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발해를 꿈꾸며, 철원(鐵原)
철원을 상징할 수 있는 단어로는 한탄강, 철원쌀, 한국전쟁, DMZ, 고석정 등을 꼽을 수 있다. 철원(鐵原)을 한자어로 풀이해보면 쇠의 고장, 쇠 벌이라는 뜻이 된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구려 시대 철원 또는 모을동비라고 칭하던 고을이었고, 조선시대 와서는 고종 33년에 칙령 제 36호로 강원도 철원군이 되었다. 철원이라는 도시는 무구한 역사 속에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고을이다. 약 1억 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한탄강 일대에는 삼국시대 신라 진평왕의 이야기와 후삼국시대 태봉의 궁예, 고려시대 충숙왕의 이야기가 서려 있으며 조선시대로 넘어와서는 명종시대 의적으로 활약했던 임꺽정의 이야기도 간직하고 있다. 현대사로 넘어와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인 한국전쟁과도 아주 깊은 관련이 있는 도시이다. 그래서 나는 철원이라는 도시를 통사(通史)*의 고장으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역사 현장 속에서 우리 민족의 환희와 아픔, 슬픔, 희망을 모두 안고 있는 도시 철원으로 떠나보자.
* 통사(通史) : 시대를 한정하지 아니하고 전 시대와 전 지역에 걸쳐 역사적 줄거리를 서술하는 역사 기술의 양식
1. 역사현장의 파수꾼, 한탄(漢灘)강
한탄강을 우리말 그대로 해석해보면 “한”은 큼(big)을 뜻하고 “탄”은 여울을 뜻하니 큰 여울이라는 뜻이 된다. 여울이란 『강이나 바다에서 유독 물살이 센 구간』이니 한탄강은 큰 강, 큰 바다 등이 되는 것이다. 북한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강원도 철원구, 경기도 연천군을 거쳐 임진강에 합류하는데 그 길이가 약 136Km이니 한반도에서 제법 큰 강인 압록강(약 790km), 낙동강(약 510km), 한강(약 494km), 금강(398km)등에 비하면 명함 내밀기는 쉽지 않은 강이다. 그러나 길이만으로 어찌 한탄강이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을 작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역사 속에서 한탄강은 그 모든 순간을 묵묵히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탄식하고, 아파했던 우리의 큰 강, 역사현장의 파수꾼임이 틀림없다.
한탄강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후삼국 시대 태봉국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이 한탄강을 건너며 검은 현무암을 보고 나라가 곧 망할 거라고 한탄(恨歎)을 해서 한탄강이라는 설이 있다. 한숨 쉬며 탄식을 하며 건넜다고 해서 한탄(恨歎) 강이라는 설도 역사의 한 현장에서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들린다.
또한 한국전쟁 때 남한과 북한의 최대 격전지였던 한탄강 일대의 비극을 지켜봐 왔던, 또한 현재까지도 민족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한탄강의 속마음은 말 그대로 한탄(恨歎) 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속마음이 무색할 만큼 최고의 풍광과 절경을 자랑하는 것은 또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한탄강은 화산 분출로 인해 생성된 지역이라서 곳곳에 수직으로 된 절벽과 협곡들이 형성되어 장관을 이루는 매우 아름답고 신기한 강이다. 이 중에서도 우리는 철원 팔경 중의 하나인 고석정(孤石亭)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고석정의 뜻을 한자어로 풀이해보면 외로운 바위에 세워진 정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석정은 철원 제일의 명승지라 그 이름값은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다. 관광객들이 고석정 앞에 놓여 있는 바위가 고석정인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바로 알고 가야 한다. 강물을 따라 크게 우뚝 놓여 있는 바위가 고석이고, 그 위쪽에 세워진 정자가 고석정인데 보통은 이 정자와 고석과 주변의 계곡을 통틀어 고석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고석정은 신라 진평왕이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로써 신라의 각종 행정조직을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중국의 수, 당나라와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폄으로써 후일 통일신라의 기반을 닦았던 왕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의 아버지이다. 진평왕 집권 시기에는 할아버지 진흥왕 때 3배 가까이 확장된 영토와 인구를 기반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해 나갔는데 이때 진평왕이 신라의 영토인 철원지역으로 와서 고석정의 뛰어난 풍광을 보고 정자를 만들어 놓을 것 같다. 진평왕은 신라시대 다른 인물들에 비해 비중이 좀 적은 편이데 그것은 재위 기간이 워낙 길고(54년) 당대 김춘추, 김유신 같은 전설적인 화랑들과 선덕여왕 같은 삼국시대 위인들이 즐비해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경주 보문동에 가면 진평왕릉(사적 180호)을 볼 수 있다. 봄철 한적한 시골길에서 벚꽃 명소를 찾고 싶다면 경주 보문동 명활산성에서 진평왕릉까지 아이손을 잡고 사뿐사뿐 걸어가 보는 것도 좋다.
