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치열했던 일생, 실학자로 금석학자로 서예가로 역사학자로 우리에게 최고의 문화유산과 예술적 감수성을 안겨준 추사의 넋은 저 백송처럼 오랜 세월 꿋꿋하게 서 있어 줄 것이다.
최고(最古) : 고려 충렬왕 때(1308년) 세워진 수덕사 대웅전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最古 :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꼽힌다.
최애(最愛)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백제 말기의 화강암 불상으로 온화하고 자비로운 미소로 인해 “백제의 미소”로 불리우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문화재 중 하나이다.
1. 상서로운 산의 고장, 서산(瑞山)
이번에 여행할 고장은 충청남도 서산과 예산이다.
여기서 도의 이름에 대해서 살펴보면 팔도(八道)는 1895년까지의 조선의 광역 행정 구역을 이르는 명칭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름을 정한 것은 각 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도시의 이름의 앞글자를 합하여 만들었다. 먼저 충청도는 대표 도시인 충주와 청주의 앞글자를 합한 것이고, 전라도는 대표도시 전주와 나주, 경상도는 대표도시 경주와 상주, 강원도는 대표도시 강릉과 원주의 앞글자를 합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경기도만 예외적으로 서울 경(京) 자에 경기 기(畿)란 한자를 쓰며 그 뜻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500리 이내의 땅을 말한다. 참고로 북한의 도 이름을 살펴보면 황해도는 황주와 해주, 함경도는 함주와 경성,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의 앞글자를 합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서산은 충청남도 내포지방에 위치하며 천안시, 아산시 다음으로 큰 제3의 도시이며 이전부터 외부와 격리되어 있었기에 조선시대부터 한 고집한다는 사람들의 유배지로 이름 높았다. 한자어의 뜻을 보면 서쪽[西]에 있는 산[山]이 아니라 상서로울 서(瑞) 자에 뫼 산(山)이다. 서산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는 해미읍성이다. 해미읍성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교황이 방문해 유명해진 해미성지와 해미읍성이 특히 천주교 신자들에겐 유명해서 성지순례 목적으로 자주 오기도 한다. 해미읍성 외에 다양한 문화유적 또한 유명한데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상(백제의 미소), 개심사, 보원사지 등이 있다. 이처럼 상서로운 산의 도시 서산으로 더나 보도록 하자.
2. 『백제의 미소』에 반하다.
이번 여행의 기착점은 뭐니 뭐니 해도 서산여행의 백미인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상이다. 흔히 줄여서 서산 마애불이라고도 부른다. 백제 후기 중국 및 고구려와의 해상 교통을 통한 불교 문물 수용의 요지였던 서산에 있는 서산 마애여래 삼존상은 중앙에 크고 환하게 웃고 있는 석가여래 입상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미소를 띠고 있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그리고 양손으로 보주를 감싸고 서 있는 제화갈라 보살상이 하나의 삼존불을 이루며 조각되어 있다. 삼국시대 대부분의 불상들이 눈을 지그시 감고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에 비해 중앙의 여래 입상은 큰 눈을 활짝 뜨고 쾌활하게 웃고 있는데 이 미소는 우리의 인식 속에 널리 알려진 일명 '백제의 미소'이다.
이 불상이 발견된 일화를 유홍준 교수는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마을 사람들만 알고 있었던 마애여래 삼존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9년입니다.
동네 나무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마애삼존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 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있는데 유, 양옆에 본 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 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 마누라가 돌을 던지지 못하고 있지유."
마애여래 삼존상을 보러 가려면 주차장 주차를 하고 조그마한 개울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안내소가 나오고 곧이어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불이문(不二門)이 놓여있다. 불이문의 의미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근원은 모두 하나라는 뜻으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3. 사찰의 구조 알아보기
여기서 잠시 사찰의 구조에 대해 알아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우리나라 사찰에 가게 되면 입구에서 시작하여 3개의 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먼저 일주문(一柱門)은 사찰 입구의 첫 번째 문으로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이어서 두 번째 문은 천왕문(天王門)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안치된 전각이다. 일반적으로 비파를 들고 있는 지국천왕은 동쪽,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는 광목천왕은 서쪽, 칼을 든 증장천왕은 남쪽,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은 북쪽을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도 있다. 사찰로 들어가는 3개의 문 중 사찰의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은 불이(不二)는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이어서 본당으로 들어가면 대개는 탑과 본당이 있는데 본당의 이름도 어떤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다.
