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반야산 상남자를 만나다, 논산(論山) 은진미륵

당일형 답사

by 이재은
반야산 상남자를 만나다.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


1. 보이는 게 논과 산, 논산(論山)


논산은 삼국시대 백제 시기에는 가지내현(加知奈縣)이었다가, 통일신라로 넘어와서 경덕왕 때에는 시진현(市津縣)이었고 9주 5소경 중 전주에 속했다. 우리에게 황산벌로 잘 알려져 있는 연산면 지역은 백제 시기에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고, 통일신라 시기에는 황산군(黃山郡)이었으며 9주 중 웅주에 속해있었다. 또 우리에게 젓갈로 잘 알려져 있는 강경읍은 1800년대 후반, 조선 3대 시장*, 2대 포구*로 불리던 큰 도시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미곡 수탈의 관문으로 이용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강경에 머무르며 큰 상권을 이루었다.


* 조선 3대 시장 : 평양시장, 서문시장(대구), 강경시장

* 조선 2대 포구 : 원산항, 강경항


보이는 게 논과 산 뿐이라서 ‘논산’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이는 금강 주변으로 펼쳐진 논산평야와 계룡산을 보면 그럴듯하다. 논산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한 여러 주장을 전 논산문화원장을 지낸 류제협 선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제시하였다.


노산(魯山)과 논산(論山)

지난 2005년 11월, 고전(古典) 강의로 유명한 도올 김용옥 교수가 건양대학교에서 “우리 민족의 미래와 청년의 꿈”이라는 주제로 대중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강의에 앞서 우리 “논산(論山)”이란 땅이름 유래에 대하여 언급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김용옥 교수는 논산이라는 지명이 노성(魯城)의 옛 이름인 노산(魯山)에서 유래한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즉 노산에 “ㄴ” 받침이 더해져 논산으로 변한 것 같다는 것이다.


황산(黃山)이 논산(論山)으로

1989년 논산의 문인 단체인 “놀뫼 문학회”에서 『지심 매고 남을 이랑 없으련마는』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하면서 당시 충남대학교 도수희(都守熙) 교수에게 논산 지명 유래에 대한 글을 부탁했다. 도 교수는 「놀뫼(論山)의 유래와 그 어원」”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연산지역의 옛 이름은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는데 이것이 황산(黃山)이 되고 연산(連山)이 되었으며 ‘황등야산’의 어형 분석(語形分析), 형태소(形態素)의 분석을 통하여 결론적으로 ‘연산면(連山面)의 진산(鎭山)이며 높이는 352m이고 산형(山形)이 가옥의 용마루처럼 생긴 36여 개의 작은 산봉우리들이 6km가량이나 길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났으므로 ‘느러리재(누르기재,느르뫼)’라 고유명으로 속칭되었고, 한자어로는 황산(黃山), 연산(連山)으로 호칭되었다. 여기서 12km밖에 까지 고유지명(固有地名)이 이전하여 ‘놀뫼’로 발달하였고 이 놀뫼’를 한자로 기록화한 것이 논산(論山)이라 믿어진다.”라고 했다.


놀메가 논산으로...

1967년에 창간된 논산중학교의 교지는 제호를 “놀메”라 하고 전병호 교장선생이 창간사에서 논산이란 지명유래에 대하여 언급했는데 “「놀메」는 우리 고장 논산의 옛 말이다. 「놀」은 「노랗다」의 뜻에서 온듯하며 신라 경덕왕 16년에 황산(黃山)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고려 때 연산으로 고쳐 불렀으며, 1914년 다시 논산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이다. 따라서 논산군은 애당초 황산군이 연산군으로 연산군이 논산군으로 개칭되었던 것이며 이로써 「놀메」는 순수한 우리말의 옛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일제 강점기 왜식 명칭이다.

1996년 논산군(郡)이 논산시(市)로 승격할 때 논산(論山)이라는 명칭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왜식 명칭으로 붙인 것이니 차제에 황산(黃山) 시 등 다른 이름으로 변경하자는 의견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했었다.