고석정은 유래가 워낙 오래된 곳이고 또한 그 정자 역시 수많은 풍파를 겪어온지라 역사 속에서도 그 이름을 드러내고 있는데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철원 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석정은 철원부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바윗돌이 우뚝 서서 동쪽으로 못물을 굽어본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眞平王)과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일찍이 이 정자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철원도호부
2. 임꺽정의 은신처, 안식처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 황해도 지방의 백정 출신 도적이며 본명은 임거정(林巨正)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를 전하고 있다.
임거정은 천인(賤人)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용맹스럽고 인물이 출중한 데다 외교술 역시 뛰어났으며 무술에도 능했다. 그러나 천인의 자식이라 하여 등용되지 못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도적이 되어 그 무리와 함께 고석정 부근에 성을 쌓고 살았다. 임거정이 이곳에서 함경도에서 조정으로 상납하는 조공을 약탈하였기에 나라에서는 큰 근심거리였다. 임거정은 자기를 잡으러 관군이 오면 고석정 부근의 암벽 석굴에 있다가 꺽지라는 물고기로 변신하여 한탄강에 숨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임거정을 임꺽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의적으로 활동한 임꺽정의 최후는 해피엔딩 스토리는 아니다. 조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후 잡혔고 잡힌 지 15일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명종실록의 한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이 임꺽정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 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또한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임꺽정을 조선 3대 도둑으로 꼽고 있다.
어쨌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의적 임꺽정은 지금도 고석정 주변에서 식당의 주메뉴인 매운탕에서 꺽지로나마 만나볼 수 있으니 고석정은 임꺽정의 영원한 은신처이자 안식처이다.
3. 막국수의 고장, 강원도
강원도 어느 지역을 가도 노포부터 체인점까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음식점이 바로 막국수 가게이다. 막국수는 본래 춘천,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간식이나 겨울밤의 야식으로 먹던 겨울 음식이었다. 막국수의 ‘막’의 뜻은 ‘국수를 막 뽑아서 바로 만든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바로 막국수 조리의 편리함과 막국수의 대중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민속대백과 사전에는 막국수의 유래와 관련된 다음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조선 임진왜란 이후 국토가 황폐해져 연이어 흉년이 들었는데 기근으로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끼니를 연명하자 나라에서 메밀 재배를 권장하여 호구책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메밀로 반죽을 만들어 구멍을 뚫은 바가지에 넣고 눌러서 빠져나오는 국수발을 끓은 물에 받아 이를 굳혀 먹었다고 한다.
또한 화전민들이 메밀을 반죽하여 먹던 메밀수제비가 발달하여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오늘날에는 여름에 많이 찾는 음식이지만 예전에는 겨울밤 야식으로 먹던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메밀가루에 전분을 섞어 반죽한 다음 분틀로 국수발을 뽑아 끓는 물에 넣어 익혀 먹었다고 한다.
막국수를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 중 춘천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막국수는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즉석에서 틀에 넣어 국수를 뽑은 것이 올챙이 묵과 같으며 뽑은 국수를 물에 몇 번 헹궈 그릇에 담은 후 동치밋국이나 육수를 붓고 오징어 생채에 곁들인 갖은양념을 얹어 섞어 먹는 형태이다. 국수 삶은 걸쭉한 물에 간장을 타서 별미로 마신다. 막국수는 원래 겨울 밤참으로 애용되어 기나긴 겨울밤의 허기를 메우는 겨울 음식이었으나 6·25 전쟁 이후부터는 여름에 먹는 음식이 되었다가 1970년대부터는 사계절 음식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강원도를 찾는 관광객이면 한 번씩은 꼭 찾게 되는 별미가 되었다.
