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는 충청북도 동북부에 위치한 시로 인구는 21만여 명으로 충청북도 제2의 도시이며 면적으로 봐서는 충청북도에서 가장 넓으며 충청도의 충이 바로 충주시에서 따왔다. 충주는 중원문화의 중심지로서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일 뿐 아니라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온 역사의 고장이다.
4세기 이전까지는 백제에 속했으나 그 후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 백제를 몰아내고 충주지역 일원을 차지하게 되고 충주를 지배하게 되면서 고구려에서는 충주를 국원성이라고 불렀다. 이후 551년 신라 진흥왕이 이곳을 점령한 이후에는 신라에 속했다. 557년에 지금으로 치면 광역시쯤 되는 소경으로 지정하고 558년에는 서라벌 인근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으로 옮겨서 도시를 키웠다고 한다.
통일 이전에는 2소경 중 하나인 국원소경이었고 통일신라 때에는 5소경 중 하나인 중원경이었다. 이곳 중원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각축전을 벌인 곳이다. 중원을 얻는 자가 한반도를 얻는다는 공식에 따라 중원 지역은 계속해서 주인이 바뀌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삼국 각 국의 문화도 모두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잠깐 통일신라 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 체제인 9주 5소경에 대해서 알아보고 가면,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한 후 신문왕은 중앙집권 강화를 위해 전국을 9개 주로 나누고 수도 서라벌이 한쪽에 너무 치우쳐 있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5개의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9주는 옛 신라 본국 영토 및 가야 지역에 3개, 구 백제 지역에 3개, 구 고구려 지역에 3개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삼국통일 이후 정복 지역의 통치와 통합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9주는 한주(경기 광주), 삭주(춘천), 명주(강릉), 웅주(백제), 전주(전주), 무주(광주), 상주(상주), 강주(진주), 양주(양산)이며 5소경은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금관경(김해)이다. 5소경에는 부유한 중앙 귀족을 정착시켜 정복지를 안정시키고 토착 지방 세력을 견제하게 하였으며 신라 중앙정부의 문화와 정책을 정복지에 확산시키기 위한 첨병 역할을 하게 하였다.
오늘 여행의 코스는 충주와 원주이니, 이 둘은 통일신라 시대 중원경과 북원경이라는 대도시였고 현재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충청도의 충주, 강원도의 원주 둘 다 각 도를 상징하는 대표도시이다. 이처럼 예로부터 유명세를 떨쳤던 도시에는 어떤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기대하면서 이번 여행을 시작해보자.
2.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
한반도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의 비석으로 주로 북방을 공략한 광개토대왕에 비해 아들 장수왕 시대에는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면서 한반도 중부까지 영토를 확장한 뒤 현재의 충주 지역에 비를 세웠다. 이 비는 원래는 그 존재를 모르고 그저 마을 앞에 있는 비로만 여겨졌는데 그래서 그 마을의 이름도 입석(立石)리였다.
그러나 1979년 충주 지역 문화재 애호가들이 모인 예성동호회가 당시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현재 충주시 중앙탑면)에서 발견하였다. 그런데 예성동호회의 본래 탐사 목표는 고구려비가 아니라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였다. 인근의 단양에서 적성비가 발견되면서 예성동호회 회원들은 중원경이 있었던 충주 지역에도 신라의 비석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입석마을 앞에 서있는 한 비석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고구려비였던 것이다. 예성동호회의 활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충주 고구려비뿐만 아니라 고구려 불상의 경향을 볼 수 있는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을 발견하였고 숭선사 위치가 적힌 기와도 발견하였다. 문화재 관련 직업이나 연구자가 아닌 민간 동호회에서 이렇게 진흙 속의 진주를 찾는 것같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발굴해내었는데 여간 대단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81년에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어 개방된 보호각을 지어 안치하였지만 산성비와 새똥 등으로 훼손이 점점 심해지자 고구려비 전시관을 건축한 뒤 전시관 안으로 옮겼다. 이 고구려비는 예전에는 '중원 고구려비'라고 불렀는데 당시 비가 있는 장소가 중원군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중원군과 충주시가 1995년 도농복합시가 되어 합쳐졌으므로 현재는 '충주 고구려비'라고 부른다.
