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바탕 전주(全州), 세상을 비빈다.

2박 3일형 답사

by 이재은
태조 이성계 어진(국보)

한바탕 전주(全州), 세상을 비빈다. 백제문화탐방


전라북도에는 도읍과 관련된 지역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는 익산과 후백제 견훤이 도읍으로 삼았던 전주이다. 두 지역 모두 도읍으로써의 기능을 한 시기는 길지 않지만 백제국과 관련하여 전라북도 지역이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서해를 통해 당시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국제적 관문이었으며 동시에 우리나라 최대 평야인 호남평야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도읍 선정에서 여러 가지 사항이 고려되겠지만 이러한 외교적 입지와 경제적 메리트를 가지고 있는 전라북도 지역이 수많은 역사의 현장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묶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웅진백제 유산인 공주 공산성·송산리 고분군, 사비백제 유산인 부여 관북리 유적·부소산성·정림사지·나성, 사비백제 두 번째 도읍지인 익산 왕궁리 유적·미륵사지 등 총 8곳의 유적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 여행은 이렇게 마한, 백제, 후백제의 이야기를 간직한 전라북도 익산, 전주, 김제를 가보고자 한다. 서울권에서 내려가면 당일로 다녀오기에는 일정상의 촉박함과 여행의 피로도가 있으니 1박 2일 여행으로 계획해보려 한다. 시간의 여유가 있고 백제땅을 다녀오는 여정이니 올라올 때는 조금 더 여유를 부려 백제 마지막 수도인 부여의 모습도 잠시 보고 오도록 하자.


마한(馬閑) 시대의 익산

마한은 진한(대구와 경북지역), 변한(부산과 경남 지역)과 함께 고조선 이후 삼한 중 하나였으며 한강 유역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까지 분포된 여러 나라를 통칭한다. 모두 54개 소국으로 이루어졌으며 삼한 중 가장 컸으며 그중 익산지역은 건마국(乾馬國)이었는데 마한의 다른 소국이었던 목지국에 마한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목지국은 훗날 백제에 통합되어 마한 전체가 백제가 되었지만 건마국이 있던 익산은 백제의 제30대 왕 무왕이 백제의 부흥을 위해 마지막 왕도로 삼을 정도로 백제 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지역이었다.

중국 양나라 때 기록인 백제 사신들의 행차를 그린 사신도인 양직공도에서는 백제국기를 인용하여 ‘백제는 옛날의 마한족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의 굴레에 있었던 익산시는 예전에는 우리에게 이리시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1995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인해 익산군과 이리시의 도농통합으로 익산시로 통합되었다. 그래서 현재 KTX가 정차하는 익산역도 예전에는 이리역으로 불렸다.

현재의 익산시 홈페이지에는 익산의 브랜드를 『위대하고 경이로운 도시 – 어메이징 익산』으로 표방하고 있다. 고도(古都=옛 도읍)의 고장 익산 사람들의 자부심과 애향심이 가득 느껴지는 브랜드 슬로건이다.


미륵사지 석탑과 서동요 설화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익산 미륵사는 무왕(武王, 600-641) 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는 세 개의 탑과 금당 등으로 구성된 3탑 3금당의 독특한 배치 형식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던 무너진 미륵사지 석탑은 세 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이고 현재는 복원이 완료되어 동탑과 서탑을 모두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 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또한 목탑에서 석탑으로서의 변화되는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 연구에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탑이라고 할 수 있다.

미륵사 창건과 관련된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인 서동요 설화는 다음과 같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미가 과부가 되어 경주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해 그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평상시에 마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고 고운 것이 짝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경주로 가서 마를 마을의 여러 아이들에게 먹이니, 여러 아이들이 그를 친하게 따랐다. 곧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아래 서동요이다.


“선화 공주님은 아무도 모르게 시집을 가서 맛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잔대요.”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궁중에 이르자 신하들이 청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했다. 공주가 떠나려 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소에 이를 무렵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을 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 따라온 사람을 알지 못했으나 뜻하지 않게 그를 믿고 좋아했다. 그 뒤 서동의 이름을 알고서 동요를 믿게 되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왕후가 준 금을 내다 팔아 생활을 꾸리고자 했다. 서동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입니까?”

“이것이 바로 황금입니다. 한평생의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땅에 이것이 진흙처럼 흩어져 쌓여 있습니다.”

공주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했다.

“이것은 바로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서방님께서 지금 금이 있는 곳은 아신다면, 이 보배를 부모님이 계신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습니다.”

이에 금을 채취해서 쌓으니 구릉과 같았다.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계신 곳에 이르러 황금을 수송할 계책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저는 신력으로 수송할 수 있으니 황금을 가져오십시오.”

공주는 편지를 써서 황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두었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황금과 편지를 하룻밤에 신라 궁중에 옮겨 두었다. 진평왕은 그 신변(神變)을 이상하게 여기고, 서동을 더욱 존경하여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과 부인이 사자사에 행차했는데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이르렀다. 그러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출현하였는데 수레를 멈추고 예의를 갖추었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 땅에 대가람(큰 사찰)을 짓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허락하고는, 지명 법사가 있는 곳에 이르러 못을 메울 일을 물었다. 그러자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허물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곧 미륵삼존 불상과 전과 탑, 행랑을 각 세 곳에다 만들고,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진평왕은 여러 공인을 보내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던 서동요 설화이다. 고려시대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무왕(武王) 조에 기록되어 있는 설화이다. 즉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믿음은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중 금제 사리봉안기가 발견됨에 따라 삼국유사 기록의 사실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금제 사리봉안기의 기록에 따르면 무왕의 왕비는 사택 왕후이며 또한 그녀가 미륵사를 창건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제 사리봉안기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학계 일각에서는 당대 왕들은 일반적으로 2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삼국유사의 기록의 사실 여부에 대한 섣부른 결론을 지양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여기서 사택 왕후의 '사택'은 백제 귀족의 성씨를 말한다.


보물 1845호인 사택지적비는 백제 의자왕 때 고위직을 역임한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말년에 늙어 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불당과 탑을 건립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이 사택지적비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 올라가면서 부여에서 둘러보고 갈 예정이다.


어쨌든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석탑의 시원 형식(始原形式)이며 한국 석탑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찬란했던 백제 문화의 꽃을 피웠던 미륵사는 조선시대 폐사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그 후 1915년 일제강점기 탑의 일시 붕괴를 막기 위해 일제가 시멘트로 보수한 부분이 미관상 좋지 않고 향후 추가 붕괴 우려가 있어서 국가문화재위원회가 1999년 4월 해체 및 보수 정비를 결정하였다.


전라북도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 정비 준비를 시작으로 석탑 해체를 위한 가설덧집 공사 등의 공정을 완료하였고, 2001년 10월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본격적인 해체·보수 정비를 시작하였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보수 정비 사업은 당초 2007년에 완료할 계획이었으나 국보임을 감안하여 신중하게 해체하고 창건 당시 건축 기술을 조사하기 위한 학술 연구를 병행하면서 작업 일정이 늦어져 완료일이 2014년까지로 연장되었다가 2017년 말까지로 다시 미루어졌다.