3. 철의 삼각지, 승일교 (국가등록문화재 제26호)
철원을 나타내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철의 삼각지』이다.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철원평야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진 철원군, 김화군, 평강군을 잇는 삼각축 선을 기준으로 하루하루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었는데 미 8군 사령관인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북으로 가면 갈수록 고지가 높아져서 아군 입장에서 공격하기 힘든 이러한 특수지형을 '철의 삼각지(Iron Ttiangle)'라고 명명하였다.
철의 삼각지 주요 지점은 철원평야 요충지인 백마고지, 김화 북방의 저격능선, 아이스크림고지이다. 이들 지점에서 6·25 전쟁 발발 이후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러한 전투를 ‘고지전’이라 한다. 백마고지 전투는 휴전회담이 난항을 겪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전투로서 백마부대가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열흘 동안 혈전을 벌인 전투이다.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세워진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에 의하면 포탄 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 높이까지 채울 만큼 치열하였다고 한다.. 해발 395미터인 이 산봉우리는 열흘 동안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1만 4000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진 포탄만 해도 30만 발이 넘었다.
철원 승일교는 한탄강을 가로질러 동송읍과 갈말읍을 잇는 다리로 높이 35m, 길이 120m, 폭 6m의 다리이다. 이 승일교는 1948년 8월 북한이 먼저 착공하였는데 6·25 전쟁 발발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이후 이 지역을 수복한 남한에 의해 1958년 12월 3일에 완공되었다. 즉 기초공사와 교각공사는 북한이 상판공사와 마무리 공사는 남한이 한 남북 합작의 다리인 셈이다. 시작과 완성의 주체와 시공 기법이 달라 아치의 크기나 교각의 모양이 겉으로도 구별된다. 분단과 한국전쟁이 낳은 독특한 현대문화유산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현대사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판단하기 난감한 부분이다. 현재 승일교는 차량통행은 금지하고 보행자 전용으로 사용하고 있고 바로 옆에 한탄대교를 개통하여 차량이 통행하도록 하고 있다.
승일교라는 이름에는 몇 가지 유래가 전해지는데,
첫째는 당시 남한과 북한의 통치자 이름을 한 글자씩 따왔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승(承)’ 김일성의 ‘일(日)’을 따와서 지어졌다는 이야기이고, 둘째는 “김일성을 이기자”는 뜻에서 ‘승일교(勝日橋)’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 중 큰 공을 세우고 북한군 포로로 잡혀간 국군 연대장 박승일(朴昇日) 대령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승일교(昇日橋)’로 지었다는 것인데 현재는 마지막 이야기가 정설로 되어 있다.
어쨌든 승일교는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의 한 장면에서 남과 북이 함께 만들지는 못했지만 함께 만든 다리이다.
철원평야는 지금으로부터 27만 년 전 신생대에 오리산이 화산 폭발하여 만들어진 용암대지이다. 철원평야는 전체 넓이가 약 35000h로 강원도 제1의 곡창지대이다. 철원평야에서는 비옥한 토질과 일교차 큰 기후와 DMZ의 청정수가 함께 어우러져 전국에서 가장 밥맛 좋은 쌀이 생산되고 있다. 철원군이 전국적인 농산물 생산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전후인데 대륙(중국) 진출의 대동맥인 경원선이 1914년 부설되면서 철원은 경기 북부와 강원, 강북 지방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수산물의 집산지로 변모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도 철원쌀은 품질을 인정받아 국내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인기가 좋아 경원선과 원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역시 철원의 대표상품이다.
