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형 답사
1)'삼촌과 조카의 고장'이라함은, 단종의 유배지 영월과 단종의 삼촌이었던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난 곳이 영주이기에 그렇게 명명하였다.
1. 내 마음속 외갓집, 영월(寧越)
영월의 한자어를 풀이해보면 편안할 영(寧)에 넘을 월(越)이다. 따듯한 햇살이 비추는 날 편한 신발을 신고 고개를 넘어간다. 가다 보면 저 멀리서 외할머니가 손 흔들며 함박웃음으로 반겨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번 여행지는 사계절 언제든 나를 반겨주는 내 마음속 외갓집 영월이다.
영월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삼국 시대에는 삼국이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으며 고려 때에 이르러 영월(寧越)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본래는 충청도의 땅이었으나 조선 초기인 정종 1년(1399)에 강원도에 속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영월이라고 하면 동강 래프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동강은 영월의 상징적인 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영월에는 동강뿐이 아니라 서강도 흐르고 있다. 한강의 발원지인 태백 검룡소에서 시작한 동강과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류하여 만들어낸 서강이 몸을 합해 남한강을 이룬다. 이 남한강이 흘러 흘러 양평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합해져 비로소 한강이 된다.
행정구역을 살펴보면 2개의 읍과 7개의 면으로 구성된다. 영월군의 면적은 1,127.45 km² (약 34만 평)이다. 인구는 2021년 8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38,055명이며 이 중 50% 이상의 인구가 영월읍에 거주한다. 인구 최고점은 1960~70년대 당시 호황을 누리던 상동 텅스텐 광산이 있어서 전국에서 유입된 인구가 4만 명이 넘던 시절이 있었다. 상동 광산이 1993년 폐광된 이후 심각한 인구 부족 현상을 겪었지만 최근 광산이 다시 문을 열게 되었으니 ‘상동의 봄’을 다시 한번 재현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영월의 행정구역 명칭도 변화가 있었는데 그 변화를 살펴보면, 2009년 영월 하동면이 김삿갓면으로 그리고 서면이 한반도면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2016년에는 수주면이 무릉도원면으로 명칭 변경을 하였다. 그 후 2021년에는 중동면이 산솔면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지역의 특징을 드러낼 수 있는 명칭으로의 변경을 통해 관광 수입의 증가와 귀농·귀촌 인구의 유입 효과를 보고 있다.
2. 억겁의 시간이 만들어낸 걸작, 요선암(邀仙岩)
영월 여행의 첫 시작점은 무릉도원면에 있는 요선정이다. 맞을 요(邀), 선인 선(僊) 자를 쓰니 ‘신선을 맞이하여 함께 노니는 정자’라는 뜻이다. 요선정은 불교 전성기인 통일 신라시대 철감국사 도윤과 징효대사가 사자산 기슭에 흥령선원을 개원하고 자주 이곳에 와서 포교를 하던 곳으로 그 당시 작은 암자가 있던 곳이라 한다.
이 지방에 살고 있는 원 씨, 곽 씨, 이 씨 중심으로 주민들이 힘을 모아 숙종, 영조, 정조가 하사한 편액과 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하여 1913년 정자를 짓고 요선정이라 불렀다.
요선정은 조선 중기 풍류가인 봉래 양사언이 이곳 경치에 반해 선녀탕 바위에 요선암(邀仙岩)이라는 글자를 새긴 데서 유래된 이름이며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구불구불한 물줄기와 우아한 산세를 바라보며 마치 신선처럼 앉아있다.
영월은 조선 시대 왕과도 관련이 꽤 있는 고장인데 영월에 유배되어 영월에 모셔져 있는 단종이 그러하고 또 조선 후기 숙종과도 관련이 깊은 고장이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은 계유정난 이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었고 이어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이렇게 단종은 폐위된 왕으로써 노산군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조선 후기 숙종은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하고 종묘에 모셨으며 노산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였다.
현재 요선정 내부에는 숙종의 어제시(御製詩)*가 모셔져 있는데 그 내용을 다음과 같다. 요선정 근처의 풍광을 둘러보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임금이 직접 시를 써서 내려보내 주셨을까’ 하는 의문이 해결된다.
*추봉 : 죽은 뒤에 작위를 봉(封)함
*어제시 : 왕이 손수 지은 시
峨峨石壁靑雲接 - 높고 높은 석벽은 구름에 닿았고
樣樣澄江碧水連 - 맑은 강 물결은 짙푸르게 이어지도다
山鳥好禽鳴樹上 - 숲 속에 아름다운 산새 우짖고
野花春草映階前 - 들꽃과 봄풀은 뜰 아래에 비치었네
携登宮穩呼兒酌 - 술을 가지고 누에 올라 따르게 하니
聞說雙樓在酒泉 - 듣건대 쌍루가 주천에 있다는데
幾經葺理尙能全 - 하 오랜 세월에도 그대로 일세
醉倚欄干白日眠 - 취하여 난간에 기대어 낮잠을 이루도다.
이 숙종의 어제시는 청허루에 간직되었으나 청허루에 화재가 있어 어제시는 누대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청허루를 중건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선왕의 시문을 똑같이 그 자리에 보존하기 위해 숙종의 어제시를 손수 다시 쓰고 그 뒤에 다시 시 한 편을 더 보태어 당시의 강원감사인 임집에게 내리니 새로 중건된 청허루에는 두 임금의 어제시를 봉안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정조는 청허루에 봉안된 두 분 선왕의 어제시를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敬吹酒泉縣樓所奉 序"(경취주천현루소봉 서)를 지어 두 분 선왕의 어제시 옆에 걸게 하니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주천은 옛 고을로서 지금은 원주에 속해 있으며
청허와 빙허의 두 누각이 있는 경치 좋은 곳으로 옛날 심정보 목사가 있던 고을이다
숙종대왕께서 지으신 시의 현판은 그간 화재를 입었는데
무인년 고을을 지키던 신하가 중건하였음을 영조대왕께서
들으시고 原篇(원편)을 찾아 손수 쓰시고 서문을 지으시어
근신에게 명하여 달게 하니 한 누각이 이루어지고 훼손되는데
따라 무겁고 가벼움이 있는 게 아니라
좋은 글과 글씨가 황홀하기만 하니 이 누는 이것으로 빛나고
그 고을의 산천 또한 이 누로 인해 빛나니 이 누각이 이 고을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기와를 잇고 수리하는 일은 가히 힘쓸 줄 믿으니
공경해서 시를 짓고 대략을 적어 그 곁에 달게 하노라
하는 내용의 서문과 함께 정조대왕은 어제시 한 편을 내려주었다. 숙종에 이어 영조, 정조까지 선대왕(단종)의 아픔이 서려 있는 영월이라는 작은 고을을 잊지 않고 고스란히 역사 속에 남겨두었다.
요선정 아래에는 요선암이 있다. 요선(邀仙)이란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그중 하나에는 세월에 깎여 흔적만 희미하게 남은 글씨가 있는데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렸던 봉래 양사언이 평창군수를 지낼 때 이곳의 풍광에 반해 ‘신선이 노닐던 곳’이란 뜻으로 ‘요선암(邀仙岩)’이라는 글자를 돌에 새겼고 거기서 이 요선암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요선암에는 돌개구멍이 있는데 일명 ‘포트홀(pot hole)’로 잘 알려져 있다. 암반의 오목한 곳에 물이 소용돌이치면서 흐르는 와류 때문에 생긴다. 모래나 자갈이 물과 함께 소용돌이치면서 암반을 마모시켜 발달하는 지형이 바로 돌개구멍이다. 깊고 동그란 돌개구멍에서는 선녀들이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고 또 동글동글 웅덩이에서 신선들이 탁족을 즐겼다고 한다.