비에 적힌 문구를 살펴보면 고려 태왕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가 본국을 고려라고 그리고 왕을 태왕으로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입구에는 한 조형물이 서 있는데 이것은 바로 고구려의 상징새인 삼족오(三足烏)이다. 삼족오는 태양에 살면서 천상의 신들과 인간 세계를 연결해주는 신성한 상상의 길조인 동시에 동아시아에서는 태양신으로 불리며 세 발 달린 검은 새 또는 까마귀이다. 삼족오의 '烏' 에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까마귀' 다른 하나는 '검다'의 의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자연물 중 새를 형상화하여 하늘을 향한 인간의 꿈이 서린 세발 달린 까마귀이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은 아래와 같이 조성되어 있다.
1 전시관 - 입석마을의 역사와 이야기
2 전시관 – 삼족오, 고구려의 유산과 설화, 생활상, 안악 3호분, 장군총
3 전시관 – 충주 고구려비와 삼국의 비석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가장 중심 공간에 거대한 비석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전시관의 주인공인 충주 고구려비이다.
비가 전시된 방에는 고구려 무덤 특유의 사방신 벽화를 모티브로 하여 전시실 네 방향 천장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려두어 고구려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여기서 청룡은 용을 형상화한 동물로 동쪽을 지키며, 백호는 흰 호랑이를 형상화하며 서쪽을 지킨다. 주작은 붉은 봉황을 형상화하며 남쪽을 수호하는 신이며 현무는 다리가 긴 거북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북쪽을 지킨다.
2. 국토의 중앙을 찾아내다, 충주 탑평리 7층 석탑(중앙탑)
충주 탑평리 칠층 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원성왕 12년에 건립되었다. 국보 제6호로서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는 남한강 상류의 강가 높은 토단 위에 건립되었는데 이는 홍수 등으로 인한 석탑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높은 토단을 조성한 다음 그 위에 대형의 석탑을 건립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건립할 때 상당한 관심과 인력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일명 『중앙탑』이라 부르며 이 이름으로 인해 2014년 1월 1일부터 본래의 가금면이 중앙탑면으로 개칭되었다.
탑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렸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다.
중앙탑과 관련된 설화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송림사 주지가 중원경(충주)을 지나다가 강물에서 보라색 안개가 퍼져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신비롭고도 장엄한 기운은 탑평리 고을 쪽으로 뻗어나갔다. 보라색은 왕권을 상징하는 색깔이기에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주지는 경주로 급히 돌아가 왕에게 “중원경에 왕기가 있으니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탑을 세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탑평리 칠층 석탑 건립 배경에 얽힌 전설이다. 남한강 변 야트막한 언덕에 조성된 이 탑은 현전하는 통일신라 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이 일대는 여러 차례 발굴 조사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사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탑은 사찰용 불탑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 혹은 기원을 염두에 두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흉흉한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국토 중앙에다 이런 탑을 세웠다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또 다음과 같은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신라 38대 원성왕이 어느 날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신라 땅의 중심이 어딘지 궁금하여 보폭이 같은 사람 둘을 선발하여 신라 영토의 북쪽 끝과 남쪽 끝에서 출발시켜 만나는 지점을 살펴보았더니 그곳이 지금의 탑이 세워진 자리였고 그리하여 탑의 이름도 중앙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국토의 중앙을 찾아내다, 충주 탑평리 7층 석탑(중앙탑)
3. 조선 철종도 반한 풍경화, 수주팔봉(水周八峰)
조선 전기 용재 성현의 수필집인 《용재총화》에는 다음과 같이 말이 나온다.
“우리나라 물맛은 충주 달천이 으뜸이며 오대산 우통수가 두 번째 속리산 삼타수가 세 번째로 좋다.”
