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천년도시를 걷다. 경주(慶州)

2박 3일형 답사, 신라 시대순 답사코스

by 이재은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은 신라 어떤 탑과도 비슷한 점이 없는 독특한 구조의 탑이다.

천년도시를 걷다. 경주(慶州)


경주는 경상북도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이며, 4읍 8면 11동의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기원전 57년 신라의 건국 시기부터 935년 신라의 멸망까지 992년간 신라의 수도였으며, 서라벌(徐羅伐), 금성(金城)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태조 18년(935) 현재의 지명인 ‘경주’로 바뀌었다.

통일신라 시대부터 이미 백만 가까운 인구가 살고 있었으며, 고려 시대에도 삼경(三京)의 하나로서 명성을 유지했으며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난 후 3경에서 제외되었으며 뒤이어 몽골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천년 제국의 도시는 다시 동경(東京)으로 복권되어 고려시대 내내 중요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조선시대 와서도 그 위상은 여전해서 경상도의 ‘경’자가 경주에서 따왔을 정도로 경상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또한 안동과 함께 영남 남인의 구심점이자 대표적인 양반도시였다. 돌이켜보면 신라 멸망 이후에도 그 명성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온 도시이다.


경주를 이야기할 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시의 면적이다. 우리나라의 시 면적 중 가장 첫 번째로 넓은 면적을 가진 도시는 안동시이다. 그리고 2위가 바로 경주시이며, 3위는 상주시이다. 그래서 경상도 역시 도 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시군구 모두 따져서 면적을 비교해보면 홍천군, 인제군, 안동시, 평창군에 이어 경주는 5위이다.


경주 이야기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문화재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별명에 맞게 경주의 문화재는 도시 곳곳에서 천년이 넘도록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다.

경주에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4곳이 있는데 바로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석굴암과 불국사(1995년 지정)이다.


석굴암(石窟庵)은 751년 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774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였다. 이 석굴은 신라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 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불국사(佛國寺)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토,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국사의 건축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좌경루, 다보탑과 석가탑, 무설전 등이 있는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두 번째는,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지정)이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천년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불교 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릉원 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 했던 포석정(鮑石亭)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 유적이 산재해 있다.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鷄林), 신라 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시설인 첨성대(瞻星臺)등이 있다.

대릉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세 번째는,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마을(2010년 지정)이다.


한국의 대표적 씨족마을이면서 양반마을인 하회와 양동은 모두 조선시대(1392~1910)에 양반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었던 한반도 동남부(영남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두 마을은 한국의 대표적인 마을 입지 유형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저온 건조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건물의 형태와 유교 예법에 입각한 가옥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


하회는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동은 양동마을과 그 주변 관련 건축물인 동강서원, 옥산서원, 독락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동마을의 세계문화유산으로써의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양동마을은 한국의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전형 중 하나인 처가입향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양동마을은 전형 중 하나인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이고 우수한 사례이다.


셋째, 양동마을은 생산 영역, 생활영역, 의식 영역으로 구성되는 한국 씨족마을의 전통적인 공간 구성을 기능적이고 경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넷째, 양동마을은 조선시대의 가장 시기가 이르고 뛰어난 살림집, 정사, 정자, 서원 등의 건축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다섯째,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적, 문화적 성과물인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무형의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사례이다.


네 번째는, 한국의 서원 ‘옥산서원’(2019년 지정)이다.


‘한국의 서원’(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건립)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을 담당하던 9개 서원으로 이루어진 유산으로, 한국의 성리학 전통에 대한 탁월한 증거이다.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등 9개 서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의 중부와 남부 여러 지역에 걸쳐 위치한다.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선조 5년(1572) 경주부윤 이제민이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처음 세웠고, 그다음 해 1573년에 선조로부터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회재 이언적은 관직을 그만두고 자신의 종가가 있는 경주 양동마을 옥산의 한 시냇가에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영하고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옥산서원을 세웠다.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서원인 만큼 안동의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의 양대(兩大) 서원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서원 중 하나로 한석봉, 김정희, 이산해 등 당대 명인의 친필 현판이 남아있다.


경주는 위와 같은 세계문화유산 외에도, 국보 34개, 보물 93개, 사적 77개 등 수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도시이다. 그래서 경주를 충분히 다 봤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몇 주, 한 달 이상은 계획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으니 다음과 같이 권역별로 묶어서 답사하는 것을 추천한다.

먼저 첫째는, 경주 시내권이다.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역사유적 대릉원지구, 경주역사유적 월성지구, 경주역사유적 황룡사지구까지 세 곳의 역사유적지구가 있으며, 국립경주박물관, 경주향교, 교동 한옥마을, 경주읍성, 분황사지, 월정교, 황리단길, 동궁과 월지 등 경주의 주요 관광지가 모두 몰려있다.


둘째는, 경주 서북부권이다. 서부권에는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두 영웅의 휴식처인 무열왕릉과 김유신묘가 있고,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이 있으며, 정혜사지 13층 석탑, 화랑의 언덕 등의 유적이 있다.

셋째는, 도시의 남쪽인 남산지구이다. 남산지구에는 나정, 오릉, 삼릉을 비롯하여 포석정, 통일전, 서출지 등이 있으며, 남산 자락을 따라 분포하고 있는, 산 하나를 박물관으로 만들어버린 수많은 불교문화유산을 볼 수 있다.


넷째는, 보문관광단지권이다. 보문호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보문관광단지, 진평왕릉, 경주월드, 경주타워, 동궁원 등 가족 단위의 여행에 적합한 시설 및 숙박시설이 많이 있는 곳이다.


다섯 번째는, 불국사권이다. 세계문화유산인 불국사와 석굴암, 신라역사 과학관, 토함산, 괘릉, 바람의 언덕 등이 있다.


여섯 번째는, 동해권이다. 문무대왕릉과 관련된 이견대, 감은사지, 기림사, 골굴사 등의 문화유적과 전촌 용굴, 양남 주상절리, 송대말 등대, 전촌 솔밭해변, 나정 고운모래 해변 등의 해안관광코스가 있으며, 감포해국길이나 읍천항 벽화마을 같은 옛 추억 가득한 아름다운 골목길도 있다.

2. 서라벌의 꿈, 사로국에서 시작되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3시간 반 정도의 거리이기 때문에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 8시 출발을 기준으로 중간에 중부내륙 고속도로의 괴산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가면 이번 답사의 일정을 밀리지 않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휴게소에서 음료 및 간식을 먹고 다시 내려오면 정오쯤이면 경주 답사 첫 번째 코스인 나정(蘿井)에 도착할 수 있다.


신라가 세워지기 전의 경주 일대는 진한의 땅으로 6명의 촌장들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그중 고허촌장인 소벌도리공이 양산 기슭 우물가에서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곳으로 가보니 빛이 나는 큰 알이 하나 있었다. 알 속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자 하늘에서 보내준 아이라고 생각하여 잘 길렀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박(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다. 박혁거세는 동해안의 한 바닷가에서 훌륭한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여 13세가 되던 해(기원전 57년)에 신라를 건국하게 되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동명왕보다 20년 먼저이고, 백제의 온조왕보다 40년 먼저 나라를 세운 것이다.


나정(蘿井)은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곳이다. 나정이라는 한자의 뜻을 살펴보면 소나무 겨우살이 나(蘿) 자에 우물 정(井) 자인데 그 뜻을 살펴보면, 소나무는 나무의 으뜸인데 거기서 자라는 겨우살이마저도 나무의 맨 꼭대기에서 자란다. 그러니까 뜻을 다시 생각해보면 신라의 시조 박혁세가 탄생한 곳을 최고, 으뜸을 의미하는 소나무, 겨우살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라 왕들의 호칭은 처음부터 왕이 아니라, 혁거세 때는 존귀한 사람을 뜻하는 거서간(혁거세), 유리왕 때는 종교적 지도자를 뜻하는 차차웅(유리), 이사금(연장자, 유리~흘해), 마립간(우두머리, 내물~지증)으로 불러졌다.


삼국의 이야기는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 사실의 역사뿐 아니라, 다양한 설화, 민담, 전설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 보듯이 신화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는데 이는 합리적이고 대쪽 같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에게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역사를 노래한 시에서, 다산(多産)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천 년 전 문헌들 허술하기 그지없어 / 載籍荒疏五千歲

호해 마란 모두가 잘못된 전설이네 / 壺孩馬卵都謬悠


‘호해(壺孩)’는 단지에서 나온 아이로, 가야국의 김수로왕 탄생신화를 말하는 듯하고, ‘마란(馬卵)’은 말 곁의 알이라는 뜻으로, 박혁거세의 탄생신화에 나오는 것이다. 알을 가르니 어린아이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성리학자들의 이치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는 다산의 생각과 많이 달라져 있다. 합리적이라면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면 더 과학적인 오늘날의 우리가 허술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 옛 신화나 전설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러한 것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가치와 우리 자신의 뿌리에 대한 진한 애정과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의 탄생지 나정(蘿井)을 봤으니 이제 박혁거세가 죽어서 묻혀있는 오릉(五陵)으로 이동을 한다. 오릉은 나정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차로 이동하면 약 1분 안에 오릉 앞 넓은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과 왕비 알영(閼英), 제2대 남해차차웅, 제3대 유리이사금, 제5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으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 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 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오릉에서는 숭덕전(崇德殿), 알영정(閼英井), 그리고 5개의 무덤인 오릉 살펴봐야 하는데,

먼저 숭덕전은 박혁거세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진 공간이다. 이 숭덕전은 조선 세종대왕 때 만들어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때 다시 지어졌다. 출입문인 영숭문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그중 가운데 문은 신문(神門), 신이 드나드는 문이라서 일반인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들어갈 때는 오른쪽 동문(東門)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왼쪽의 서문(西門)으로 나오는 것이 관람의 에티켓이다.


그러나 숭덕전의 문은 평소에는 닫혀 있다.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개방을 하지 않고 매년 춘분과 추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개방하고 있다.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영숭문-숙경문-숭덕전> 이 일자형 구조로 되어 있고 여러 가지 제사에 필요한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숭덕전(崇德殿)은 평양에 있는 기자조선의 기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인전(崇仁殿), 고조선 단군과 고구려 동명왕을 모시고 있는 숭령전(崇靈殿)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국전(國殿)이며,


또한 신라 4대 석탈해왕을 모신 숭신전(崇信殿), 미추왕과 문무왕, 경순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혜전(崇惠殿), 백제 시조 온조왕을 모시고 있는 경기도 광주의 숭렬전(崇烈殿), 고려 태조 왕건을 위패를 모시고 있는 경기도 연천 숭의전(崇義殿), 가야 김수로왕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선전(崇善殿)과 더불어 우리나라 8대 전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알영정은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알영정에 용이 나타나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한 할머니가 이 광경을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가 잘 씻겨서 길렀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은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지었으며 아이는 자라면서 빼어난 용모와 훌륭한 덕행을 갖추게 되었다. 박혁거세가 이 소문을 듣고 왕비로 맞아들였고 일영 왕비는 행실이 어질고 왕을 잘 보필을 하였다. 이를 보고 당시 사람들은 왕과 왕비 두 분의 성인(聖人)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알영정에는 1931년에 세워진 비석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文(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문)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이 여기서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오릉으로 이동하면서 신기한 걸 발견할 수 있는데, 소나무들이 모두 예를 갖추어서 절하듯이 고개를 오릉 쪽으로 숙이고 있다. 이것은 마치 신하들이 왕에게 절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소나무의 속성 때문이다. 소나무는 햇볕을 많이 필요로 하는 양수(陽樹)나무라서 해가 잘 드는 왕릉을 향해 자연스럽게 나뭇가지가 향하게 된 것이다.


다섯 개의 능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박혁거세의 능인지, 다른 능들이 누구의 능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나라 박 씨 가문의 성지와 같은 곳이라 여길 발굴조사 하기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무덤을 파헤쳐 열어보는 것 자체가 윤리상 금기사항이기도 하지만, 특히 유교의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에서는 그것이 어떤 정당한 이유이든 간에, 가령 학술적인 이유라도 후손들이 결사반대할 것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왕릉급 신라 고분들은 누가 묻혔는지 명확하지 않았던 황남대총, 천마총 등이지, 특정 왕릉으로 정해진 곳을 발굴한 사례는 거의 없다. 대한민국의 박 씨는 본관을 막론하고 모두가 계보상 박혁거세의 후손이므로, 그냥 문화재 정도 대우만 받는 다른 대부분 신라 왕릉들에 비해 시조가 묻힌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성지로서 중요시한다.