우리는 100세 시대에 돌입한 지 꽤 되었지만 아직은 사람은 100년을 살기가 쉽진 않다. 여기 요선암 돌개구멍이 만들어지려면 사람의 수명보다 수백 배, 수천 배가 더 지나야 한다. 수많은 시간과 물줄기가 천연 화강암반을 매만지고 다듬어서 만들어냈으니 억겁의 세월에 한 번 놀라고 그 세월을 견뎌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돌개구멍의 태연한 자태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요선암 앞에 서면 자연이라는 무한한 대상에게 우리가 좀 더 겸손하고 순수해져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3. 구산선문
통일신라 말기에는 새로운 불교사상인 선종(禪宗)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크게 성장했다. 선종은 경전을 위주로 공부하는 것보다 스스로의 본성을 깨닫는 것을 더 중시하였다. 왕실과 밀착해서 세력을 쥐고 있던 교종의 방해를 받기도 했지만 지방 호족들의 큰 호응과 후원을 받으며 크게 발전해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는데 크게 9개 파가 두드러졌다. 이 9개 파의 본산을 구산(九山)이라 한다.
구산의 사찰들은 모두 깊은 산속 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런 풍토를 따라 크고 작은 사찰들이 산간 지역에 창건되었다. 오늘날 산속의 사찰에서 많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구산선문을 연 스님과 중심 사찰은 다음과 같다.
실상산문 : 홍척, 남원 실상사
가지산문 : 도의, 장흥 보림사
사굴산문 : 범일, 강릉 굴산사
동리산문 : 혜철, 곡성 태안사
성주산문 : 무염, 보령 성주사
사자산문 : 철감, 영월 흥녕사 (법흥사)
희양산문 : 도헌, 문경 봉암사
봉림산문 : 현욱, 창원 봉림사
수미산문 : 이엄, 해주 광조사
당시의 불교는 지배층부터 백성들까지 전 국민이 신봉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구산선문은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후삼국시대 신라 조정이나 지방 호족들은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고승비를 세워주거나 선종 승려가 자기 지역에 머물도록 보호해 주는 등 많은 노력을 했고 지금도 이 시기 구산선문 사찰의 고승비가 많이 남아있다.
4. 사자산 법흥사
법흥사는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사자산에 있는 사찰로 삼국시대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며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중의 한 곳으로써 대표적인 불교 성지이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전수받아 643년에 귀국하였다. 그 뒤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등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또한 법흥사는 위에 서술된 바와 같이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자산문이었다.
법흥사에 당도하여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일주문의 기둥을 코끼리와 용이 각각 양쪽에서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영원한 진리의 가르침으로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발원하며 사자산문을 일으키라는 뜻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받침석에는 12지신상을 양각으로 조각해 놓은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이니 어떠한 나쁜 기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있다. 일주문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법흥사 입구인 원음루와 금강문에 도착하게 된다. 다포계 팔작지붕 형태로 매우 화려한 건물이다. 금강문을 지나면 포대화상이 반겨주고 있으며 그 뒤로는 보물인 징효대사 탑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징효대사의 탑비로 고려 혜종 1년(944)에 세워진 것이다. 징효대사는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을 연 칠감선사 도윤의 제자로 흥녕사(법흥사의 옛 이름)에서 선종의 법문을 크게 일으켰던 승려이다. 비석의 글은 최언위가 짓고 최윤이 썼으며 최환규가 새겼다. 비석의 내용은 징효대사가 평생 한 일과 신라 효공왕이 징효대사라는 시호와 보인이라는 탑명을 내린 것 등을 적고 있다.
신라 말 고려 초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탑비로 비 받침(귀부)은 거북 모양이며 비 몸 받침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용을 새긴 비 머릿돌(이수)을 얹었다. 비 받침의 거북 머리는 용머리를 본떴으며 부릅뜬 눈에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비 머릿돌에는 네 마리의 용과 "징효대사"라는 전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섬세하면서도 웅건한 느낌을 준다.
고승들의 비문을 살펴보면 예외 없이 스님들의 남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나오는데 이 비문 중에 징효대사가 도담선사에게 배움을 구할 때 주고받은 선문답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징효대사가 도담선사를 뵙고 배움을 구하고자 절을 올렸는데 처음 뵙는 분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도담선사도 그러한 느낌이었는지 정효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늦게야 상봉하다니 그동안이 얼마나 되었는가?” 하고 물으니 징효는 앞에 있는 물병을 가리키며, “이 물병이 물병이 아닐 때에는 어떠했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도담선사는 속으로 ‘어쭈 제법이네’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수준을 높여 이렇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절중이라고 하옵니다.”
“그러면 절중이 아닌 때는 누구인가?”
이렇게 나오면 징효는 당황하여 대답을 못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징효는 당당히 받아넘겼다.
“절중이 아닌 때는 이와 같이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도담선사는 무릎을 탁 치며 “내가 많은 사람을 상대했지만 그대 같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며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후 절중은 16년 동안 선방에서 진리를 깊이 탐구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고승들의 선문답은 이처럼 매우 간결한 내용 같으면서도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이미 결론이 나 있으며 단지 서로가 서로를 확인할 뿐이다.
탑비 뒤에는 징효국사의 승탑(부도)이 있다. 부도란 스님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일종의 묘탑이다. 이 부도는 두 개의 네모난 돌을 바닥에 깔고 팔각의 아래 받침돌을 놓았는데 각 면에는 안상이 새겨 있다. 받침돌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위, 아래 받침돌과 모서리에 기둥 모양이 새겨진 가운데 받침돌로 구성되어 있다. 불상을 올려놓는 연화대좌와 비슷한 형태이다. 몸돌은 팔각형의 북 모양을 하고 있으며 투박한 모습의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올려놓고 있다. 부도의 위치로 보아 탑비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법흥사 관람의 포인트는 세 구역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인데 극락전 구역과 약사전 구역, 적멸보궁 구역이다.
먼저 극락전 구역으로 이동해보자. 극락전은 법흥사의 정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건물로 팔작지붕을 얹고 있다. 여기서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으며 그 양쪽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극락전 옆에는 조사전이 자리 잡고 있는데 여기에는 자장율사와 징효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또한 그 옆으로는 한글로 현판을 써놓은 만다라전이 있는데 내부에는 티베트 스님들이 참배를 왔다가 모래로 만들었다는 만다라를 볼 수 있다.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모래로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세계를 조성한 것이다. 원래 만다라의 완성은 모래로 이상 세계를 조형한 뒤 이를 파괴하는 것인데 이곳의 만다라는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완성 직전의 모습을 그대로 전시해 놓았다.
다음으로 약사전 구역으로 올라가면 약사전과 산신각, 법운당 등의 건물을 볼 수 있다. 약사전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 공간으로 특히 질병과 관련된 일을 관장하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곳이다. 약사전은 보통 작은 전각인 경우가 많은데 법흥사의 약사전은 굉장히 거대한 편이다. 약사전 위로는 산신각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산신각은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민간신앙과 불교문화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전각으로 산신을 모시는 곳이다. 보통은 사찰의 꼭대기 부근에 세운다.
이어서 적멸보궁 구역으로 올라가면 푸른색 지붕을 덮고 있는 기품 있는 적멸보궁이 모습을 볼 수 있다. 적멸보궁은 불교의 전각 중 가장 권위 있는 전각이다.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이 대웅전인데 적멸보궁은 대웅전보다 훨씬 높은 레벨 아니 최고 레벨에 있는 전각이다. 적멸은 모든 것이 소멸한 상태, 온갖 번뇌와 잡스러움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며 부처가 열반하기 직전 적멸의 법을 설법하는 장소를 상징하는 곳이 적멸보궁이다. 이러한 적멸보궁은 아무 사찰에나 지을 수 없고 오직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는 곳에서만 지을 수 있다. 그리고 적멸보궁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불상이 없다는 점이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곳에 세우므로 굳이 전각에 부처를 대신하는 불상을 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리 쪽으로 난 창을 통해서 부처의 진신사리를 만나게 된다.