물맛이 달아 ‘감천(甘川)’ ‘달래강’이라고 불리기도 한 달천은 지금도 충주 시민의 식수원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속리산 천왕봉 인근에서 발원하여 충북 내륙의 산과 들을 적시며 수려한 계곡을 만든 달천은 충주에 이르러서는 충북의 2대 평야 중 하나인 달천 평야를 만들고 있으니 충주의 젖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천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너른 물줄기가 ‘ㄷ’ 자로 산자락을 휘감고 돈다. 강 건너편에 병풍처럼 서 있는 산자락의 바위 능선이 바로 수주팔봉이다. 수주팔봉을 풀어쓰면 ‘물 위에 선 여덟 개 봉우리’이다. 달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암봉은 송곳 바위, 중바위, 칼바위 등 이름도 제각각이다. 파노라마를 펼치듯 고개를 돌려가며 봐야 수주팔봉 전체를 가늠할 수 있다. 마치 대형 스크린 앞에 선 것처럼 깎아지른 봉우리들이 그려내는 풍광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수주팔봉의 명성은 조선시대에도 결코 빠지지 않았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왕(조선 철종)이 꿈에 여덟 개 봉우리가 비치는 물가에 발을 담그고 노는데 발밑으로 수달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신선이 된 듯했다. 그 꿈이 현실처럼 생생해 영의정을 불러 얘기했다. 실제로 이런 곳이 있을까? “충주의 수주팔봉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라는 이조판서의 말에 왕이 직접 충주까지 갔다. 배를 타고 수주팔봉 칼바위 아래 도착한 철종은 “과연 꿈에서 본 그곳이구나” 감탄하며 달천에 발을 담그고 한동안 놀았다고 한다.
지금도 왕이 도착한 나루터는 ‘어림포’ 마을은 ‘왕답 마을’로 불린다. 물 좋고 산세 좋고 인심 좋고 풍광 좋은 곳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는데 예전에 그랬듯이 지금도 차박을 하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핫플레이스이다.
4. 다이내믹 도시, 원주(原州)
조선 중기 문신인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平평丘구驛역 마ᆞ갈을 가ᆞ라 黑흑水슈로 도라드니,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雉티岳악이 여긔로다
남양주에서 말을 갈아타고 여주로 돌아드니,
섬강은 어디인가? 치악산이 여기로구나.
송강은 여기서 원주 섬강과 치악산으로 향하고 있다.
원주는 강원도 남서부에 위치한 강원도 최대 도시이며 춘천시, 강릉시와 함께 강원도를 대표하는 3대 도시이다. 통일신라의 5소경 중 하나인 북원경이었고 이 북원경의 ‘원’ 자에 고을 '주'자를 붙여 현재 이름인 원주가 되었다.
역사적 공간을 보면 신라 시대 사찰인 법천사와 거돈사, 흥법사 터에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통일신라 말기 천하에 세력을 떨치던 양길, 궁예, 왕건, 견훤 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시내로 들어오면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강원도의 관찰사(현재의 도지사)가 머물며 업무를 수행하던 강원감영이 있던 곳이다.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도 수도권에서 1시간 이내의 거리라서 도시로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원주시외버스터미널이나 원주 고속버스터미널에 가보면 서울로 가는 사람들은 평일이나 주말 할 것 없이 매우 많고 주말이나 금요일 저녁에는 서울이 아닌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로 향하는 버스에도 사람들이 많다. 또 광주-원주 고속도로를 통해 승용차로 서울까지 1시간 정도의 거리이기 때문에 외식이나 공연, 쇼핑 등 문화생활을 즐기러 가기도 한다.
또한 원주는 군사도시이기도 한데 군사도시란 군대의 주둔이 많아 군사적인 기능이 두드러진 도시를 말한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군사도시로는 대한민국 육해공 3군 본부가 있는 계룡시와 해군이 있는 창원시 진해구가 있다. 그밖에 주한미군 기지가 있는 평택시, 동두천시, 칠곡군 육군훈련소와 부대가 많이 있는 논산시, 춘천시, 의정부시, 1군 사령부가 있는 원주시, 군사분계선 접경의 파주시 등이 군사도시로 불린다.
원주는 또 예로부터 교육의 도시인데 조선 시대 교육기관으로 명륜동에 원주향교가 있었다. 고려 인종 때 창건된 이 향교는 세종 4년(1422년) 원주 목사 신호가 중수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중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원으로는 칠봉서원과 도천서원이 있다. 칠봉서원은 광해군 4년(1612년)에 호저면에 설립되었다. 건립 당시는 서당이었으나 인조 2년(1624년)에 사당을 건립하고 운곡 원천석을 봉안하면서 운곡서원이라 하였다.
원주향교는 천하의 명당자리에 건립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남산 기슭에 향교를 지으려고 목재를 쌓아놓고 많은 목수들을 동원해 작업을 진행하였다. 하루는 까치 한 마리가 일하는 목수의 자[尺]를 물고 날아가자 목수가 허겁지겁 쫓아갔다. 날아가던 까치는 어느 곳에 이르더니 자를 떨어뜨렸다. 목수가 자를 주워 들고 보니 그곳이 천하명당이었다. 그래서 향교를 이곳으로 옮겨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명륜동 원주향교의 위치이다. 이 명륜동 향교 자리는 하늘이 점지해 준 명당이라 한다.