철원의 자존심인 철원쌀은 현재에도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중북부 지역의 최대 쌀 주산지인 철원평야에서 생산되는 철원쌀은 전국에서도 가장 벼베기가 이른 시기에 진행돼 햅쌀의 수매가와 판매 가격이 가장 먼저 결정된다. 이는 곧 전국에서 생산되는 쌀의 수매가와 판매가에 영향을 주게 되니 우리나라에서 철원쌀이 지닌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쌀은 곧 국민의 주식이자 군대의 군량미인데 이렇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철원을 백마고지 전투에서 잃게 된 김일성은 3일을 통곡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쨌든 승일교는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의 한 장면에서 남과 북이 함께 만들지는 못했지만 함께 만든 다리이다.
4. 직탕폭포
동송읍 장흥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한탄강 협곡에 들어서면 독특한 모양의 폭포를 볼 수 있다. 철원 8경 중 3경인 직탕폭포이다. 직탕은 물이 탁 떨어진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일반적인 폭포는 높은 데서 떨어지고 폭보다 높이가 한참 높지만 직탕폭포는 높이가 약 3m 정도이고 폭은 80m 정도 되는 넓은 폭포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로 인해 한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 폭포는 한탄강의 침식작용을 받은 현무암 주상절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계단 모양의 폭포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을 두부침식 현상이라고 하며 세계적으로 이 현상이 가장 활발한 곳이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와 철원의 직탕폭포이다. 이 두부침식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한탄강 지질공원(www.hantangeopark.kr/)에서 아래와 같이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생김새만 비슷하게 보일 뿐 규모의 차이가 상당한 두 폭포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폭포 주변의 현무암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직탕폭포는 여러 용암 단위로 만들어진 현무암 위로 오랫동안 물이 흐르면서 풍화와 침식작용을 받는 과정에서 현무암의 일부분이 주상절리를 따라 떨어져 나감으로써 계단 모양의 폭포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 경우, 폭포수의 떨어지는 힘에 의해 침식작용이 진행되고, 이에 의해 현무암 기둥들이 계속 무너져 내려 결국에는 폭포의 위치가 조금씩 강 상류 쪽으로 침식해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두부침식(頭部浸蝕, headward erosion: 침식이 상류 쪽을 향해 이뤄져 강의 길이가 길어지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직탕폭포가 한국의 나이아가라라고 불리는 것은 이와 같이 두부침식을 겪으며 후퇴하는 과정에서 나이아가라와 유사한 형태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997년 직탕폭포와 고석정 주변의 지형 김주환>
직탕폭포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총각이 직탕폭포 밑에 있는 굴에 들어갔는데 굴속에는 넓은 들판과 논이 있어 사람 살기가 좋은 곳이었는데 단지 하나 소금이 없었다. 총각은 소금만 구하여 오면 살기가 좋겠다고 생각하고 굴 입구를 표시하여 놓고 소금을 사러 나갔다. 총각이 소금 한 가마니를 사서 돌아왔는데, 입구를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총각의 입장에서는 정말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총각이 발견한 굴은 현실세계와 이상 세계의 경계에 있는 공간이다. 총각은 굴을 발견하고 굴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힘든 현실세계에서 분리되어 이상 세계로 들어간다. 그런데 몸은 이상 세계에 들어와 있지만 정신은 여전히 현실세계에 얽매여 있다. 들어갔으면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 총각은 소금을 구하기 위하여 현실세계로 일시 귀환함으로써 이상 세계로 가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직탕폭포의 굴은 고달픈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상상이 만들어 낸 유토피아이자 꿈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철원 총각처럼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갖추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한이 드는 이야기이다. 때로는 조금 모자라고 부족해도 만족할 줄 아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5. 발해를 꿈꾸며, 노동당사
철원읍 관전리에는 노동당사가 있는데 1946년 초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 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철원 1개 리(理)당 쌀 200 가마씩 거두었고 지역주민들로부터 강제로 모금과 노동력 동원을 하였다. 건물의 외부 공사는 지역주민들을 동원해서 시키고 건물의 내부 작업은 비밀유지를 위해 공산당 당원들만 동원하였다. 광복 후부터 6·25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 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잡혀와서 무자비한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 당사 뒤편의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당시의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외관 역시 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건물 전체가 검게 그을리고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게 나있다.