나정(蘿井)은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곳이다.


3. 신라 최고의 명당자리, 황룡사(皇龍寺)

신라는 법흥왕 14년(527)에 불교를 공인하고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창건하였다. 이어서 진흥왕 14년(553) 월성 동편의 습지를 매립하여 신궁(新宮)을 짓던 중 황룡이 나타난 것이 인연이 되어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는데 이를 황룡사(皇龍寺)라 했다고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전한다. 진흥왕 27년(566)에 1차 가람이 완성되었으며, 이후 진흥왕 35년(574) 장육존상(丈六尊像)이 완성되었고, 진평왕 6년(584)에는 금당이, 선덕여왕 13년(645)에는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구층 목탑이 각각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부터 선덕여왕까지 신라 최전성기 약 100년의 시간 동안 만들어진 사찰이다.

이후 고려 고종 25년(1238)에 일어난 몽고군의 침략으로 사찰이 완전히 불타버리기 전까지 약 700년 동안 신라를 대표하는 중심 사찰로 그 법맥을 이어왔다.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호국사찰이며 우리에게는 전근대 시대 최대급이었던 80미터가량의 황룡사 9층 목탑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 목탑은 고려 시대에도 개경의 고려 정치인들의 기행문을 보면 동경(東京)에 가면 꼭 들러보고 높이와 전망에 감탄하는 관광명소였다. 현재는 터만 남아있으며 1963년에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황룡사 구층 목탑 건립 당시 신라의 주변 정세를 살펴보면, 당나라에서는 중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군주인 태종 집권 시기였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막리지에 올라서 강경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며, 백제 역시 의자왕이 즉위하여 신라의 대야성 등 여러 성을 빼앗는 등 신라 국경을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643년의 신라 선덕여왕은 백제 의자왕에게 대야성 등 40여 개의 성을 빼앗겨 왕권이 크게 실추된 상황이었다.


이때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자장 스님이 신라로 돌아와 여왕을 찾아간다. 이 일과 관련된 일화가 『삼국유사』에 실려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자장이 중국에 있는 절 근처에서 연못을 거닐고 있는데, 어떤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나서 자장에게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묻자 자장은 ‘고국인 신라에 주변 나라들이 자꾸 침략을 해와서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신령스러운 존재가 ‘나는 원래 황룡사를 지키는 용이다.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면 9층의 목탑을 세워라. 그러면 한 층에 하나씩 9개의 나라가 조공을 바치고 정복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자장은 신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여왕은 목탑을 세우기로 결정하였지만, 당시 신라에는 9층의 목탑을 세울만한 기술자가 없었다. 그래서 백제의 기술력을 빌리기 위해 의자왕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백제에서는 ‘아비지(阿非知)’라는 기술자를 신라에 파견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당시는 삼국이 치열하게 통일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시기인데 어떻게 적국으로, 그것도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백제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또 백제는 어떻게 그 요청을 받아들인 것일까? 비록 적국이긴 하였지만 종교적인 관점에서 각자가 믿고 있는 불교라는 신앙은 같았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건 아닐까? 정치적, 군사적 의견이 아닌 종교적, 예술적 관점에서는 불교라는 공통분모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아비지는 신라로 넘어와서 열심히 주춧돌을 닦고 기반을 만들면서 구층 목탑을 세우기 위해 준비하던 도중에 어느 날 무서운 꿈을 꾸게 된다. 그 꿈은 백제가 멸망하는 꿈이었는데 아비지는 속으로 ‘황룡사 구층 목탑을 지으면 정말 백제가 멸망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목탑을 짓지 않기로 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주변이 깜깜해지더니 진동이 울리기 시작하면서 노승이 나오더니 가운데 기둥을 세울 큰 돌을 올려놓고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목탑을 완성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완성하는데 매진한다.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68년에 벼락을 맞고 지진 등으로 기울어져 다섯 차례나 수리하거나 재건했다는 기록이 경문왕 13년(873) 탑을 재건할 때 넣어둔 사리함 내에서 발견된 ‘찰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목탑 양식을 알 수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22.2m이며 탑의 높이가 80m, 현대의 건물로 치면 30층 높이의 건축물이다. 그리고 왜 9층인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불교에서 완전한 수, 꽉 찬 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9층의 각 층에는 정복할 나라들을 상징해놓았는데, 1층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거란, 여적, 예맥을 상징해놓고 모든 나라를 정복하여 통일하고 싶다는 의미를 담아 놓았다.


황룡사 추정 복원도

4. 전설 속의 천재 화가, 솔거


솔거는 신라시대의 화가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생과 사 등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미천한 출신으로 여겨진다. 현재 한국사 기록에 남아있는 화가들 중 가장 오래된 화가이다. 그가 그린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이며, 이 벽화는 노송을 실감나게 잘 그려서 새들이 착각하고 날아들다가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훗날 벽화가 낡아 황룡사의 한 스님이 채색을 다시 하였더니 더 이상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고 한다.


먼 훗날 조선의 신사임당의 이야기 중에서도 솔거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신사임당이 유년 시절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은 꽈리나무에 앉은 메뚜기 그림이었다. 다 그리고 마루에 놨는데, 너무 잘 그린 나머지 그 집에서 기르던 닭이 그 메뚜기를 진짜 메뚜기로 착각하고 마구 쪼아서 망쳐버린 이야기이다.


솔거의 출생과 죽음, 작품세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三國史記 第 四十八卷(삼국사기 제 48권)_177.率居(솔거)


率居(솔거) : 솔거는

新羅人(신라인) : 신라 사람으로

所出微(소출미) : 출생이 한미하였으므로

故不記其族系(고불기기족계) : 그 씨족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生而善畫(생이선화) : 선천적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嘗於皇龍寺壁畫老松(상어황룡사벽화로송) : 일찍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體幹鱗皴(체간린준) : 줄기에는 비늘처럼 터져 주름지었고

枝葉盤屈(지엽반굴) : 가지와 잎이 얼기설기 서리어

烏鳶燕雀(오연연작) :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들이

往往望之飛入(왕왕망지비입) : 가끔 바라보고 날아들었다가

及到(급도) : 도달함에 미쳐

蹭蹬而落(층등이낙) : 허둥거리다가 떨어지곤 하였다.

歲久色暗(세구색암) : 그린 지가 오래되어 색이 바래지자

寺僧以丹靑補之(사승이단청보지) : 그 절의 중이 단청을 보수하였더니

烏雀不復至(오작불부지) : 까마귀와 참새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又慶州芬皇寺觀音菩薩(우경주분황사관음보살) : 또 경주의 분황사 관음보살과

晉州斷俗寺維麾像(진주단속사유휘상) : 진주의 단속사 유마상(維摩像)은

皆其筆蹟(개기필적) : 모두 그의 필적이다.

世傳爲神畫(세전위신화) : 세상에 전하여져 신화(神畵)로 여겼다.


5. 신라 3보 (新羅三寶)


신라 3보는 왕실의 권위와 호국(護國)을 상징하는 국가 차원의 보물로, 진흥왕 때 만들어졌다는 ‘황룡사 장육존상(丈六尊像)’,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천사옥대(天賜玉帶)’,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을 말한다.


이 신라 3보는 현재에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된 뒤에서 한 동안은 존재하였으나 몽골과의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이 중 천사옥대는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서 바쳤고 왕건이 이를 창고에 보관하였다는 게 마지막 기록이고 그 이후는 알 수가 없다. 구층 목탑은 몽골 침입 때 전소되었고, 장육존상은 동경잡기(東京雜記)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시대인 17세기까지는 남아있었지만 이후 사라졌다.


시대순으로 첫 번째 보물 장육존상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남쪽에 큰 배가 정박하였는데, 조사하여 보니 첩문(帖文)이 있었는데 인도의 아소카왕이 황철(黃鐵)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석가 삼존상을 주조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였다.


“원컨대 인연이 있는 나라에 이르러 장육존용(丈六尊容)을 이루어라”


배는 세계 곳곳을 두루 돌지 않은 곳이 없었느나 모두 주조하지 못하고 배를 다시 보내게 된다. 마지막으로 신라국에 이르렀고 당시 진흥왕이 그것을 주조하여 한 번에 불상을 완성하여 황룡사에 안치하였다. 본존불인 석가모니상의 무게는 3만 5천7근으로 황금 1만 1백 9십 8푼이 들어갔고, 양쪽의 두 보살에는 철 1만 2천 근과 황금 1만 1백 3십 6푼이 들어갔다.


설화 속의 이야기 같은데 실제 황룡사지에 가면 정확한 봉안 위치를 알 수 있는 금당과 석조대좌가 남아있고, 장육존상의 머리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4편의 나발(螺髮)이 금당터에서 출토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불교 수용이 늦었고, 귀족들의 반발로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라는 획기적 사건 이후에야 불교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장육존상 이야기는 신라 최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을 부각하기 위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당시 신라인들의 불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장육존상의 주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한 사건을 바라보는 두 역사서의 다른 관점과 서술방식을 엿볼 수 있다.


진흥왕 35년(574) 봄 3월에 황룡사(皇龍寺) 장륙상(丈六像)을 주조하여 완성하였는데, 구리의 무게가 35,007근이고, 도금한 금의 무게가 10,198푼이었다.


두 번째 보물 천사옥대는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던 해에 한 천사가 하늘로부터 옥대(玉帶)를 가지고 내려와 상제의 명을 받들어 이를 왕에게 바쳤다. 왕이 친히 두 무릎을 꿇고 공손히 받자, 천사는 곧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뒤 천지에 제사하거나 종묘에 제사할 때는 으레 왕이 이 옥대를 찼다.


그 형태는 금으로 새겨서 옥을 박아만든 네모난 판형 62마디를 연결하였으며 각 마디에는 하늘에서 정한 계시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옥대에 박힌 옥 하나하나가 모두 용이어서 그중 하나를 떼어 물에 던지면 용이 승천했다고 한다.


한편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천사옥대를 잃어버렸다가 경명왕 때 찾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경명왕 5년(921) 봄 정월에 김율(金律)이 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신이 작년에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왕이 신에게 물어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장육존상, 구층탑, 천사옥대를 이르는 것이라고 들었다. 장육존상과 구층탑은 아직도 있으나, 천사옥대가 지금 그대로 있는지 알지 못하는가?’라고 하였는데, 신은 답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말하기를, “천사옥대는 어떤 보물인가?”라고 하였으나, 잘 아는 자가 없었다. 이때 황룡사에 90세가 넘은 승려가 있었는데, 말하기를 “제가 일찍이 그에 대해 들었는데, 천사옥대는 진평왕께서 착용하시던 것이라고 합니다. 대대로 전해져 남고(南庫)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마침내 창고를 열도록 명하였으나 찾을 수 없어, 다른 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지낸 이후에야 그것을 찾았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매우 길어 보통 사람들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평왕의 이야기에서는, 왕의 키가 무려 11척, 제석궁(帝釋宮)에 갔을 때 돌계단을 밟는데, 돌 두 개가 쪼개졌습니다. 진평왕은 주변의 신하들에게, “이 돌을 움직이지 말고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라”라고 하였다. 그가 얼마나 거구이며 얼마나 힘이 셌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신라인들은 진평왕과 천사옥대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구름 밖 멀리서 하늘이 내려주신 옥대는

왕의 용포 차림과 알맞게 잘 어울리네

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 더 무거워져

이다음에는 쇠로 섬돌(계단)을 만들어야겠네


세 번째 보물인 황룡사 9층 목탑은 위에 『황룡사』 부분에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신라 3기(奇)와 8괴(怪)


신라 3보와 함께 신라 3기, 신라 8괴는 신라를 이해할 수 있는 재미있는 전설을 집약한 것인데 그 내용을 다음과 같다.


신라 3기는 3가지 기이한 것이란 말로 금척(자), 옥저(만파식적), 선덕여왕의 구슬(화주)이다.


첫 번째, 금척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의 천신으로부터 받았다는 금으로 된 자라고 한다. 이 자는 병든 사람을 자로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자로 재면 살아나고 하는 신비한 자였는데, 중국에서 빌려 달라고 하여 이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어 건천읍 지역에 30개의 똑같은 무덤을 만들어 그 속에 묻어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경주시에서 대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금척리에 여러 개의 무덤이 있는데, 그곳이 경북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소재 사적 43호로 경주 서쪽 7~8km 지점에 32기의 대형 고분군이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52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32기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고분을 파내려고 곡괭이질을 하면 천둥번개가 치고 하여 일본인들도 금척리 고분을 손을 대지 못했다고 전해 지기도 한다. 1952년 그 고분군 중 2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금귀걸이, 옥류, 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일제강점기만 해도 52기의 고분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32기가 된다고 함.