원주는 또 보은(報恩)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는데 치악산의 은혜 갚은 꿩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한 젊은이가 활쏘기를 즐기며 날마다 뒷산에 올라가 열심히 연습을 했다.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화살을 목표물에 명중시켰다. ‘이만하면 한양에 가서 무과 시험을 볼 수 있겠지.’ 자신만만한 젊은이는 벅찬 가슴을 안고 집을 떠났다. 몇 날 며칠을 걸어서 원주에 있는 적악산 재를 넘게 되었다. 깊숙한 산골짜기 경치 좋고 맑은 물이 흐르는 벼랑 밑에서 피곤한 몸을 쉬고 있을 때 별안간 어디선가 꿩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꿔궝 꿩, 꿩꿩! 꿔궝 꿩!” 젊은이는 심상치 않은 꿩의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바로 길옆 바위 밑에서 큰 구렁이가 알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어린 꿩들의 둥지를 응시하며 입을 벌려 막 잡아먹으려는 순간이었다. 좀 떨어진 곳에서 어미 꿩이 구원을 청하듯 애타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젊은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활의 시위를 당겼다.
“팽”하고 화살이 날아가 구렁이 몸에 박히자 큰 구렁이는 꿈틀거리다 죽어버렸다. 위기를 넘긴 꿩들은 다시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어미에게 다가갔고 옆에서 울부짖던 어미 꿩은 고맙다는 듯 “꿔꿩” 소리를 내며 새끼들과 함께 먹이를 구하러 날아올랐다. 젊은이는 순간적으로 활을 쏘았지만 마음 한편으론 꺼림칙했다.
“꿩들은 살려줬지만 구렁이를 죽였으니 잘한 일은 아니지!”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산길을 걸었다. 해가 지기 전에 재를 넘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깊은 산 속이라 밤이 되면 산짐승들도 돌아다닐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다급해져서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어느덧 해는 지고 어두운 산길을 더 갈 수가 없어서 젊은이는 큰 나무 밑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 수풀 사이로 불빛이 반짝반짝 꿈결 같이 보였다.
‘아! 저기 사람 사는 집이 있구나.’
젊은이는 허겁지겁 불빛만 보고 얼마쯤 걸어서 큰 기와집 앞에 다다랐다. 대문간에서 가쁜 숨을 내 쉬며 주인을 불렀다.
“주인 계시오? 주인 계시오.”
한참 만에야 인기척이 나며 소복 차림을 한 젊은 여인이 등불을 들고 나왔다.
“과거 보러 길을 가다가 산속에서 날이 저물었습니다. 하룻밤만 자고 가게 해 주십시오.”
“손님의 사정은 딱하지만 저도 오늘 남편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혼자 있습니다. 손님 부탁을 들어드릴 수가 없군요.”
소복을 한 여인의 눈빛이 유난히 푸르게 빛났다.
젊은이는 섬찟한 느낌이 들었지만 헛간에서라도 자고 가게 해 달라고 다시 한번 간청하였다.
“정 그러시다면 따라오시지요.”
“누추하지만 여기서 쉬십시오.”
마지못해 허락하는 여인의 뒤를 따라 들어간 곳은 사랑채에 있는 방이었다.
젊은이를 힐긋 쳐다보고 나가는 여인의 눈빛에 독기 같은 것이 얼핏 서려 있었다.’
피곤해서 바로 자리에 누웠지만 하루 종일 험한 산길을 걸어온 젊은이는 배가 고파서 잠이 오질 않았다. 할 수 없이 먹을 것을 청하려고 할 때 마침 여인이 밥상을 차려 들고 들어왔다. 너무 배가 고팠던 터라 젊은이는 밥상을 받기 무섭게 정신없이 밥그릇을 비웠다. 젊은이는 상을 물리자 가물가물 졸음에 빠져 그냥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꿈인지 생시인지 젊은이는 몸이 선득선득 차갑고 조여 오는 듯한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큰 구렁이가 젊은이의 몸을 칭칭 감고 두 가닥의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왔다.
“당신은 오늘 오던 길에서 살생을 했소. 당신 화살에 맞아 죽은 구렁이가 바로 내 남편이오. 나는 내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당신을 여기로 유인한 것이오.”