2017년 12월 원래 남아 있던 6층까지의 수리가 이루어졌고, 2018년 6월 수리를 완료해 7월 중순까지 임시 개방했다. 최종 개방은 주변 정비 후 2019년 4월에 이루어졌다.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보수 개방까지는 장장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예전에 어렸을 때 미륵사지 석탑을 봤을 때는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는 모습에 ‘이건 왜 무너졌지?’ 생각하며 무심코 지나쳐 왔는데, 어른이 되어서 붕괴되어 있는 미륵사지 석탑을 보았을 때는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듯한 아픔과 안타까움이 사무쳤다. 그러나 현재 복원이 완료된 미륵사지에 가보았을 때 깔끔하게 정돈된 미륵사지와 미륵사지 석탑을 바라보았을 때 화려하고 웅장했던 사비 백제 문화와 백제인의 기상이 느껴졌다. 그때 미륵사지 석탑 앞에서 느꼈던 감동과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지금도 심장을 뛰게 한다.


미륵사지 석탑 관람의 포인트는 정문으로 입장하여 들어가다 보면 양 옆에 연지(연못)가 있고 좀 더 가면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는데 바로 연지와 당간지주 중간지점에서 바라보는 시점이다. 당간지주를 통해 바라본 시점에는 미륵사지 동, 서탑이 양쪽에 우뚝 당당하고 위엄 있게 서 있는 모습이 보이며 탑과 탑 사이 가운데에는 미륵산의 모습이 마치 배경인 양 포근하게 받쳐주고 있는 장면이다.

3. 누구의 왕궁이었나요? 왕궁리 유적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위치한 옛날 왕궁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미륵사에서는 차량으로 약 10분 거리에 있으며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백제시대에 궁궐로 사용되었으나 후대에 사찰로 용도가 바뀌었다가 다시 세월이 지나 사찰도 폐사되고 폐허로 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직 발굴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여러 가지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곳이지만, 근처의 미륵사와 제석사지, 익산토성, 미륵산성, 낭산산성, 천호산성, 금마도토성, 쌍릉 등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봐서 백제 무왕의 왕궁이었다는 견해가 유력한 상태다.


현재는 국보 제 289호인 왕궁리 5층 석탑만이 당당하게 우뚝 서 있고 이 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국보 제 123호로 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왕궁리 유적은 광활한 땅에 거대한 석탑이 혼자 떡하니 서 있어 예로부터 뭔가 범상치 찮은 장소로 여겨졌다. 과연 이 신비한 곳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가장 먼저 나온 의견은 고조선의 준왕이 중국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남쪽으로 피신해 세운 도읍이라는 가설로 관련 유적으로는 준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미륵산성이 제시되었다.

두 번째로 나온 의견은 백제의 무왕이 천도 혹은 별도를 목적으로 왕궁을 조성했다는 가설로 관련 유적으로는 미륵사지와 쌍릉(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알려져 있음) 등이 제시되었다.


세 번째는 의견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인 안승이 건국한 보덕국의 도읍이었다는 가설로 관련 유적으로는 익산토성(보덕성이라고도 불림)이 제시되었다.


네 번째는 의견은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는 가설로 관련 유적은 딱히 제시되지 않았다.


발굴 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궁궐이 있었던 것으로 결론이 나왔으며 이에 무왕의 수도였을 확률이 커졌다. 더하여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무왕에 의해 세워진 유적이 맞다면 이는 왕권강화나 신라와의 전쟁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왕권강화가 목적이라는 설은 정황상 권력구도에서 멀었던 무왕이 웅진-사비의 유력 귀족 가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지지 기반을 새로이 다지기 위해 금마저로 천도하려 했다는 설이고 신라와의 전쟁을 위한 것이라고 보는 설은 신라와의 전쟁을 자주 벌였던 무왕이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전투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 금마저에 별궁을 짓고 정무를 보았다는 설이다.


우리는 너무나 궁금하지만 왕궁리 유적들은 어리석은 우리를 보며 수많은 과거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자연스레 겸허해지고 숙연해진다. 넓은 대지에 파란 하늘과 푸른 잔디를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왕궁리 5층 석탑을 볼 때 가장 아름다운 포인트는 탑의 대각선에서 서서 하늘을 배경으로 탑이 정중앙에 오게 하는 구조이다. 그 구조가 가장 아름답고 탑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사진도 가장 예쁘게 나오는 구도이다. 탑을 관람하고 사진을 찍을 때는 꼭 대각선에서 찍어보도록 하자. 물론 앞모습, 뒷모습도 찍고.

왕궁리 5층 석탑은 왕궁리 유적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는 것처럼 탑의 완성과 관련된 다양한 전설 역시 전해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굴복시키지 못하자 급기야 도선대사를 불러 그 대책을 물었다. 그러자 도선대사는 왕건에게 "완산(전주)의 지세가 개가 웅크린 형상이므로 그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탑을 쌓으면 꼬리가 눌려 일어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건이 꼬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탑을 쌓았는데 그곳이 바로 왕궁리탑이다. 탑이 완성되자 완산(전주)이 사흘 동안 깜깜해졌고 이후 견훤이 몰락했다고 전해진다.


남매를 둔 노파가 있었는데 어느 날 노파에게 관상쟁이가 찾아와 "자식 둘 중 하나를 내보내지 않으면 불길해진다." 일러주었다. 노파는 남매 가운데 가장 먼저 탑을 쌓는 자식을 거두고 늦게 쌓은 자식을 내치기로 했는데, 딸에게는 일부러 크고 섬세하게 아들에게는 작고 투박하게 탑을 쌓게 했다. 그런데 딸이 밤낮없이 열심히 탑을 쌓았던 반면 아들은 설렁설렁 게으름을 피우며 느긋하게 탑을 쌓는 바람에 결국 남매가 동시에 탑을 완성했다. 노파는 하는 수 없이 둘 다 거두었는데 이때 딸이 쌓은 탑이 미륵사지 석탑이고 아들이 쌓은 탑이 왕궁탑이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왕궁리 5층 석탑의 해제와 보수과정에서도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왕궁리 석탑이 기울고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에서는 왕궁탑을 해체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1965년 해체 작업에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옥개석 이음새로 사용된 꺾쇠에서 '천석(千石)'이라는 문자가 발견되었다. 아마 왕궁탑을 처음 쌓을 때 참여한 일꾼이 제 이름을 새겨둔 걸로 추정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왕궁탑의 해체 복원을 총감독하는 분의 성함이 김천석(金千石)님이었다고 한다.


공사를 감독하던 김천석님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의사들이 아무리 진단해도 병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현장에서 탑 상층부를 해체하면서 감춰진 유물들이 출토되자 병세가 호전되었고 며칠 후 퇴원하여 현장에 복귀했다고 한다.


4. 탑의 구조를 알면 문화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탑을 볼 때 몇 층인지 보려면 탑의 구조를 알아야 하는데 탑은 크게 아래부터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된다. 그중에서 탑신부가 탑의 층수를 결정한다. 탑신석의 개수가 층 수를 결정하는데 난해하다면 지붕모양의 옥개석을 보고 구분하면 된다. 탑의 층은 기본적으로 홀수이다. 홀수는 양의 수이며 하늘의 수이고, 짝수는 음의 수이고 땅의 수로 여겨지는 음양사상의 영향이다. 대체로 백제 석탑은 5층, 신라 석탑은 3층으로 시대와 지역별 유행이 있으며 경주의 정혜사지 13층 석탑이나 다보탑 같은 탑을 이형탑이라고 하는데 이 탑들도 구조적으로 따져보면 역시 홀수이다.