두 번째, 신라 31대 신문왕(681~692년)이 감은사에 행차한 뒤에 이견대에 들렀는데 해룡이 나타나 흑옥대를 바쳤는데, 이 해룡의 말에 따라 바닷가에 떠있는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했는데 그 뒤 적군이 쳐들어 오거나 병이 났을 때 또는 가뭄이나 홍수가 나거나 태풍이 불어올 때 이 피리를 불면 모두가 평정이 되었다고 하여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도 동해의 용왕이 신라왕에게 옥피리를 바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한문건(1765~1850)이란 자의 글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이 옥피리를 갖고 싶어 했으나 조령을 넘자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하여 신라에 대한 충절을 나타내는 기물(奇物)로 여겼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만파식적은 신라의 문무왕이 죽어서 된 용과 하늘의 김유신 장군의 혼령이 나타나 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신문왕에게 보냈다고 하는 피리이며 이 만파식적의 소지자는 1975년 당시 포항경찰서에 근무한 적이 있는 전직 경찰관으로, 구입한 후 30년간 보관해 왔으며 그 전직 경찰관은 일제강점기 경성에 머물던 일본인으로부터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세 번째, 화주는 선덕여왕이 가지고 있었다는 수정구슬인데 분황사 석탑에서 나와 백률사에서 보관을 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광선을 구슬에 비추면 솜에 불이 붙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돋보기와 비슷한 물체였을 것이다.


8괴는 경주에 있는 8가지 괴이한 것을 말하는데, 남산부석(南山浮石), 문천도사(蚊川到沙), 계림황엽(鷄林黃葉), 금장낙안(金丈 落雁), 백률송순(栢栗松筍), 압지부평(鴨池浮萍), 나원백탑(羅原 五層 石塔), 불국영지(佛國影池)를 말한다.


남산 부석(南山浮石)

남산 부석은 경주 남산에 떠 있는 바위를 말하며 버선을 거꾸로 세어놓은 것처럼 보여 버선바위라고도 부른다. 남산 국사곡 능선 위에 큰 바위 하나가 작은 바위돌을 다리 삼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있는데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이 그야말로 떠 있는 형상이다. 명주실을 바위 뒤로 넘겨 앞으로 끌어당기면 명주실이 끊어지지 않고 통과한다고 하여 바위가 떠 있다고 생각했기에 부석이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문천도사(蚊川到沙)

문천은 남천을 말하는데, 흐르는 물이 너무도 맑고 고와서 물은 아래로 흐르지만 모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예로부터 모기내 또는 물개(모래)내라고 불렀다.

계림황엽(鷄林黃葉)

계림의 나뭇잎은 움이트면서부터 붉은 색을 띄는것이 신비롭다. 계림숲은 가을이 아닌 여름에도 잎사귀가 누렇게 변한다. 신라왕조의 조상이 되는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은 가을이 아니라 여름에도 단풍이 지는데, 최치원이 이것을 보고 신라의 쇠망을 알았다고 하며, ‘곡령청송(鵠嶺靑松) 계림황엽(鷄林黃葉)’이라는 글을 썼다고 하는데, 곡령은 고려를, 계림은 신라를 의미하며 신라는 누런 나뭇잎처럼 국운이 시들어가고, 고려는 푸른 솔처럼 국운이 흥기 할 것이라는 말로 예언을 했다고 한다.

금장낙안(金丈 落雁)

경주시 석장동에 있는 병풍처럼 놓여 있는 수직 암벽이 있는 그곳을 금장대라고 한다.

그 앞쪽 형상강 상류인 서천과 더불어 경치가 좋아서 예로부터 지나가던 기러기가 반드시 떼를 지어 내려앉았다고 하는데 한번 앉으면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금장대의 풍광이 수려하고 물이 맑아 지나가던 기러기가 반드시 이곳에 내려앉아서 쉬고 간다고 하는 곳으로, 신라 때 귀족의 딸인 예기라는 처녀가 결혼을 앞두고 단오절에 친구들과 금장대의 소나무에서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 강물에 빠져 죽은 후부터 매년 익사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고 하는 설과, 김동리 소설 무녀도에서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고, 또 신라 20대 자비왕 때 을화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회를 즐기다가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던 푸른 소(沼)로 전해지기도 하는데 그것이 예기청소(藝技淸沼)다. 금장대는 옛 선사시대 부족민들이 바위에 그림을 그려 신에게 소원을 빌었다고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금장대의 직벽에 사람 발자국, 여성 생식기, 배, 사냥하는 모습 등의 암각화가 이를 추정케 하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암각화 중 한 유적 내의 문양의 개수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1994년 이곳의 수직 암벽에서 암각화의 유물이 발견되기 전에는 예기청소(藝技淸沼)와 금장낙안으로 유명한 곳이다.

백률송순(栢栗松筍)

토종 소나무는 베면 순이 자라나지 않는데 백률사의 소나무는 이차돈의 순교 탓인지 모르지만 베어도 순이 돋아 나왔다고 하여 생긴 말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백률사 부근에는 울창한 대숲이 있었고 이 지방의 대나무는 가느다란 것뿐인데 이곳 백률사에 나는 대나무는 굵은 종류의 대나무가 많아 한꺼번에 돋아나서 송화가루가 날리는 송순과 같아서 그 광경을 찬미하여 "백률송순"이라고 불렀다는 전설도 있다.


압지부평(鴨池浮萍)

안압지의 물 위에 말밤이라고 하는 이끼 같은 풀이 뿌리가 없이 자라고 있는데 이것을 압지부평이라고 한다.

나원백탑(羅原白塔)

나원리 마을의 절터에 남아있는 석탑으로,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경주 감은사지 석탑과 경주 고선사지 석탑과 비교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나원백탑(羅原白塔)’이라 부른다.


불국영지(佛國影池)

영지에는 날이 맑으면 불국사의 전경이 물에 비쳐 보이는데 다보탑만 보이고 석가탑은 비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부른다. 백제에서 서라벌까지 신라 불국사의 건립을 위해 초청되어왔던 아사달이 그리워 아사녀가 찾아왔는데, 신성한 일을 하는 동안 아사녀를 만날 수가 없는 아사달이 말하기를 일이 끝나게 되면 영지에 불국사의 탑이 비칠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더니 아사녀는 영지에 가서 매일 영지를 쳐다보며 불국사 공사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영지에 정말 불국사의 탑이 영지에 비쳐 비친 탑을 보고 너무 기뻐서 환호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공사를 마친 아사달이 영지로 왔더니 아사녀의 신발만 못가에 있었고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기다림에 지쳐서 물에 빠져 죽은 줄 알고 같이 영지에 빠져 죽었는데 그 후로 다보탑은 영지에 비치는데 석가탑은 비치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석가탑을 그림자가 없는 탑, 무영탑이라고도 했다.

6. 여왕의 향기, 분황사(芬皇寺)


경주시 보문동에는 사적 제163호로 지정된 경주 낭산이 있다. 이 낭산에 잠들어 있는 여인이 있는데, 바로 신라 27대 왕인 선덕여왕이다. 그녀는 건강하던 어느 날 말했다. 자신이 어느 해 어느 날에 떠나니 수미산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그녀는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미리 자신을 묻을 곳을 예언한 것이다. 신하들이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자 그녀는 여기 낭산을 가리켰고 얼마 후 그녀는 이곳에 묻혔다.


불교에서 도리천은 제석천(帝釋天)이 머무는 수미산 꼭대기이고 사천왕이 그 밑에서 도리천을 수호하고 있다. 신라인들은 당시 도읍의 중심이었던 낭산을 세계의 중심인 수리산으로 여겼고, 수미산을 품고 있는 신라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26대 왕인 진평왕의 둘째 공주로 태어났는데, 언니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공주이고, 동생은 서동요의 주인공 선화공주이다. 진평왕부터 그 딸 셋이 모두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진평왕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는데, 당시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기 때문에 성골에게만 왕위를 물려줄 수 있었다. 그래서 진평왕은 아들이 없으니 성골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마음먹고 큰 딸 천명공주를 용수와 결혼시킨다. 이 용수가 바로 25대 진지왕의 맏아들이다. 그러나 실정으로 쫓겨난 진지왕의 후손인지라 귀족들의 화백회의의 반대로 왕위를 물려줄 수 없었다. 결국 아버지 진평왕은 평소 배포와 기백이 뛰어났던 둘째 공주 덕만을 635년 신라 27대 왕으로 세운다.

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幸也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실로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선덕왕(善德王) 조에서 쓴 부분이다.


선덕여왕은 왕위에 오를 때부터 대내적으로 많은 반대에 부딪혔으며, 대외적으로는 백제에게 40여 개의 성을 빼앗기는 등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여자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만으로 온갖 비난과 고초를 겪어야 했던 선덕여왕은 안으로는 민심을 잡아야 했고, 밖으로는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당나라까지 견제해야 했는데, 이러한 여왕의 약점을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신하가 극복해주었고 그 결과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왕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여왕의 재위 시절에는 원효와 의상, 자장이라는 큰 스님들이 활동한 시기로 문화적으로도 크게 융성한 시기였다. 그리하여 황룡사 9층 목탑, 첨성대, 분황사 등의 걸출한 국보급 문화재들이 모두 선덕여왕 시절 만들어졌다.


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또한 선덕여왕은 세 가지 예지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를 지기삼사(知幾三事)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그 첫째는 모란도 이야기인데, 어느 날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선덕여왕에게 모란 그림과 꽃씨를 선물로 보낸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더니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신하들이 씨를 심어 나중에 꽃이 피자 여왕의 예언처럼 향기가 나지 않았다. 신하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묻자 여왕은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는 꽃임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왕은 황룡사 북쪽에 ‘향기로운 여왕의 절’ 분황사를 짓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여근곡에 숨어있던 백제군사를 사로잡은 일인데, 어느 겨울날 옥문지에서 개구리들이 며칠 동안이나 울어댔다. 신하들은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여 여왕에게 알렸는데 여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개구리울음소리가 난 여근곡으로 알천과 필탄 두 장군으로 하여금 군사 2천 명을 풀어서 여근곡 근처에 숨어 있던 백제의 장군 우소가 거느리는 5백의 백제 군사를 무찌르도록 하였다. 적을 무찌르고 돌아오자 신하들은 여왕께 어떻게 적의 침입을 알았는지 물었다. 여왕이 말하기를 개구리는 눈이 붉어져 있어 성난 군대를 상징하고, 옥문 즉 여근은 음(陰)에 속하므로 흰 것을 뜻하며, 흰 것은 서쪽을 상징하는데 서쪽의 백제 군사가 쳐들어 온 것으로 보았다. 남근(男根)은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그들을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고 답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죽는 날과 묻힐 장소를 예언한 도리천 이야기이다.

분황사는 전성기 당시에는 황룡사에 버금가는 규모의 사찰일 뿐만 아니라 경덕왕 때 중창될 때에는 신라 역사상 가장 큰 불상인 약사불이 금당에 봉안될 정도로 굉장한 규모를 가진 사찰이었다.


현재 ‘분황사 모전석탑’은 우리에게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잘 알려져 있는 국보로, 현존하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으로 모전석탑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탑이다.


탑의 종류

탑을 만든 재질에 따라 나누어보면, 목탑과 석탑, 전탑으로 나눌 수 있다. 목탑은 말 그대로 나무로 만든 탑으로, 4세기부터 6세기 말까지 당시 중국의 영향으로 삼국에서 다층의 누각 형식의 목탑이 축조되었었다. 그러나 나무라는 재질의 특성상 현재는 모두 소실되고 없다. 이러한 목탑 양식을 하고 있는 현재의 문화유산으로는 충북 보은 법주사 팔상전과 전남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있다.


석탑은 7세기 무렵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우리나라의 특성상 화강암이 풍부해 이러한 석탑이 많이 건립되었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대부분의 탑은 석탑이며, 한국을 ‘석탑의 나라’라고 부르고 있다.