젊은이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바로 여인의 말소리였다.
“나도 살생은 원하지 않았지만 꿩이 하도 가여워 순간의 동정심 때문에 생전 처음 죄를 지었소. 하지만 큰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가던 길이니 제발 살려 주시오.”
젊은이는 숨을 헐떡이며 애원하였다.
“내 남편과 나도 전생에는 사람이었는데 너무 탐욕이 많아 벌을 받고 구렁이가 되었소. 하지만 저 위 빈 절 종각에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이 달려 있는데 오늘 밤이 새기 전에 종소리가 세 번만 울린다면 우리 죄도 풀린다오. 그렇게만 되면 당신도 살려 주겠소.”
큰 구렁이 입에서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빈 절 종각에 매달린 소리 안 나는 종이 어떻게 소리를 낼 수가 있나,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젊은이는 낙담을 하며 눈을 딱 감았다.
밤은 깊어져서 삼경이 지났지만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때 ‘땡’‘땡’‘땡’세 번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구렁이도 종소리를 들었는지 칭칭 감았던 젊은이의 몸을 스르르 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날이 훤히 밝았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젊은이가 누워있던 곳은 빈 절간 앞 바위 밑이었다. 젊은이는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종소리가 났던 빈 절의 종각을 찾아 올라가 보았다. 과연 종각에는 종이 달려있었고 그 밑에는 꿩 세 마리가 머리가 깨진 채 죽어 있었다. 젊은이는 감격하여 울면서 말하였다.
“어제 살려준 꿩이 은혜를 갚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머리로 종을 쳐서 소리를 냈었구나! 아무리 말 못 하는 날짐승이지만 은혜를 갚으려 목숨을 바쳤으니 내가 그 영혼을 달래주어야겠구나.”
젊은이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죽은 꿩들을 묻어주고 과거 길을 포기한 채 빈 절을 고쳐 거기서 살았다. 그 절이 지금의 치악산 상원사(上院寺) 요 단풍색이 고와 적악산(赤岳山)으로 부르던 산 이름도 붉을 적(赤)자 대신 꿩 치(雉)자를 넣어서 치악산(雉岳山)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해 온다.
이처럼 강원도 원주시는 다방면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다이내믹한 도시이다.
4. 귀래리(貴來里), 귀한 손님이 오셔서 머무르심. 경천묘(敬天廟)
원주시 지명 중에 귀래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는 귀한 분이 오셨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귀래라고 하였다. 신라 말 경순왕이 이곳에 와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하였으며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면 이름도 귀래면이 되었다.
귀래면에 가면 경천묘를 볼 수 있는데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능이 아닌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다.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이름은 김부이다.
신라는 하대로 접어들면서 중앙 귀족 간의 왕위쟁탈전과 지방 세력가와 하층민의 잦은 반란으로 통치력은 점차 약화되어갔다. 이런 가운데 신라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가 건국되어 후삼국이 성립되었고 918년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면서 고려와 후백제 간에 주도권 다툼이 전개되었다.
927년 경순왕은 왕위에 올랐으나 신라는 이미 사직을 보전할 힘이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935년 이미 운명이 다한 신라의 형세를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무고한 백성들과 천년 사직의 보존을 위해 고려에 귀부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당시 귀부를 놓고 경순왕과 태자의 갈등을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자(王子):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만 충신·의사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수비하다가 힘이 다하면 그만 두어야지,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경순왕: 작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차마 죄 없는 백성들의 간과 뇌장(腦漿)이 땅에 쏟아지게 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평화적으로 넘겨준 뒤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이곳 용화산의 빼어남을 보고 그 정상에 올라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그 아래에 화수사와 고자암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경순왕이 죽자 왕을 추존하던 신하와 불자들이 고자암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받든 것이 영정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귀부를 하였다지만 적대국이었던 신라의 왕의 사후를 제대로 챙겨줄 고려의 신하가 누가 있겠는가? 전각은 무너지고 인적도 끊어졌다가 조선 초에 목은 이색, 양촌 권근 등에 의해 전각이 중수되었다. 그 후 조선 숙종 때 원주 목사 김필진이 새로 화상을 그리고 다시 전각을 지어 모셨으나 화재를 당했고 영조 때 재건되면서 영정각의 명칭을 '경천묘'로 하사하였다.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경순왕은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후 경주를 떠나서 개경 근처에서 살아야 했고 죽어서도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시 바깥에 묻혔다. 경순왕릉이 경주가 아니라 연천에 있는 것은 고려 조정이 의도한 바라는 설이 대세인데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장례를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 치르면 경주 일대의 민심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 때문이다. 따라서 '왕릉은 수도 개경에서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빌미로 경주까지 가지 못하게 하고 당시 수운 교통이 편리한 임진강 고랑포 근처인 현 위치에 능을 세우게 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주 김 씨 중 경순왕의 후손이 많으므로 그냥 문화재 대우만 받는 다른 대부분의 경주 왕릉들에 비해 중시조 격인 경순왕릉은 매우 중요시하여 일 년에 두 번 3월 1일과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낸다.