5. 조선의 3대 도시 전주


조선시대 전주는 호남 제일의 곡창지대 중심으로 물산이 풍요롭기가 한양을 방불케 하였다. 전주가 호(戶) 수로는 한양, 평양에 이어 3번째이고, 인구수는 한양, 평양, 의주, 충주에 이어 5번째였다. 전주부(全州府)는 1403년부터 1949년까지 전주시로 개칭되기까지 사용된 전주의 옛 행정구역이다. 과거 전주는 조선시대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했던 전라도 감영(지금의 도청)이 있던 곳으로, 한양과 평양에 이어 조선 시대 3대 도시로 정치·경제·문화적 중심도시였다.


또한 전주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조선의 풍패지향(豊沛之鄕)이었다. 풍패란 건국자의 본향을 일컫는 말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이 풍패인데서 비롯되었다. 전주 이 씨의 시조는 통일신라 문성왕 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며 그 부인 경주 김 씨는 태종 무열왕의 11대손으로 군윤(軍尹, 향직)을 역임한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 태조 이성계는 시조 이한의 21대손이다. 우리는 전주를 답사하고 다녀갔으니 이제부터는 전주하면 풍패지향의 고장이라고 아는 척, 다녀온 척을 하는 것도 좋겠다.


풍패지관은 전주 객사의 다른 이름인데 여기서 객사란 보통 고려, 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여 외국 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숙소를 말한다. 그런데 이 풍패지관이란 명칭은 조선 초 전주부성을 창건할 때 같이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뒤 성종 3년(1473)에 전주부윤(副尹) 조근(趙瑾)이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창설할 때 남은 재력으로 객사를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라감영의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닌 보물로, 주관 정면에는 풍패지관이라는 유려한 초서체의 대형 현판이 걸려 있다. 명나라 재상 주지번의 글씨로 전해지는데 전주가 바로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높임과 자부심이 담겨 있다.


객사는 기능상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가 주재하는 곳이면 거의 빠짐없이 지어졌으므로 전국적으로 상당수에 달했을 것이나 현재 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객사로는 부산의 다대포, 전북의 흥덕·순창, 경북 안동의 선성현, 경남의 장목진 객사 등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것으로는 전주 객사(보물)와 여수 진남관(보물)이 있다. 객사의 부속 건물로서는 강릉 객사의 정문이던 강릉 객사문(국보), 밀양 객사에 딸린 누각이었던 영남루(보물) 정도가 두루 알려진 것이다.

요즘에는 전주하면 한옥마을, 경기전 등을 먼저 떠올리지만 수십 년간 전주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는 풍패지관이었다. 풍패지관으로 들어가서 잠시나마 여행하는 나그네의 마음을 달래보는 것도 풍패지향을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6. 전주와 태조(太祖) 이성계


전주 이 씨의 시조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통일신라 때 사공이라는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며, 중시조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이다. 태조 이성계에 비해 이한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시조 이한 이후 18세손 목조 이안사(태조의 고조부)가 전주를 떠날 때까지 후손들은 대대로 신라에 벼슬을 하면서 전주에 터를 닦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시조*인 태조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전주 이 씨는 어떻게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영흥으로 가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중시조 : 족보나 성씨의 본관을 말할 때, 시조의 후손으로서 가문을 일으킨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며 중조(中祖)라고도 한다.


전주에 터전을 잡고 살던 시조 이한의 후손들은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에 이르러 큰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전주 이 씨의 터전인 이곳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전주의 호족으로 성격이 호방하고 용기와 지략이 뛰어난 이안사는 새로 부임해 온 지주사의 탐욕과 포악함을 규탄하다 지주사*의 눈 밖에 나게 된다. 그는 지주사의 보복을 피해 가솔들을 포함한 170여 호나 되는 상당한 세력을 이끌고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를 한다. 그러나 그 지주사가 안렴사(각 도의 으뜸 벼슬)가 되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북쪽으로 지금의 원산 지역인 함경도 덕원으로 옮겨 갑니다. 이때는 원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근 100년간 지배하게 되는 쌍성총관부가 영흥에 설치될 무렵입니다.


*지주사 : 고려 시대 지방 행정 구역인 주(州)의 으뜸 벼슬


여기서 태조 이성계는 역사의 전면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를 잘했던 이성계는 부친인 환조 이자춘을 도와 고려의 쌍성총관부 탈환에 절대적 기여를 함으로써 이른바 불패 신화의 서막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성계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고 조선을 건국한 임금이 된다. 꿈은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대화로 구성하였다.


이성계는 이상한 꿈을 꾸고 설봉산 도인 스님을 찾아갔다.

토굴에 당도하니 스님은 선정에 들어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스님께 삼배를 올린 이성계는 찾아온 사연을 밝혔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요? 거 어디 들어봅시다."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는데 온 고을 닭들이 일제히 울어대더니 집집마다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꽃이 마치 비 오듯 떨어져 내렸습니다. 다시 또 꿈은 이어져 저는 어느 집 헛간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다가 거울 깨지는 소리에 문득 꿈을 깨게 됐습니다. 무슨 불길한 징조는 아닌지요?"

"참으로 그런 꿈을 꾸었다면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될 꿈입니다.'

스님은 은밀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그 꿈은 아주 길몽입니다. 마을의 닭들이 일제히 울어댄 것은 꼬끼오 꼬끼오한 것이니 이는 반드시 고귀한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며 방아 찧는 소리는 귀하게 될 것을 축하하는 의미입니다. 또 헌 곳간에서 서까래 세 개를 가로로 짊어졌으니 그 모양은 마치 임금 왕 자와 같지 않습니까."

스님의 말을 들은 이성계는 흥분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새 상기된 얼굴에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스님, 그럼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진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스님은 말없이 시 한 수를 적어 내놓았다.

花落能成實 鏡破豈無聲

꽃이 떨어졌으니 열매가 맺힐 것이요,

거울이 깨졌으니 소리가 나지 않겠는가.

스님은 다시 이성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대 얼굴엔 군왕의 기상이 가득하오. 허나 아직은 때가 아니오. 성현에게 기도를 올리고 공덕을 지어야 일이 성취될 것이오. 앞으로 3년은 더 기다려야 하니 그동안 이곳에 절을 세우고 오백 나한을 모셔 기도를 잘 올리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일은 나만 알고 비밀을 지킬 터이니 장군도 꿈 이야기를 입 밖에 절대 내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오."

※ 나라를 창업하면 창업주의 4대조까지는 왕으로 추존하는 관습이 있어 조선 태조(太祖)의 고조인 목조(穆祖)로부터 증조는 익조(翼祖), 조부는 도조(度祖), 부는 환조(桓祖)로 추존하고 있다. 여기에 태조(太祖)태종(太宗)까지 더하여 용비어천가에서는 육룡(六龍)이라고 높여 부르고 있다.


