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꼭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
도, 있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어. 나와 이곳은 서로의 이유가 아니야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기억할 수 없게 디자인된 도시'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건물의 특정 디자인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기억할 수 없는 공간은 소속감을 주지 못한다'는 영감에서 시작한 작업인데요, 이 도시에 10년 가까이 살았음에도 여전히 처음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누구더라', 갈 때마다 '여기에 이런 게 있었던가' 같은 느낌일까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최근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꺼냈습니다.
"나와 이곳의 '관계'를 잘 모르겠어."
저는 현재 해외에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산 지 (저 역시) 거의 10년이 되었지만, 최근 들어 이곳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도시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 사는 것도 좋지만, 내가 없으면 이곳도 아무 문제없고-이곳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큰 변화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와 이곳,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편한 게 영 이상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이유도 되지 않습니다.
친구는 본인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 친구는 아티스트로, 본국에서 7년 동안 개인 스튜디오에서 주로 혼자 작업을 했습니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자전거를 타고 멀리 나가 커피를 마시거나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시적인 만남으로는 혼자라는 느낌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정말 열심히 준비한 이벤트를 열었는데, 정성껏 보낸 초대장에도 불구하고 참석자는 겨우 3명뿐이었고 그 일이 큰 충격이었다고 해요. 자신의 마음이 이웃들에게 전달될 거라 기대했지만, 그 기대가 무너진 경험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메아리'를 기대한다고 해요. 여전히 그렇게 '닿고 돌아오는' 관계를 갈망하지만 영 쉽지 않다고 합니다. 자신이 보내는 시간과 일로 바쁘고, 많은 사람들과 협업하고, 그 시간들을 너무 좋아하지만 결핍이 있는 걸 분명히 인지한다고 해요. 아마 그래서 '기억되지 않는 도시'에서 기억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기록하고 싶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저는 서울에서 평생을 살다가 이곳에 왔습니다. 서울의 저는 이곳의 저와 과연 달랐을까요? 서울이 더 좋은 곳이길 언제나 바랐지만, 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고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이 제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저 서울 속에서 '피곤한 인물 134287' 정도를 담당했어요.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의 한 동네에서 보냈지만 살던 곳을 떠날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저를 잡는 것도, 제가 아쉬운 것도 없었어요. 제가 없는 서울은 그 어느 부분도 비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제가 있었던 장소들, 했던 선택들을 곱씹어 봤습니다. 그것들이 없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을 때, 혹은 내가 그곳에 없었을 때 '그건 내 인생에서 뺄 수 없어' 혹은 '나는 그곳에 꼭 필요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기억에 남을 만한 성과를 남기거나 나라는 사람이 각인되고 싶은 욕망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예를 들어, 회사와 나) 책임도 없고, 감사하지 않는 게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을 뿐이에요.
지금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소속감 인가 봅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는 아니고요, 살아있는 구성원의 경험을 하고 싶어요. 동네, 일 수도 있고요. 단순하게 '거기' 사는 거 말고, '거기에 내가 살기 시작하면서... 나도 거기 살기 시작했을 때..'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그런 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