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펴 들며
지난 3월에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호흡곤란을 동반한 알레르기가 원인이었는데, 회복기에 접어들면서 병원에서 주어진 시간이 점점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이것저것 집어서 가져다준 책들 중 {안나 카레니나}가 눈에 띄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중학생 시절 막내이모에게서 받은 생일선물이었다.
당시의 여타 중고등학생 필독 고전도서와는 달리, 2권에 걸친 두터운 책 분량도 그렇고, 문체가 딱딱하여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었다.
그런 심적인 부담감으로 시도한 {안나 카레니나}는 첫 도입 부분을 읽고 관두고를 반복하다 결국 포기하였다.
그러나 생일선물이라는 의미부여로 폴란드로 삶의 터전을 옮겨온 후 지금까지 이 책을 소장해 오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안나 카레니나}는 우리 집 서재에 가장 긴 세월 동안 자리 잡고 있는 책들 중에 하나인 셈이다.
남편이 그 스토리를 자세히 알 리가 없을 터인데, 병실 테이블에 놓인 {안나 카레니나}를 보고는,
‘아~ 또 만났네? 그래 이번에는 한번 끝까지 읽어 보자.”
라는 생각에 씩 웃음이 나왔다.
돌이켜보면, 사회인이 되고 난 뒤부터 내 인생에서 문학 특히 고전문학의 존재감이 많이 멀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
책을 그렇게 자주, 또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학창 시절에는 고전문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따라다니면서 비교적 책과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함께 인상 깊은 구절을 옮겨 적거나 소리 내어 음미하는 자체가 낭만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적어도 그때는 친구들과 함께 책과 어울려 뭔가를 하는 순간 자체가 좋았을 뿐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었고, 어느덧 마케팅, 브랜딩, 경영, 재무 분야의 책들로 책장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에 도움 되는 팁이나 리더십, 승진, 영업 매출 증대 등 경쟁에 이기기 위한 당위성에 초점이 맞춰진 책 읽기였다.
최근 몇 년간 인생의 변곡점을 겪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좋은 일도 있었고 마음을 무겁고 힘들게 하는 일들도 있었다. 상식으로 통념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우왕좌왕하던 때도 있었다.
오랫동안 계속될 것만 같던 것들이 금방 시들해지거나 사라지는 모습에 허탈에 빠진 적도 있었다.
한때뿐이 아닌 불변의 진리, 그리고 나를 굳건히 잡아줄 철학과 본질적인 가치가 절실히 필요했다.
책장에 가득 찬 경영, 마케팅, 리더십 등의 서적에서는 나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었다.
해외에 사는 입장에서 나에겐 책이 유일한 인생의 길잡이 노릇을 해주었다.
결국, 위인전, 철학책, 종교서적, 자기 계발 서적들까지도 손을 뻗쳐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책들을 읽고 나면 떨림으로 다가오는 메시지를 포착하기 위해 처음으로 독서일기도 쓰기 시작하였다.
올해 초에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읽었다.
이지성 작가는 책의 첫 장에서 끝까지 고전문학을 읽어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작가가 결론지은 고전문학 독서의 이유는 인생의 가치와 의미, 불변의 진리 그 자체였다.
내가 바로 간절히 찾던 그것이었다.
그 메시지가 얼마나 진정성 있게 느껴졌는지, 읽는 도중에 간간이 눈물겨울 정도였다.
이지성 작가의 뜨거운 호소력에 감응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고전문학을 펼치기란 여간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병실에서 다시 만난 {안나 카레니나}…
‘결국 이 계기로 고전문학을 다시 시작하게 된 거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 시절의 고전 읽기는 순수한 낭만과 지적인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다면, 사회인이 되고 인생 변곡점을 겪는 속에 읽게 되는 고전은 그 맛과 의미부터가 다른 것 같다.
이번에는 건강문제를 안고 인생을 뒤돌아보는 와중이었기에, 이지성 작가 자신이 체험한 치열함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전을 대하는 숙연한 마음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솔직히 3개월이 지난 지금도 매일 꾸준히 읽고 있으며 얼마 남지 않은 소설 후반부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이다.
지속과 끈기에 나 자신도 놀라울 따름이다.
이지성 작가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