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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Apr 04. 2024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통제하는, '걔'

'잘할 생각 없었다, 딱히 재밌지도 않다'는 방어기제가 기지개를 켭디다?

처음 만나는 자유, 새로운 환경에서 만난 친구들로부터 느끼는 감정이 '진짜 자유'라고 생각한 주인공의 혼란을 그린 영화인데요, 요즘 자주 생각납니다.


감정을 '처음 경험'한 순간이라니!


저는 어렸을 때부터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것도, 기쁜 것도, 그렇다고 딱히 슬픈 것도 없었던 기억이에요. 감정의 변화 폭이 크지 않았고, 표현하지 않을 이유가 제 감정의 크기를 앞섰고, 어른들은 저를 어른스럽다고 칭찬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감정의 변화가 생길 때마다 제 방어기제가 열일해 왔던 거 같아요. 오늘 처음으로 제 감정의 방어기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방어기제는 감정적인 스트레스나 불안의 상황에서 마음이나 정서를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이에요.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거나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정을 억누르거나 회피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잠깐 동안 나 자신을 보호할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정서적인 적응과 성장을 방해할 수도 있어요.



그동안 누군가가 귀찮게 굴거나 나를 거부해 억울할 때에도 '무슨 일이 있나 보다, 그럴 수도 있지', 부럽고 질투가 날 때도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내가 더 돋보이고 싶을 때에도 '이만하면 됐어' 그런 생각들이 먼저 떠올랐고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게 잘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대부분의 내 감정까지도 '내 것'이라고 여기지 못했으니 그러면 안 됐어요. 게다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결국 통제한 셈이 되었고요.


힘든 상황이 생길 때면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마치 제삼자처럼 이성적으로 대처했습니다. 있는 일을 없는 척하는 건 잘 못해서 '회피형'은 아니었지만 자주 이상한 데 꽂혀서 짚고 넘어가려 했고, 상대는 잘 이해 못 하는 걸 따진 적도 많았습니다. 여기에서 감정을 억누르고 저기에서 감정을 회피하다 보니, 엄한 데서 반격하는 태도가 나왔던 거 같아요.


사춘기 때에 제 방어기제는 가장 바쁘게 돌았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때의 제가 '겪었어야 할' 많은 감정들을 건너뛰었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그랬을 리가 없어요. 이쁘고 공부 잘하고 돈 많고 밝은 친구들이 부러웠고 이 친구 저 친구를 짝사랑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우월감도 느끼는 아주 당연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제 방어기제는 이렇게 속삭이곤 했죠, '유치하게 왜 그래? 어쩔 건데?'. 열등감, 자기 비하, 질투, 갈망 등등 분명 내 안에 버젓이 있는 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했고 충분히 유치하지 못한 채로 쿨하게 침잠했어요. 그리고는 친구들 앞에서 세상 무던한 사람인 척 웃기는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댔습니다. 무슨 감정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언제나 얼굴이 어두웠고 피곤했어요. 복잡하게 섞인 그 감정을 저는 그저 슬펐다고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 나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덩치 큰 친구가 대신 싸우겠다고 나서는 모습을 보고 그 뒤에 숨었달까요.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는 좀 닥치라'라고 저를 위협했을 수도 있어요.


그동안 저는 적당히 예상 가능한 역할을 해왔어요. 잘 못할 일은 '방어'적으로 초기에 관뒀을 겁니다. '집에서 멀어, 시간이 없어' 등등. 잘하지 못하는 저를 꽁꽁 숨겨뒀었기에 직면한 적이 많이 없는데요, 요즘은 뭘 해도 뚝딱거려서 당황스럽습니다. 만드는 가방은 아무래도 대칭이 안 맞고, 제가 쓰는 글은 흐름이 보이지도 않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지금은 제 생각의 흐름이 이래서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는 뭘 해도 잘 해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생기고, '원래 잘할 생각 없었다, 딱히 재밌지도 않다'는 방어기제가 기지개를 켭니다.


덩치 큰 친구가 여전히 가리고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저는 맘마를 경험하는 중입니다.(지난 글에 언급한 감정의 이름을 모른다는 표현) 아마도 그동안 잘 보이기 위해 이것저것 쳐낸 나 말고 그냥 나,를 만난 거 같아요. 예전 같지 않은 저에게 실망하고,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요. 맘에 들지 않는 불편한 옷을 입은 것만 같습니다. 잘 못하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건 또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냥 잘 못하는구나 그러고 계속하면 되는 건지, 잘 못해도 괜찮다고 달래야 하는 건지, 잘 못하는 데 뭐 하러 맘 써 그러면서 그동안의 방식으로 버려야 하는 건지.


'누구와도 함께 사는 건 피곤하니 혼자가 최고다' vs. '함께하는 건 원래 피곤한 거고(마치 사람이면 늙는다와 같은 수준의 어쩔 수 없는 조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형태가 아니라도) 사람은 같이 살아야 한다'. 예전의 저는 전자에, 지금의 저는 후자에 동의해요. 피곤하다는 이유로 있는 것을 없는 척할 순 없더라고요, 어른들 말씀처럼 그러다 탈 나니까요.


감정 탐구생활이니만큼, 방어기제 녀석도 그 뒤에 숨은 감정도 열심히 탐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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