전탑(塼塔)은 벽돌을 구워 쌓아 만든 탑으로 삼국시대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였고, 석탑과는 달리 기둥의 표현이 없다. 또한 목탑이나 석탑과는 다르게 추녀 끝이 밋밋한 수평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 많다. 현재 경북 안동 법흥사지 7층 전탑이나 안동 조탑동 5층 전탑, 여주 신륵사 다층 전탑 등이 전해지고 있다.


모전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새로운 양식으로, 벽돌이 아닌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은 탑이다. 고려시대 유행하였으며, 제천 장락리 7층 모전석탑, 정삼사 수마노탑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아 토질의 특성상 벽돌을 구울 수 있는 흙이 많지 않기 때문에 돌을 깎아 벽돌처럼 만든 모전석탑이라는 새로운 양식의 탑을 세웠다. 당시 선덕여왕이 모전석탑을 세운 까닭은, 당나라의 여왕에 대한 모욕과 멸시 때문에 중국풍의 전탑이 아닌 독자적 형식의 탑을 짓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원효와 자장이 이 분황사에서도 활동했다. 원효는 이곳에서 많은 저작을 남겼고, 원효 사망 후에 아들인 설총이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 원효의 뼈를 부수어 만들었다는데 ‘원효 회고상’이라고 한다. 또한 분황사에는 신라 화가 솔거가 그린 『분황사 관음보살도』가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의 역사에서 원효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깨달음 얻고 돌아온 뒤에 머무른 곳이 분황사였고, <금광명경소>나 <화엄경소> 등 현전하는 원효의 대부분의 저작도 분황사에서 집필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원효를 위해 '화쟁국사비' 비석이 세워진 곳도 분황사였다. 이 화쟁국사비는 조선 후기 이전 어느 시점에 사라져서 추사 김정희가 '화쟁국사비가 있던 곳'이라고 남겨둔 글이 있다.

이후 몽골의 침략 때는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 9층 탑은 목탑이었기 때문에 전소되었지만 분황사 모전석탑은 석재인 까닭에 다행히도 남을 수 있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또 한 번의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경주 지역의 민속 향토 지리지인 동경잡기에는 원래 9층 탑이었는데 왜란 때 왜병이 탑의 반을 헐었으며 후에 분황사의 승려들이 처음부터 다시 쌓다가 또 허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경덕왕 14년(775) 구리 30만 근 이상이 들어간 거대한 약사여래 동상을 분황사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것 역시 임진왜란 중 분실되었다.


현재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그리 크지 않은 절로 보이나, 2000년대 이후의 발굴 작업들을 통해 현재 있는 규모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분황사의 깃발을 걸던 당간지주도 분황사 경내가 아니라 황룡사와 분황사 중간쯤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당간지주는 현존하는 통일신라 당간지주 중 유일한 귀부형(거북이 모양) 간대석(당간을 지지하는 받침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보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경내에는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漁井)이라고도 불리는 우물이 있는데, 화강암을 통째로 움푹하게 파낸 다음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만들어져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부는 높이 70cm로 윗부분은 8각형이며, 내부는 원형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우물 안의 4각형은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를 뜻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경주에 들렀다 떠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대왕님, 저희들은 서라벌 동북(東北) 쪽 금학산(琴鶴山) 기슭에 있는 동천사(東泉寺)의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입니다. 어제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이 주문을 외워 우리 남편들과 분황사 팔각정에 사는 호국용을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습니다. 우리 남편들과 분황사의 호국용을 구해주십시오."


라고 호소하였다.

이 말을 들은 원성왕이 "세 호국용이 있는 한 신라가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훔쳐간 것이 틀림없다."라고 하면서 날랜 기마병 50명을 몸소 거느리고 사신을 뒤쫓아 그들이 묵고 있는 하양관에 이르게 되었다. 왕은 친히 잔치를 베풀고 당나라 사신과 주술사를 꾸짖어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용 3마리를 잡아가지고 이곳까지 왔는가? 만약에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이다." 했더니, 그제야 물고기로 변한 호국용 3마리를 내어 바쳤다.


그 호국용 3마리를 들고 와서 각각 제자리에 놓아주었더니 놓은 곳마다 물이 한길이나 솟아오르고, 호국용들도 원래 모습으로 변했으며, 기뻐 뛰놀면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당나라 사신은 신라 왕의 명철함에 감탄하여 돌아가서 "다시는 용을 훔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당의 황제에게 아뢰었다 한다. 이때부터 팔각정을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漁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보광전은 금당 세 개가 모두 소실되고 없는 현재 분황사의 대웅전 구실을 하고 있는 전각으로 외관으로만 따져도 상당히 낡았다. 1998년 해체 수리 당시 분황사의 창건과 소실 경위 등이 담긴 상량문이 나왔는데, 보광전이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보광전 안에 석조 대좌 위에 모셔져 있는 3.45m짜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1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구리 5,360근이 들었다고 한다. 한쪽에는 원효 대사의 초상화도 같이 모셔두었다.


분황사를 배경으로 전해지는 향가가 있는데, 바로 『도천수대비가』이다. 그 내용은 신라 경덕왕 시절 분황사에 걸려 있던 천수대비 그림 앞에서 눈먼 자식의 눈을 고쳐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하며 불렀던 노래이다. 아이는 결국 눈을 떴고 다음과 같은 찬양의 글을 올렸다.


竹馬蔥笙戱陌塵 一朝雙碧失瞳人

不因大士廻慈眼 虛度楊花幾社春


대나무 말 타고 피리 불며 길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 눈을 잃었네.

보살님의 자비로운 눈 주시지 않았다면

몇 번이나 버들꽃 피는 봄을 헛되이 보냈을까.



‘분황사 모전석탑’은 우리에게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잘 알려져 있는 국보로, 현존하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으로 모전석탑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탑이다.


7. 태종 무열왕 김춘추


태종 무열왕은 신라의 제29대 군주로,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와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사이의 아들이며 선덕여왕의 조카이다.

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湌龍春【一云龍樹】之子也 【唐書以爲眞德之弟 誤也】 母天明夫人 眞平王女 妃文明夫人 舒玄角湌女也


휘는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 【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고 왕비는 각찬(角湌) 서현의 딸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삼국사기》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이며, 골품제라는 신라의 특수한 사정상 즉위 직전까지 태자가 아니었고 마지막 성골인 진덕여왕이 승하한 후 화백회의의 합의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교관, 정치가로 활발하게 활동해서 태종 무열왕이라는 묘호 외에 본명인 김춘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신라 정치사에서 제36대 혜공왕까지 이어지는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왕실의 시조 격이다. 태종 무열왕의 행보에 대해서는 많은 상반된 평가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7세기 당시 김춘추라는 인물을 빼고는 한반도 정세를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태종’, ‘고종’ 같은 호칭을 묘호(廟號)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고려나 조선 시대의 왕들은 묘호가 더 익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조선은 모든 군주에게 묘호를 올렸는데 신라에서는 일부 군주에게만 묘호를 지어 올렸다. 그 이유는 당시 신라의 묘호 관행이 고려나 조선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또 묘호 제도는 원래 중국에서 건너온 것인데, 중국에서도 모든 군주가 아니라 일부 중요한 업적을 남긴 군주에게만 묘호를 올렸다. 그래서 신라는 당시 이러한 관행에 따라 묘호를 지어 올린 것이다.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는 아무에게나 붙이는 게 아니라, 그 공과 덕이 태조(太祖)에 버금갈 만한 임금, 또한 국가의 기틀을 다진 황제나 왕에게 붙이는 묘호였다. 사실상 국가의 창건자에 준하는 공적을 세워야 받을 수 있는 묘호인데, 그 묘호를 받은 군주로는 김춘추(신라 태종), 이방원(조선 태종), 이세민(당 태종), 오고타이(원 태종), 홍타이지(청 태종) 등으로 모두가 해당 왕조의 기틀을 쌓는데 대단한 업적과 무게감이 있으며, 묘호조차 필요 없이 본명만으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군주들이다.


무열왕의 이름 춘추(春秋)는 당시 신라의 일반적인 작명법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유학적 성격의 이름이었는데, 이는 춘추의 아들 법민(法敏), 인문(仁問), 문왕(文王)도 마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름에 의미를 두는 것이 일반적임을 고려하면 이는 김춘추 본인이나 길게는 이름을 지었을 아버지 김용춘부터 일가 전체가 기존 불교적 질서를 대신할 유교적 사회 질서와 개혁에 관심이 많은 성향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훗날 김춘추가 비담의 난 평정 이후 실권을 쥐면서부터 있었던 당나라 제도 도입과 함께 실시했던 각종 개혁도 그 영향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유교적인 이름을 지은 김유신과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성향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풍채가 매우 특이했는지 당 태종은 김춘추를 보고 매우 기이하다고 평했다. 『일본서기』에서도 일본에 외교를 위해 넘어갔던 김춘추에 대해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담소를 잘했다(春秋美姿顔善談笑)고 기록되어 있다.

왕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성안의 시장 물가는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을 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제1, 태종 춘추공


성골과 진골을 구분해보면, 성골은 왕족과 왕족 사이에서 태어난 계급이고, 진골은 왕족과 왕족이 아닌 부모에게서 태어난 계급이다. 김춘추는 진골 신분이었기 때문에 아직 성골이 많이 남아있던 젊은 시절에는 유력한 귀족이었고 왕이 되기 전에는 뛰어난 외교가로 활약을 하였다. 김춘추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으로 인해 신라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결국 삼국통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외교적 활약을 하였기에 7세기 동아시아에서는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인 대야성 도독 김품석이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있었던 백제의 대야성 침공 당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는데, 당시 서라벌에 머물던 김춘추가 이들의 부고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 후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스스로 맹세하면서 지원군을 요청하고자 고구려로 향했다.


처음에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인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라 하고 곧 왕을 찾아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11년(642년)


김춘추는 고구려로 가기 전에 김유신과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떠나는 김춘추를 향해 김유신은 “공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왕궁의 뜰을 짓밟게 될 것이오.”라는 패기가 흘러넘치는 말을 했고,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60일 이내면 돌아올 것인데 이때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볼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김유신과 피를 나눈 맹세를 다졌다.


당시 고구려 보장왕은 실권이 없었고 사실상 고구려를 좌지우지하던 권력자였던 연개소문이 직접 김춘추를 대접해 주었다. 김춘추는 고구려 조정에 양국이 그간의 경쟁을 중지하고 화해하며, 현재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를 고구려가 군사적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고구려의 보장왕은 "죽령 이북 땅이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는데 신라가 이를 돌려준다면 구원병을 보내줄 수 있다"라고 답했다. 죽령 이북인 한강 유역은 신라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그걸 다 돌려주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약소국으로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위해 내세운 무리한 요구였다.

이 요구에 김춘추는 "이웃의 위기를 기회로 어찌 영토를 내놓으라 할 수 있습니까? 전 신하로서 어쩔 수 없으니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라며 이를 거부하였고, 보장왕은 결국 김춘추를 붙잡고 구금시켜 버린다. 감옥에서 김춘추는 보장왕의 총애를 받는 고구려의 대신 선도해에게 청포 3백 보의 뇌물을 보낸다. 이를 받은 선도해는 김춘추를 찾아와 ‘토끼전’ 이야기를 해 주고, 거짓말로 자라를 속이고 위험에서 벗어난 토끼의 꾀를 상기시키며 융통성 있는 대답을 할 것을 당부했다.


김춘추는 토끼전 이야기대로 보장왕을 다시 만나 신라에 돌아가면 왕을 설득해 고구려 옛 땅을 돌려주도록 하겠다고 하자, 고구려는 땅을 돌려준다는 약속도 받았고 신라군과의 충돌도 우려해 결국 김춘추를 그냥 보내주게 된다. 이후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도중 황해 바다에서 고구려 순찰선을 만났는데 고구려군은 김춘추를 죽이려 했으나 김춘추를 보좌하던 온군해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으로 김춘추처럼 위장해 대신 죽어 김춘추는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고구려는 김춘추를 죽이려 했고, 김춘추는 거짓말로 겨우 빠져나왔으니 신라와 고구려의 외교 관계는 고구려 멸망 때까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와의 협상 자체는 실패했지만, 김춘추는 고구려행을 통해 소정의 정치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선덕여왕 말기가 되면 신라 내부에서도 성골 여왕 다음에는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김춘추가 목숨을 걸고 적국에 가서 담판을 지으려 했으니, 신라인들에게는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영웅이라고 각인시켜주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648년 3월 당나라에 파견된 신라 사신에게 당 태종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았고 이 문제로 김춘추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실제 회담은 화기애애했는데 당 태종은 김춘추를 극진히 우대했고 김춘추도 신라에 필요한 요구를 급하게 먼저 꺼내지 않고 학문 관련 주제를 먼저 꺼내 당 태종과 공감대를 먼저 형성하는 화법을 구사했고 장안에 오래 머물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당나라 조정 중신들과도 교류하면서 양국의 이해관계를 확인하였다.