먼저 석가모니불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 대웅보전, 영산전, 팔상전이라고 부른다. 보통은 석가모니불과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는 건물을 대웅전이라고 부르고 석가모니불과 협시불인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모시고 있는 경우에는 좀 격을 높여서 대웅보전이라고 부른다. 영산전은 석가여래와 석가의 일대기를 여덟 시기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화를 모신 법당으로 팔상전이라고도 부른다. 그 예로 국보인 안동 봉정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건물을 극락전, 극락보전, 아미타전, 무량수전이라고 부른다. 불가에서 말하는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이니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은 아미타불에 귀의하겠다는 뜻인데 즉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로 가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말이다. 이처럼 아미타불이 관장하는 세계가 극락세계이니 극락전, 극락보전이라고 부르고 아미타불의 극락세계가 무한한 생명을 주는 곳이라 하여 무량수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가면 볼 수 있는 국보인 소조 아미타여래좌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약사불은 동방유리강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로 병과 무지 그리고 가난과 배고픔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이다. 그래서 약사불의 왼손에는 대개 약병이나 약항아리를 들고 있으며 약사불의 협시보살로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다. 이러한 약사불을 모시고 있는 전각을 약사전, 유리전, 유리보전이라고 한다. 봉화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에 가면 유리보전에 약사불을 모시고 있다.
미륵불은 현세불인 석가모니의 뒤를 이어 다음 세상을 관장할 미래불로 현재는 수미산의 도솔천에서 천인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다고 알려진 미륵보살을 말한다. 이 미륵보살은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천만 년 뒤에 인간 세계로 내려와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고 한다. 그때 미륵불이 관장하는 세계가 용화세계이다. 이 미륵불을 모시는 건물을 미륵전, 용화전, 자씨전이라고 한다. 김제 금산사 편의 내용을 참고해보면 1층엔 대자보전, 2층을 용화지회, 3층엔 미륵전의 현판이 걸려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며 이는 모두 미륵불을 모시고 있다는 같은 뜻이다. 또한 대표적인 미륵불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국보 제78호와 제83호로 지정된 두 개의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있습니다.
한편 비로자나불은 앞에서 본 다른 부처와는 성격이 다른 부처이다.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 그리고 약사불과 미륵불은 모두 부처로 존재하는 부처들이나 비로자나불은 불법(佛法) 곧 불변의 불교 진리 그 자체를 형상화시킨 부처이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불은 불교 진리의 상징인 부처라 할 수 있다. 비로자나불은 이렇듯 만고불변의 진리 그 자체이므로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그 진리의 빛이 이 세상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부처 중의 부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로자나불은 화엄사상에서 특히 중심이 되는 부처이며 이 부처를 모신 건물을 대적광전, 광명전, 대광명전, 보광전이라고 한다. 이처럼 '적'이나 '광'이 들어간 건물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건물이며 또한 화엄사상의 부처이기 때문에 화엄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철원 편에서 들렀던 도피안사에 가면 대적광전 안에 국보인 철조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의 건물로 나한전이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법당으로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이다. 아라한은 공양을 받을 자격을 갖추고 진리로 사람들을 충분히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므로 나한전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봉화 편에서 들렀던 청량사 응진전에 가면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명부전은 죽은 영혼이 가는 저승을 상징하는 곳인데 그 안에는 저승의 심판관인 10대 왕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으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스님처럼 머리를 삭발했으며 우리가 사는 세상의 나쁜 귀신들과 기운들을 막아주고 신선한 에너지로 바꿔준다는 의미에서 육환장(둥근 고리가 여섯 개 묶인 지팡이)을 짚고 한 손에는 지옥을 훤히 볼 수 있는 맑은 구슬을 들고 있다. 여주 신륵사 명부전에 가면 지장보살과 시왕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어느 절에 가도 보통 삼성각을 볼 수 있는데 이 건물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토착화하면서 고유 민간 신앙인 산신신앙과 도교의 칠성신앙등을 불교가 수용하면서 생겨난 건물이다. 곧 산신, 칠성, 독성을 함께 모신 경우를 삼성각이라 하며 각각 따로 모셨을 때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이라 불린다. 보통 큰 법당 뒤쪽에 자리하며 각 신앙의 존상과 탱화를 모신다.