노을이 아름다운 산이 있어...

근년에 와서는 논산의 서쪽에는 높은 산이 없고 넓은 평야지대라서 아무 곳에서나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면 금강 가에 지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볼 수가 있어 “노을 뫼” 즉 아름답게 노을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작은 산이라고 하던 것이 변하여 “놀뫼”가 되고 이것이 변하여 논산이 됐다는 그럴듯한 이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말(論)이 많아서 논산(論山)이라고...

이런저런 설(設)들이 하도 많다 보니 심지어는 말(論)이 산(山)처럼 많아서 論山(논산)이라고 했다고 농담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논설(論說)이 산처럼 우뚝한 곳이라서...

그리고 최근에는 조선시대 논산 출신의 훌륭한 학자였던 사계 김장생 선생, 팔송 윤황 선생, 신독재 김집 선생, 명재 윤증 선생 등 뛰어난 학자들의 논설(論說)이 산처럼 높은 곳이라서 논산(論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논산 답사에 앞서 논산이라는 고장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논산은 청춘의 고장이다. 논산훈련소가 있어 이제 갓 성인이 된 20대 푸른 청춘들이 가장 많은 도시이며, 젊음의 추억과 애환이 서려있는 도시이다.


논산은 딸기의 고장이다. 50여 년의 재배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논산평야의 비옥한 토양과 맑은 물, 풍부한 일조량 등 천혜의 자연조건 속에서 천적과 미생물을 이용한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되어 맛과 향이 뛰어나다.


논산은 계백의 고장이다. 백제 의자왕 때, 계백장군이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군대에 맞서 최후의 일전을 치렀고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의 고장이다.

2. 구한 말 핫플레이스, 강경포구


강경은 과거 군산, 부여, 공주를 연결하는 수상교통의 요지로 크게 번성한 도시였다. 서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곡창지대인 논산평야, 호남평야와 가까운 특성 때문에, 수운을 통한 상거래가 발달하였으며, 특히 강경시장은 대구(서문)시장, 평양시장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성하였다.


강경이 특히 번성한 시기는 구한말인 1900년대부터이다. 일본인의 유입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1910년에는 한일은행 건물이 지어졌고, 충청남도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이었다. 한때 전성기에는 인구가 3만에 육박했다. “강경에 와서는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 강경은 크게 번성한 도시였다.

강경하면 젓갈인데, 젓갈이 유명한 지역답게 강경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젓갈을 파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이렇게 강경 젓갈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된 이유는 대둔산 자락의 토굴 속에서 섭씨 10도에서 15도 사이에서 새우를 발효시켜 다른 지역의 젓갈보다 영양이 많고 맛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토굴의 저온 속에서 적당히 숙성되고 발효된 강경 젓갈은 감칠맛이 좋아 직접 반찬으로 먹을 수도 있고, 김치의 부원료와 자연 조미료로써 널리 이용되고 있다.


3. 후백제의 꿈이 잠들다. 견훤왕릉


견훤은 신라 말기의 군인이자, 후백제를 창업한 군주이다. 한국사에서 후삼국 시대의 문을 열고, 후에 손수 닫은 유일한 군주였다. 후삼국 시대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면서 시작되었고, 또한 그가 후백제를 멸망시키면서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867년 경상북도 상주의 농부였던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의 비범함을 나타내는 설화를 하나 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 아자개에게 식사를 날라 주기 위해 포대기에 싸인 어린 견훤을 나무 밑에 놓아두었을 때 지나가던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견훤의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와 무언가를 했는데 남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남자가 밤에 떠나기 전 옷에 바늘을 꽂아 실을 엮어서 날이 밝은 뒤에 실을 따라갔더니 연못으로 이어져 있어 파보니 큰 지렁이가 바늘에 꽂혀 상처가 덧나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견훤은 성장하면서 체격이 남달리 컸으며 용모도 비범했다고 전해진다. 장성한 견훤은 갑작스레 고향을 떠나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로 올라가 군인이 되었다. 이 당시는 바로 경애왕과 경순왕의 외조부인 헌강왕의 재위 시절이었다. 이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는데 상주에서 부와 권력으로 제법 세력을 자랑하던 아자개가 가문의 격을 높이고자 아들을 경주로 보냈다는 말도 있고, 통일신라에서는 지방세력의 자식을 번갈아가며 수도에서 일하게 하는 상수리 제도가 존재했기 때문에 견훤의 상경도 그런 이유일 수 있다.