당 태종은 과거 신라 사신과 선덕여왕을 모욕하다시피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신라도 당나라의 힘을 이용해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길을 모색했지만, 당시 ‘안시성 전투’와 같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상당한 부담을 갖고 있던 당나라 역시 신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록에 있는 것처럼 김춘추의 외모나 말솜씨가 친화력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당 태종이 예전에는 신라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동안 고구려와의 전쟁에 여러 차례 실패하면서 후방 지원 세력으로서 신라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같은 편으로 삼기 위해 환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춘추는 단지 당나라의 힘을 빌리는 것뿐만 아니라, 체계화된 당나라의 제도와 유학을 도입해 신라를 개혁하는 데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김춘추가 당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당 태종에게 요청해 ‘국학’ 견학을 요청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김춘추는 귀국한 뒤 진덕여왕에게 요청해 신라 관복의 양식을 당나라의 복식과 같게 하였으며 신라 고유의 연호를 없애고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은 신라의 대외 관계의 방향성을 표방한 것으로 신라는 당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귀속하겠다는 점을 보여준 상징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당나라는 원정군 파견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이 무렵의 태종 무열왕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不報 憂形於色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6년 기사


그러나 659년 10월, 태종 무열왕의 꿈에 앞서 죽은 신하인 장춘과 파랑이 나타나 "당에서 내년에 백제를 친다고 합니다."라는 보고를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태종 무열왕은 두 사람을 추모하는 불교 의식을 거행했고 그 자손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으며 한산주에 장의사(莊義寺)라는 절을 세워 이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물론 실제로 귀신이 나타나 정보를 알렸을 리는 없고 그만큼 양국의 이해관계가 극적으로 맞아떨어졌음을 이후 일화로 각색된 기록이다. 이듬해 660년 결국 당은 소정방에게 13만 대군을 맡겨 황해를 건너 신라로 보냈고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어 660년에 백제를 단기간에 멸망시켰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주력 군대가 황산벌 전투를 거쳐 사비성, 웅진성에서 싸우는 동안 무열왕은 후방인 금돌성(지금의 상주시)에서 머물렀고 의자왕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660년 7월 29일 사비성으로 이동했다. 8월 2일에 열린 정식 항복식에서 의자왕이 직접 따르는 술잔을 받고, 과거 대야성 함락 때 백제군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백제에 투항한 배신자 ‘검일’과 ‘모척’을 처단해 딸과 사위의 복수를 했다.


김춘추의 최후는 흔히 병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백제 부흥군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무열왕 본기 마지막에 나오는 아래 기록을 근거로 상상을 해볼 수 있다.


六月 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 王薨

661년 6월에 대관사(大官寺)[24]의 우물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25]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삼국사기》

익산 지방은 미륵사나 왕궁리 유적 등이 있던 백제의 주요한 지방이었기 때문에 정복된 지 1년도 안 된 661년에 신라의 왕이 그곳에 갔다가 백제 부흥군에 의해 시해되었음을 암시할 수도 있다.


젊은 시절부터 외교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김춘추, 삼국통일의 대업을 시작하고 신라의 기존 질서를 재편하고 새로운 유교적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태종 무열왕은 경주시 서악동에 고요히 묻혀있다. 그것도 평생을 두고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영원한 동지였던 김유신과 가까운 곳에….


무열왕릉은 신라 왕릉 중 아무런 의심 없이 확실하게 특정 왕의 능이라고 제대로 밝혀진 능이다. 그것은 바로 왕릉 바로 앞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쓰인 비가 있기 때문이다.


신라 왕릉 중 주인이 정확히 확인되는 왕릉은 몇 기 되지 않는다. 능의 주인이 비교적 정확하게 밝혀진 건 위치상 거의 확실해 보이는 선덕여왕릉이나, 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된 무열왕릉과 흥덕왕릉 등이 있다. 그 외에 원성왕릉, 성덕왕릉과 헌덕왕릉도 실제 그 왕의 능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는 편이다.


무열왕릉은 신라 왕릉 중 아무런 의심 없이 확실하게 특정 왕의 능이라고 제대로 밝혀진 능이다.


8. 하늘의 천신(天神)이 되어 신라를 지키다, 김유신


김유신은 신라를 상징하는 장군이다. 신라 26대 진평왕 때부터 30대 문무왕 때까지 80년에 가까운 기간을 살며 5명의 신라왕을 섬겼다. 옛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 김구해의 증손자이며, 조부는 김무력, 부는 김서현이다. 골품은 진골이다. 선덕여왕 이후 성골 왕통의 단절로 인한 극도의 정치 불안정 속에서 약화된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의 대침공을 몇 번이나 막아내는가 하면, 꾸준히 일어났던 서라벌 귀족들의 반란을 연거푸 진압하는 등 망국의 단계에 돌입한 신라를 지켜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군 사령관으로써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 최고의 영웅의 모습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유신의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황금 갑주로 완전무장한 소년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으며, 이후 태어난 아기의 등에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7개의 점이 있어 칠요(七曜)의 정기를 품었다고 여겼다. 김유신의 이름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지어졌다.


내가 경진(庚辰) 일 밤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로써 이름을 지어야 하오. 그렇지만 <예기(禮記)>에 따르면 날짜로써 이름을 짓지는 않는다고 하던데, '경(庚)' 자는 '유(庾)' 자와 서로 비슷하며 '진(辰)'과 '신(信)'은 소리가 서로 가깝고 옛 현인 중에 유신(庾信)이라는 이름도 있으니 어찌 그렇게 이름 짓지 않겠소?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김유신 상


김유신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의 가문은 일찍부터 유학을 중시하고 유교적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성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다른 대부분의 신라 귀족들의 이름은 한자를 단지 음차해 순수하게 신라 고유식 이름을 짓거나, 불교적 이름을 짓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면에서 진지왕 이후 왕위에서 멀어진 김춘추 집안 역시 가족 이름을 한문식으로 지은 것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신라 화랑으로 크게 성장한 김유신은 선덕여왕 시기에 비로소 그 이름을 드러낸다. 647년 정월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여자 왕은 정치를 잘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경주 인근 명활성에 주둔하고 김유신이 주도하는 근왕군은 월성에 주둔한 상태로 10일간 공방전을 벌였는데 그러다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지자 비담은 "내가 듣기로 떨어지는 별 아래에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다 했다. 이는 틀림없이 여주가 패할 징조다!"면서 병졸들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다.


이에 선덕여왕이 몹시 두려워하자 김유신이 나서서,


길함과 흉함은 정해진 게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옛날에 주왕은 붉은 새가 있었음에도 망했고 노나라는 기린을 얻었음에도 쇠하였는데, 고종은 장끼가 우는데도 흥했고 정공은 용(들)이 싸웠지만 창성하였습니다. 그러니 덕이 요사함에 이김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의 변괴라는 건 두려워할 것이 아니니,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소서.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김유신 상


라고 말하며 선덕여왕을 진정시키고는 불붙은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날려 별이 다시 떠오른 것처럼 연출하고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떴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후 장졸들을 독려하여 반란군을 몰아치니 비담이 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를 추격하여 비담을 참수하고 그 9족을 멸했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태종 무열왕 시절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왜 김유신이 신라 최고의 영웅인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 날에 소정방(蘇定方)은 부총관(副摠管)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김유신(金庾信) 등이 당(唐)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김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 소정방의 우장(右將)인 동보량(董寶亮)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이 곧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 7월 9일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다.


노년기인 문무왕 때는 왕에게 은퇴를 요청했지만 문무왕은 허락하지 않고 은퇴를 거부하는 의미로 지팡이 궤장(几杖)을 하사했다. 또한 신라 중앙군 조직인 9 서당(九誓幢)의 수장인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에 임명되었으며, 고구려 정벌이 끝난 후에는 기존에 가장 높았던 대각간직 위의 태대각간직을 새로 만들어 거기에 임명되었다. 현대로 치면 6성 장군인 대원수 직위를 받은 것과 같다.


673년 정월 황룡사와 도성 사이에 커다란 별이 떨어졌고, 때맞춰 지진까지 일어나자 문무왕이 걱정했는데, 김유신은 '이 변이는 신에게 있는 것이지 나라의 재앙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문무왕은 만약 그렇다면 더 걱정이라 하며 담당 관서에 제를 올릴 것을 명했다. 또한 김유신의 집에서 갑자기 한 무리의 무장한 병사들이 통곡하면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유신은 '그들은 나를 지켜준 음병(陰兵)들이다. 내 운이 다한 것을 알고 떠났으니 나도 곧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이 일이 있은지 10여 일 후에 자리에 눕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문병하러 방문한 문무왕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고, 며칠 뒤 자택에서 종을 시켜 문무왕에게 보내는 유서를 작성하게 한 뒤 숨을 거두었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내주었다. 김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

삼국유사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 김유신이 수련한 경주의 단석산 정상엔 검법을 전수받은 김유신이 신검으로 돌을 갈랐다는 설화가 담겨있는 돌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화랑이던 김유신은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신녀인 천관녀를 만나 사랑에 빠져 그녀와 교제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 만명부인이 그 꼴을 보고는 "나는 이제 늙었다. 네가 커서 장차 나라에 큰일을 하여 왕과 부모에게 기쁨을 안겨줄 날을 밤낮으로 고대해왔는데 어찌 너는 술과 여자나 쫓아다니느냐"라고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아예 출가를 하라는 선언까지 떨어지자 김유신도 엎드려 울며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해서 천관에 대한 그리움을 꾹 참고 다시 그 집에 들르지 않기로 어머니께 맹세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상태로 집에 돌아가던 중, 말이 평소 길 가던 버릇대로 그녀의 집 앞에 멈춰 서자 천관이 즉시 달려 나와 영접했는데, 정신을 차린 김유신이 상황을 깨닫고 천관에 대한 마음을 눌러 참고 '네가 어찌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리 하였느냐'며 말의 목을 그대로 베고 그대로 떠나버렸다고 한다. 현재 김유신의 집이었던 재매정택과 천관녀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천관사는 직선거리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천관녀는 그의 무정함을 원망하며 《원사(怨詞)》라는 향가를 지었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그의 결단에 감동하여 신녀직을 그만두고 비구니가 되어 절에서 지내다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후에 김유신도 죄책감을 느꼈는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천관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터라 천관사라는 절을 지어 그녀를 위로했다고 한다.

- 비담의 난 때 김유신이 연을 띄어 반란군의 사기를 꺾자 이후 비담은 직접 2만의 대병력으로 왕위

를 찬탈하려 드는데, 김유신에게는 그 절반 병력인 1만밖에 없었다. 이에 김유신이 비담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대항하는 자는 9족을 멸하겠다며 진군해 비담의 병력과 대치하자 김유신을 본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 정치적 입지를 올리기 위해 김춘추와의 정략결혼을 시도했는데, 축국 놀이를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자락을 밟아서 터트린 다음, 옷을 고쳐주겠다면서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누이동생 문희를 방으로 들여보내서 김춘추를 맞이하게 한다. 그런데 문희가 임신을 했는데도 김춘추는 정식 혼인한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모른 척을 했는데, 이에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아이를 임신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문희를 화형 시키겠다면서 일부러 젖은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펴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오르게 해, 그것을 본 지나가던 선덕여왕이 중재를 하여 혼인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 상장군으로 지낼 때 오랜 기간을 동안 전쟁터에서 보낸 뒤에 다시 전쟁터로 나갈 때 마침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집에 들르지 않고 전령을 보내 우물물 한 바가지만 떠오라 한 뒤 말 위에서 마신 뒤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 하고 다시 전쟁터로 떠났다. 이를 본 군사들이 "상장군님은 집을 눈앞에 두고 들르지 않는데 우리가 집 걱정하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사기가 하늘을 찔러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그 우물은 현재 그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에 '경주 재매정'이란 이름으로 사적 제246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유신은 왕은 아니었지만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그의 묘는 신라 왕릉에 준하는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능 주위에 둘레돌인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십이지신상을 부조로 조각해 놓았다. 경주에 있는 어지간한 왕릉 못지않게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


묘 앞에는 두 개의 묘비가 있는데, 하나는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운이 세운 묘비로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라고 적혀 있다. 다른 하나는 1970년대에 세워진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이라고 적혀있다. 이 비석의 ‘묘(墓)’자가 비가 오면 ‘능(陵)’자로 바뀐다고 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1970년에 비석을 세울 당시 처음엔 김유신이 어쨌든 왕족이 아닌 일반인이므로 흥무왕묘(墓)라고 새겨 놨으나, 추존이긴 하나 '왕'이 되었으므로 왕에게는 능(陵) 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에 처음엔 묘(墓)라고 쓰여있던 것을 메우고 능(陵)이라고 다시 새겼다고 한다. 글자를 고친 것이므로 옛날 묘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어서 두 글자가 겹친데다가, 원래 비석에 쓰인 석재와 글자를 메울 때 쓴 석재의 색과 질감이 미묘하게 달라서 물을 뿌리면 글자가 바뀌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김유신은 왕은 아니었지만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그의 묘는 신라 왕릉에 준하는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8. 신문왕릉


신문왕은 할아버지인 태종 무열왕과 아버지인 문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재위 시절 계속되는 통일전쟁을 치르며 삼한일통에 주력을 하였다면, 신문왕은 국가의 체제를 재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고단했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데 보다 집중하게 된다.