그리고 금강계단과 적멸보궁이 있는데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곳이어서 모든 사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이 있는 경남 양산 통도사, 전북 김제 금산사, 강원 설악 봉정암, 강원 정선 정암사, 강원 영월 법흥사에만 있다.
다시 백제의 미소 편으로 넘어와서 이야기해보자.
불이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머리 위 돌담 너머로 환하게 웃고 있는 부처님 얼굴이 보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문화재를 만든 제작진은 이 계단을 극락세계로 올라가는 피안의 세계로 올라가는 구도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조금씩 보이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설레고 신비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삼존상 중 가운데 부분에 있는 석가모니 입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으며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웃는 표정에서 나오는 눈썹, 복숭아 씨처럼 생긴 타원형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겨놓았다.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이 보살은 제화갈라보살인데 마치 그 표정이 시골에 인심 좋은 할머님께서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손주들의 재롱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며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백제 석공의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마치 이 표정은 우리 손주들 오면 어떤 맛있는 것을 해줄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할머님의 미소 같다.
서산 마애여래 삼존은 보기 위해 올라갈 때도 가슴 설레고 기분 좋지만 다 보고 내려올 때도 마음이 훈훈해지고 자칫하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그것은 바로 내려오려다 잠시 뒤를 돌아보면 걱정하시면서도 따듯하게 웃어주는 모습이 마치 남은 일정 조심해서 가라는 우리들의 부모님, 조부모님 같아 보여서이다. 한 겨울에 답사를 다녀왔는데 몇 번을 뒤돌아보고는 못 내려오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산 마애여래 삼존은 보기 위해 올라갈 때도 가슴 설레고 기분 좋지만 다 보고 내려올 때도 마음이 훈훈해지고 자칫하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서산 마애여래 삼존은 보기 위해 올라갈 때도 가슴 설레고 기분 좋지만 다 보고 내려올 때도 마음이 훈훈해지고 자칫하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4. 서산의 보물창고, 보원사터
백제의 미소의 원래 명칭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상인데 이 지역이 바로 용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라가는 입구부터 용현계곡이 있어 여름철에 답사를 예정하면 더 좋은 코스이다. 겨울철에도 아름다움과 감동은 여전한데 추워서 오래 있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용현계곡을 따라서 약 1Km 정도 올라가다 보면 넓은 지대가 나오는데 바로 보원사터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다. 법인국사 보승탑 비에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역은 가까이에 서산 마애삼존불이 있고 각 종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당시 불교문화가 굉장히 발전된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보원사지에는 석조(보물 제102호)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5층 석탑(보물 제104호), 법인국사 보승탑(보물 제105호)과 탑비(보물 제106호) 등이 남아 있다. 말 그대로 보물창고이다.
석조는 통일신라 시대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석조(돌그릇)이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재 남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석조이다. 안쪽과 위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 쪽은 거칠게 다듬은 상태인데 아마도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석조물이다. 당간은 절 앞에 세워두고 부처나 보살의 위엄과 공적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막아주는 의미를 가진 당이라는 깃발을 다는 깃대이다. 통일신라 시대 양식이며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으며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당간은 나무로 만들어졌기에 현재가지 전해지지는 않지만 국보인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은 둥근 철통을 연결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온전하지는 않지만 현재까지도 당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5층 석탑은 통일신라 말 고려초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변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2개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인데 기단부의 아래층에는 사자상을 위층에는 8부 중상을 새겨놓았다. 8부 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법인국사 탑은 법인국사 탄문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는데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고려 광종 19년(968년)에 왕사, 974년에는 국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입적하기 전 탄문은 목욕을 하고 나서 대중을 모아놓고 아래와 같은 유훈을 남긴다.