※ 고려 후기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고려를 지배한 후 내정 간섭을 위해 쌍성총관부(함경도), 동녕부(평안도), 탐라총관부(제주도)를 설치하였다. 오늘날 제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돌하르방은 몽골의 훈촐로라는 석상과 비슷하며 하르방의 어원은 몽골어 하라(망보다, 파수보다)와 바라칸(신, 왕)의 합성어이다. 당시 고려를 지배하려 했던 원나라의 막대한 영향력을 알 수 있다.

7. 불편한 동거, 경기전과 전동성당, 핫플레이스


전주 여행의 핫플레이스인 한옥마을에서 시간 여유를 두고 먹거리, 볼거리, 살거리 등을 마음껏 즐겼으면 경기전으로 향해보자. 완산구 풍남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각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신 사당이다. 어진이란 임금의 초상화로 태조 어진은 이성계의 얼굴을 그려놓은 초상화이다.


태종 10년(1401년) 전주, 평양, 경주, 개성, 영흥에 태조의 어진을 모시는 '어용전(御容殿)'을 세웠으며 세종 24년(1442년)에는 그 소재지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불렀다. 경기전의 경기는 태조 전주 이 씨의 발상지이므로 '경사스러움(慶)이 터 잡은(基) 곳'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경기전을 제외한 4곳은 모두 불탔고 정유재란 때 경기전마저 소실되었다. 그 후 광해군 때 경기전만 복원되었다.


태조 어진은 임진왜란 때는 묘향산,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 정유재란 때는 서울 명륜당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때는 위봉산성으로 옮기어 보존할 수 있었다.


현재 경기전에 있는 어진은 모사본이며 원본(고종 9년)은 어진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원본은 11월 중에 약 3~4주간 전시된다고 한다. 이 태조 어진은 국보제 318호이고 영정을 실제로 모시고 있는 정전 건물은 보물 제 1578호이며 경기전 전체 권역은 사적 339호로 지정되었다.

경기전 입구에 하마비가 있는데 하마비는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경고를 주는 비이다. 주로 궁궐의 정문 밖이나 종묘 입구에 세웠으며 성균관을 비롯한 지방의 문묘(공자를 모시는 사당) 밖 홍살문에도 하마비를 세웠다. 왕이나 장군, 고관,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놓기도 하였는데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 이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자 예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하마비가 세워진 것을 보면 경기전이 어떤 장소였는지 입구에서부터 알 수 있다.


경기전 바로 건너편에는 천주교 전동성당이 있다. 조선왕조의 갖은 탄압을 뚫고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신앙을 싹 틔운 한국 가톨릭의 오래된 교회와 바로 그 유교 이념으로 500년을 버틴 왕조의 상징인 경기전이 얼굴을 바로 맞대고 있는 곳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다. 우뚝 서 있는 두 건물의 이질감은 그 외적 형상뿐만 아니라 그 내용까지 알게 되면 더 불편한 동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재의 경기전과 전동성당은 한옥마을과 함께 전주여행의 상징이자 필수코스이며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사랑하고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이다.

경기전 관람은 들어가서 경기전 정전부터 시작한다. 정전의 뜰 양옆에는 큰 통이 여러 개 있는데 바로 '드므'이다. 궁궐 정전과 같이 중요한 건물 네 모서리에 방화수를 담아 놓는 그릇을 말하며 이 드므는 청동이나 돌로 만드는데 모양은 원형과 방형이 있고 솥 모양으로 만든 것도 있다. 목조건축은 불에 약하기 때문에 화마를 막기 위해 상징적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화마는 너무 험상궂게 생겨서 불내러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어느 문화재 관광단지에 갔을 때 이 드므 옆에 경고문을 붙여 놓았는데, "휴지통이 아니에요, 휴지 버리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었는데 (실제로 많은 장소에서 드므 위에 유리뚜껑을 덮어놓았다) 모르면 그럴 수도 있으나 우리는 이제 알았으니까 알려주고 아끼도록 하자. 아는 만큼 아낄 수 있다.

경기전 관람의 방향은 순서는 경기전 정전을 먼저 보고 반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정전을 나와서 왼쪽으로 나있는 문을 통과하여 나오게 되면 전주사고(全州史庫)를 만날 수 있다.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인데 잠시 조선왕조실록과 보관장소인 사고에 대해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8. 조선의 보물창고, 사고(史庫)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에 걸쳐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국보 제 151호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이다. 고종과 순종의 실록도 편찬되었으나 당시는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일제가 정략적 의도로 왜곡한 부분이 있어서 문화재청에서는 별도로 취급한다. 이러한 이유로 국보 지정과 세계기록유산에서도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제외되어 있다.


고려 때부터 역대 왕들의 실록을 편찬하여 사고(史庫)라 불리는 수장 공간에 보관하였다. 이는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고 실록을 후대까지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전국에 외사고(外史庫)를 설치하였다. 세종실록에 보면,


"여러 본을 만들어 각도 명산에 나누어 간직하고 해마다 돌려가며 바람을 씌어 불우의 사태에 대비하소서"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고려 실록이 편찬되었으나 외적의 침입과 이자겸의 난 같은 사건으로 인해 궁궐 안에 설치한 사관이 화재로 소실되는 참화가 되풀이되자 지방에도 별도의 사고를 설치하여 중요서적의 보존을 만전을 기했다. 마찬가지로 조선 전기에도 한양의 춘추관 이외에 전주, 충주, 성주에 사고를 두어 실록을 분산하여 보관하였다. 춘추관을 '내사고'라 했고 지방에 있는 사고를 '외사고'라고 하여 4대 사고 체제를 갖춘 것이다. 접근하기 쉬운 지방의 중심지에 외사 고를 설치함으로써 서적 이용과 관리의 효율성을 높였다.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청하옵건대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지어서 전적을 간직하게 하고서" 임금께서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권 86, 세종 21년 7월 3일)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주사고를 제외한 세 곳(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가 불에 타는 참화를 겪는다. 조선 전기 4대 사고가 당시 일본군의 북상로에 그대로 있어 안타깝게 소실되었다. 전주사고의 실록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참봉 오희길을 비롯한 손홍록과 안의 같은 지방의 선비들이 왜군이 들이닥칠 것을 알고 실록을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후 실록은 선조가 있던 해주로 옮겨졌고 묘향산 등을 거쳐 마침내 강화도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은 사고의 입지선정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불러왔다. 전주 사고본을 제외한 모든 실록이 소실됨에 따라 실록을 보다 안전하게 후대까지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이 논의되었고 관리상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산간지역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하였다. 외적의 접근이 어려운 산간, 도서지방의 오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게 되었다. 왜란 이후 5부의 실록이 다시 갖추어졌다. 경복궁 내 역사기록 창고인 경사고 보관용 1부 외에 4부의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적당한 입지를 찾기 위해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감사에게 각기 도내의 사고 후보지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결과 왜란 때 보존된 전주사고본은 강화도 마니산(후에 정족산성으로 옮김)에 보관되었고 새로 만들어진 3부는 춘추관, 묘향산(후에 적상산으로 옯김), 태백산에 각각 보관되었다. 그리고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교정쇄본은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었다. 이 교정쇄본은 교정하기 전의 일종의 첨삭 자료로써 당시의 교정부호, 교정 방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춘추관 보관본은 조선 인조 때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소실되었고, 나머지 4부는 현재 태백산 보관본은 부산 국가기록원에, 적상산 보관본은 북한 김일성대학에, 정족산 사고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오대산 사고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왕조 실록의 여러 가지 기록을 보면, 기록 기간 25대 472년, 기록 수량 1893권 888책, 기록 일자 172, 000일, 분량은 6천4백만 자이다.