신문왕 즉위 당시 신라의 상황은, 오랜 전란 과정 속에서 성장한 전쟁 영웅과 공신 세력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졌으며, 주변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외교도 불안정했으며, 옛 고구려계와 백제계 유민들은 아직 신라의 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지도 않은 상태에 국토는 황폐해진 상태였다.


신문왕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잘 알고 있었고 그 과제를 다음과 같이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있다.


귀족 숙청

왕권강화를 위해 신문왕에게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는, 바로 진골 귀족들의 비대해진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문무왕 시절부터 이미 정치개혁이 시행되고 있었으나, 난세를 끝낸 영웅인 문무왕에게는 특별한 반역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던 중 681년 8월 8일, 신문왕의 장인인 김흠돌의 모반사건이 발생한다. 김흠돌은 통일전쟁에서 상당한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자신의 딸을 태자였던 신문왕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자랑했다. 진골귀족 견제에 불만을 품은 김흠돌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문왕은 이미 예상한 것처럼 준비된 진압군으로 반군을 제압한다. 그리고 신문왕은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옛 성인의 좋은 규범이고,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이다. 과인이 왜소한 몸과 볼품없는 덕으로 숭고한 기틀을 받아 지키느라 먹을 것도 잊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들며 여러 중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려 하였다. 그런데 어찌 상복도 벗지 않은 때에 경성에서 난이 일어나리라 생각했겠는가? 적괴의 우두머리 김흠돌, 김흥원, 진공 등은 벼슬이 자신의 재주로 오른 것이 아니고, 관직은 실로 성은(聖恩)으로 오른 것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였도다. 마침내 불인(不仁)·불의(不義)로 복과 위세를 마음대로 부려 관료들을 깔보고 위아래를 속였다. 날마다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을 왕성히 하고 포학한 마음을 제멋대로 하여 흉악하고 나쁜 이들을 불러들이고 왕실의 근시들과 결탁하여 화가 안팎에 통하게 되었다. 똑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서 날짜를 정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반역을 행하고자 하였다. 과인이 위로 하늘과 땅의 보살핌에 힘입고 아래로 종묘(宗廟)의 영험을 받아서인지 김흠돌 등의 악이 쌓이고 죄가 가득 차자 그들이 도모하던 역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는 바로 사람과 신이 함께 버리고,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리를 범하고 풍속을 해침에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병사들을 추가로 모아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나쁜 무리들을 없애고자 하였다. 일부는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고, 일부는 대궐 뜰에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가지나 잎사귀 같은 잔당들을 샅샅이 찾아 모두 죽여 삼사일 안에 죄수 우두머리들이 탕진되었다. 일이 부득이했으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근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한시라도 잊으리오. 이제 요망한 무리들이 숙청되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근심이 없게 되었으니 소집한 병사와 말들을 빨리 돌려보내도록 하라. 사방에 공포하여 이러한 뜻을 알게 하라.”

당연히 원래 왕비였던 김흠돌의 딸도 아버지의 모반죄에 함께 엮어 폐출되고,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를 새 왕비로 맞이했는데 신문왕의 후계자인 효소왕과 성덕왕은 모두 그녀의 소생이다.

문무왕이 설치를 허락했던 신라 내 고구려 유민 자치국인 ‘보덕국’도 신문왕의 숙청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보덕국의 왕 안승은 앞서 김흠돌의 난이 일어나자마자 사신을 보내 신문왕에게 역적 토벌을 축하했는데, 신라의 수도였던 경상북도 경주시와 보덕국이 있던 전라북도 익산시의 물리적 거리나, 전화도 없던 당시 정보전달 속도를 감안하면 반란 발발 5일 만에 경주에 축하 사절이 도착했다는 건 보덕국 측도 굉장히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빠르게 지지 선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문왕을 거스를 뜻이 없음을 표명한 보덕국도 불과 3년 뒤 684년 해체되고 신라의 직접 통치로 전환되었다. 기록에는 보덕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토벌과 함께 해체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문왕은 이미 서라벌 귀족들도 신속하고 잔혹하게 숙청을 했던지라, 보덕국 역시 언젠가 제거해야 할 구시대의 잔재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군사조직 정비, 9서당 10정

통일 신라의 군사제도인 '9서당 10정'은 모두 신문왕 때 완성되었다. '9서당'은 통일 신라의 중앙군 조직으로 신문왕 7년(687)에 완성되었으며, '10정'은 통일 신라의 지방군 조직으로 신문왕 5년(685)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9서당 10정 조직은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먼저 9서당은 중앙군 조직이지만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민족 융합정책의 일환으로 조직되었다. 9서당의 구성은 신라인뿐만 아니라 백제, 고구려, 말갈의 유민들도 구성이 되었다. 10정은 통일신라의 지방군 조직으로 9주에 1정씩 배치를 하였다. 9기 주인데 9정이 아니라 10정인 이유는, 국경지대이고 넓은 ‘한주’ 지역을 방위하기 위해서 1정을 더 배치하였다.

관료전의 지급과 녹읍 폐지

신문왕은 687년 문무 관료들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차등 있게 내려주는데 이것이 바로 '관료전(官僚田)'이다. 관료전은 실제 정무를 수행하는 관리들에게만 일정한 보수를 지급한 조치라는 데 의의가 있는 조치이다. 즉 선천적인 골품보다는 후천적인 '직분'을 중시하여 진골 귀족의 기득권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로는 아직 미흡했다. 결국 689년에 또 한 번의 극단적 조치를 취하는데 바로 귀족들의 녹읍(祿邑)을 폐지한 것이다. 본래 신라에서 진골 귀족들은 녹읍을 지급받았고 6두품과 그 이하들은 '축년사조'라고 해서 일종의 월급처럼 한 해 혹은 한 달을 기준으로 국가에서 일정량의 곡물이나 토지를 제공받았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고 진골, 6두품 이하를 막론하고 전부 축년사조로 돌려 버렸다.


녹읍이 진골 귀족 세력의 기반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신문왕의 조치는 진골들의 경제 기반에 타격을 입혀 진골도 6두품과 같은 행정 관료층으로 편입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이후 70년 뒤 경덕왕 때 녹읍을 부활시킬 때까지 진골들은 6두품 이하들처럼 축년사조를 받게 된다.


국학 설치

648년 김춘추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나당 동맹 체결 이외에도 당나라의 국학을 견학했고 이때 국학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했으나 당시는 통일 전쟁의 절정기로 제도개혁의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통일 전쟁이 완전히 끝난 682년에 신문왕이 국학(國學)을 세우게 된다.


국학은 유교적 소양을 지닌 인재 양성이라는 목적에 맞게 운영되었다. 먼저 교육내용을 살펴보면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기본 공통 과목으로 삼고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禮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선(文選)을 교육하였다.

3개 과로 나누어서 운영을 했는데 예기, 주역, 논어, 효경을 가르치는 과, 춘추좌씨전, 모시, 논어, 효경을 가르치는 과, 상서, 논어, 효경, 문선을 가르치는 과가 있었다. 특히 논어와 효경이 모든 과에 공통되는 과목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밖에도 산학박사(수학), 천문박사(천문학), 의학박사(의학), 율령박사(법학)가 있어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실무 기술을 가르치는 종합교육기관이었다.


국학에는 박사와 조교가 소속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9년을 공부한 뒤, 학업 성취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신라의 국학은 기존 귀족들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고 유교의 이념인 충(忠), 효(孝)로 무장된 유학자들을 등용함으로써 보다 실력 있는 인재를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영입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왕권 강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 경주시 교동에 있는 경주향교가 통일신라 신문왕 때 세워진 국학이 있었던 자리이다.


당나라와의 관계

당나라와는 아버지 문무왕 때 있었던 나당전쟁 이후 오랫동안 형식적인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686년 신문왕은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해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를 요청하면서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이에 당시 당의 실권자인 측천무후가 여러 유교적 예법과 모범으로 삼을만한 유교 경전 글을 정리해 50권의 책으로 만들어 신라에 보내주었다. 이는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의 실질적인 첫 교섭이었다.


또한 692년, 당나라에서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太宗)에 대해 시비를 걸어왔다. 태종은 천자국 황제에게 붙이는 용어이기 때문에 당에서는 신라가 이를 사용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신문왕은 답사를 보내 정중하게 이를 거절했다. 답사의 요지는 무열왕 역시 덕이 있고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었으니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신문왕은 나당전쟁에서 당을 격퇴한 자신감으로, 당에 대한 당당한 외교적 자세를 유지하였다.


신문왕은 692년 7월 2일에 붕어(崩御)했다. 삼국사기에는 그냥 692년 7월에 승하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신문왕 사후 그의 추도를 위해 효소왕이 건립한 황복사 3층 석탑의 '황복사금동사리함기'에 신문왕이 7월 2일에 붕어했다고 적혀 있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할아버지 태종 무열왕이나 아버지 문무왕에 비해 대중적으로는 덜 유명한 편이나, 11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재위 기간을 보냈음에도 강력한 임팩트를 남긴 임금으로, 현재 각종 한국사 시험에서 통일 신라 부분 중 가장 많이 출제되는 왕이다.


또한 신문왕은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내려준 만파식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원효대사의 아들은 설총은 왕을 충고하는 내용의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왕에게 올렸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신문왕이다.

화왕계에서는 왕을 화왕(모란), 간신을 장미, 충신을 백두옹(할미꽃) 등에 비유해 장미, 백두옹을 통해 간신을 멀리하고 충신을 가까이하라는 내용이며, 이는 곧 유교 정치 이념을 드러내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聰曰 唯 臣聞昔花王之始來也 植之以香園 護之以翠幕 當三春而發艶 凌百花而獨出 於是 自邇及遐 艶艶之靈 夭夭之英 無不奔走上謁 唯恐不及


설총이 이렇게 말했다. “제가 들은 것은 옛날 화왕(花王, 모란)이 처음 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를 향기로운 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봄철이 되자 곱게 피어나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빼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곱디고운 아름다운 꽃의 정령들이 바삐 달려와 화왕을 알현하고자 하며 오로지 뒤처지지 않을까 염려하였습니다.