5.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석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초기 기록으로는 땅이 타면서 연기가 났다는『삼국사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진평왕 31년(609) 정월에 모지악(경북 영일군 갈탄 지역으로 추정)의 땅이 타면서 연기가 났다’라는 기록과 ‘태종 무열왕 4년(657) 가을에 동쪽 토함산(불국사 토함산 부근으로 추정)에서 땅이 타는 연기가 나서 3년 만에 꺼졌다’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또 『고려사』에는 명종 10년(1180)에 ‘의연촌에서 땅이 타고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적 석탄개발은 러시아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개입한 계기는 당시 우리나라가 처한 대내외적 정세와 관련이 있다. 조선을 둘러싼 주변 강국의 입김이 강한 때에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러시아가 조선의 각종 이권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채굴허가를 받은 러시아인들이 실제로 석탄을 생산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실제로 탄광개발이 착수된 것은 황실이 직영하고 나선 1903년 1월의 일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탄광 역시 군정청으로 모두 귀속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는 석탄증산을 위해 노력하였고, 전쟁 중에도 1950년 11월 1일에 '대한 석탄공사'를 발족하였다. 6.25 전쟁 이후 정부는 석탄 운반을 위한 철도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6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석탄증산을 위한 적극적인 사업을 펼쳤다. 그 결과 1966년에 1,161만 톤의 석탄을 생산함으로써 석탄의 자급자족을 실현할 수 있었으며, 석탄은 우리에게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1965년 가을부터 연탄수요가 많아지면서 서서히 연탄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1966년 여름 연탄이 잘 팔리지 않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연탄 수요가 급증하더니 설상가상으로 그 해 겨울 한파가 들이닥치면서 연탄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웃돈을 주고도 연탄은 구하기 어려웠다. 당장 서민들의 난방연료가 시급한 상황이 되었다. 연탄파동이 나자 정부는 에너지 정책을 석탄 위주에서 유류 위주로 전환하였다.
연료정책의 변화로 1967년 7월부터 석탄 수요는 서서히 감소세로 돌아섰다. 1967년 초 200여 개에 이르던 탄광은 1969년에 50개소로 감소하였다. 연탄파동을 계기로 쇠퇴의 길을 걸었던 석탄 산업은 1973년과 1978년에 발생한 석유파동으로 인해 다시 호황을 맞게 되었고 또다시 연탄 품귀현상이 발생했다. 화력이 약하고 질이 나쁜 저질탄까지 나돌아 서민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정부는 가정용 연탄 공급의 확보를 위해 목욕탕과 다방, 음식점 등에서는 연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1가구당 1회 20장 이상 판매 금지, 연탄구매카드제, 연탄판매기록장제 등 다양한 제도를 시행하였다.
1980년대 중반을 거쳐 후반에는 국제 유가가 안정되었고 화석연료를 대신할 청정에너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져 가정용 연료로 가스가 보급되었다. 가스의 보급으로 인해 연탄의 사용량, 무연탄의 소비량은 크게 줄어들었다. 석탄 산업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사회 경제적 손실이 막대할 것이라는 이유로 1987년 ‘석탄산업합리화 사업단’이 설립되어 석탄산업의 합리적인 발전을 위한 각종 사업이 수행되었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모두 334개의 탄광이 폐광되었으며 2021년 현재 대한석탄공사 산하 강원도 태백시의 장성광업소, 강원도 삼척시 도계광업소, 전남 화순군 화순광업소에서 무연탄을 생산 중이며, 민영탄광으로는 강원도 삼척시의 (주)경동 상덕광업소, 강원도 태백시의 (주)태백광업이 운영 중이다.
6. 절차탁마(切磋琢磨)의 마을, 영월 북면 마차리
영월 북면에는 마차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얼핏 듣기에는 마차(馬車)와 관련 있어서 마차리인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사자성어인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갈 마(摩)와 갈 차(磋)를 따서 만든 지명이다. 마차리는 영월화력발전소의 발전용 석탄의 공급기지로 영월광업소를 기반으로 형성된 최초의 탄광촌으로 1990년 석탄산업합리화로 폐광되기까지 약 60여 년 동안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해왔다.
영월광업소는 지형 특성상 석탄을 운반하기 불편하여 생산이 그다지 활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56년 영월과 충북 제천을 잇는 영월선 철도가 개통되면서부터 영월의 석탄은 서울을 포함하여 전국 각 도시로 쉽게 운반될 수 있어서 생산량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영월광업소에서 생산된 석탄은 삭도를 통해 영월 화력발전소로 운반됐는데 1966년 영월광업소의 석탄 생산량은 307,254톤이었고 영월화력발전소의 석탄 소비량은 353,034톤이었다. 따라서 영월광업소에서 생산된 석탄 대부분이 화력발전소에서 소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석탄을 싣는 바가지 모양의 운반기구 1개 당 적재 무게가 1톤에 달해 공중에서 거친 기계음을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1943년 영월화력발전소 건설 때 만들어진 이 삭도의 케이블카는 영월 탄광이 호황을 이루던 시기에 유용하게 쓰이다가 1973년 광업소 폐광과 함께 철거됐다. 가행 당시 케이블카의 거리는 12km나 되었고 철탑은 48개였다. 케이블카는 높은 하늘에 떠 있는 솔개 같다고 해서 ‘솔개 바가지’라고 불리기도 했다. 뚜껑이 없는 케이블카가 삭도를 지날 때 종종 탄들이 쏟아지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탄을 주워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개인이 탄을 주워서 쓰는 일이 빈번해지자 시중에서는 국자 두 개를 합쳐 놓은 것처럼 생긴 주먹탄을 만드는 도구가 판매되기도 했다. 일부 가정에서는 집에다 19공탄을 찍는 나무로 만든 수타식 장비를 갖추어 놓고 탄으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이렇듯 탄광촌의 다양한 일화를 만들어 낸 삭도는 교통이 미비하던 시절 비밀리에 교통수단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간혹 ‘솔개 바구니’가 뒤집어지면서 인명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1960~70년대는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호황기로 영월 마차리 탄광촌의 호황기와 맞물려 있다. 마차리의 인구가 영월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마차리 탄광촌은 호황을 이루었다. 영월광업소 소재지인 마차리에는 대통령이 세 명이나 다녀갔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다녀가고,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1980년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다녀갈 정도로 대통령의 관심을 받는 탄광촌이었다. 당시 영월지역의 주점에서는 손님 중에서도 영월광업소 직원을 으뜸으로 쳤다. 그다음 순서가 영월화력발전소와 대한중석 순이었으니 영월광업소가 있는 마차리 탄광촌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탄광을 둘러싼 이러한 다양한 일화들은 이제는 볼 수 없는 옛이야기지만 영월 북면 강원도 탄광문화촌에서는 아련한 추억거리로 재현해놓았다.
이 탄광문화촌은 1960~70년대 석탄산업의 중심지였던 영월군 북면 마차리의 탄광 마을과 폐광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각종 유물과 자료들로 잊혀가는 탄광촌의 생활현장을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조성해놓았다. 과거 ‘검은 황금’이라 불렸던 석탄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고 탄광촌 광부들의 생활 모습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테마형 문화공간으로 60년대 마차 탄광촌을 그대로 재현한 탄광생활관과 생생한 채광 현장 체험이 가능한 탄광 갱도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탄광생활관은 퇴근을 한 광부들이 배급표를 받던 배급소를 비롯해 마차 상회 이발관, 선술집, 양조장, 뻥뛰기 아저씨 등 60년대 마차리의 생활상과 광부의 애환이 담긴 거리와 마을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으며, 탄광갱도체험관은 갱도에 설치된 레일, 영상과 효과음, 광부작업복 체험 등을 통해 현실감 넘치는 체험이 가능하도록 조성되었다.
