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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KAY Jan 19. 2024

HongKong Hiking

그곳에 있으니 올랐을뿐

 꿈을 꿨다. 현실계보다 두 톤은 더 밝고, 필터를 끼운 카메라로 바라보듯 뿌옇게 번진 듯한 대낮의 풍경. 온통 초록이지만 저마다의 빛이 다른, 한없이 걸어도 끝날 줄 모르는 여정의 꿈을 꿨다.

 홍콩의 6월부터 8월까지는 그 꿈이 현실이 된 것만 같은 기시감에 사로잡히는 일이 잦다. 하늘은 높고 태양이 내뿜는 빛은 지상으로 사정없이 내리 꽂힌다. 불규칙한 몬순이 있는 날도 숱하고, 그렇게 내리는 빗줄기로 인해 하늘은 더욱 높아지고 대기는 더욱 후끈해진다. 특히 해가 가장 높은 정오 즈음 집 밖으로 나서면 마치 내가 댐의 수문을 당기기라도 한 듯 왈칵 쏟아져 들어오는 거대한 물살 같은 햇빛과 열기에 숨이 막히기 일쑤다. 자외선이 얼마나 강렬한지, 실명까지는 아니어도 정말 백내장이라도 발병할 것 같은 위기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강렬한 태양과 열기에 대처하는 나름의 방편을 마련하여 산에 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날씨에 산에 오르다니 대단하군’으로 집약되는 주변인들의 촌평은 개의치 않는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토록 ‘무모한 고행’에 가까운 행위를 하는 자는 내가 유일해야 하는데 막상 산에 오르다 보면 그곳에는 나 말고도 항상 다른 누군가 있기 때문이다. 궂은 날에도, 지나치게 무더운 날에도, 모두가 바쁜 주중에도, 한가롭다면 낮잠을 잘 것만 같은 시간에도, 해만 떠 있다면 홍콩의 산에는 언제나 누군가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를 가장 편안하게 마주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산이다.

 내가 사는 동네는 나와 같은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서래 마을처럼 같은 나라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는 아니고 금융가와 가까운 곳이다 보니 기존 터줏대감들과 금융계에 종사하는 외국인들이 서로 뒤섞여서 살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잘 들여다보면 뒤섞인 듯 섞이지 않고 교묘하게 서로의 영역을 나누며 살고 있기도 한데, 그러한 경계가 미치지 않는 곳이 바로 산이다. 국적이 어떠하든 산은 거기 있으므로 오르고 싶은 자는 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존재감이 큰 어르신 부대를 비롯하여, 태극권을 하며 건강 증진에 더욱박차를 가하는 사람들, 등산로를 무대 삼아 피리 연주를 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사람들, 갓난 아기부터 꽤 큰 아이까지 어깨에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괴력의 서양인들, 멋들어진 운동복은 기본이고 헤어 스타일링까지 완벽한 회심의 유러피언들까지 홍콩에서 만나 볼 수 있는(인디아를 제외한-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들을 만난적은 없다) 거의 모든 국적의 사람들과 개를 산에 오르면 만날 수 있다.

 홍콩으로 이주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딱히 취미활동으로 할 만 것이 없어서 야생 원숭이 서식지로 유명한 사자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관광지라는 이유로 만만하게 본 것이 화근이었다. 장비는커녕 그저 운동화만 착용했을 뿐 일상복으로 임했던 산행은 곧 극기훈련이 되었다. 계단도 많고 가파른 오르막도 많아 산에서 급조한 나뭇가지로 등산용 지팡이까지 만들어야만 했다. 한참을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올라 능선에 이르렀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아찔한 고층 아파트 숲이 레고 모형같이 발아래 들어차 있고, 저 멀리 보이는 바다가 낯익은 듯하면서도 생경해서 마치 수락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아파트 숲을 ‘오려두기’로 가져와 홍콩의 바닷가에 ‘붙여넣기’를 한 것만 같이 비현실적인 느낌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동행했던 자들은 그날의 산행을 야생 원숭이와의 대면으로 기억하지만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셉션’같은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기억한다.

 며칠 전, 폭우 경보가 뜬 날에도 우리동네 뒷산인 피크(야경으로 유명한 그 피크가 맞다)에 올랐다. 오락가락하는 폭우로 인해 우산을 들긴 했지만 양말까지 뚫고 들어오는 빗물이 운동화 안에서 걸음을 뗄 때마다 찌걱찌걱 리드미컬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산에 깊이 들어갈수록 비는 잦아들고 나뭇잎에 고인 빗물이 이따금씩 후두둑 떨어질 뿐이었다. 오직 빗물이 계곡이 되어 흐르는 물소리만 들리는 촉촉한 레인포레스트. 발 마사지 받으러 가서나 듣는 소리를 현장음으로 듣는 호사는 흔치 않다. 나는 비가 씻고 지나간 숲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지나치게 평온하고 아늑한 그 순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산은, 아니 숲은, 아니 홍콩의 숲은 나에게 영감과 치유를 선물한다. 극심한 추위는 없으므로 더위에 강한 나로선 홍콩은 1년 내내 산에 오르기 좋은 곳이다. 산을 좋아하는 건강하고 재미있는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도 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좋고 비가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좋다. 잘 정비된 등산로가 많고, 등산로를 완주하고 내려오면 유명한 해변이 펼쳐지거나 맛 집이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 홍콩에 온다면, 반 나절쯤은 산에 오르는 계획을 세워도 좋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깨어 있는 상태로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른다. 낮게 내려 앉은 구름을 숲에서 만나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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