忽有一佳人 朱顔玉齒 鮮粧靚服 伶俜而來 綽約而前曰 妾履雪白之沙汀 對鏡淸之海而沐春雨以去垢 快淸風而自適 其名曰薔薇 聞王之令德 期薦枕於香帷 王其容我乎


홀연히 한 미인이 붉은 얼굴과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맵시 있게 차려입고는 간들간들 오더니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저는 눈처럼 흰 물가의 모래를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薔薇)라고 합니다.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들은지라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온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又有一丈夫 布衣韋帶 戴白持杖 龍鍾而步 傴僂而來曰 僕在京城之外 居大道之旁 下臨蒼茫之野景 上倚嵯峨之山色 其名曰白頭翁 竊謂左右供給雖足 膏梁以充腸 茶酒以淸神 巾衍儲藏 須有良藥以補氣 惡石以蠲毒 故曰 雖有絲麻 無棄菅蒯 凡百君子 無不代匱 不識王亦有意乎


또한 한 장부가 베옷에 가죽 띠를 매고 허연 머리에 지팡이를 짚은 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구부정하게 와서 말하기를 ‘저는 서울 밖의 큰 길가에 거처하여, 아래로는 푸르고 넓은 들판의 경치를 내려다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빛에 의지하고 있사온대, 이름은 백두옹(白頭翁, 할미꽃)이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비록 주위에서 받들어 올리는 것들이 넉넉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고 의복이 장롱 속에 쌓여 있더라도,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돋우고 독한 침으로 병독을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말에 명주실과 삼실 같은 귀한 것이 있다 해도 왕골과 띠풀 같은 천한 물건을 버리지 않아, 무릇 모든 군자들은 모자람에 대비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였습니다. 왕께서도 또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或曰 二者之來 何取何捨 花王曰 丈夫之言 亦有道理 而佳人難得 將如之何 丈夫進而言曰 吾謂王聰明識理義 故來焉耳 今則非也 凡爲君者 鮮不親近邪侫 疎遠正直 是以 孟軻不遇以終身 馮唐郞潛而皓首 自古如此 吾其奈何 花王曰 吾過矣 吾過矣


어떤 이가 ‘두 사람이 왔는데 어느 쪽을 취하고 어느 쪽을 버리시겠습니까?’ 하니, 화왕이 ‘장부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아름다운 여인은 얻기가 어려운 것이니 이 일을 어찌할꼬?’라고 말했습니다. 장부가 나아와서 말하기를 ‘저는 대왕이 총명하여 이치를 잘 알 것이라 생각하여 왔던 것인데, 지금 보니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릇 임금 된 사람 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하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드뭅니다. 이 때문에 맹가(孟軻, 맹자)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고, 풍당(馮唐)은 낭서(郞署, 숙위관으로 낮은 관직임)에 머물러 백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이러하였으니 전들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니, 화왕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라고 했답니다.”


於是 王愀然作色曰 子之寓言 誠有深志 請書之 以謂王者之戒 遂擢聰以高秩

이 이야기를 듣고 신문왕은 안색을 바로 하며 말했다.

“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담겨있다. 글로 써서 왕 된 이들의 경계로 삼기 바란다.”


신문왕릉은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전 시대의 신라 왕릉보다 좀 더 장식물이 늘어나고 섬세해졌음을 알 수 있다.


9. 소성거사(小性居士), 원효


원효는 신라 중대의 승려로 같은 시기에 활동한 고승 의상과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이다. 해골물 일화로도 유명하며 파계 행적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계는 물론이고 한국 고대사, 철학사, 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또한 의상대사, 자장율사, 도선대사 등과 함께 웬만한 고찰(古刹)들의 창건자이다.


삼국 통일기에 인생 대부분을 보냈고 통일 신라의 탄생을 보았으며, 화쟁(和諍) 사상을 주장해 불교의 대중화는 물론 종파 통합의 정신을 강조했다.

불교의 사상을 깊게 접할 일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원효하면 그냥 '해골물을 마신 승려'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 불교뿐 아니라 종교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한 사상가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승려가 많았는데 저서 『대승기신론 소』는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논문이었고, 『십문화쟁론』은 당시 유행하던 불교 이론을 묶어 정리해놓은 책이다.


『대승기신론 소』는 중국의 마명보살이 저술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원효가 해석과 주를 붙인 것이다. 이후 대승기신론의 주석서 가운데 최고로 여겨져 중국으로도 전파되었고, 이후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학계 전체에 '해동소(海東疏)'라는 이름으로 널리 유통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불경으로 통했다.

『십문화쟁론』에서 원효는 인간 세계의 화(和)와 쟁(諍)이라는 이면성을 인정하면서, 이 화와 쟁은 정(正)과 반(反)에 집착하고 타협하는 합(合)이 아니라, 또한 이 둘이 불이(不二)라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쟁과 화를 동화시켜 나가는 원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따라서 변증법적 불교 논리 전개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원효를 이야기할 때 가장 유명한 일화는 해골물 이야기이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두 사람은 황폐한 언덕길을 가다가 밤이 되어 무덤 사이에서 자게 되었다. 한밤중에 원효는 심한 갈증이 나서 굴 안의 샘물을 손으로 움켜 마셨는데 달고 시원했다. 그런데 날이 밝아서 보니 마신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크게 깨닫고 유학을 포기했다.


당시 중국 유학을 한 승려들은 귀족 불교의 발전에 기여했다. 세속오계(世俗五戒)로 유명한 원광(圓光)법사, 율법의 대가 자장(慈藏)율사 등이 대표적이다. 의상대사 역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귀족 불교를 지배하는 인물이 되었다. 의상은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고 했다.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바로 모든 것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다’라는 의미다. 하나는 임금이고, 모든 것과 많은 것은 백성이다. 백성은 임금에게서 비롯되었으니 임금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존중하자는 말이다.


반면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귀족 불교와 다른 길을 걸었다. 왕족과 귀족 중심의 불교가 아닌 민중 불교를 개척했다. 원효는 낮에는 백성들과 어울리면서 밤이 되면 연구와 저술을 하는 초인적인 생활을 했다. 원효는 청소년기부터 대단한 결심을 한 사람인데 십 대 중후반기에 쓴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의 한 구절을 보면 그 결의를 알 수 있다.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리더라도 불기운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주린 창자가 마치 끊어지듯 하더라도 음식을 구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100년도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않는다 말할 것이며, 수행하지 않고 놀기만 할 것인가.”


고려시대 승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원효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가난하고 무지한 무리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된 데에는 원효의 교화가 컸다.”


10. 원효의 열반 성지, 골굴사


약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 선인 일행이 경주 함월산에 정착하면서 골굴사와 기림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골굴사는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의 석굴 사원을 본떠서 석굴사원 형태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 사원이다.


조선 중기 겸재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도』를 보면, 골굴사는 여러 석굴들 앞에 목조 전실을 만들고 여기에 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조선 중후기에 화재로 소실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경주에 사는 박 씨 일가가 상주하면서 다시 사찰로 만들었고, 1989년에 한 개인에게 매매되어 넘어간 상태였던 것을 당시 기림사 주지스님이 매입해서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로 등록되었다.

주불인 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이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주변에 관음굴, 지장굴, 약사굴, 나한굴, 신중단, 칠성단, 산신당 등의 굴법당과 더불어 남근바위, 여궁 등의 민간 전래 신앙의 흔적까지 있어 한국적인 석굴사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골굴사에는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 수련원이 개설되어 내국인은 물론 수많은 외국인들이 불교 전통 무예를 배우는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소림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원효대사가 열반한 성지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 겸재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도』를 보면, 골굴사는 여러 석굴들 앞에 목조 전실을 만들고 여기에 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11. 문무왕(文武王)과 신문왕(神文王)의 길, 문무대왕로드

문무왕은 신라의 제30대 군주로 이름은 김법민이다. 아버지는 제29대 태종 무열왕이고 모친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이다. 남동생은 김인문이고 여동생 지소부인은 김유신의 부인이다. 아버지 태종 무열왕과 그 아들 신문왕과 함께 통일신라 최전성기를 이끌었었으면,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한때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의 마지막 승부까지 승리하여 최후의 승자로 남을 수 있게 한 군주이다. 한 마디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성한 군주이다.


백제는 아버지 태종 무열왕 때 멸망하였다. 뒤이어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은 거의 백제 부흥군,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와의 전쟁의 연속이었다.


삼국통일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공을 막아낸 업적이 있기 때문에 역사에 좋은 평가를 받는다. 태자 시절부터 즉위 후까지 문무 양면에서 활약해서 왕명도 문무왕(文武王)이 되었다. 한마디로 화전 양면 전술의 달인이며 거대한 국력을 가진 당나라와의 전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화전 양면 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문무왕의 뛰어난 지략 때문이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은 바다를 통해 칩입해 올 왜구를 걱정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동해바다 가까운 곳에 절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던 문무왕은 681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내가 왕이 된 후 지금까지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나날이 전쟁의 연속이었던 같소.”

“덕분에 우리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또 당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룬 것 같습니다.”

“경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오. 이제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동해에 장사를 지내주시오.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소.”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고, 그의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 장사를 지냈고, 문무왕이 완성하지 못한 절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절의 이름을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감은사지(感恩寺址)’라고 지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이때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난 바로 뒤인지라 넘치는 자부심이 표출된 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전 신라의 가람배치는 황룡사 유적에서 알 수 있듯이 1탑식(1탑 3금당)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통일신라로 넘어와서는 2탑식(2탑 1금당) 가람배치가 주를 이루었는데 후에 세워진 불국사의 석가탑, 다보탑의 배치를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기단을 2단으로 한 새로운 형식을 선보였는데 이는 이후 건립되는 석탑의 시원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감은사지 석탑 이후 2단의 기단과 3층의 탑신부를 가진 탑이 이후 통일신라 석탑의 주류를 이루었다. 1959년 서탑을, 1996년 동탑을 해체수리하였고 탑에서 나온 두 정교한 금동 사리갖춤은 현재 각각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나누어 전시 중이다.


신문왕은 이 감은사를 바다의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금당의 기초공사를 돌로 하였는데, 특히 돌과 돌 사이에 빈 공간을 두고 바닷물이 흘러들어 오도록 설계를 함으로써 왜구로부터 바다를 지키고 있는 문무왕이 잠시나마 부처님의 금당으로 와서 쉴 수 있게 하였다.


『삼국사기』 만파식적 편에는 문무왕과 신문왕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전해진다.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김 씨이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681) 7월 7일에 왕위에 오르자, 거룩하신 선대부왕인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

【절에 있는 기록은 이러하다. “문무왕께서 왜군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짓기 시작하셨지만 다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어 바다의 용이 되셨다. 그 아드님이신 신문왕께서 왕위에 오른 해인 개요 2년에 공사를 마쳤다.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두었으니, 곧 용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왕의 유언에 따라 뼈를 보관한 곳이므로, 대왕암(大王岩)이라고 불렀고 절은 감은사(感恩寺)라고 하였다. 뒤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

다음 해 임오년(서기 682) 5월 초하루에 해관 파진찬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있었는데,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와서 물결에 따라 오가고 있습니다.”

왕이 이상하게 여기어 천문을 담당한 관리인 김춘질(金春質)에게 점을 치게 하였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거룩하신 선왕께서 이제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기에 또 김유신 공도 삼십삼천의 한 분으로 이제 이 신라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성을 지킬 보물을 내리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 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에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고는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도록 하였다. 산의 모습은 마치 거북이 머리 같았고 그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해졌다. 사신이 와서 이러한 사실을 아뢰자, 왕은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 다음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해져서 하나가 되더니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쳐 7일 동안이나 깜깜하였다가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이 잔잔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갔는데, 용이 검은 옥띠를 받들고 와서 바쳤다. 왕이 용을 맞이하여 함께 앉아서 물었다.

“이 산의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해지는 것은 어찌해서인가?” 용이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합해진 연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거룩하신 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서 불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지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마음을 합치셔서 이처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왕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서 오색찬란한 비단과 금과 옥으로 용에게 보답하였다. 그리고 명을 내려 대나무를 베도록 하였는데, 바다에서 나올 때 산과 용이 홀연히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는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태자 이공(理恭)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일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축하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옥대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이 옥띠의 여러 개의 장식은 모두 다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태자가 아뢰었다.

“하나를 따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왼쪽 두 번째 것을 따서 계곡물에 넣었더니 곧 용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갔고, 그 땅은 연못이 되었다. 그래서 이 연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부른다.

왕이 대궐로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였다.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물면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었으며,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그래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만파식적


감은사지는 황룡사지처럼 그리 넓지도 않고, 불국사처럼 그리 문화재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경주를 여행하는 답사객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이다. 삼국통일과 신라의 중흥이라는 대업을 완성한 문무왕과 신문왕의 이야기가 이렇게 서려있을 뿐 아니라, 감은사지 석탑에는, 웅장하면 소박하지 말던가, 화려하면 수수하지 말던가, 아름다우면 겸손하지 말던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고픈 답사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감은사지 석탑에는, 웅장하면 소박하지 말던가, 화려하면 수수하지 말던가, 아름다우면 겸손하지 말던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고픈 답사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2.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서원(書院)은 조선 시대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교육 기관이다.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고등 교육 기관이지만, 국립으로 전국 각 도시에 분배된 향교와 달리 사립학교로서 지역의 교육과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조선 중기 4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지방사립대학교라고 볼 수 있으며, 서원의 교장을 훈장(訓長)이라 하고, 학생회장을 장의(掌議)라 하였다.

