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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도 가격표가 있다

당신이 힘든 이유는 감정을 ‘저렴하게’ 줬기 때문이다

by 집샤

“아니, 감정이 무슨 물건이길래 가격표까지 붙여?” 싶을 거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마음 한 조각으로 상대가 한순간 무장해제되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무심함 한 스푼에 관계가 싸늘해지기도 한다. 감정이라는 것은 그 정도로 강력하고, 실제로 ‘제한된 자원’이라는 뜻이다.


그런 귀한 자원을 무턱대고 공짜로 퍼주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지쳐버리거나 혹은 상대에게마저 ‘싸구려’ 취급을 받게 된다. 결국 “어차피 네 마음은 늘 넘치니까, 어디든 막 줄 수 있는 거 아니야?”라는 황당한 말을 듣게 되기도 하고.


문제는, 그렇다고 감정을 아예 꽁꽁 숨기고 지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인간관계에선 어쨌든 마음을 주고받아야 하니까. 그래서 필요한 게 바로 ‘가격표’다. 가격표가 붙은 명품 가방은 쉽게 할인되지 않는다. 남들이 “그 가방 나 좀 빌려줘”라며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이건 내 소중한 자산이야. 아무나 막 사용할 순 없어.” 이렇게 스스로 명시해 두면, 나도 덜 소모되고 상대도 내 마음을 가볍게 여기지 못한다.


공짜로 주는 감정의 폐해

“내가 좋아서 해주는 건데, 뭐 어때.”


처음엔 이렇게 합리화하기 쉽다. 이게 내 성격이기도 하고, 애초에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바로 나타난다. 열 번을 다 받아주고, 열 번을 다 베풀어줬더니 어느 순간, “너는 원래 그래”라는 말이 돌아온다. 처음엔 정성을 다해 맞춰준 내 마음을 ‘칭찬’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걸 ‘당연’으로 받아들인다. 처음엔 환호하다가, 곧 당연시하고, 결국엔 무관심해지는 패턴이다.


사람은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로 안다’는 명대사도 있지 않은가? (근데 이건 남자들 특이다, 여자들은 호의가 반복돼도 권리로 아는 경우가 드물다)


어쨌든 그렇게 ‘공짜 제공’이 반복되면 내 입장에선 분명히 지치기 시작한다. “왜 나만 이렇게 소모되어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 때, 상대방은 “너 스스로 한 거잖아?”라고 되묻는다.


결국 감정적으로 가장 억울한 지점에선 “내가 왜 이 정도로 자괴감을 느껴야 하지?” 하는 고민까지 시작된다. 이게 바로 감정을 무심코 ‘할인’해서 퍼준 후폭풍이다.


감정이란 자산, 왜 비쌀까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때론 물질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딱 한 마디 “좋아한다”가 누군가에게 엄청난 활력을 주고, 반대로 잠깐의 무심함이 상대의 하루를 송두리째 부숴놓기도 한다. 게다가 ‘감정’을 주는 데에는 시간, 체력, 에너지 같은 실질적 자원이 소모된다. 내가 일할 시간, 쉴 시간을 줄여가며 상대에게 연락하고, 선물하고, 만나러 가는 수고를 한다. 그런데 그 가치를 공짜로 들이밀면, 상대는 언젠가 그 ‘희생’이나 ‘노력’을 제대로 알아봐 주지 못한다. ‘너 마음은 원래 잘 써주는 거니까, 뭐’ 하고 폄하해 버리는 것.


명품 가방을 공짜로 주면, 받는 사람이 오히려 “이거 그렇게 좋은 거야?”라며 막 굴릴 수 있는 것과 같다. 공짜로 얻은 것엔 대체로 감가상각이 급격하게 일어난다. 내 감정도 똑같다는 거다.


연애를 시장에 비유한다면, ‘싸게 팔린다’는 뜻

연애 얘기로 넘어가 보자. 낭만적이지 못하다며 게거품을 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연애는 ‘감정을 사고파는 거래’에 가깝다. 내가 연락을 열 번 하면 열 번 모두 3초 만에 답해주고, 만나자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가 주고, 상대가 살짝 비위를 건드려도 무조건 이해해 주고… 이게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 내 감정의 ‘공급량’이 터무니없이 높아진다. 그런데 공급이 넘치면 시장가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상대가 그만큼 내게 되갚아줄 의사가 있다면 몰라도, 대부분의 경우엔 그냥 “아, 이 사람은 원래 이 정도는 해주는구나”라는 인식으로 굳어버린다. 그러면 결국 내가 열과 성을 다해 준 것에 비해 돌려받는 것은 훨씬 적어지게 된다. *공짜’ 감정의 운명이 이런 거다.


그러다 진짜 문제는, 한없이 퍼주던 사람이 더는 못 버티는 순간에 터진다. 상대가 “너 원래 이런 사람이잖아?”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때, 당사자는 뒷목을 잡으며 “내가 언제 그렇게 무한정으로 베푼다고 했어?” 하며 울분을 토한다. 그러다 다툼이 커지고, 최악의 경우엔 이별로도 이어진다.