신라의 장군으로 서남 해안지역에 해적 토벌을 위해 배치되었을 때, 견훤은 창을 베개 삼아 적을 대비하였다(寢戈待敵*)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기상이 남달랐다.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거병하여 892년에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왕을 칭했다. 이후 900년, 서쪽을 순행하던 견훤이 완산주(지금의 전북 전주)에 이르자 완산주의 백성들이 몰려나와 견훤을 크게 환영하였다. 마침내 자신이 인근 지역의 민심을 장악했음을 알게 된 견훤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00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을 싣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黃山)을 거쳐 사비(泗沘)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

왕으로 재위하는 내내 왕건의 고려와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며 서로 패권을 잡기 위해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견훤은 노년기에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운주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돌아온 노년의 견훤은 뒤를 이을 후사를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견훤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이미 고창 전투 패배 이후부터 대립과 분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검, 양검, 용검 등은 견훤이 이미 늙어 판단력이 흐려져 있다며 좀 더 고려에 강경하게 나설 것을 주장했다. 견훤은 평소에 자신이 총애하던 총명한 넷째 아들 금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는데, 이를 알고 있던 견훤의 장남 신검은 번민하다가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찬 벼슬을 지내던 능환은 신검과 결탁하여 신검의 두 아우인 양검, 용검 등과 은밀히 음모를 꾸몄다. 마침내 935년 3월 파진찬인 신덕과 영순 등이 신검에게 권하여 난을 일으켰다. 신검은 아버지인 견훤을 폐위하여 김제에 있는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로써 견훤은 왕위를 잃고 말았는데 892년에 왕을 칭하며 세력을 일으킨 지 43년 만이었다. 견훤을 몰아낸 신검은 반발 세력을 억누르고 대왕을 자처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상황을 보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初, <萱>寢未起, 遙聞宮庭呼喊聲, 問「是何聲歟?」

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멀리 궁궐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므로,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자


告父曰: 「王年老, 暗於軍國政要, 長子<神劍>攝父王位, 而諸將歡賀聲也.」

신검이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연로하시어 나라와 군대의 업무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인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한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俄移父於<金山>佛宇, 以<巴達>等壯士三十人守之.

그리고는 곧이어 금산 불우(金山佛宇)로 아버지를 옮기고, 파달(巴達) 등 장사 30명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졸지에 장남에게 배신당해 권좌와 자식을 잃고 금산사에 유폐당한 견훤은 실로 엄청난 울분을 터뜨렸고 반드시 빠져나가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결국 유폐된 지 3개월 만인 935년 6월 금산사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은 고려군의 영향권에 있던 나주로 향해 고려 조정에 귀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했다. 이에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유금필과 대광 만세 등을 보내 4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가서 견훤을 해로를 통해 데려오도록 했다.


견훤이 마침내 개경의 왕궁에 이르자 왕건은 견훤을 깍듯이 예우하며 모셨는데 그 대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을 노리고 으르렁대던 숙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왕건은 견훤이 자신보다 나이가 거의 10살 정도 많다고 하여 '상보(尙父) 어르신'이라 높여 불렀으며 남쪽 궁궐에 거처를 정해주고 그 지위는 고려 백관의 위에 두도록 하였다. 또한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 금과 비단, 병풍과 금침, 노비 40명, 말 10 필을 주었고 후백제에서 투항해 온 자를 가신으로 붙여주어 불편함이 없게 하는 등 무진장 애를 썼다. 공식적으로는 군주가 신하를 대하듯 '상보'라는 호칭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상 대접은 상왕급이었다.