탄광문화촌을 둘러보면서 머릿속에 계속 아래와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광부의 아들이었더라도 혹은 광부의 아들이 아니었더라도 모든 아들과 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죽음의 위기가 닥쳐올지 모르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탄광의 갱도로 묵묵히 들어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왜 아버지라고 두렵고 가기 싫지 않으셨을까? 가족들을 위해 온갖 사투를 벌이고 온몸에 시커먼 탄을 뒤집어쓴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셔서 저녁상에 막걸리 한 잔 하시는 모습이 그리운 건 그때는 몰랐던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가? 아니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버지와의 시간 때문인가?
『탄광 마을 아이들』은 시인 임길택이 강원도 탄광 마을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이들 또는 탄광촌 주민들로부터 듣고 느낀 이야기를 아이들의 시선과 눈높이에 맞춰 시로 옮겨놓은 동시집인데 그중 “거울 앞에 서서”라는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아버지 하시는 일을
외가 마을 아저씨가 물었을 때
나는 모른다고 했다
기차 안에서
앞자리의 아저씨가
물어봤을 때도
나는 낯만 붉히었다
바보 같으니라구
바보 같으니라구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야
나는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십니다
일한 만큼 돈을 타고
남 속이지 못하는
우리 아버지 광부이십니다, 이불속에 엎드려
책을 봅니다
동생에게 문 닫으라
소리쳐가며
이불 덮어쓰고
책을 봅니다
방바닥에 닿은 배
따뜻해지고
슬금슬금 온몸에
졸음이 퍼집니다
또 탄광의 생활과 관련된 이야기와 광부들의 여러 가지 금기(禁忌)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갱내에서는 쥐를 잡지 않는다 -
어두운 막장에서 탄을 캐던 광부는 검은 쥐로 상징되기도 했으니 쥐와 인연이 남다르다. 쥐는 광부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있었다. 쥐는 갱내 출수 사고나 붕락 사고를 미리 알아내곤 했으므로 갱내 경험이 많은 광부들은 쥐의 움직임을 보고 갱내 사고를 감지했다. 사고가 발생할 때쯤 쥐들은 안전한 갱구 쪽으로 우르르 도망을 갔다. 광부들은 그걸 보고 함께 대피하거나 안전을 강화해서 목숨을 건졌다는 사례가 많다.
퇴근 후에 막걸리를 마시지 않으면 진폐에 걸린다 -
육체노동자들이 노동 후에 술을 즐기는 편이지만 광부들이 술을 즐기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탄가루를 마시는 광부들에게 생기는 직업병인 진폐증을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광부들은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면 몸속에 있는 탄가루가 씻겨나간다고 믿었다. 술집에 들르지 않고 집으로 곧장 퇴근한다 해도 아내가 나서서 막걸리 한 사발부터 건넨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 -
탄광이 늘어나고, 석탄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탄광촌은 호황을 맞았다. ‘지나가는 강아지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라는 말이 실상을 잘 대변한다. 만 원권은 1973년 최초로 발행된 이래 2009년 5만 원권이 발행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 지폐의 최고 액면가 아니었던가. 그 돈을 강아지가 물고 다닐 만큼 흔했다는 얘기다. 광부의 생활 속에 빠르게 스며든 것은 상업적 향락문화였으며, 탄광촌에서 가장 돈 잘 버는 곳은 속칭 물장사들이었다.
갱내에서는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
안전을 중시하는 갱내에서는 ‘휘파람을 불면 굴이 무너진다’라고 경계했다. 탄광 막장이 무너질 때 나는 소리와 흡사하다는 이유를 들어 휘파람을 불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휘파람을 불길하고 재수가 없는 일의 징조로 보았다. 어촌에서도 작업 중의 휘파람을 금했다. 어촌에서는 ‘휘파람은 태풍을 연상시키고, 바다의 신을 자극하여 센 바람을 더 세게 한다’고 믿어, ‘조업 중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는 금기를 지킨다. 휘파람 소리는 귀신을 부르는 소리로 널리 알려져 올 만큼 어둠과 휘파람은 상극이었다.
숫자, 색상 관련 탄광 속신 -
갱내 작업장에는 4자를 붙이지 않는다. 탄광 막장에서는 광부들의 무사고에 대한 기원이 첫 번째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알려진 모든 것은 피하는 심리가 팽배하다. 그리하여 죽을 사(死)와 같다는 숫자 4를 갱내 작업장에는 적극적으로 피했다. 탄광 막장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불운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굴속으로 가져가는 도시락 보자기를 파란색과 붉은색으로 사용했다. 파란색 보자기를 통해서는 안전한 생명을 기원하고, 붉은색 보자기를 통해서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기를 기원한 것이다.
광부들이 즐겨먹는 돼지고기와 돌구이 문화 -
탄가루를 마시는 광부들에게 돼지고기는 탄가루를 씻어내는 몸에 아주 좋은 음식으로 알려졌다. 태백·삼척·정선·영월지역의 탄광촌 가까운 계곡의 넓적한 돌은 돼지고기 돌구이를 많이 해서 대부분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태백시에서는 금천의 잣나무골, 문곡의 풀장 계곡, 동점의 방태골, 소도의 당골 등이 돌구이를 해 먹는 유명한 계곡이었다. 환경문제를 거론하던 1990년대 중반까지도 이곳 계곡에서는 돼지고기 구이판으로 사용했던 그을린 돌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7. 청령포의 눈물, 단종 애사(哀史)
청령포는 남쪽은 기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 서, 북쪽은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들어갈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는 특수한 지형이다. 풍광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명당 중의 명당인데 이곳에서는 어린 소년왕 단종의 눈물과 한숨이 서려 있는 곳이다.
1457년 6월 여름, 단종은 한양에서 영월까지 700리 길을 내려와 천혜의 감옥이라 불리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단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2년 만에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세조는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영월 청령포로 유배 보냈다.
5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청령포로 들어가는 길은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 서강은 변함없이 청령포를 감싸 안고 흐르며 그 뒤에는 육육 봉이라는 험준한 산이 불쑥 솟아 있다. 육지 속의 섬으로 가는 길은 작은 나룻배가 유일하다. 매표소 선착장에서 바라보는 청령포는 몇 걸음이면 닿을 듯하지만 강물이 꽁꽁 언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다.
배를 타고 들어가는 길에 솔솔 부는 강바람은 어린 단종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던 그 바람이었을 것이다. 뱃길로 고작 3분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지만 여행객을 내려준 배가 떠나고 나면 섬에 남겨진 기분이 든다. 졸지에 왕좌를 빼앗기고 배에서 첫발을 내딛던 어린 임금의 심정이 마음속을 느껴진다.
청령포 선착장에 내려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된 거송들이 빼곡한데 소나무 숲 가운데 단종이 지내던 공간인 단 종어 소가 자리하고 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복원해 놓은 건물이다.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관노, 궁녀가 기거하던 행랑채가 전부다. 글 읽는 단종과 그를 알현하는 선비, 시중드는 궁녀를 재현해 놓은 밀랍인형으로 단종의 유배생활을 소리 없이 보여준다.
어소를 나서면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소나무인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이다.
