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호이저 (Tannhäuser) - 엘리자베트의 기도
바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 탄호이저(Tannhäuser)의 주인공 하인리히(탄호이저)는 13세기 초 독일 튀링겐(Thuringen) 지방 바르트부르그(Wartburg)성의 기사로서 영주의 조카딸 엘리자베트와 순수한 사랑을 나누다가, 관능적인 사랑의 여신 베누스(Venus)가 살고 있는 베누스베르그(Venusberg)성을 찾아간 후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쾌락에 젖어 살다가 정신을 차리고 기사들의 세계로 돌아온다. 하지만, 엘리자베트의 사랑을 얻기 위한 노래 경연에서 베누스를 찾아갔던 하인리히의 과거가 드러나 목숨을 잃을 처지가 된다. 그때 엘리자베트는 영주와 기사들에게 그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간청한다.
물러서요!
여러분들이 그를 심판할 수는 없어요!
끔찍하군요!
그 무서운 칼을 치우고 순결한 저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저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들어보세요.
그는 강력하고 무서운 마법의 포로가 되어 있어요.
불쌍한 그가 통회와 속죄로 지상에서 구원을 얻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순수한 신앙으로 철저히 무장하신 여러분들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나요?
그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구원의 길마저 막으려 하나요?
저를 보세요.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그가 단숨에 꺾어버렸어요.
온 마음으로 그를 깊이 사랑했건만 그는 제 마음을 짓밟아버렸어요.
하지만 그를 위해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를 살려주세요.
통회하며 속죄할 길을 떠나도록 해주세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굳은 신앙심을 되찾을 기회를 주세요.
엘리자베트의 간청으로 목숨을 건진 하인리히를 위해 그녀는 기도한다. 그가 로마를 다녀오는 순례의 길에서 진실로 참회하고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은총과 자비의 하느님,
순례의 길을 떠나는 그를 받아 주소서.
악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그의 죄를 용서하소서.
오직 그를 위해 간구하는 기도에
저의 삶을 바치겠나이다.
그가 영원한 어둠 속에 빠지기 전에
당신의 빛을 보여주소서.
두렵고도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저를 받아주소서.
이제 제 목숨은 당신의 것이니
언제든 거두어 가소서.
그러나, 로마에서 돌아오는 순례자들의 틈에서 하인리히를 찾지 못한 엘리자베트는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조용하고 간절한 기도를 마지막으로 드린다.
성모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모님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성모님께 의지하오니 저를 이 세상에서 거두어 주소서.
눈처럼 희고 순수한 천사처럼
성모님 계신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소서.
나의 마음이 당신을 저버린 일이 있다면
죄스러운 욕망이나 세속적인 욕구가 제 마음에 들었다면
끝없는 고통 속에서 지워버리게 하소서.
모든 죄를 다 참회할 수 없지만
은총으로 저를 받아 주소서.
정숙한 처녀인 제가
겸손한 자세로 성모님 앞에 서서
당신의 은총이 가득한 자비를
그의 죄를 위해 간구하도록 하소서.
자신의 죄가 용서받지 못했음을 비관하던 하인리히는 엘리자베트의 죽음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절망 속에 쓰러져 죽는다. 그제야 고목 지팡이에 싹이 돋아, 하인리히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알려준다.
오페라 탄호이저의 배경이 되는 13세기 초 튀링겐 지방의 바르트부르그성은 "헝가리의 엘리사벳"로 불리는 엘리사벳 성인이 살았던 곳이다. 1207년 7월 7일, 헝가리의 왕, 안드레아 2세의 딸로 태어난 엘리사벳은 정략결혼을 위해 네 살 때부터 튀링겐에서 자랐으며, 열네 살에 튀링겐 영주 헤르만 1세(Hermann I)의 둘째 아들인 루트비히 4세(Ludwig IV)와 결혼하였다. 1227년에 루트비히 4세가 십자군에 참전하였다가 사망하자, 시동생 하인리히에 의해 아이들과 함께 바르트부르그성에서 쫓겨났다. 1231년, 스물네 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녀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는 작은 형제회 재속 회원이 되어 헤센(Hessen)의 마르부르그(Marburg) 성에 살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고 한다.
1235년 5월 28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하여 시성 된 엘리사벳은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고, 미망인이 된 후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 중에도 많은 기적의 일화들을 남겨, 독일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녀가 되었다.
성녀 엘리사벳의 성화는 망토 안에 빵이나 장미꽃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빵을 가지고 나가다가 남편에게 들키자 그 빵이 향기로운 장미꽃으로 변했다는 전설 때문이다. 그래서 성녀 엘리사벳은 빵집의 수호성인이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오라토리오, "성 엘리사벳의 전설"(The Legend of Saint Elizabeth)에는 나병 환자를 데려다가 침대에 뉘어 간호를 하는 엘리사벳을 못마땅하게 여긴 시어머니가 루트비히 백작에게 나쁘게 말을 전하자, 화가 난 백작이 뛰어들어와 침대보를 걷었더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전설이 음악이 되어 전해진다.
모든 사랑이 목숨을 대가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와 같이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사랑은 흔하지 않다. 그런데 성녀 엘리사벳은 그렇게 사랑했다고 한다.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토록 숭고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