견훤이 죽은 후 고려왕조는 견훤의 왕릉을 조성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 견훤이 사망한 황산(오늘날의 논산)에 견훤릉이 남아 있어서 오늘날까지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 견훤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완산주(전라북도 전주)를 바라보며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현재 논산에 있는 견훤왕릉은 멀리 전주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남아 있다. 후삼국의 영웅이자 군주였던 견훤과 경순왕(경기도 연천)은 이렇게 머나먼 타국의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잠들어 있다.

견훤왕릉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 있으며, 지름 17.8m, 둘레 70m, 높이 4.5m이다. 주변에 아무 시설이 없고 큰 봉분 앞에 1970년 문중에서 세운 비석 ‘後百濟王甄萱陵’이 있다.

*寢戈待敵(침과대적) : '창을 베고 자면서 아침을 기다린다'라는 뜻으로,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인의 자세를 비유하는 고사성어


고려왕조는 견훤의 왕릉을 조성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 견훤이 사망한 황산(오늘날의 논산)에 견훤릉이 남아 있어서 오늘날까지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


4. 반야산 상남자를 만나다.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


충청남도 논산시 반야산에 위치하였고 대한 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며, 고려 광종 19년(968)에 승려 혜명(慧明)이 창건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이자,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고도 불리는 국보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입상’으로 유명한 절이다.


전체 높이 18.12m로 우리나라 최대 불상이다. 고려 광종(光宗)이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고려 초의 역사와 불교 조각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 석조보살입상은 머리에 이중방형(二重方形)의 보개(寶蓋)라 불리는 보관(寶冠)을 착용하고 있으며, 보살상임에도 여래상이 입는 대의(大衣)를 입고 있다.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스스로 황제라 칭한 고려 광종의 정치적 의지가 반영된 불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입상의 조성 기록은 조선 영조 19년(1743)에 건립된 ‘관촉사 사적비(灌燭寺事跡碑)’에 남아 있는데 이 기록은 조선 시대 작성된 것이지만 그 내용이 사실적이며 구체적이다. 특히 석조 미륵보살입상의 건립 공사를 고려 광종 21년(970) 시작하였다는 내용과 불상의 실측치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며 불상을 조성하는 과정의 애로사항과 이를 해결하는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관촉사 사적비’의 글자 수는 총 1,159자이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을 상고하니 고려 광종(光宗) 19년 기사년(969년)에 사제촌(沙梯村)의 여인이 반약산(盤藥山) 서북쪽 골짜기에서 고사리를 캐는데 홀연히 어린아이의 소리가 들려서 이윽고 나아가 보니 땅속에서 커다란 바위가 솟아 나오는 것이었다. 마음에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돌아와서 그 사위에게 말을 하니 사위가 곧바로 관아에 고하고 관아는 조사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백관에게 명하여 회의를 하니 아뢰기를 “이는 필시 불상을 만들라는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의원(尙醫院)에 명하여 팔도에 사신을 보내 널리 불상을 만드는 장인을 구하게 하였다. 승 혜명(慧明)이 추천에 응하고 조정은 장인 백 여 명을 골라서 경오년(970년, 광종 21)에 일을 시작하여 병오년(1006년, 목종 9)에 일을 끝마치니 무릇 37년이 걸렸다.