관음송은 영월의 청령포 안에서 자라고 있으며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19m의 크기로 1.6m 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청령포는 세조 2년(1456)에 왕위를 빼앗긴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 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이 나무는 단종과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역사적·학술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관음송을 지나면 노산대와 망향탑으로 가는 오르막길이 보인다. 서강이 내려다보이는 층암절벽 위에는 작은 돌탑이 하나 있는데 단종이 한양에 두고 온 정순왕후를 그리며 손수 쌓았다는 망향탑이다. 돌 하나하나에 단종의 손길과 그리움이 서렸다.
청령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노산대는 단종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곳이다. 매일매일 한양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노을이 지도록 하염없이 앉아있었을 단종의 모습이 그려진다. 바위 이름 역시 노산군이 즐겨 찾던 바위라 노산대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단종이 청령포에 머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유배되고 나서 그 해 여름 홍수로 남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단종의 처소는 영월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기게 된다.
단종은 자주 찾던 매죽루(梅竹樓)라는 누각이 있는데 단종은 이곳에서 한양을 바라보며 자규시를 지었다고 한다. 자규(子規)는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우는 소쩍새를 가리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지은 것이다. 단종의 자규시가 너무 슬퍼 누각의 이름을 매죽루에서 자규루(子規樓)로 바꿨다고 한다. 그 후 많이 퇴락해 민가가 들어섰는데 정조 15년(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이곳을 돌아다니다 그 터를 찾아 복원하였다.
자규시(子規詩: 소쩍새 시), 단종(端宗)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은 이룰 수 없고
窮恨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 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묏부리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이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何乃愁人耳獨聽 (하내수인이독청) :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그러던 중 세조 3년 6월 말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 운동을 기획하고 있다는 고변이 들어온 이후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4개월여 동안 영주 순흥 지방은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무렵 정인지와 신숙주가 합세하여 세조에게 주청을 올렸다. 단종이 살아 있는 한 이 같은 모반은 끊임없을 것이므로 모반을 일으킨 금성대군은 말할 것도 없고 단종도 함께 사사하여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처음 단종을 유배지로 호송한 신하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약을 들고 간 신하도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이다. 이처럼 비극적 임무를 맡을 수밖에 없었던 왕방연은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청령포 부근에서 비통한 심정으로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업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지금도 이 시조비는 마치 왕방연이 그랬던 것처럼 원통한 마음으로 청령포를 내려다보며 홀로 서 있다.
8. 단종 애사(哀史)의 조연들
단종의 죽음과 관련하여 단종의 이야기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소식에 대해서도 궁금하니 알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다.
먼저 왕비인 정순왕후 송 씨는 단종의 정비이다.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본관은 여산이다. 남편 단종이 강등되면서 군부인(君夫人)으로 격하되었다가 그 후 노비가 되었다. 이후 세조는 그녀가 비록 노비이지만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남편 단종의 명복을 빌다가 사망하였으며 그의 능의 소나무는 단종의 장릉이 있는 동쪽 방향으로 굽는다는 전설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이별을 가슴에 담고 있다. 단종이 정순왕후와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하였는데 그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못 만났다 하여 두 사람의 슬픈 모습을 본 사람들이 '영영 이별 다리, 영영 건넌 다리, 영 이별 다리, 영이별교'라는 뜻을 담아 말한 것이 현재의 영도교의 유래가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영 이별 다리'로 불렀는데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에는 동망봉(東望峯)이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세조 2년(1456) 단종이 죽은 후 정순왕후가 정업원(현재 청룡사)에 머무르며 날마다 이 봉우리에 올라 단종이 유배 가서 죽은 영월 쪽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정순왕후는 정업원에서 지내며 나라에서 주는 집과 식량을 거부한 채 절에서 살며 염색 일로 생계를 이어갔는데 정순왕후의 어려운 삶을 알게 된 마을 여인들이 중심이 되어 도와주었다고 한다.
2018년 준공된 숭인재(崇仁齋) 어울림 쉼터에는 폐위된 후 정순왕후의 삶의 흔적들을 기억해주고 있는 공간이 있어 멀리 영월에서 바라보고 있는 단종과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주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인물로 단종의 넷째 삼촌인 금성대군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 씨의 6남으로 세조의 친동생이며 단종의 숙부이다. 금성대군은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경기도 광주, 연천 등을 떠돌다가 경북 영주 순흥으로 오게 되었다. 여기서 금성대군은 순흥 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고을의 군사와 선비들을 모으고 여러 지역의 선비들에게 소식을 알려 단종 복위를 시도하였으나 시녀와 관노의 밀고로 인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고 그에게 동조했던 지역의 수백 명의 선비들과 그 가족들이 모두 희생되었다. 이 사건을 정축지변(丁丑之變) 이라고 한다.
영주시 안정면 동촌 1리는 피끝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조는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와 관련하여 한명회의 6촌인 안동부사 한명진을 시켜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라고 하였다. 순흥의 백성들은 역모의 땅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순흥 30리 안에는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도록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죽계천을 따라 흐르는 피가 십 여리로 흘러 동촌 1리에서 끊어졌다 하여 지금도 이 마을을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역사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얼마나 끔찍하고 참담한 이야기인가?
이 사건은 영주 지역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음식도 그중 하나이다. 영주의 별미인 ‘태평초’라는 음식이 있는데 이름만큼 팔자 좋은 음식은 아니라 고난이 묻어 있는 음식이다. 정축지변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한 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먹거리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산속이라 곡식을 심을 땅도 부족했고 잘 자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메밀은 언제 어디에 심어도 잘 자랐다. 이걸로 메밀묵을 해 먹었다. 이것이 태평초다. 궁중음식이었던 ‘탕평채’가 고급 재료인 청포묵을 쒔다면 태평초는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메밀묵을 사용했다. 여럿이 나누어 먹고 정을 나눌 수 있도록 한 음식이다. 농사일이 끝난 겨울철 태평스러운 시기에 먹던 음식이라고 태평초라는 설이 있지만 알고 보면 순흥 사람들의 한(限)이 서린 음식이다.
세 번째 인물로 단종을 유배지로 이끈 금부도사 왕방연이다.
잔악무도한 세조의 폭력을 전달하게 된 왕방연도 분노와 설움의 눈물을 흘렸다. 한양으로 돌아온 왕방연은 이내 관직을 사임하고 단종이 귀양 갈 때 백설기를 먹었던 송계원 근처, 지금의 봉화산 아래 중랑천변 먹골로 거주지를 옮겼다. 단종에게 물 한 그릇 바치지 못했던 자신을 뉘우치고 사죄하기 위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왕방연은 초야의 이름 없는 선비로 살았다. 그러나 왕방연은 어린 단종의 애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한시도 괴로워서 잠을 편히 이룰 수가 없었다. 매일 밤 앞마당을 서성이며 영월 쪽을 향해 눈시울을 붉혔다.
“전하, 소인이 어찌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요?”
눈물로 단종을 찾다 잠이 든 왕방연의 꿈속에 단종이 귀양 내려갈 때의 행색으로 나타났다. 단종은 몹시 고단하고 지쳐 보였다.
“여보게 금부도사, 귀양길에 보았던 배나무 열매는 익었는가? 희고 단 속살 한 입 베어 먹으면 타들어가는 이내 마음 조금이나마 시원해지겠구려”
꿈에서 깬 왕방연은 고단한 모습으로 갈증을 호소하는 단종을 생각하며 배나무를 심기로 하였다. 하얗게 핀 배꽃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이른 봄, 어디선가 뻐꾹새가 날아와 한나절을 배나무에 앉아 슬피 울었다. 그 풍경을 지켜보던 왕방연의 눈과 가슴에도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정성 들여 키운 배는 날이 갈수록 단단하게 여물었다. 배 수확을 하는 날 왕방연은 향기가 좋고 달처럼 탐스럽게 익은 배를 골라 바구니에 한가득 담았다. 그리고는 영월 청령포를 향해 절을 하면서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다. 왕방연은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이마를 땅에 짓찧는 고두배(叩頭拜)를 올렸다.