후백제 견훤의 마지막 모습과 신라 경순왕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도 닮아있다. 이들은 살아서도 고국을 그리워하였고 죽어서도 각자의 고국을 그리워하며 타국 땅에 묻혀있다. 역사에서 패자의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공식처럼 다가오는 이들의 삶과 죽음이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 건 경천묘를 다녀와서일까?
역사에서 패자의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공식처럼 다가오는 이들의 삶과 죽음이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 건 경천묘를 다녀와서일까?
6. 『존재하지 않음』의 아름다움, 원주 거돈사지
원주 거돈사지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절터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6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3층 석탑(보물 제750호)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높은 축대 위에 중문을 세운 자리가 있으며 그 뒤로 3층 석탑과 금당터, 강당터가 남아 있다. 이러한 절의 구조를 1탑 1금당 가람배치라고 하는데 탑과 금당, 중문이 일적선상에 놓여있는 배치이다.
이 거돈사지에는 3점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이다.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은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높이는 5.3m로 탑신부에서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옥개석의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 구조와 기둥 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 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금당(법당)은 절의 중심건물로 탑 뒤에 위치해 있는데, 규모가 전면 6칸 측면 5칸으로 되어 있다. 이 안에는 2m 정도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시던 석조대좌가 놓여있다. 아마도 신라 말기 불상의 경향으로 보아 지방 호족에 의해 철불이 모셔졌을 가능성이 많다. 금당의 오른쪽과 뒤로는 석축을 쌓고 건물을 지었던 흔적이 있으며 우물터도 발견할 수 있다.
절터를 정면에서 바라볼 때 탑의 오른편 끝에는 원공국사 승묘탑비가 자리 잡고 있고 왼편에는 절에서 나온 각종 석재를 모아 놓았다. 절터 아래 길 건너편으로는 부론초등학교 정산 분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교되었고 그 터에 당간지주가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시인 이달규는 탑에 얽힌 사연과 역사를 전통의 시가인 시조로 노래하였는데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에서는 다음과 같은 시조를 썼다.
시인 떠나보내고 오늘은 탑 구경간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라니
소낙비 내려도 좋고
흙먼지 일어도 좋다
시인이 있었고 시 한편이 있었다
버려진 이 누구이며 사라진 이 누구인가
옛 절집 흔적 없어도 탑 하나면 족한 것을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 중에서)
옛 절집 흔적 없어도 탑 하나면 족한 것을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 중에서)
거돈사지 원공국사 승탑은 고려 전기의 승려 원공국사의 사리탑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원공국사는 고려 광종 때의 승려이다. 여기서 국사(國師)는 나라의 큰 스승이며, 왕사(王師)는 왕의 스승으로 당시 승려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법계였다. 신라 말의 도선국사, 고려시대 대각국사, 원종국사 등이 있다.
원종국사는 법명이 지종으로 경기도 양평 사나사에 머물던 인도 승려 홍범에게서 득도하였고 광종 10년(959년) 중국 후주에 유학하여 공부하였다. 970년 귀국한 뒤 왕사(王師)에까지 올랐다. 현종 9년(1018년) 거돈사에 들어가 그 해에 입적하였다.
이 부도는 고려 초기 팔각원당(八角圓堂) 형식의 대표적 양식을 취하고 있다. 신라의 양식을 이어받아 모양이 아담하고 절제되었으며 비례미가 좋고 깊은 품격을 풍긴다. 게다가 각 부분의 조각이 장엄하여 위엄 있고 세련되어 보인다.