퇴계 이황은 서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성균관이나 향교는 번잡한 도시에 있어서 앞으로는 번거로운 학칙에 얽매이고 뒤로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쉬우니, 어찌 서원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서원은 크게 교육의 기능과 지방 교화의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먼저 교육의 기능에 대해 살펴보면, 서원에서의 교육의 목표는 훌륭한 성현을 본받아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하는 것과 동시에 정계로 진출하기 위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원에서는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 중심의 공부에 집중했다.


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지방 교화 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해 십철, 그리고 우리나라 18현 및 송나라의 6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배향 인물의 선택 폭이 국립인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훨씬 넓었다.


이외에도 서원은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는데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의 출판 기능도 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다. 또한 서원에서는 그 지역의 여론을 이끌어 나갔음은 물론이고, 각 지역별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규탄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 활동도 수행하였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개는 다음과 같다.


소수서원 (경북 영주) 남계서원 (경남 함양) 옥산서원 (경북 경주) 도산서원 (경북 안동)

필암서원 (전남 장성) 도동서원 (대구 달성) 병산서원 (경북 안동) 무성서원 (전북 정읍)

돈암서원 (충남 논산)


13.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 조선 유림(儒林)들의 집회 장소이자 학당(學堂)인 서원을 철폐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를 서원철폐령이라고 하며 줄여서 서폐령(書廢令) 이라고도 한다.

본래 서원의 기능은 조선왕조 기간 동안 유림들이 학문에 정진하고 선조들을 배향하며 충, 효, 예를 가르치던 곳으로 성균관, 향교와 함께 유림의 3대 학문의 전당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대학 및 대학원에 속하는 교육 기관이며, 성년이 된 유생들에게 유학교육과 동시에 선현에 대한 존경과 배향을 가르쳤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원의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옛 성현을 모신다는 이유로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이나 제사 비용 징수 등의 과도한 수탈을 일삼았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을 서원으로 끌고 가 사사로이 처벌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를 말리던 지방관이 서원에 끌려가 곤장을 맞는 등 그 폐단이 적지 않았다. 또한 탈세와 군역 회피 역시 따라붙었다.


이 문제가 조정까지 전해지게 되면서 숙종 때부터 사사로운 목적이나 착취의 목적으로 서원을 세울 경우 제재를 내리고 관련 유생은 과거시험에 대한 제한을 두게 했으며 일부는 훼철(毁撤)되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 시절에 한 사람을 중복하여 둔 서원 등을 적발하여 철폐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원 설립이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조정에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단속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원은 자꾸 늘어서 숙종의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이후 영조가 금지령을 더 강하게 재확인해야 했을 정도였다. 거기에 서원들 사이에서 유림 및 양반들의 텃세가 날로 심해지고 폐단이 더욱 심해져 서원은 이때를 계기로 학문 목적의 기능을 일부 상실하고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악덕 집단으로 낙인 되어 민중들의 지탄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양반들의 텃세가 심할수록 민중들의 고통도 더해졌으며 일부 서원은 이를 빌미로 민중으로부터 향세(鄕稅)를 과다하게 징수하기도 하는 등 병폐가 심해지기도 하였다.


1863년 고종의 섭정을 맡게 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게 되면서 서원의 텃세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조대비의 권위와 입을 빌려 서원의 폐단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나가면서 서원 철폐의 명분을 쌓아나갔고, 만동묘를 철폐한 것을 시작으로 병인양요 이후에는 온갖 텃세와 병폐, 비리로 얼룩진 전국의 서원들을 모두 철폐시키고 서원에 관련된 양반 및 유림은 퇴출하도록 하는 강경책을 내놓으며 서원과 유림들을 압박하였다.


이에 강한 저항과 반발에 부딪혔지만 대원군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면서 서원철폐의 의지를 확고하게 내비친다.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온다 할지라도 내 백성을 힘들게 한다면 나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서원 유림들과 양반가들은 만동묘 철폐 때까지만 해도 상소를 올리고 매우 강렬하게 반발했지만, 임금인 고종이 매우 단호한 의지를 보이며 철폐 반대 상소를 꾸짖으면서 곧 사그라들었다. 대원군은 자신의 조상인 인평대군의 서원도 가차 없이 철거하고 부실하고 비리가 많은 불량한 서원은 조사를 통해 완전 철폐하도록 하고 나머지 일부 서원만을 존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철폐된 서원의 예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토록 하였고, 퇴출된 서원들은 건물 자체가 강제 훼철되어 소실되었다. 우암 송시열이 세운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시작으로 전국의 600여 개의 서원이 모두 철폐되었고 47개의 서원만 남기게 되었다.


대원군 실각 이후 유림들은 고종에게 서원의 복구를 요구하지만 고종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근대화의 물결 속에 유림들이 한국사의 주도 세력에서 물러나면서 서원에 대한 복구 요구는 사라져 갔다.


14. 퇴계의 스승, 이언적


이언적(李彦迪)은 조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양동마을 태생으로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 종사와 조선왕조 최고 정치가의 영예인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명이다. 그의 호인 회재(回財)는 회암(晦庵 :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르겠다는 의미이다.


이언적은 조선 시대 도학의 이론과 실천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한국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언적으로부터 시작된 도학의 논리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논쟁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특히 이언적의 태극논쟁은 조선 시대 성리학의 이론적 체계를 최초로 달성했다. 이언적의 철학사상은 단순히 성리학의 논리만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깊은 사색과 수양을 통해 주자의 학설에 대해 스스로 체득한 원리를 체계화하고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를 정리해 책으로 남김으로써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퇴계 이황은 「회재 이선생 행장(晦齋李先生行狀)」에서 우리나라의 선현들은 삶의 교화는 있지만 전하는 학문의 내용이 없었는데 회재는 서책을 남겨 그의 학문을 후대에 전했으니, 이런 분이 없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인현(仁賢)의 교화(敎化)를 입었으나 학문은 전함이 없다. (중략) 우리 선생(先生)께서는 수수(授受)한 곳 없이 스스로 사학(斯學)을 떨치시어 암연(闇然)한 가운데 밝은 도(道)를 닦으시고 덕(德)이 행실(行實)에 부합(符合)되시며 병연(炳然)이 문필(文筆)이 특출(特出)하시어 말씀을 후세(後世)에 드리운 분이시니 동방(東方)에 거의 그 유(類)가 없다.”


이언적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의 뒤를 이어 문묘에 종사되었다.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후대의 선비들이 그를 조선 도학의 선현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도학의 계보는 포은 정몽주를 시작으로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로 계승되었지만 집필한 문헌이 불에 타거나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아 그들의 성리학 사상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회재 이언적의 저술들은 아들 이전인을 통해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이 되었다. 더욱이 이전인이 부친의 행장(行狀)을 퇴계 이황에게 부탁하면서 저술 내용과 가치가 퇴계 이황에 의해 높이 평가되고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


이언적 이전에 문묘에 종사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는 사화와 인연이 깊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언적도 사화와 인연이 깊다. 조선 전기에 일어난 사화가 모두 그의 생애 동안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언적이 8살일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14세 때에는 갑자사화, 벼슬에 나가 있던 29세 때에는 기묘사화가 있었다. 기묘사화 당시 이언적은 조부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와 있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55세가 되던 1545년에는 을사사화, 57세가 되던 1547년에는 양재역 벽서 사건이라 불리는 정미사화가 있었다.


기존의 사화에서 선비들은 죽음으로 도학을 보였지만 이언적은 유배지에서 남긴 저술로 조선 성리학의 사상적 실체를 남겼다. 이것이 퇴계 이황을 비롯한 조선의 선비들이 이언적을 동방의 선현으로 문묘에 종사한 이유였다. 퇴계 이황이 쓴 이언적의 행장에는 그가 책상에 새겨두고 스스로를 경계했다는 글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날마다 3가지를 반성하니, 내 몸이 하늘을 섬김에 다하지 못함은 없는가, 임금과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되지 못함은 없는가, 마음을 지킴에 바르지 못함은 없는가?”

『회재전서』권 14 「회재이선생행장(晦齋李先生行狀)」


날마다 자신을 성찰하며 정진했던 이언적의 학문은 회재 이언적의 호와 퇴계 이황의 호 첫 글자를 따 ‘회퇴학파’라 불릴 정도로 이황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5. 끝이 없는 곳, 무수히 많은 곳, 옥산서원(玉山書院)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자옥산 자락에는 회재 이언적 선생을 기리기 위한 옥산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서원 앞의 계곡물은 폭포를 이루고 있는데, 옛날 유생들이 심신을 깨끗이 하고 자연을 관조하며 학문을 연마하라는 의미로 퇴계 이황이 세심대(洗心臺)라고 새겨놓았다.


서원으로 진입하는 외삼문(外三門)은 역락문(亦樂門)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서향을 하고 있다. ‘역락(亦樂)’은 논어 ‘학이(學而)’편에서 인용된 말로 ‘뜻이 맞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면 기쁘다’는 의미이다.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역락문으로 들어서면 앞쪽으로 작은 도랑이 있는데 이는 서원의 명당수로 자계천의 상류에서 서원의 북쪽 담장 아래로 끌어들인 물길이다. 이 작은 도랑을 건너면 나오는 건물이 무변루(無邊樓)이다.


무변(無邊)이란, ‘끝이 없는, 무수히 많은’의 의미인데, 본래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고 하여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을 따서 무변루로 고쳤다.


무변(無邊)이란, ‘끝이 없는, 무수히 많은’의 의미인데, 본래 누각의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고 하여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을 따서 무변루로 고쳤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얹은 건물이다. 2층 누마루에 서면 서원 안으로는 강당과 마당이 시원하게 보이고, 서원 밖으로는 계곡과 앞산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한국 서원 건축양식에 처음 도입한 누마루 형식의 건물이다. 편액의 글씨는 역시 한석봉이 썼다.


무변루에서 안쪽을 바라보면 정면에 옥산서원(구인당)이 보이고, 좌우로 유생들이 생활하는 기숙사가 있는데, 동재(東齋)인 민구재(敏求齋)와 서재(西齋)인 암수재(闇修齋)가 있다. 서원의 동재에는 선배 유생들이 생활하였고, 서재에서는 후배 유생들이 생활하였다.


동재인 민구재 쪽으로는 관솔불을 피워 서원을 밝히던 정료대가 서 있다. 관솔불이란, 소나무의 가지가 부러지면 옹이가 되고 옹이 주변에는 많은 송진이 모여 빨갛게 되는데, 이것을 쪼개어 불은 붙이면 송진이 계속 빨려 올라오면서 아주 오래 불이 붙어 있게 되는데 이것을 관솔불이라고 한다.


무변루에서 바라볼 때 정면에 보이는 ‘옥산서원(玉山書院)’ 현판은 처음에는 조선 후기 명필가 이산해가 썼는데, 1839년 화재로 소실되자 추사 김정희가 다시 쓴 것이다. 그리고 안쪽의 대청마루에 걸린 또 하나의 ‘옥산서원(玉山書院)’ 현판은 이산해의 글씨로 옛날 것을 모각한 것이다. 또한 마루 안쪽의 ‘구인당(求仁堂)’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 옥산서원의 구인당 한 건물에만 조선을 대표하는 명필가 3명의 글씨가 걸려 있다.


구인당은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강의와 토론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던 공간이다. 마루 양쪽의 양진재와 해립재는 교사들이 지내는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과 비슷한 공간이다.


구인당 뒤쪽에는 내삼문(內三門)인 체인문(體仁門)이 있고 체인문을 둘러싼 담장 안에 이언적 선생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墓)’와 제사 준비 및 제기 보관 공간인 전사청이 있다. ‘체인(締姻)’은, ‘어질고 착한 마음을 실천에 옮긴다’는 뜻으로 온건적 합리주의자로 사회 혼란을 인(仁)으로 어루만지며 바른길을 찾을 것을 강조해 온 이언적 선생의 실천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체인묘를 바라볼 때 좌측으로는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신도비가 있는데 당시 비문은 기대승이 짓고, 이산해가 썼다. 건립 당시에는 서원 앞의 계곡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해 서원 안으로 옮겼다. 우측으로는 서원의 강학활동과 관련된 교재, 성적표 등을 보관해 온 경각(經閣)과 서원에서 만든 목판을 보관한 문집 판각이 위치하고 있다.


천년도시를 걷다. 경주(慶州)


keyword
이전 03화3. 한바탕 전주(全州), 세상을 비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