“전하, 배를 수확할 때쯤 다시 궁으로 돌아오고자 하셨지요. 돌아오시지 못하게 한 소인이 죄인이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왕방연은 눈물로 속죄를 하였다. 단종에게 속죄하는 길은 배나무를 잘 키워서 달고 맛있는 열매를 수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해에도 마찬가지로 배를 수확하여 영월 청령포를 향해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고두배를 하였다. 그날 밤 제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왕방연에게 단종이 다시 찾아왔다.
“금부도사의 눈물 어린 충정으로 가꾼 배를 먹으니 이제껏 꽉 막혔던 체기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소. 고맙소. 그나저나 언제쯤에나 나도 귀양살이를 끝낼 수 있을까? 귀양살이를 끝내고 바람 따라 훨훨 날아다니고 싶구려. 하얀 배꽃처럼, 뻐꾹새처럼 말이네.”
단종의 혼령은 죽어서도 귀양살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방연은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피를 흘리고 통고하였다. 단종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시달렸던 왕방연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속되를 하면서 변함없는 절개를 지켰다.
“내가 죽으면 영월 가는 길에 묻어주고 주변에 배나무를 많이 심어라.”
후손들은 그의 유언대로 신내동과 묵동의 접경지대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런 연유로 그가 살고 묻힌 곳을 왕방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왕방연이 손수 심었던 배나무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왕방연의 눈물과 정성으로 가꾸어진 배는 오늘날에도 ‘먹골배’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배꽃이 흩날리던 달밤, 한 잎 한 잎 속절없이 쌓이는 하얀 꽃잎은 어린 단종의 슬픔과 억울함이 깃든 눈물방울이었다. 눈물방울이 떨어진 자리에 열린 먹골배는 충절의 눈물을 흘리며 매일매일 속죄하듯 살다 간 왕방연의 마음을 하얗게 담아내고 있다. 지금도 매년 달처럼 익어가고 있다.
단종 애사(哀史)의 네 번째 인물로는 마지막까지 단종을 모신 시녀와 종인들이다.
단종이 죽자 이들은 동강의 강물에 몸을 던졌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이 이를 슬프게 여겨 낙화암(落花巖)이라 부르고 단(壇)을 설치하여 그 넋을 위로하였다. 그 후 영조 18년(1742)에 이곳에 사당을 건립하여 이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영조 25년(1740)에 부사 김응복이 사당을 개수하고 이름을 민충사(愍忠祠)라 불렀다. 매년 한식과 음력 10월 24일 단종의 기신제(忌辰祭)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들은 죽어서도 단종을 같은 땅 영월에서 모시고 있다.
9. 다재다능한, 팔방미인 도시, 영주(榮州)
영주는 경상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이다. 동쪽으로는 봉화군, 남쪽으로는 안동시, 서쪽으로는 예천군이 있으며 북쪽은 죽령을 경계로 충청북도 단양군, 마구령을 경계로 강원도 영월군과 맞닿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처음엔 백제의 내기군(奈己郡)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신라 파사 이사금이 정복한 이후 신라 영토가 되었다. 400년도 광개토대왕의 남방 원정을 전후로 해서 고구려군이 주둔하는 장소가 되어 고구려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그 이후로도 물론 내내 명목상으론 신라 영토였지만 고구려군이 반세기 넘게 장기 주둔하면서 자기네 땅같이 행동하며 지배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반쯤은 고구려 땅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는 고구려와 동맹이었던 신라가 고구려에 강하게 불만을 품은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후 5세기 중반에 신라가 고구려군을 모조리 쫓아낼 때 신라가 지배력을 회복하게 되지만 이 일대가 워낙 고구려 화가 많이 진행되었기에 영주 지역은 이후로도 일명 '고구려 고지'라고 불렸다.
고려 시대에 강주(剛州)가 되었고, 그때부터 경상도에 속했다. 1980년 영주군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되어 남은 영주군 지역이 영풍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되어 현재의 영주시가 되었다.
영주는 안동에 비해 명성이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영주의 다재다능하고 팔방미인 같은 면을 알게 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재다능함을 몇 가지 살펴보면,
영주는 유교문화의 도시이다.
영주시는 선비의 고장임을 표방하고 있으며 선비촌, 소수서원 등의 유학 관련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학창 시절 국사시간에 국사책에서 접했던 그 유명한 서원이다. 소수서원의 원래 명칭은 백운동 서원이었다. 중중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모시기 위해 사당을 세웠던 것이 그 시작이다. 안향은 고려 후기 문신으로 중국으로부터 성리학(性理學)을 가져와 처음으로 국내에 보급한 인물로 조선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선구자적 인물이다. 주세붕은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 서원을 세웠으며 훗날 명종 4년(1549)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해오면서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경상도 관찰사에게 요청하였으며 당시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리고 아울러 각 종 서적과 노비도 하사하였다. 소수(紹修)란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의미이다. 당시 영주지역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내용이며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 걸맞게 당시 영주의 과거시험 급제자 수는 전국 4위를 차지한다.
안향 선생이 후학들에게 일러주는 글을 안자육훈(安子六訓)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식으로서는 효(孝)를 해야 하고,
신하로서는 충(忠)을 해야 하며,
예(禮)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신(信)으로 벗을 사귀고,
자기 수양은 경(敬)으로 하고,
일을 함에는 성(誠)으로 할 따름이다.
영주는 불교문화의 도시이다.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는 신라에서 종파성을 띠게 되었는데 가장 특징적인 종파가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해지는 기록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대사의 화엄종이다. 영주 부석사는 바로 이 화엄종의 본당으로 의상대사이래 그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대사는 676년 부석사에 자리 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 5점, 보물 6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 중 하나이며 특히 사찰 앞으로 펼쳐진 자연경관을 품 안으로 끌어안은 모습은 마치 부처님의 온화한 자비심처럼 모든 이의 마음을 무아지경에 빠지게 한다. 남녀노소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찰임에 틀림없다. 또한 영주의 대부분의 사찰들도 통일신라 시대부터 이어온 고찰(古刹)로써 현재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영주는 사과와 인삼의 도시이다.
영주 사과는 전국 제1의 사과 주산지로서 백두대간의 주맥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분기하는 지역의 소백산 남쪽에 위치한 산지과원에서 생산되어 풍부한 일조량과 깨끗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로 인에 맛과 향이 뛰어나며 성숙기 일교차가 커서 사과의 당도가 높다. 특히 아오리(사과의 한 품종)는 어느 지역 사과보다도 품질 우수성이 입증되어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품종이다. 영주시의 사과 생산량은 전국 기준 대비 15%를 차지하고 있다.
영주보다 더 알려진 이름이 풍기 지역인데 이곳에 재배되는 풍기인삼은 소백산 기슭의 풍부한 유기물과 대륙성 한랭기후와 배수가 잘되는 사질양토로서 인삼이 생육하기 좋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타지방보다 육질이 단단하며 유효 사포닌 함량이 높은 우수한 인삼을 생산하고 있으며 또한 풍기인삼의 특성을 살린 인삼가공제품을 생산하여 전국에 유통하고 있다. 풍기인삼의 시작과 관련하여서는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과 관련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백성들의 삶에 늘 관심을 가졌던 주세붕은 풍기군수가 된 후 산삼 공납량이 갈수록 늘어나 고충을 겪고 있는 풍기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겼다. 당시 풍기는 자생 삼 주산지로 나라에 산삼을 공납으로 바쳐야 했지만 채취량에 비해 공납량이 갈수록 늘어가는 실정이었다. 주세붕은 이 지역의 토양과 기후를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풍기지역이 산삼 생육에 적합한 자연환경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산삼 종자를 채취하여 농가에서 재배하도록 하였고 그리하여 풍기지역은 우리나라 최초로 인삼 재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영주는 섬유의 도시이다.