불상이 이미 완공된 후 도량(道場)에 모시려고 하여 마침내 천여 명이 힘을 합쳐 옮겼는데 머리 부분이 연산(連山) 땅 남촌 이십 리에 도착하자 그로 인해 마을의 이름을 우두(牛頭)라고 하였다. 혜명 스님이 비록 불상은 완성하였으나 세우지를 못하여 걱정하고 있었다. 마침 사제(沙梯) 마을에 도착하자 두 명의 동자가 진흙으로 삼동불상(三同佛像)을 만들며 놀고 있었는데 평지에 먼저 그 몸체를 세우고 모래흙을 쌓은 뒤 그 가운데에 다음을 세워 다시 이처럼 하니 마침내 그 마지막 부분도 세우는 것이었다. 혜명이 주의 깊게 보고는 크게 깨닫고 기뻐하였다. 돌아와서 그 규칙과 같이 하여 이에 그 불상을 세웠으니 동자는 바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현신(現身)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의 신장은 55척 5촌, 둘레는 30척이고 귀의 길이가 9척, 눈썹 사이가 6척이며 입의 지름은 3척 5촌, 화광(火光)이 5척이다. 관의 높이는 8척이니 큰 덮개는 넓이가 11척이고 작은 덮개는 6척 5촌이다. 작은 금불은 3척 5촌이고 연화(蓮花)의 가지는 11척인데 혹은 황금을 칠하고 혹은 붉은 구리로 장식하였다.

이에 사방에 풍문이 퍼져 만백성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공경히 예불하는 사람이 마치 시장과도 같았으므로 그 앞에 흐르는 냇물을 이름하여 시진(市津)이라 하였다. 세우기를 마친 뒤에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져 불상을 씻어 주었고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하게 서려 100일을 지속하였다.


고려의 문신 목은 이색은 관촉사 은진미륵을 이렇게 언급하였다.

마을 동쪽 백리 떨어진 고을의 관촉사에

미륵존 큰 석상이 “내 나온다, 내 나온다” 하면서 땅에서 솟았네.

눈 같이 흰 빛이 큰 들에 비추고 의연히 서 있으니

농부들이 벼를 베어 극진히 보시하네.

왕과 신하들을 놀라게 함이 어찌 구전뿐이야!

국사에 실려있다네.


5. 혹평(酷評)


관촉사 은진미륵은 그 생김새에 맞게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데, 그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권위 있는 학자들의 혹평을 받으며 우리에게 알려져 있었다.


“… 전체적인 균형미는 없다. 머리 부분이 지나치게 크고 면상(面相)이 평범하며 의상의 수법이 간결하다.”(세키노 다다시)


“3등신에, 전신의 반쯤 되는 거대한 삼각형 얼굴은 턱이 넓어 일자로 다문 입, 넓적한 코와 함께 가장 미련한 타입으로 만들고 있다, 한국 최악의 졸작이다. 은진미륵은 불상이라기보다는 그저 돌기둥(石柱)에 불과하고 그 위에 의미 없는 선이 옷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신라의 전통이 완전히 없어진…. 이 불상에 한국인이 놀란다면 그 사이즈(18.12m) 때문이고, 외국인이 감탄한다면 그 원시성 때문일 것”(김원룡).


이렇게 세키노와 김원룡 같은 영향력 있는 학자들의 공개적인 험담 탓에 ‘은진미륵’은 최근까지도 ‘못난이 불상’이니 ‘최악의 졸작’이니 하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아무런 변명도 못한 채…. 그나마 못생기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가장 크고 조성 시기(968년, 고려 광종)가 명확한 불상이라는 점 때문에 1963년에 보물(제218호)로 지정되었다.


삼 등신, ‘얼큰이’(얼굴 큰 사람), 주걱턱, 미련남, ‘패테’(패션 테러)도 모자라 ‘한국 최악의 졸작’이라니….

일제강점기 세키노 다다시만 그랬다면 몰라도 한국 고고 미술사학의 거장인 김원룡 전 서울대 교수 역시 그런 평가를 내렸으니 이 불상의 억울함과 서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2018년 2월 8일 문화재위원회 국보 심의 회의에서 대반전이 일어난다. 문화재위원들은 “중후하고 역강한 힘을 느낄 수 있는 조형미를 갖췄고 통일신라와는 완전히 다른 파격과 신비의 미적 감각을 담은 가장 독창성 짙은 불교 조각” 이라고 입을 모은 것이다. 이에 은진미륵은 만장일치로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아왔을까?