철원군은 38선 이북에 있어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동시에 소련군이 진주하였고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어 공산 정권 아래에 들어갔다. 철원군은 경원선의 중심역인 철원역의 소재지였고 분단 직후 일시적이나마 북강원도 도청 소재지였을 정도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도 공산 정부는 인근 지역인 포천, 연천, 이동, 일동, 김화, 평강 일대를 아우르는 노동당사 철원군지부를 철원군 철원읍 시가지 한복판에 건립하였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구 철원은 대한민국에 귀속되면서 노동당사도 남한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노동당사는 2002년 5월 31일 국가등록문화재 제22호로 등록되었다.
1994년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라는 곡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여 일반인들도 철원의 노동당사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KBS 열린음악회가 녹화되기도 하였다.
6·25 전쟁 전, 중, 후의 기억을 모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철원 노동당사는 철원의 랜드마크라 해도 모자라지 않다. 또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현대사의 아픔이 있는 문화재이다.
6. 백마고지의 영웅, 故 조응성 하사
백마고지는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 12㎞ 지점에 있는 해발 395m의 고지로서 군사적 관례에 따라 395고지라고도 한다. 6·25 전쟁 때 국군과 중공군이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내려보면 마치 백마(白馬)가 쓰러져 누워 있는 듯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한국·유엔군과 북한·중공군 양측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백마고지는 중부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의 하나인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김종오(金鐘五)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 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 투하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중공군은 제38군 예하의 제112·113·114사단의 약 4만 5000명의 병사를 동원하였으며, 아군은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를 비롯하여 경장비 제51연대, 53전차중대, 제1포병단 등의 국군과 제5공군, 제73전차대대, 제49·제213·955 포병대대 등의 미군이 맞서 싸웠다.
제9사단 장병들은 치열하다 못해 참으로 처절하게 싸웠다. 당시 보도를 보면 ‘총으로 싸우다가 총탄이 없으면 검으로 싸우고, 검이 없으면 물고 뜯어서라도 싸워 이겼다’고 하고, 또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육박전을 벌이는데, 머리를 만져 머리털이 길면 아군이고 짧으면 적이라고 여기고 싸웠다’고 전하고 있다.
10월 6일에서 10월 15일까지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21만 9954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 5000발의 포탄을 발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중공군은 1만여 명이 사상자 또는 포로가 되었고 제38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제9사단도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9사단은 백마부대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계속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전투를 기념하여 백마고지 정상에 기념관과 전적비, 호국영령 충혼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해마다 10월 16일을 전승(戰勝) 기념일로 삼아 민·관·군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 이후인 1952년 11월 20일 사단 사령부를 방문하여 대통령 부대표창을 친히 수여(親授)하고 전승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또한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상승백마(常勝白馬)’, 즉 항상 승리하는 백마부대라는 의미의 친필 휘호를 하사하였다.
한편 2021년 10월 28일 백마고지에서 6·25 전쟁 때 전사한 병사의 유해가 발굴되었는데 故 조응성 하사였다. 그 자세가 총을 겨누고 있는 그 자세 그대로 발굴되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1928년 경북 의성 태생인 고인은 농사를 짓던 중 전쟁이 터지자 1952년 5월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남긴 채 제주도 제1 훈련소로 입대했다. 9사단 30연대 소속이었던 그는 1952년 10월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방어작전을 펼치던 중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의 유해는 쏟아지는 포탄을 피해 개인호에 몸을 은폐한 채 적을 향해 총을 겨누는 자세 그대로 발굴됐다. 상반신만 수습된 고인의 유해 주변에서 탄악류를 비롯해 개인 소장품으로 추정되는 만년필, 반지, 숟가락 등의 유품도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철모와 머리뼈에서는 한눈에 봐도 전사 원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관통 흔적도 발견되었다.