인견은 정제된 낙엽송의 목재 펄프와 면 씨앗에서 분리한 잔털의 린터(길이가 짧은 면섬유)가 쓰이며 셀롤로오스 섬유를 원료로 하여 제조한 섬유이다. 인견은 풍기지역의 대표 특산물이며 풍기지역을 찾는 관광객과 전국적 매장을 통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풍기인견은 천연의 섬유라 가볍고 시원하며 몸에 붙지 않고 통풍이 잘 되며 착용 시 촉감이 아주 상쾌하다. 땀 흡수력이 탁월하며 정전기가 전혀 없는 ‘냉장고 섬유, 에어컨 섬유’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으며, 특히 식물성 자연섬유로 피부가 여린 아기에서부터 알레르기성 피부, 아토피성 피부 등 피부가 약한 사람에게 아주 좋은 섬유라고 한다.
풍기 인견은 1934년경부터 평안남도 덕천 지방에서 명주 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던 일부 월남 민들이 1938년경 풍기에서 섬유를 직조한 것이 현재 풍기인견의 시작이다. 직물공장을 경영하던 월남 민들이 6·25 전쟁 이후 대거 풍기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가내공업으로 발전하였고 이때부터 풍기를 대표하는 전통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최대 인견 생산지역으로 국내 생산량의 8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영주는 문화유산의 도시이다.
영주는 국보 7점, 보물 23점, 천연기념물 3점, 사적 4곳을 보유한 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이다. 특히 부석사는 무량수전, 무량수전 앞 석등, 조사당, 조사당 벽화, 소조 여래좌상 까지 무려 국보 5점을 보유하고 있다. 영주 흑석사에도 국보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이 있으며, 유교와 관련된 국보로 소수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향의 초상이 있다.
또한 영주의 명승지로 죽령 옛길이 있는데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엎치락뒤치락 불꽃 튀는 격전장이었는데 영양왕 1년(590) 고구려 명장 온달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죽령이 얼마나 막중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국가민속문화재인 무섬마을은 양반도 평민도 모두 함께 공부했다는 조용한 선비의 마을로 지금도 수려한 풍광과 고즈넉한 옛 건물들로 인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0. 극락세계로 가는 길, 부석사(浮石寺)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승려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세운 화엄종 사찰로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부석사의 ‘부석(剖析)’은 '뜬 돌'이란 뜻인데 이는 의상대사가 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의상은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기 위하여 당나라로 떠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함께 떠나고자 했던 원효대사는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당나라로 가지 않았고 의상대사만 떠나게 된 것이다. 등주(登州)의 바닷가에 도착하여 어느 불교 신자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주인에게는 아리따운 용모의 선묘(善妙)라는 딸이 있었다. 선묘는 의상을 지켜보며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에게 불교의 깨달음을 전하였다. 이때 선묘는 영원히 의상을 따를 것을 결심하고 의상이 불교 공부하는 것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의상은 종남산의 지엄(智儼)을 찾아가 화엄 사상을 연구하였고 신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선묘의 집에 들러 그동안 편하게 지내게 해 준 데 대하여 감사 인사를 하고 바로 배를 타러 갔다.
의상이 떠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선묘는 급히 배를 타는 곳으로 가보았지만 배는 이미 저만치 떠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이 입을 옷과 여러 물건들을 담은 상자를 배를 향해 던져 의상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스님이 무사히 돌아가 불교의 교리를 잘 펼치시게 해 주십시오.’ 빌고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선묘는 용으로 변하였고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여 무사히 신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용이 된 선묘는 신라에 와서도 계속 의상을 보호하였다. 신라에 도착한 의상은 화엄 사상을 펼칠 곳을 찾아 경상북도 영주시 봉황산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다른 종파의 스님들이 수백 명이나 살고 있어 의상의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이때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하여 절의 건물 위를 덮어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로운 상황을 만드니 스님들이 놀라고 두려워 모두 도망갔다. 그제야 의상이 그곳에서 화엄경을 만들어 날마다 강론하니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교리가 전파되었다. 의상은 큰 바위가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의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지었다. 현재에도 부석사에는 ‘浮石’이라 새겨진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은 용이 된 선묘가 변하였던 바위라고 전해진다.
삼국사기 궁예 전에 의하면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립한 후 전국 시찰 중에 부석사에 이르렀을 때 주지승으로부터 이곳에 신라 왕의 어진을 모셨다는 말을 들은 후 칼로 내리쳤다고 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집필 당시 아직도 부석사에 그 칼자국이 남아있었다고 밝혔다. 2000년에 방영한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칼을 꽂은 자리에 피가 흘러내리는 등의 무시무시한 연출도 나왔다. 후에 다른 승려들이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으나 왕건이 나서자 쉽게 뽑히는 것을 보고는 주지승이 신기하게 여겨한다.
고려 시대에는 선달사나 흥교사로도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공민왕 21년(1372년)에 주지가 된 원응국사가 크게 증축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과 조사당 또한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몇 안 남은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고려시대 중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봉정사 극락전과 누가 더 오래되었나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왜냐면 확실한 시기를 알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전통 건물은 보통 짓고 나서 100~150년 후에 수리하기 때문에 건립 시기는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이르리라고 본다.
둘 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보통은 봉정사 극락전이 더 오래되었다고 여긴다. 봉정사 극락전이 한국 건축의 구조적인 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무량수전은 한국 건축의 비례와 파격의 미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항상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 세트로 나오는 곳이 수덕사 대웅전이다. 현재까지 창건 연대가 정확히 밝혀진 것 중에서는 수덕사 대웅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부석사는 국보 5점, 보물 6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점 등 웬만한 도시들보다 많은 국보와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국보 제 18호인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유물로써 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법당이며 같은 뜻이지만 다른 말로는 아미타전, 극락보전이라고도 불린다.
아미타불은 부처임에도 열반에 들지 않고 극락세계에 머물며 중생들에게 설법을 하는 부처인데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들어 윤회에서 벗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극락세계에 머문다. 그래서 이를 상징하는 법당인 무량수전은 한국의 절에서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과 함께 가장 흔히 볼 수 있고 또 중요하게 여기는 건물이다. 무량수전을 본당으로 삼는 절에서는 극락을 다르게 일컫는 말인 안양(安養)을 사용하는 안양루, 안양교, 안양문과 같은 건물들도 볼 수 있는데 부석사가 대표적인 절이다.
안양루 내부 곳곳에는 여러 글을 걸어두었는데 그중 방랑시인 김삿갓이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글이 걸려있다.
부석사(浮石寺)
平生未暇踏名區(평생미가답명구)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이곳 못 오다가
白首今登安養樓(백수금등안양루) 흰머리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네
江山似畵東南列(강산사화동남열) 강산은 그림처럼 동남으로 벌려 있고
天地如萍日夜浮(천지여평일야부) 천지는 부평초처럼 낮밤으로 물 위에 떠 있구나
風塵萬事忽忽馬(풍진만사홀홀마)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범범부) 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 되어 헤엄치네
百年幾得看勝景(백년기득간승경) 백 년 동안 몇 번이나 빼어난 경치 구경할까
歲月無情老丈夫(세월무정노장부) 세월은 무정히도 젊은 사내를 늙게 했구나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에 있다고 하여 보통 무량수전의 전각은 문 방향을 남향으로 놓되 아미타불은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게 놓는다. 이렇게 하면 참배자는 문 안쪽으로 들어와 건물의 왼쪽(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게 된다.