현재의 부도는 지대석 없이 바로 기단이 시작되고 있다. 기단은 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부분이 팔각이다. 탑신은 팔각형인데 각 면을 살펴보면 앞뒤 양면에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좌우 양 면에는 창문 모양을 그리고 남은 네 면에는 4천왕입상을 새겼다. 면과 면이 만나는 각 모서리마다 꽃무늬로 장식한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는데 이것은 이 부도가 승려의 사리탑이면서도 불탑의 형식을 따르려 했던 의도를 엿보게 한다.
옥개석 역시 팔각으로 탑신석과 닿는 곳에 4단의 층을 표현하였고 그 위에 서까래를 새겼다. 추녀는 얇고 각 귀퉁이에는 추켜올림이 뚜렷하며 일반적 팔각 원당형 부도의 형식처럼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다. 꼭대기에는 팔각형의 보개가 얹혀 있다.
원주 거돈사지에 있는 원공국사 승묘 탑비는 거돈사지 삼층석탑의 오른편에 약 11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고려 현종 16년(1025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 대표적 문인인 ‘해동공자’ 최충(崔沖)이 지었고 김거웅(金巨雄)이 새겼다.
비는 거북받침돌(귀부) 위로 비 몸을 세우고 머릿돌(이수)을 얹은 모습으로 비 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적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 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 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정교이고 화려하다.
원공국사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세속에서 쓰던 성은 이 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원공국사는 8세에 출가하여 광종 6년(955년)에 오월국으로 유학한 뒤 그곳에서 불교를 강의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역대 왕들이 그를 숭상하여 대선사, 왕사 등으로 모셨다고 한다.
거돈사지에서는 ‘존재하는 않음’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데 아름다울 수 있는지, 역설적인 표현같기도 하지만…….
그 절, 그 법당, 그 탑 그대로 존재했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 모습으로만 기억되겠지만 폐사지는 마치 뼈대만 남은 철사에 찰흙을 붙여 창조물을 만들 듯 머릿속에서 다양한 모습의 절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상상하는 이에 따라서는 절이 건립된 통일신라 시대를 상상할 수도 있고, 원공국사가 내려와 수행하던 고려 시대를 상상할 수도 있고, 임진왜란, 한국전쟁 등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한없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뼈 아픈 아픔을 간직하고 있을 수도 있고, 화려하고 찬란할 수도 있고, 수수하고 소탈할 수도 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아마도 거돈사의 옛 모습을 추억이 아닌 기억으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존재는 저 앞에 서 있는 천년이 넘은 느티나무뿐이 아닐까?
거돈사지는 사계절이 모두 각각의 색깔과 멋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 멋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 찬란함 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져진 수수함, 소탈함의 멋이라 몇 번을 와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할 때, 거돈사에서 다음과 같은 프러포즈를 해보면 어떨까? 어디를 둘러봐도 좋은 경치와 상쾌한 공기, 긴장감을 풀어주느라 계속해서 음향효과를 내주는 새들의 지저귐, 더불어 천년이 넘은 훌륭한 문화유산과 느티나무가 양 사이드에서 응원해주고 있는 거돈사지 계단에서의 프러포즈는 연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최고의 프러포즈가 될 것이다.
“거돈사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사계절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인즉, 당신과 함께 사계절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와 함께 해줄래요?”
6. 나라의 창고, 조창(漕倉) - 경창(京倉)
조창이란 전국 각 지방에서 조세의 명목으로 납부한 미곡을 수납하여 한양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기 위해 연해나 하천의 포구에 설치하여 운영하였던 국영 창고의 총칭이다.
고려 초기 이래 조운 제도가 활성화되면서 세곡의 수납과 운송에 적절한 전국 주요 지점에 조창이 세워지게 되었다. 고려의 도읍인 개경은 서해안에 가까이 있고 예성강과 임진강 하구를 통해서 세곡을 수납하기 편리한 입지를 지녔던 까닭에 고려는 국초부터 조운 제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다. 『고려사』에도 국초부터 12개 조창이 운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는 조창의 설립과 운영에 여러 변화가 있었다. 15세기 후반에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전국에 9개 조창이 기록되었으나 조선 후기인 19세기 초반에 편찬된 『만기요람』에는 8개 조창이 수록되었다.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 사이에 조창의 전체 숫자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6곳이 폐지되고 5곳이 신설되는 등 조창의 분포 위치에는 큰 변동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조창을 통한 관선을 통한 조운 방식 대신 민간 선박에 의한 임운의 방식이 확대되었는데 즉 쉽게 이해하면 민간에 용역을 준다는 의미이다. 또한 수취 제도의 변화로 인해 세곡의 납부가 면포나 동전의 납부로 대체되는 지역이 늘어나면서 조창과 조운의 중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이 되면 조운 제도의 폐지와 함께 전국의 조창 역시 그 기능이 완전히 소멸되는 운명에 처한다.