이러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던 곳이 바로 이곳 전주 사고이다.


전주사고를 지나 태실과 그 비를 볼 수 있는데 태실은 왕이나 왕실의 자손이 태어났을 때 그 탯줄을 모셔두는 곳을 말하며 그 형태는 승려의 사리탑과 비슷하다. 경기전 경내에 있는 이 태실은 조선 예종대왕의 태를 묻은 곳으로 옆에 태실비가 함께 놓여 있다. 비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우고, 용무늬를 둔 머릿돌을 얹었다. 비의 앞면에는 “예종대왕태실(睿宗大王胎室)”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비석 뒷면의 기록에는 조선 선조 11년(1578년)에 처음 비를 세운 후 156년이 지난 영조 10년(1734년)에 다시 세웠다고 적혀 있다.


전주사고와 일직선상으로 뒤에는 조경묘가 있다. 조경묘는 전주 이 씨의 시조 이한 부부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조선 영조 47년(1771년) 세워졌다. 철종 5년(1854년) 경기전을 고칠 때 같이 수리하였고 고종 31년(1894년) 위봉사에 잠시 모셨다가 이곳으로 다시 모셨다. 위패는 영조 47년에 왕이 친필로 써서 보낸 것이라고 한다.


조경묘를 지나면 어진박물관을 볼 수 있다. 어진박물관은 태조의 어진과 어진을 모실 때 쓰였던 가마, 용선, 홍개 등의 의식 도구를 전시하고 있다. 지상 1층, 지하 1층의 한옥으로 건축되어있는데 경기전의 전체적인 경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전시실이 주로 지하에 배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지상에는 어진실만 있는데 태조어진 진본(국보 제 317호)을 비롯하여 영조, 철종, 고종, 순종 어진 모사본과 세종과 정조의 표준영정을 모시고 있다. 지하는 상설전시실인 역사실과 가마실,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역사실에는 어진이안통, 용두, 『조선왕조실록』(복제본)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가마실에는 어진을 모시는데 쓰인 신연, 향정자, 채여, 가교 등을 비롯한 가마류가 전시되어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태조를 비롯한 조선왕실 관련 특별전이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반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다 보면 경기전의 부속건물들을 볼 수 있는데 각 부속건물들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수복청 : 제사가 맡은 하급 관원들이 있던 곳으로 주로 행사 준비를 위한 임시 거처

마청 : 경기전의 말과 조정에서 참례하기 위해 내려온 관리의 말을 두는 곳

용실 : 제수용 음식을 만드는 방앗간으로 디딜방아와 절구를 두고 음식을 만든 곳

조과청 : 떡이나 유밀, 다식 등의 제사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던 곳

제기고: 제기, 기물,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이며 습기 방지를 위해 바닥이 지면과 분리되어 있음

어정 : 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 물을 기르는 우물

수문장청 : 경기전을 지키는 수문군들이 업무를 보는 곳

전사청 : 제수준비와 상을 차리는 전사관이 집무하면서 제사 준비를 하는 곳

동재·서재 :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진 집으로 제관들의 제계 의식을 하기 위한 곳


전주_경기전_조경묘_(촬영년도___2015년).jpg 전주 경기전 조경묘


9. 전주비빔밥, 전주 콩나물국밥 이야기


전주에 왔으니 음식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주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음식창의도시이다. 전주를 상징하는 먹거리로는 백반과 한정식, 전주비빔밥, 콩나물국밥 등이 있다. 한식 백반이 가정의 밥상에서 기초하였다면 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은 남문 밖 시장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발생하였다. 남문 밖 시장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전주에 위치하면서 자연스럽게 전라도의 행정과 물산, 유통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남부지방 최고의 시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로 인하여 점포도 많이 생겨나고 전국에서 보부상들과 상인들이 몰려들면서 먹거리 또한 다양해졌으며 특히 전주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이 싹트기 시작했다.


전주가 지금까지도 맛의 고장으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기후, 풍토 등 자연환경과 함께 물과 평야가 잘 어우러져 있어 각 종 자연의 산물이 풍부한 덕분이다. 또한 풍부한 재료와 함께 주로 음식을 담당했던 부녀자들의 빼어난 음식 솜씨를 들지 않을 수 없는데 좋은 재료와 함께 마음을 담은 정성이 음식의 맛에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비빔밥의 유래로는 음복설, 묵은 음식처리설, 궁중음식설, 동학혁명설, 농번기 음식설, 임금 몽진 음식설 등이 있다.


음복이란 제사를 마치고 나면 제사상에 놓은 제물을 빠짐없이 먹는 것을 말하는데 산신제나 동제의 경우 집에서 먼 곳에서 제사를 지내므로 식기를 충분히 가지고 갈 수 없어 결국 제물을 골고루 먹으려면 그릇 하나에 여러 가지 제물을 받아 비벼서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에 근거를 둔 비빔밥의 유래를 음복설이라 한다.


묵은 음식처리설은 섣달 그믐날 새해 새날을 맞기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면서 묵은해의 음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묵은 밥과 묵은 나물을 비벼먹은 것에서 비빔밥이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또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에는 흰 수라, 팥 수라, 오곡 수라, 비빔 등 4가지가 있는데 비빔은 점심때나 종친이 입궐했을 때 가벼운 식사로 이용되었다는 것에 근거한 것이 바로 궁중음식설이다.


동학혁명설은 그릇이 충분하지 않은 동학군들이 그릇 하나에 이것저것을 넣어 비벼먹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농번기 음식설은 하루에 여러 번 음식을 먹어야 하는 농번기에 그때마다 구색을 갖춘 밥상을 준비하기가 어렵고 그릇을 충분히 가져가기도 어려웠으므로 그릇 하나에 여러 가지 음식을 섞어 먹게 되었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임금 몽진 음식설은 고려 때 몽고 침입으로 임금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만한 음식이 없어 밥에 몇 가지나물을 비벼 올렸다는 것에서 유래를 찾고 있다. 이렇듯 비빔밥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비빔밥이 어디에서 언제부터 먹기 시작하였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비빔밥은 지역의 특산물을 주재료로 사용하면서 각 지역별로 향토색을 담은 음식으로 발전되어 왔는데 전주비빔밥의 맛의 비결은 천혜의 지리적 조건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재료, 장맛, 뛰어난 음식 솜씨, 음식에 들이는 깊은 정성이 조화를 이룬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주의 특산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콩나물이다. 전주는 수질이 좋고 기후가 콩나물의 재배에 알맞으며 임실에서 생산되는 쥐눈이콩을 이용하여 아주 오래전부터 질 좋은 콩나물을 생산해 왔으며 그 맛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국 제일이다. 따라서 전주에는 콩나물을 이용한 음식이 발달했고 각색 나물을 사용하는 비빔밥에도 콩나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전주비빔밥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육회이다. 육회는 다른 재료와의 어울림이 좋아 전주비빔밥의 맛을 한층 높이는 역할을 하였으며 전주비빔밥에서 빠져서는 안 될 재료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할리우드 배우 기네스 팰트로우는 다이어트 시 중에서도 한국의 비빔밥을 가장 선호한다고 공개하였으며 미국의 팝스타 마이클 잭슨 또한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음식 중에서 비빔밥이 가장 맛있다"라고 말했다. 갖가지 화려한 고명을 얹은 전주비빔밥은 하나의 예술품과 같은 꽃밥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전주비빔밥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탕반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으로 꼽히는데 그중에서도 전주비빔밥이 으뜸으로 여겨지고 있다.