그렇다면 아예 감정을 숨기고 아끼며 각 잡고 살라는 이야기냐? 그건 아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좋아서, 기쁘게, 스스로의 감정을 쓰고 싶다. 다만 내가 베푸는 마음이 ‘값진 것’이라는 사실을 상대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게 핵심이다.


가격표를 붙인다는 것의 의미

결국, “내 감정을 함부로 소비하려면, 너도 적절한 대가(감정, 노력, 인정 등)를 지불해 줘”라는 요구와 같다. 거래처럼 치밀하게 주고받자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나 혼자 무한정 퍼주는 구조는 곤란하다’는 걸 명시해야 한다.


가격표를 붙이지 않고 덤핑해 버리면, 처음엔 상대가 “우와!” 하고 감탄하더라도 곧 ‘그냥 그런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러다 내가 지쳐서 “나도 사람인데 왜 이해 못 해주냐”라고 따지면, 돌아오는 대답은 “네가 원해서 했잖아”일 뿐이다. 그 순간의 배신감은 말로 다 못 한다.


구체적인 예시, “애인에게 무조건 맞춰주기”의 함정

1주 차엔 “어떻게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지? 정말 천사야”라며 감동하지만, 한 달쯤 지나면 “얘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주는 사람”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석 달쯤 지났을 때, 지친 내가 “왜 나만 계속 이렇게 맞춰야 해?”라고 쏟아내면, 상대는 어이없어하며 “네가 좋아서 한 거잖아?”라고 말한다.


이건 ‘가격표 미부착’의 전형적인 결과다. 나는 애초에 공짜 이벤트를 대규모로 열어놓았고, 상대는 그 이벤트가 영구적으로 진행될 거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정작 내가 에너지가 바닥나서 울분을 토할 때쯤 되면, 이미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럼 나는 감정을 숨기고 아낄까?”


그건 또 극단적인 선택이다. 사람은 결국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을 표현하며, 그 과정에서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존재다. “완전히 마음을 닫고 살겠다”라고 하면 외롭고 허전해진다.


결국 중요한 건 ‘밸런스’다. 내가 기분 좋게 퍼주더라도, 그게 ‘공짜’로 폄하되지 않도록 적정선을 두고, 상대 역시 내 마음을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 쉽게 말해, “나도 너를 좋아하니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만큼 너도 나를 존중해야 해”라는 의식을 깔고 들어가야 한다.


가격 산출에 대한 현실적인 방법

보통 감정 가격 산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얼마를 계산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럼 나는 당연스럽게도 그 수치는 각자 정하는 거라고 답한다. 내 감정에 얼마짜리 가격표를 붙이든, 그건 온전히 내 자유다. 문제는 그걸 두고 상대가 “비싸네?” 하고 난리 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예 공짜로 퍼주면 손해 보고, 비싸게 매기면 상대가 질색할 수도 있다. 이런 위험은 피할 수 없다. 왜냐면 애초에 연애라는 게 ‘상당한 리스크’를 짊어지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이건 당연한 가치야”라고, 호소해도 상대가 “나에겐 오버스펙”이라 느끼면 곧장 튕겨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격표를 애매하게 붙여두면, 결국 나만 중간에서 억울해진다. 내가 얼마짜린지 내가 정하지 않고, 상대 기분 맞추기에 급급하면 나중에 후회하기 마련이다. 오히려 차라리 “난 이 정도 대접받아야 해”라고 못 박아 두는 게 깔끔하다. 상대가 그 가치에 동의하면 함께 가는 거고, 아니면 빠이빠이다.


연애는 무위험 채권이 아니다. 심지어 그 안전하다는 채권 투자에서도 리스크가 있다. 감정 하나가 몇 점짜리인지 스스로 결론 내리고, 그 가격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하는 것. 그게 내 감정을 지키는 최소한의 방법이고, 가장 현실적인 가격 산출 방식이다.


결론, 내 감정은 값비싼 자산

다시 돌아와서, 공짜로 막 퍼주면 상대는 고마움보다 ‘원래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그리고 그 말로만 듣던 “네가 좋아서 했잖아?”가 내 가슴에 비수로 꽂힐 순간이 온다.


뒤늦게 “애초에 조금이라도 가격표 붙일걸” 하고 후회하지 말자. 내 마음이 명품 가방보다 못한 취급을 받게 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이건 꽤 값나가는 감정이야”라고 의식적으로 선언해야 한다.


그렇다고 사랑을 장사하듯 하라는 게 아니다. 내가 내 감정을 귀하게 대우해 달라고 분명하게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이런 것조차 “아, 귀찮고 어렵고 피곤해”라면… 혼자 살던지, 운에만 기대어 귀인만 손가락 빨며 기다리던지, 징징거리며 고충에 절어 살던지 알아서 해라.


결국, “내 감정은 정말 비싸다.” 그렇게 믿어야만, 상대에게도 그 가치가 전달된다. 그게 연애든 우정이든 어떤 관계든, 감정의 건강한 유통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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