딸 조영자씨는 부친의 신원확인 소식에 “어느 날 아버지가 오징어를 사 오셔서 맛있게 먹었는데, 우리에게 이별을 고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신 것 같아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떠나기 전 가족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오징어를 사 온 아버지, 오징어를 맛있게 먹었던 딸은 70년이 지나도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전쟁의 비극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7. 철마는 달리고 싶다, 월정리역
월정리역은 비무장지대 남쪽 한계선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마지막 기차역으로 남쪽에서 올라가다 보면 연천의 신탄리역 다음 역으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역이다. 월정리역을 지나는 경원선은 서울 용산구와 북한의 강원도 원산 사이에 부설된 철도로써 1914년 9월 6일 개통되었으며, 총연장은 223.7㎞이다. 원산은 당시 동해안 제일의 항구로써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의 중요성은 경의선이나 호남선 못지않았다. 1910년 강화도 조약 당시 일본이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한 것을 보아도 그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경원선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외교전 역시 매우 치열하였다. 1896년 프랑스의 피브릴르회사가 주한 프랑스 대사를 통하여 경원선과 경목선 부설권을 청구하였으나, 우리 조정은 이를 거절하였다. 1898년 독일 총영사 크린(Krien,F.)이 한국 외부대신에게 경원선 부설권을 그들이 세운 회사 세창양행(世昌洋行)에 준허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역시 거절되었다. 독일 측은 경인선과 경의선의 부설권이 이미 미국과 프랑스에 있는 사실을 들어 같은 요구를 몇 차례 거듭하다가, 마지막에는 철도 부설 자금의 공급권이라도 얻어내려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경인선과 경부선의 부설권을 획득하여 공사에 들어간 일본도 경원선 부설권을 놓치지 않으려 들었다. 경원선 부설권이 일단 다른 경쟁국에 넘어갔을 경우, 그것이 그들의 대한 정책(對韓政策)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일본은 기회를 엿보다가 1899년 대리공사 하야시(林權助)로 하여금 한국 정부에 경원선 부설권을 요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즉각 거부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줄기찬 외교적 압력에 대하여 우리나라 정부가 일관하여 내세운 원칙은 ‘철도와 광산 경영은 일체 이를 외국인에게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1899년 정부는 경원선의 부설을 박기종(朴琪淙) 등의 국내 철도 회사에 허가하고, 이를 관보로 공포하였다. 그러나 자금 사정으로 얼마 되지 않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자 1904년 서울~원산 사이 철도 부설 노선 답사를 한국 정부의 제지 없이 마친 일본은 그 해 8월 27일 경원선을 군용 철도로 부설하기로 결정하여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경원선 부설은 경의선과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수단으로 빼앗기고 만 것이다.
월정리역에 가면 ‘철마(鐵馬)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 옆에 멈춰 선 열차를 볼 수 있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열차 앞부분만을 가져가 지금은 객차로 쓰이는 뒷부분만 일부가 남아 있다.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던 철의 삼각지에 위치한 월정리역의 멈춰진 기차는 근대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현대 6·25 전쟁의 아픈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월정리(月井里)는 한자 뜻으로 보면 달우물 마을이다. 그에 대한 효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월정리 어느 산골에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와 그를 지성으로 봉양하는 딸아이가 살고 있었다. 딸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병이 깊어지자 병을 낫게 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노력하였지만 모두 허사였다. 첩첩산중에서 오로지 아버지에게 의지하여 살던 처녀는 앞길이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처녀는 예전에 정월 대보름날이나 한가위 때 아버지가 달을 향해 두 손 모아 빌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딸아이가 곱게 커서 좋은 남편을 만나서 잘살기를 매번 빌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녀는 마지막으로 밤하늘을 밝히는 달님께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빌기로 했다. 처녀는 지극 정성으로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밤마다 달님께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처녀는 달님께 빌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도사가 나타나서 말을 했다. “나는 달의 화신인데 너의 정성이 지극하여 이르노니 집 옆 바위 위에 가보면 물이 고여 있을 것이니 달이 지기 전에 너의 손으로 천 모금을 길어 아버님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 처녀는 허둥지둥 꿈에 들은 곳을 찾아가서 물을 길어다 아버지 입에 넣기를 기백 번을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달은 서편으로 기울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한 딸은 온몸을 바위에 부딪쳐 몸은 찢어지고 피가 흘렀으나 멈추지 않고 계속 왔다 갔다 하며 물을 길었다. 처녀가 가냘픈 손으로 드디어 천 번째 물 깃기를 마치자 서천의 달도 지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아버지 병환은 말끔히 나았다. 그러나 효녀는 지쳐 쓰러졌고, 영영 깨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아버지가 딸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차디찬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사람들은 바위 위에 물이 고였던 자리를 ‘달의 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 역시 달 월(月) 자에 우물 정(井) 자를 써서 월정리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 가면 처녀가 달을 들고 있는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8. 고려 호족의 힘, 도피안사(到彼岸寺)
철원군 동송읍에 있는 도피안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년) 당대의 고승 도선국사가 1,500여 명의 지역주민들과 함께 철불(鐵佛)을 조성하고 삼층석탑을 세워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도피안(到彼岸)이란, 피안에 이른다는 말로 "번뇌와 고통의 세계인 생사고해를 건너서 이상 세계인 열반의 언덕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혼란스러웠던 신라 말기 사람들의 편안하고자 하는 소망을 바라는 의미가 아니었나 싶다.