전주에 가면 또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바로 콩나물 국밥인데 음주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장용 콩나물 국밥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주의 콩나물 국밥이 유명해진 비결은 전주 콩나물에 있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콩나물은 독성이 없고 맛이 달며 오장과 위장에 맺힘을 풀어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백질, 칼슘, 칼륨 등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으며 아미노산의 일종인 아스파라긴산이 함유되어 알코올을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구체적인 조리법은 1910년부터 나타나는데 그 원조는 단연 전주이다. 뚝배기에 밥과 콩나물과 각종 양념을 곁들여 펄펄 끓여내는 콩나물국밥이 전통적인 전주식 콩나물국밥이라면 펄펄 끓이지 않고 밥을 뜨거운 육수에 말아서 내는 방식은 남부시장식 국밥이다.


콩나물국밥집에 가면 꼭 있는 메뉴가 모주(母酒)인데 이 모주는 조선 선조의 왕비였던 인목대비가 광해군 때 폐위되면서 인목대비의 모친이 제주도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빚었던 술이라 해서 처음에 '대비모주'라 부르다가 나중에는 '대비'라는 말을 빼고 '모주'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말의 서울에도 모주집이 있었는데 술지게미에 물을 타서 뜨끈뜨끈하게 끓여낸 모주는 알코올 농도가 매우 낮아 맹물을 겨우 면하는 정도의 것으로 겨울 새벽에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해장 겸 아침으로 먹었던 술이다.

9. 모악산의 미륵 세상, 금산사


금산사(金山寺)는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이다. 대한민국의 국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절인데 바로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이 장남 신검에 의해 강제로 유폐되었던 비운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또한 후백제 시기에는 이곳에 행궁이 들어서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서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 당시 견훤의 금산사 감금 생활 촬영을 이곳에서 실제로 찍었다.

조계종 본사, 말사 구분은 본사는 이미 25개 교구 본사가 정해져 있으며 또한 그 교구본사 주변의 크고 작은 사찰들을 말사로 소속시키고 있다. 조계종의 사찰은 전국에 3천여 사찰에 달하며 이 사찰들은 25개 교구본사로 구분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아래와 같이 25교구 본사가 있다.


서울: 조계사(제1교구) - 총무원장이 직할하는 교구본사

경기: 용주사(제2교구, 봉선사(제25교구)

강원: 신흥사(제3교구), 월정사(제4교구)

충북: 법주사(제5교구)

충남: 마곡사(제6교구), 수덕사(제7교구)

경북: 직지사(제8교구), 은해사(제10교구), 고운사(제16교구), 불국사(제11교구)

대구: 동화사(제9교구)

경남: 해인사(제12교구), 쌍계사(제13교구), 통도사(제15교구),

부산: 범어사(제14교구)

전북: 금산사(제17교구), 선운사(제24교구),

전남: 백양사(제18교구), 화엄사(제19교구), 선암사(제20교구), 송광사(제21교구), 대흥사(제22교구)

제주: 관음사(제23교구)


그래서 보통 절을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이 본사와 말사의 관계를 설명한다.


"무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금산사의 주요 건물로 대표 법당인 미륵전, 대장전, 명부전, 나한전 등이 있으며 정문 역할을 하는 거대한 일주문이 있다. 금산사는 근처의 말사인 귀신사와 함께 대표적인 화엄종 계열의 사찰이다. 따라서 금산사 신앙의 중심은 미륵전도 아니요, 일반적인 사찰처럼 석가모니를 본존불로 하는 대웅전, 대웅보전이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본존불 대신 안치한 적멸보궁도 아닌 화엄경에 등장하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삼는 대적광전이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설명할 때에 큰 고요함(大寂)과 지혜의 큰 빛(光)을 지닌 부처라 가르치는데, 이것은 비로자나불이 석가모니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등 모든 부처의 본체이자 진리의 몸이라는 의미이다. 바로 여기에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종 계열의 사찰들은 모두 신양의 중심 공간인 '대적광전'이 있고 금산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금산사 대적광전은 금산사 경내의 중심 위치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로 미륵전과 대장전이 있다. 기단 앞쪽으로 보물로 지정된 육각 다층석탑과 노주, 석련대 등이 서 있고 멀리 정면에는 보제루를 앞에 두고 있다. 대적광전 역시 보물 제 476호로 지정되었으나 1986년 12월 6일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인해 전소되어 보물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그리고 1990년에 다시 그 모습을 복원하였다. 미륵전의 서쪽에 위치하며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다포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0. 옛 건축물의 형식 (한옥 읽는 법)


여기서 옛 건축물을 볼 때 건축물의 형식을 이해하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먼저 정면과 측면을 볼 때 칸의 수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개수이다. 금산사 대적광전처럼 정면에 기둥이 8개이고 그 사이가 7칸인 경우 '정면 7칸'이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옆면을 보면 기둥이 5개이고 그 사이가 4칸이 되므로 '측면 4칸'이 되는 것이다.


김제_금산사_일원_대적광전_(촬영년도___2015년).jpg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

그리고 지붕을 보면 보통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맞배지붕은 옆에서 보았을 때 V자를 거꾸로 해놓은 모양이며 수덕사의 대웅전이나 무위사의 극락보전에서 볼 수 있는 지붕의 형식이다.


예산_수덕사_대웅전_측면.jpg
강진_무위사_극락보전_측면.jpg
수덕사 대웅전과 무위사 극락보전


우진각 지붕은 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를 짓고 있는 형식으로 정면에서 보면 사다리꼴 모양이고 측면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되어있으며 서울의 흥인지문이나 경복궁 광화문 등 궁궐건축 중 정문이나 문루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서울_흥인지문_2_(촬영년도___2015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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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흥인지문과 경복궁 광화문


팔작지붕은 측면에서 보면 아래는 사다리꼴이 있고 그 위에 삼각형의 지붕이 있는 형식이며 경복궁 경회루나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경복궁_경회루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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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회루와 부석사 무량수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포 형식을 살펴보면 다포형식과 주심포 형식이 있다. 공포란 건물의 지붕을 떠받치는 부분에 나무로 짜올려 지붕 무게를 받게 한 구조를 말한다. 주심포 형식이란 기둥머리 위에만 포가 짜인 형식으로 국보인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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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_무량수전_우측 (1).jpg
예산_수덕사_대웅전_좌측면_전경_(촬영년도___2015년).jpg
주심포 형식이란 기둥머리 위에만 포가 짜여진 형식으로 국보인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이 있다.

다포형식은 기둥머리 위뿐만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포가 짜인 형식으로 봉정사 대웅전,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등이 있다.