그 이유는 은진미륵을 석굴암 본존불과 비교했기 때문이었다. 8세기 중후반 완성된 석굴암을 두고 세키노 다다시는 “완전히 신라의 장인들의 창의로 이뤄졌고,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견줄 만한 것이 없다”라고 극찬했다.


김원룡은 “석굴암 불상은 당나라 불상(천룡산 석굴·보경사 석불)을 기본으로 하면서 숭고·청순한 정신미의 절정으로 이끌었다”라고 했다. 특히 석굴암 본존불의 완벽한 신체 비율, 비불비인(非佛非人)의 표정, 석면을 흐르고 있는 생명력을 통해 불타의 신비와 자애로 보는 이를 감싸주고 있다.”


김원룡은 “그러나 신라 멸망 후 고려의 불공들은 예술가 기백이나 기술을 완전히 잊어버린다”라고 전제하면서 그중에서도 은진미륵을 대표적인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 단적인 예가 유명한 논산의 미륵불이다. 조각이 아닌 돌기둥(석주), 불공(佛工)이 아닌 석공(石工)의 작품이 신라 이래 석불 전통의 종지부와 같은 기념비로 남게 되는 것이다.”

6. 촌티


은진미륵의 건립과 관련하여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지방 호족들이 곤경에 빠진 백성들의 불안감을 없애려고, 그리고 지방에서의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은진미륵과 같은 거대 불상을 조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색이 강한 불상이 되었고, 통일신라의 정교한 양식과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철원의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7. 면류관


은진미륵의 특징 가운데 이중으로 된 사각형 형태의 보개(덮개)가 있는데, 이 보개의 형태가 임금이 쓰는 면류관과 비슷하다는 것에 주목하는 연구자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임금은 광종을 지칭한다.

광종(949~975년)은 고려의 건국 과정에서 크게 성장한 호족세력을 억누르려는 이른바 왕권 강화책을 쓴 임금이다. 나말여초 혼란기에 양인에서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이들을 조사해서 다시 양인으로 되돌리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였고(956년), 과거제를 실시했다(958년). 바로 이 과정에서 왕의 권위를 크게 부각하려고 은진미륵과 같은 거대 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고려 태조 19년(936) 논산 인근의 연산에서 신검의 후백제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여 항복을 받아냈다. 태조는 이 역사적인 승전을 기념하려고 연산에 개태사와 삼존불을 세웠다. 광종은 그런 태조의 기상을 이어받아 후백제의 옛 영역인 논산, 연산 지역의 호족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개태사 삼존불상보다 4배 이상 큰 은진미륵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임금의 면류관 형태의 이중 사각형 보개는 바로 광종의 ‘왕즉불(王卽佛)’ 관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충남지역에는 은진미륵의 양식과, 제작 시기가 비슷한 불상이 하나 더 있는데,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입상(보물 217호)이 바로 그것이다.

8. 배역의 땅


후백제의 서기 어린 땅과 원한 품은 백성들의 결합을 차단하기 위해 ‘비보(裨補)’ 차원에서 18m가 넘는 은진미륵을 조성했다는 견해도 있다.


‘비보’란 산천 지세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절이나 탑을 세워 나쁜 땅을 진압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비보사탑풍수’라 한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의 8번째는 ‘차현 이남과 금강 바깥쪽은 배역(背逆)의 땅’이라 규정해 놓았다. 북쪽을 향해 흘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트는 금강의 모습이 마치 고려의 도읍인 개경을 향해 활을 당기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배역의 땅’을 진압하고 다스려야 했다. 이렇게 ‘비보사탑풍수’의 차원에서 조성한 것이 은진미륵과 같은 거대 불상이라는 해석이다.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口+衘)統合之怨, 犯蹕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災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그 여덟 번째로 말하기를, 차현 이남 공주강 바깥은 산의 형태와 땅의 기세가 등지고 거슬러서 나란히 달려 나가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밑에 있는 주군(州郡)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와 종친이나 외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혹여 국가의 변란을 일으킬 수도, 혹여 통합당한 원한으로 임금을 시해하려는 난(亂)을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또 과거 관청에 예속된 노비와 진(津)과 역(驛)의 잡척들이 권세가들에 아부해 신분을 바꾸거나 요역을 면제받기도 할 것이며, 종실이나 궁원(宮院)에 빌붙어 간교한 말로 권세를 농락하고 정사를 문란케 하여 재앙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양민(良民)이라 하더라도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훈요 10조 중, 제 8조>


