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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감정이 대체재로 취급될 때 생기는 일

사람은 기억에 남는 감정만 선택한다, 나머지는 교체된다

by 집샤

감정의 가치는 '비교 가능성'이 생기는 순간 무너진다. 상대에게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되는 건, 단순히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다. 구조가 바뀐 거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감정이 유일한 게 아니라는 걸 상대가 체감하는 시점부터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건 아주 작은 차이에서 시작된다. 예전엔 내가 연락하면 반응이 빠르던 사람이, 이제는 답장을 미루고 우선순위를 낮춘다. 예전엔 내가 주는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누군가와 더 깊은 공감대를 나눈다. 문제는 이 변화를 ‘기분 탓’으로 넘긴 채, 그대로 감정을 공급하고 있다는 데 있다. 내가 공급하는 감정이 더 이상 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 퍼주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된다.


대체재란 무엇인가. 없어도 큰 손해가 없고, 비슷한 무언가로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존재다. 감정이 대체재가 된다는 건, 나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는 신호다. 상대에게 나는 옵션이 된다. 반드시 나여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처음부터 그렇게 취급받는다면 오히려 낫다. 애초에 소모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처음에는 유일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체재가 되어버리는 경우다. 관계는 한 번 그 궤도에 들어서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내가 예전과 똑같이 감정을 줘도, 상대는 더 이상 똑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이전과 동일한 태도를 보여도, 이미 나를 평가하는 좌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특별함'을 되찾기 위해 움직인다. 감정의 강도를 높이고, 표현의 빈도를 늘린다. 더 잘해주고, 더 기다려주고, 더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구조상 오히려 더 나를 '소모성 존재'로 확정 짓는 행위다. 더 많이 줄수록 희소성은 줄어들고, 더 다가갈수록 긴장감은 사라진다. 사람은 대체 가능한 것에 정성을 쏟지 않는다. 휴대폰 충전기가 고장 나면 아쉬워도 불편하지는 않다. 당장 가까운 편의점에서 새 걸 사면되니까. 그게 대체재의 운명이다. 그리고 감정이 그 수준으로 취급되는 순간, 나는 그 관계에서 반드시 손해를 본다.


더 무서운 건, 대체재가 되면 감정을 줘도 리턴이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계는 원래 '주고받기'의 구조인데, 대체재가 된 감정은 '줘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상대는 더 이상 나에게 에너지를 쓸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의 가치가 사라졌다는 건, 곧 노력할 유인도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우리는 감정의 투입량을 늘리면 회복될 거라고 착각한다. 마치 가격을 낮추면 물건이 다시 팔릴 거라는 기대처럼.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단가를 낮춘다고 다시 사랑받는 구조가 아니다. 희소성을 잃은 감정은, 아무리 싸게 공급해도 회수되지 않는다. 시장은 냉정하다. 가치가 없는 감정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내가 대체재로 취급받고 있다는 신호를 명확히 감지할 줄 알아야 한다. 관계 안에서의 내 감정이 리턴 없이 소비되고 있는지, 상대가 나를 선택하는 이유가 점점 흐려지고 있는지, 나라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이 관계 안에 아직 존재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감정을 줄 때마다, 상대가 '감사함'이 아니라 '당연함'으로 반응하고 있다면 이미 구조는 바뀐 것이다. 이때 필요한 건 감정을 더 퍼붓는 게 아니라, 공급을 멈추는 것이다. 감정은 회수 없이 계속 제공되면 '기본값'이 된다. 기본값은 절대 사랑받지 않는다.


감정을 회복하려면, 먼저 나의 존재가 '대체 불가능한'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건 거창한 게 아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감정이 특정한 방식, 특정한 결로 설계되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아무도 나처럼 위로하지 못하고, 나처럼 말하지 못하고, 나처럼 공감하지 못한다는 인식. 관계 안에서 나만의 결을 만드는 것이다. 상대가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없는 방식으로 감정을 설계하는 것, 그것이 감정의 브랜드화다. 브랜드는 많지만,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는 몇 없다. 감정도 그렇다. 누구나 다정할 수 있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다정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그런 감정만이 대체되지 않는다.


당신이 감정을 주었을 때, 상대가 '비슷한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다면 이미 늦었다. 감정은 무조건적일 필요는 없지만, 고유해야 한다. 감정의 고유성은 희소성과 연결되고, 희소성은 곧 가치가 된다. 감정을 전략적으로 설계하라는 게 아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 안에서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해 자각을 갖자는 말이다. 감정은 퍼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기억되는가가 중요하다. 기억에 남는 감정은 절대 대체되지 않는다. 잊히는 감정만이 대체된다.


연애든 인간관계든, 감정을 잘 쓰는 사람은 결국 '자기만의 감정 포지션'을 갖는 사람이다. 그 감정은 기능이 아니라 정체성이고, 표현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감정을 줄 때, 꼭 기억하자. ‘이건 아무나 줄 수 없는 방식인가?’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없으면, 당신의 감정은 이미 대체재로 취급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관계는 빠르게 식는다. 사랑은 대체재와 경쟁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에게만 남는다.


그러니까 착각하지 마라. 당신이 계속 감정을 주고 있음에도 상대가 무덤덤한 이유는, 당신이 그저 ‘대체 가능해 보여서’다. “굳이 지금 당장 끊을 필요는 없고, 필요할 땐 연락하면 반응할 사람”으로 분류된 거다. 당신이 더 잘해준다고, 더 매달린다고, 더 버틴다고 그 분류가 바뀌지 않는다. 이미 마음속에서 당신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으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더 노력하는 건 관계를 살리는 게 아니라, 당신을 싸게 파는 마지막 세일 시즌을 연장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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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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