안동_봉정사_대웅전_정면_(촬영년도___2015년).jpg
공주_마곡사_대웅보전_올려다_본_모습_(촬영년도___2015년).jpg
다포형식은 기둥머리 위뿐만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포가 짜여진 형식으로 봉정사 대웅전,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등이 있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바라보면 금산사 대적광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에 다포식 팔작지붕을 얹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 옛 건축을 볼 때는 꼭 이렇게 시작을 하면 건축물을 보다 세련되게 이해할 수 있다.

인조 13년(1635)에 지어진 금산사 미륵전은 상당히 특이한 건물로 한국 사찰 중에서는 유일한 3층 법당이다. 내부는 통층이라 위로 올라갈 수는 없다. 복원물이 아닌 한국 고건축물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3층 구조이므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었다. 단순히 3층 중층 건조물일 뿐만 아니라 목탑 구조와 유사한 점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은 목탑은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기 때문에 미륵전은 매우 귀중한 문화재이다. 미륵전의 미륵보살상은 건물 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의 크기라고 한다, 삼존불 중 가운데 미륵불상 높이가 11.82 m, 좌측(법화림보살) 우측(대묘상보살)의 상은 8.8m이다. 미륵전의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그 뜻을 살펴보면 모두 같은데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법당이라는 뜻이다.


김제_금산사_미륵전_우측면_(촬영년도___2015년).jpg 김제 금산사 미륵전


금산사 대장전은 원래 미륵전 뜰 가운데 세운 목조탑으로 불경을 보관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예전의 기능은 없어지고 안에 불상을 모시고 있다. 조선 인조 13년(1635년)에 다시 짓고 1922년에 지금 있는 위치로 옮겼다. 지붕 위에 남아 있는 조각들은 목조탑이었을 때 흔적이며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의 제자상을 모시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 크기이며 다포식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꾸민 우물천장이고 석가모니가 앉아 있는 수미단에는 정교한 장식문을 조각해 놓았다.

김제_금산사_대장전_우측면_(촬영년도___2015년).jpg 김제 금산사 대장전

보제루, 대적광전, 미륵전, 대장전을 본 후에는 미륵전 옆쪽으로 높은 곳에 있는 적멸보궁으로 올라가야 한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에 예배하기 위해 세워진 전각으로 진신사리는 보통 적멸보궁 근처의 탑이나 계단에 모신다. 금산사 적멸보궁 바로 뒤에 있는 금강계단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종 모양의 탑이 있다. 따라서 적멸보궁 안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았고 유리벽을 통해 금강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직접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불전을 지칭하여 적멸보궁이라 하는데 신라 진덕왕 때 자장스님이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받아와 우리나라의 가장 신령한 땅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여 모셨는데 경남 양산 통도사에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모시고 금강계단을 세웠다. 그리고 강원도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강원도 영월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에 각기 사리를 모시고 적멸보궁을 지었다. 이로써 이 장소들을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11. 선남선녀들의 만남 장소


임실 관촌 사선대는 물이 맑고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하늘에서 신선과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으로 임실군에서 손꼽히는 관광명소이다. 사선대에 얽혀 있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마이산의 두 신선과 운수산의 두 신선이 관촌 오원강 기슭에 모여 놀다가 병풍처럼 아름다운 주위의 풍경에 취하여 대에 오르기도 하고 바위 위를 거닐기도 하면서 즐겼다. 어느 날 까마귀 떼가 날아와 함께 어울려 놀고 있을 때 홀연히 네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네 신선을 호위하여 사라졌다. 그 후로 그곳을 선남선녀들이 놀았다 하여 사선대(四仙臺)라 하고 까마귀가 놀던 강이라 하여 오원강(烏院江)이라 불렸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조선 정조 때 관촌면 주천리의 상산 이 씨 이달효는 아호를 호산이라 하고, 문장이 뛰어나 호산집일책을 퍼내기도 하였다. 그는 호남의 명사들과 널리 사귀었고 임실 현감 이도재와도 막연한 사이었다. 이때 이도재 현감은 전주 판관과 남원부사 호산 이달효 등과 같이 넷이서 항상 오원강 위에 배를 띄워 놀았다. 이들 네 분들은 서로 나이가 비슷한 노년기에 이곳에 모일 때에는 언제나 관복을 벗고 평복을 하였으므로 마치 네 사람의 신선과도 같아 어느덧 그들이 놀던 곳을 사선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요즘 멋지고 예쁜 남녀 커플을 보면 흔히 선남선녀(善男善女)라고 부르는데 한자어의 뜻은 다르지만 사선대에서 노닐던 선남선녀가 생각난다.


이 사선대 관광지에서 또 하나의 명소는 사선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운서정(雲棲亭)이다. 운서정은 관촌 소재지는 물론이고 멀리 오원천이 흘러 내려오는 상류의 주변 10리를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이름 그대로 구름이 머물러 가는 곳이다. 오랜 옛날부터 사선대에는 신선들이 내려와 쉬었다 가는 곳이었는데 이곳 운서정에 올라와서 아래를 굽어보면 신선이 내려올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있는 운서정은 조선시대 승정원의 정 3품 당상관인 승지 김양근의 아들 김승희가 부친의 덕망을 기리기 위하여 1923년부터 1928년까지 6년에 걸쳐 지은 정자다. 그냥 정자만 지은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부속 건물들을 함께 지어 운치를 더했다. 이 정자를 짓는데 쌀이 300석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쌀 1석이 두 가마를 말하는 것이니 쌀 600 가마가 들어간 셈이다.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며 어지간한 효자 아니고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답사 기간 중 쉬면서 아이들과 간식이라도 먹으며 잠시나마 사선대의 신선이 되어보도록 하자.


12. 후백제 견훤의 한(恨)


전주와 금산사를 다녀가면서 후백제 왕 견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견훤은 867년 상주의 농부였던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본래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가문을 일으켜 지방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했다.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의 비범함을 나타내는 설화를 하나 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 아자개에게 식사를 날라 주기 위해 포대기에 싸인 어린 견훤을 나무 밑에 놓아두었을 때 지나가던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이다. 아자개가 직접 농사일을 하고 하인 없이 어머니가 직접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는 기록을 통해 견훤 가문이 처음부터 유력한 지방 세력가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견훤은 성장하면서 체격이 남달리 커졌으며 용모도 비범했다고 전해진다. 장성한 견훤은 갑작스레 고향을 떠나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로 올라가 군인이 되었다. 신라의 군인이었던 견훤은 서남해 방면으로 진출하여 전투마다 승리하면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어느 정도 세력을 확대한 견훤은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한 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이르러 900년에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고 왕위에 올랐다. 서쪽을 순행하던 견훤이 완산주에 이르자 완산주의 백성들이 몰려나와 견훤을 크게 환영했다. 마침내 자신이 인근 지역의 민심을 장악했음을 알게 된 견훤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00여 년이 되었는데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을 싣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의 김유신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을 거쳐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


이때부터 고려에 멸망당한 936년까지 37년간 전주는 후백제의 왕도가 되었다.