은진미륵은 아무리 봐도 ‘꽃미남’이라기보다는 굳이 남자로 표현하자면 ‘상남자’에 가깝다. 고려는 왜 불상을 꽃미남으로 조성하지 않았을까?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 중 4조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법하다.

其四曰,惟我東方,舊慕唐風,文物禮樂,悉遵其制,殊方異土,人性各異,不必苟同,契丹,是禽獸之國,風俗不同,言語亦異,衣冠制度,愼勿效焉,


우리 동방(東方)은 옛날부터 당나라의 풍속[唐風]을 흠모하여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이 다 그 제도를 따랐으나, 지역이 다르고 인성(人性)도 각기 다르므로 꼭 같게 할 필요는 없다. 거란(契丹)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풍속이 같지 않고 말도 다르니 의관 제도(衣冠制度)를 삼가 본받지 말라"

<훈요 10조 중, 제 4조>


그래서 고려인들은 주변의 흔한 왕씨, 김씨, 박씨의 얼굴을 조각했던 건 아닐까?


9. 예학(禮學)의 대가 김장생(金長生), 돈암서원(遯巖書院)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조선 인조 12년(1634)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그의 사상을 잇기 위해 창건되었다. 조선 현종 1년(1660)에 '돈암(遯巖)'이라는 이름으로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김장생은 구봉(龜峯) 송익필과 율곡(栗谷)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그 학문을 이어받아 17세기 사림의 시대에 걸맞게 조선 예학(禮學)을 정비한 예학의 대가이다.


김장생이 예론(禮論)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모든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행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질서가 필요하다"라고 보고, 그것을 '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암서원은 예학을 집대성한 사계 김장생을 모시면서부터 창건과 함께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다.


김장생은 선조 35년(1602)에 연산으로 내려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양성당은 김장생을 따르고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유생들이 모여 강학하던 서재이다. 돈암서원은 양성당을 모체로 하여 건립되었고, 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창건했던 강경(江景)의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서원은 동쪽을 향해 앞으로 펼쳐진 일대의 들판을 내다보고 있으며, 경내의 건물과 시설물로는 사당인 숭례사(崇禮祠), 강당인 양성당, 동재와 서재, 응도당(凝道堂), 장판각, 정회당, 산앙루, 내삼문, 외삼문, 하마비, 홍살문 등이 있다.

서원 경내 가장 안쪽에 위치한 사당은 담으로 둘러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 내부에는 주벽인 서벽 중앙에 사계 김장생, 왼쪽인 북벽에는 안에서 밖으로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오른쪽인 남벽에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들 네 분은 모두 문묘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돈암서원은 선정(先正) 서원이기도 하다.


양성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전후에 퇴를 둔 대청이며, 좌우에는 온돌방 각 1칸씩을 두었다. 강당 앞에는 마당을 마주 보며 최근에 재건한 동재와 서재가 서 있다. 강당 앞 오른쪽인 동남쪽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인 응도당(凝道堂)이 자리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응도당은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세상의 도리 또는 진리가 이곳에 응집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응도당은 돈암서원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던 강당으로, 기와에 쓰여 있는 명문으로 보아 163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 강당 건물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크고 옛 건축양식을 충실히 따라서 지은 것이 특징이다. '응도당(凝道堂)'과 응도당 마루 위에 걸린 '돈암서원(遯巖書院)'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세상의 도리 또는 진리가 이곳에 응집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응도당은 돈암서원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던 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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