도선국사는 이 절을 800의 비보국찰(裨補國刹) 중의 하나로 삼았으며, 화개산이 마치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약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철불(국보 제63호)과 석탑(보물 제223호)으로 산세의 약점을 보완하여 국가의 내실을 굳게 다지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수록되어 있는 사적기에 의하면, 도선이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하여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고 하였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았더니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으므로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오래도록 국가의 비보사찰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1898년 봄에 큰 화재로 전소된 뒤 주지 월운(月運)이 강대용(姜大容)의 도움을 받아 새로 법당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다.
도피안사는 한국전쟁 때 또다시 불타 완전 폐허가 된다. 9년이 지난 1959년 어느 날, 제15사단장 이명재(李明載) 장군은 난데없는 꿈을 꾸었다. 땅속에 묻힌 불상이 답답하다는 내용의 꿈이었다. 이튿날 전방 시찰을 나갔던 장군은 갑자기 갈증을 느껴 부근의 한 민가에 들어갔다가 간밤 꿈에서 땅속에 묻힌 불상과 함께 보였던 안주인을 만나고는 깜짝 놀랐다. 이명재 장군은 그 여인의 안내를 받아 불타 없어진 도피안사 터를 찾아가 뒤지기 시작했고, 땅속에 묻혀 있던 철불을 발견했다. 장병들이 불상을 끌어올리려고 했으나 불상은 꿈쩍도 하지 않자 장군이 불상의 얼굴을 정갈하게 씻은 뒤 자신의 군복을 벗어 입혔더니 비로소 불상이 땅 위로 올라왔다고 한다. 절이 전소되면 땅속에 묻혔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이 장군의 현몽(現夢)으로 다시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장군은 그 절터에 도피안사를 재건하고 불상을 다시 모셨다. 당시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어서 군에서 관리해오던 도피안사는 1985년에 민간인 관리로 이관되었다.
국보인 철조비로자나좌불상은 장흥 보림사 철불(국보)과 함께 9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철불이다. 신라 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신라 하대는 경주에서의 왕위쟁탈전으로 왕권이 약해지면서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난 지방 호족들은 선종(禪宗)과 결합하게 된다. 선종의 주요 이념인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스스로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인데 이는 호족들 역시 실력과 힘을 쌓으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딱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그 결과 지방의 호족들은 선종에서 예배 대상으로 삼은 비로자나불을 많이 조성하였고 당연히 불상의 모습도 경주의 중앙 양식을 답습하지 않고 보다 현실적이고 보다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 재료 또한 비싼 구리를 사용하기보다는 지방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철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사회상을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은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불상의 등 뒤에는 ’香徒佛銘文幷序(향도불명문병서)’라는 발원문이 주조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불이 열반하신 지 1806년이 지난 신라의 865년에 향도 1500여 명이 금석(金石)과 같은 견고한 뜻을 가지고 신라국 한주(漢州)에 있는 철원군 도피안사에 금용(金容, 황금빛 나는 붓다의 모습)을 주조하여 만들었습니다.
기나긴 시간 속에, 기나긴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통사의 고장 철원에서의 마지막 여행지는 도피안사로 마무리하며 세상의 근심 조금이나마 내려놓는 힐링의 시간을 가져보자.
국보인 철조비로자나좌불상은 장흥 보림사 철불(국보)과 함께 9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철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