견훤의 이런 주장은 옛 백제 지역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겠지만 그가 가는 고을마다 환영을 받았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백성들은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견훤의 군대가 인심을 얻는데 성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운 후백제는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성을 빼앗았으며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신라를 도와주러 온 왕건의 군대마저 격파하여 왕건이 겨우 목숨만 구해 돌아가도록 하는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렇듯 초기에 주도권을 장악하던 견훤은 왜 왕건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게 되었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의 아들이 열 명이 넘는데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아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를 알아챈 형 신검이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둔 후 왕이 되었다. 아들에게 쫓겨나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3개월 만에 탈출하여 적국이었던 고려로 가서 반역한 아들 신검의 목을 베어달라고 부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후백제는 내부 권력 다툼으로 약화되어 견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려에게 멸망하였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후백제의 영웅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니 고려에서 쓸쓸한 임종을 맞게 된다. 임종의 순간에도 완산주(전주)가 그립다고 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논산 연무읍에 그의 유언에 따라 완산주를 향해 묻었다고 한다. 실제로 하늘이 맑은 날에는 멀리 전주의 모악산이 보인다고 하니 견훤은 죽어서도 완산주를 바라보며 지나간 날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자신의 고향도 아닌 도읍으로 경영했던 곳도 아닌 여기 논산 땅에 쓸쓸히 묻혀있다. 이처럼 역사에서는 아무리 화해를 해서 사이가 좋아져도 승자와 패자에 대한 대우는 냉혹하리만큼 철저하다.


13. 천도(遷都), 그 수많은 사연


천도란 국가의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한 국가에 있어서 수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그만큼 나라의 중대사이다.

백제의 처음 수도는 한성이었다. 현재 서울시 송파구 부근인데 그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책 『백제의 시작 위례성』 편에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한성 부근은 삼국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각축을 벌일 때 가장 먼저 차지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렇게 중요한 한성 부근을 놔두고 백제는 왜 천도를 해야 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 때문이다.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이 이끄는 3만의 고구려군이 한성을 불시에 공격하고 함락시키고 백제의 개로왕을 살해하였으며 백제 주민 8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후대 왕인 문주왕이 신라 지원병 1만 명을 데리고 도착했을 때는 고구려군이 이미 철수한 뒤였고 왕성 또한 파괴된 상태였다. 신라 원병 1만 명을 이끌고 돌아온 문주왕은 개로왕의 사망으로 인해 왕위가 비었기 때문에 일단 폐허 상태에 있는 한성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폐허 상태의 한성에서 국가를 유지해 나가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천도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장소는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결정되었다. 훗날 백제 24대 동성왕이 즉위하여 왕권 강화 정책을 실시하는데 신라 왕실의 딸과 혼인하여 동맹의 관계를 맺는다. 뒤를 이은 무령왕 역시 왕권강화 정책을 이어가는데 특히 지방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을 22 담로로 나누고 담로에는 왕족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한다. 무령왕은 국력의 신장을 꾀하여 전쟁과 외교에 모두 능한 왕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농업기반도 강화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킴으로써 백제는 다시 한번 전성기를 꽃피우게 된다.


이때까지의 수도였던 공주의 웅진성은 원래 토성으로 지어졌는데 먼 훗날 조선 시대 때 석성으로 바뀌게 된다. 도성 앞에는 금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버티고 있어 농사짓기도 편리하고 적군이 쳐들어올 때 수비하기 편리한 아주 좋은 조건의 성이다. 그러나 공주의 지형 자체가 그리 넓지는 않아서 큰 도읍으로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게다가 웅진성 앞 금강으로 바다가 연결되지 않아서 무역을 하기에는 영 불편했다.

이에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웅진백제 63년 시대를 접고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또한 그는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으며 잃어버린 옛 영토를 찾기 위해 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공격한다. 백제와 신라는 함께 한강유역을 점령하지만 553년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백제의 영토를 다시 빼앗게 된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으로 달려가다 매복한 신라군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후 백제는 의자왕 때에 와서 내부 분열과 신라의 김춘추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사비에서의 도읍 기간은 122년이다. 한강 유역과 금강 유역 등 남한의 주요 지방을 돌며 700여 년간의 역사를 가진 백제이다.

13. 화려했던 사비시대의 기억, 정림사지(定林寺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이 말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기사에 나오는 말로 백제 문화를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해주는 말이다. 이 말은 후에 조선 초기 정도전이 한양도성을 지을 때도 그대로 인용해서 조선의 선비문화를 대표하는 사자성어가 되었다.


정림사지 주차장에서 내려 입구로 가다 보면 신기한 백제문화를 볼 수 있는데 사비 백제의 상징과도 같은 곳에 있는 학교의 이름이 바로 백제초등학교이다. 1960년 개교한 공립초등학교인데 국보와 보물이 있는 정림사지 바로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의 자부심이 대단할 것이다. 또한 주변의 도로명만 봐도 성왕로, 계백로, 사비로 등 백제시대를 연상할 수 있는 이름들이다.

정림사지에 들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보도록 하자.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 함께 백제 석탑 출발점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아무 조명을 못 받았는데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정림사지임이 밝혀졌다. 당시의 사진으로 미루어 정림사지는 일본 군대의 대규모 행사나 아이들의 놀이터, 우시장 등이 열리는 곳이었다. 1962년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이 사지에 대한 전면 발굴이 이루어져서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

정림사지의 백미는 단연 정림사지 5층 석탑과 석조여래좌상이다. 이 탑과 불상을 통해 우리는 백제문화의 검이불루 화이불치 정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정말 검소한 듯 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정림사지 5층 탑이 유명한 까닭은 또 하나가 있는데 바로 탑의 별칭 때문이다. 탑의 초층탑신에는 660년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멸망)한 공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어서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 선생은 소정방이 새긴 이 비문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심정을 읊었다.

"벌레먹은 잎처럼 흐릿한 글자획

새 쪼은 나무마냥 어지러운데

이따금 이어진 네댓 글자는

문장 조리 훌륭하구나

승리는 한때의 기쁨이며

패배 역시 한때의 치욕일 다름일터

지금 탑은 들밭 한가운데 놓여

나무꾼 소몰이꾼들의 놀이터가 되었구나..."


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탑의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단부에 있는 지대석의 크기이다. 지대석의 크기에 의해 모든 탑은 높이와 너비가 결정된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그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단위 ‘고려 척’)이며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 기본 단위가 되었다. 이러한 점이 바로 정림사지 5층 석탑이 가진 절제미와 균형미를 이루어낸 것이다.

부여_정림사지_오층석탑_정면_(촬영년도___2015년).jpg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그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단위 ‘고려 척’)이며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 기본 단위가 되었다.

5층 석탑과 함께 정림사지를 지키고 있는 또 하나의 유물이 있는데 바로 보물 제 108호인 석조여래좌상이다. 불상의 상체 부분을 보면 손 모양이 지권인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해 비로자나불을 모신 것을 알 수 있다. 정림사가 고려시대 중창불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 불상은 백제시대가 아닌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인해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기법은 알아보기는 어려우며 불상을 아래에서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의 화려하고 자세한 조각기법을 통해 훼손 전의 모습을 잠시나마 상상해 볼 수 있다. 현재는 정림사지 강당 전각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찬란했던 정림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면 석조여래좌상은 지금 빛나는 것들도 언젠가는 소멸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푸른 잎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고 예쁜 꽃도 언젠가는 진다는 것을...

세월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이곳 정림사지는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다.


부여_정림사지_석조여래좌상.jpg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찬란했던 정림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면 석조여래좌상은 지금 빛나는 것들도 언젠가는 소멸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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