무심한 눈으로 보게 되면 화려한 기교가 장식이 없는 건조한 목조건축으로도 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완벽한 조화와 파격의 아름다움으로 목조건축 중 백미로 꼽히고 있다. 그것은 지붕의 파격미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건물의 가운데 부분보다 귀퉁이의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도록 ‘안허리곡’이라는 기법으로 처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봉정사 극락전의 지붕과 처마가 단정한 일직선으로 처리되었는데 반해 무량수전은 곡선미의 파격을 보여주고 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 하면 배흘림기둥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정확한 의미를 살펴보면, 기둥의 중심부가 상부와 하부에 비해 더 두꺼워 중심부에서 위, 아래로 갈수록 점점 굵기가 얇아지는 형태의 기둥이다. 원래 큰 기둥의 굵기를 똑같이 하면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배흘림기둥은 이 착시현상을 바로 잡아주는 효과가 있으며 기둥이 지붕을 탄력 있고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듯하게 보이는 효과를 준다. 또한 건축물의 무게가 기둥 중간으로 집중되는 것을 고려한 기술적 장치이기도 하다. 구조적인 안정감과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기둥 하나에서 동시에 찾아볼 수 있다. 국보인 무량수전 내부에는 또 하나의 국보인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
국보 제 17호로 지정된 무량수전 앞의 석등은 통일신라 시대 석등이며 높이 2. 97m이다. 매우 화려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신라 시대 석등 가운데 최고로 꼽히고 있다. 구조를 살펴보면 하대석에는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는데 잎의 끝마다 귀꽃이 달려 있고 화사석의 4면에 정교하게 조각된 보살 입상이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신기한 점은 이 석등이 건물의 중심선에 서쪽으로 50cm 정도 치우쳐서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석등의 비켜진 흐름을 따라가면 우리의 동선은 자연스럽게 무량수전의 동쪽으로 안내가 되고 자연스럽게 서쪽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불을 만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구성되었다.
무량수전 앞에 서면 한 자리에서 국보 3점은 물론이거니와 무량수전을 등지고 섰을 때 가히 극락세계라고 할 수 있는 천하절경을 만나볼 수 있는 행운의 경험을 할 수 있다.
무량수전의 서쪽(무량수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왼쪽)으로는 이 절의 이름인 ‘부석’이 놓여 있고 동쪽으로는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제 249호)과 선묘각이 위치하고 있다. 선묘각은 바당의 용이 되어 의상대사를 도와준 선묘 낭자의 영정을 모셔두고 있는 전각이다. 선묘 낭자의 영정은 용을 타고 있으며, 벽면에는 용이 되어 의상대사의 귀국길을 도와주는 선묘낭자의 모습과, 부석사의 유래가 된 ‘부석’ 이야기 벽화가 걸려 있다.
여기까지 봤으면 부석사를 다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직 중요한 코스가 하나 더 남아있다. 선묘각을 나와 삼층석탑의 오른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 오르다 보면 국보 제 19호인 조사당을 볼 수 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작은 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그려놓은 조사당 벽화가 있었다. 지금은 보존을 위해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벽화를 그린 연대 역시 조사당의 건립 시기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국보 제 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사당 앞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에서 피어난 꽃인 선비화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의상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지팡이가 있다. 의상이 열반할 때 예언하기를 “이 지팡이를 비와 이슬에 맞지 않는 곳에 꽂아라. 지팡이에 잎이 나고 꽃이 피면 우리나라의 국운이 흥왕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문도들이 그 지팡이를 조사당 축대에 꽂았더니, 과연 음력 4월 초파일 무렵 버선 모양의 누런 장삼빛 꽃이 피었다. 그 후로 국운이 흥하고 나라가 태평할 때는 늘 잎이 나고 꽃이 피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는 잎은 나도 꽃이 피지 않다가 광복과 함께 30여 년 만에 다시 꽃이 피었다고 한다.
이 선비화의 수령은 1,300여 년이지만 그 높이는 불과 1m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영주 지역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지역인들은 부석사 선비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이 나무의 잎과 가지를 달여 먹으면 임신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몰래 꺾어 가는 일이 많아 나무가 자랄 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는 철책을 하여 훼손을 막았는데 그래도 피해가 계속되어 지금은 쇠그물을 처마까지 쳐서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조사당의 서쪽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서 부석사 관람의 마지막 코스인 자인당(慈忍堂)을 꼭 만나보고 와야 부석사 답사가 끝이 난다. 자인당에는 통일신라 때 만든 석불 3구가 봉안되어 있다. 이들 석불은 본래부터 자인당에 있었던 불상이 아니라 예전 부석사 내 여러 전각에 모셔져 있던 것을 1950년대 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자인당 석불 3구 중 가운데 1구는 영주 부석사 석조 석가여래좌상이며 보물 제 163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좌우 2구는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으로 보물 제 2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인당은 원래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상을 모시고 있지만 자인‘전’이 아니라 자인‘당’으로 남아 있다.
궁궐이나 사찰의 전각에는 각 이름마다 그 레벨이 있는데,
순서대로 보면 전-당-합-각-제-헌-루-정 (殿-堂-閤-閣-齊-軒-樓-亭)로 구분된다.
① 전(殿) : 건물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로 왕과 왕비,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지내는 곳으로
주로 일상적인 활동공간보다는 의식행사나 공적인 활동을 하는 공간이다.
② 당(堂) : 전(殿)에 비해 격이 한 단계 낮은 건물로 일상적인 활동 공간을 의미한다.
③ 합(閤), 각(閣) : 전(殿)이나 당(堂)의 부속건물이거나 혹은 독립 건물을 의미한다.
④ 제(齊), 헌(軒) : 왕실 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기거 및 활동 공간으로 재(齋)는 숙식 등 일상적인 주거용이거나 혹은 조용하게 독서나 사색을 주로 하는 용도로 쓰는 전각이며, 헌(軒)은 대청마루가 발달되어 있는 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용도에서도 일상적 주거용보다는 상대적으로 공무적 기능을 가진 경우가 많다.
⑤ 루(樓) : 바닥이 지면에서 사람 한길 높이 정도의 마루로 되어있는 집이다. 이층 건물일 때 일층은 각, 이층은 루라고 부른다.
⑥ 정(亭) : 흔히 정자라고 하는데 경관이 좋은 곳에 휴식이나 유희 공간으로 사용되는 작은 집을 말한다.
이번 여행을 마치며 두 도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영월과 영주는 지리적으로 가까이 붙어 있다. 오히려 같은 도의 다른 도시들보다 지리적으로 더 인접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두 도시이다. 삼국시대 각 국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치열한 격전지였으며 조선시대 단종의 유배지였던 영월과 단종 복위 운동으로 피바람이 불었던 영주는 곁에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단절되고 단속되었던 삼엄한 고을들이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두 도시를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것에 두 도시에 매우 감사함을 느낀다. 조선의 임금인 단종, 숙종, 영조, 정조, 그리고 금성대군뿐 아니라 회헌 안향, 신재 주세붕, 퇴계 이황, 난고 김병연(방랑시인 김삿갓), 자장율사, 의상대사, 징효대사 등의 역사 속 수많은 인물들을 만나고 공감할 수 있다.
또한 무릉도원면의 요선정과 요선암, 천혜의 명승지인 청령포, 5대 적멸보궁인 사자산 법흥사, 마차리 광산의 추억, 벌마로 천문대에서의 한밤중 별자리 여행, 영월 서부시장 할머니의 온정과 맛, 천년고찰 부석사의 극락세계, 4억 년 전의 비경 고씨굴 등은 어느 곳 하나 핫플레이스가 아닌 곳이 없는 최고의 여행코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