흥원창은 강원도 원주시 법천동에 설치되었던 조선 전기의 조창으로 고려시대의 흥원창을 계승하여 운영하였다. 원주, 평창, 영월, 정선, 횡성 등 강원도 영서지방의 세곡과 강릉, 삼척, 울진, 평해 등 영동지방의 세곡을 수납 보관하였다가 일정한 기일 안에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7. 진리(法)가 샘솟는 땅, 원주 법천사지
진리(法)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법천사(法泉寺).
고려시대 대표적인 법상종(法相宗) 사찰로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 해린이 젊은 시절 승려의 길로 들어선 곳이자 말년에 입적한 곳이다. 지광국사는 당대의 제일가는 고승이자 나라의 정신적 지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법천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이르러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학자 유방선이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쳤다고 하며 한명회, 서거정, 권람 등이 그에게서 배웠다고 전한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은 이곳을 방문한 뒤 『유원주법천사기』를 썼는데 그 책에 따르면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진 뒤 폐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법천사지에서 전하는 유물은 지광국사탑비(국보), 지광국사탑(국보), 당간지주(강원도문화재자료) 등이 있다. 법천사는 당시 유력한 종단 중 하나였던 법상종의 중심 사찰로 고려시대의 뛰어난 불교미술 양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은 지광국사가 고향인 법천사에서 입적한 후 사람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승탑이다. 당시 문종은 슬퍼하면서 장례를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지광국사가 입적한 후 15년이 지나 탑비가 세워졌다.
이 승탑은 여느 승탑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미, 뛰어난 장엄 장식 등으로 역대 고승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부도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다.
『고려사』 기록에 보면,
고종 4년(1217년)에 침입한 거란군의 기세가 법천가까지 이르렀다는 기사로 미루어보아 법천사의 법등이 이때까지 이어졌으며 당시 전란에 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사찰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빈 터로 남게 되었으며 경내에는 승탑과 탑비, 당간지주 등 석조물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1911년에 이 탑의 운명이 뒤바뀌는 일이 벌어졌는데 당시 어떤 일본인이 땅 주인에게서 이 탑을 사서 서울에서 몇 사람을 거친 뒤에 일본 오사카까지 반출이 된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당시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5년에 다시 환수해 경복궁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데라우치의 생각은 일본이나 조선이나 하나였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 상관은 없었지만 자신이 총독인 이상 조선의 문화재는 조선 땅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조선 총독 재임 기간에 상당히 많은 석조물들이 원위치에서 일본으로 가려던 중에 그에 의해서 서울 경복궁으로 강제 배치되었고 지금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여기서 끝이었다면 다행이겠지만 6·25 전쟁 와중에 유탄 폭격을 받아서 12,000개가 넘는 조각으로 나눠지고야 말았다. 이후 복구 논의가 있었지만 묵살이 된 채 방치되고 있던 중 당시 월남 대통령이던 응오 딘 지엠이 방한하면서 이승만 대통령과 경복궁과 경회루를 둘러보던 중 부서져 있던 이 탑을 봤고 “대체 저게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지적을 하자 부랴부랴 복원에 나서게 되었다.
현재는 대전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이 완료되었지만 수리기간이 조금 더 연장되어 2024년 하반기 중으로 원래의 자리로의 귀향 시기를 잡고 있다. 110여 년간 타향살이를 하며 온갖 수난을 겪었던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제자리를 찾는 날 꼭 다시 찾아가 보도록 하자.
법천사지 지광국사 탑과 세트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는 현재도 법천사지에 있으며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었다.
비는 거북받침돌(귀부) 위로 비 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이수)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기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 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 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았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입적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썼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인 법천사지 당간지주는 현재 지광국사 현묘탑비와 함께 절터를 지키고 있다. 기둥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며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모양이다. 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꽂아두기 위한 둥근 받침돌이 있으며 두 기둥의 윗부분은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다듬어 놓았고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파놓았다.
법천사는 당시 유력한 종단 중 하나였던 법상종의 중심 사찰로 고려시대의 뛰어난 불교미술 양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