“사람은 누구나 노소가 있으나 불법(佛法)에는 선후가 없다. 부처님께서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입멸을 고하셨으니 모든 법은 마침내 공(空)을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곧 먼 곳으로 떠나려 하니 너희들은 잘 지내면서 부처님의 계율을 잘 지켜나가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라고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가서 의연하게 가부좌를 틀고 입적하였다고 한다.
그와 한 시대를 같이 했던 고려 광종도 2개월 후 사망하게 된다.
탑의 바로 옆에 나란히 법인국사 보승 탑비가 서있는데 고려 경종 3년(978년) 4월에 건립되었으며 탄문의 생애와 화엄종이 고려 왕실의 정신적인 지주라는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 비의 몸체 전면에 비문을 새겼으며 비문은 구획선을 긋도 그 안에 음각으로 처리하였다.
비의 끝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애도의 시가 적혀있는데 이 시로 마음을 달래고 서산 여행의 마무리를 해보고자 한다.
“진리가 어찌 먼 곳에 있다고 하겠는가? 누구나 진실하면 그곳에 있는 것,
행적을 새겨준 비석만 남아 있을 뿐 자비하신 그 모습 언제 다시 만나리"
현재 보원사지에는 석조(보물 제102호)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5층 석탑(보물 제104호), 법인국사 보승탑(보물 제105호)과 탑비(보물 제106호) 등이 남아 있다.
5. 예산(禮山)? 예산(藝山)?*
예산은 충청남도 중북부에 위치한 군으로 도청 소재지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예당저수지가 있고 비옥한 예당평야가 펼쳐져 있다. 평야란 기복이 거의 없는 평평하고 넓은 땅을 말하며 주로 우리가 생각하는 벼의 생산지이다. 평야는 보통 주변에 큰 강을 접하고 있으며 농업이 진흥되면서 자연스럽게 교통이 발달하고 사람이 모이고 도시가 형성된다. 우리나라의 최대 평야는 호남평야이며 전라북도 서부와 논산시가 포함된 평야이다. 그리고 그다음이 예산과 당진에 걸쳐있는 예당평야이다. 2012년 삽교읍 일원 내포신도시로 충청남도청과 충청남도의회와 충남지방경찰청이 이전되었으며 행정구역은 2읍 10면이다.
예산군의 역사를 보면 백제 때에는 까마귀 산이란 뜻으로 오산(烏山), 통일신라 때에는 외로운 산이란 의미로 고산(孤山)으로 불렸다가 고려 태조 왕건 때 예도의 고장이란 뜻에서 예산(禮山)으로 고쳤다. 또한 삼국시대 예산은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인 임존성이 있던 고장이다.
예산군은 충절의 고장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생가와 영정을 모신 충의사가 있고 또한 우애로도 이름나 있는 고장인데 우리가 교과서에서 봤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바로 여기 예산의 실존인물인 이성만, 이순 형제를 모델로 하여 만든 것이다.
우애가 좋던 형과 아우가 있었는데 이 형제 모두 각자가 부모 사후 부모님의 유산을 정확하게 나누어 분배하였다. 형은 결혼하여 자녀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우는 아직 독신이었다. 이들 형제는 얼마나 우애가 좋았던지 평소 새로운 음식이 한 개라도 생기면 반드시 함께 나눠 먹었으며 함께 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결혼한 후에도 아침에는 위 뜰 거리에 사는 형이 동생의 집에 들렀고 저녁에는 오리골에 사는 동생이 형의 집에 들러 한 상에서 같이 음식을 먹었다. 그러던 중 어느 가을날 추수를 끝내고 형제는 각자의 볏단을 서로에게 주기 위해 밤마다 자신의 논에 쌓아 놓았던 볏단을 서로 몰래 상대 집 볏단에 쌓아놓는데 둘 다 똑같이 행동한 나머지 볏단은 줄지도 늘지도 않았다. 이에 이상하게 생각하던 형제가 결국 다음날 밤에 서로 볏단을 들고 가다가 길에서 마주쳐 진실을 알게 되면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들 형제는 우애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성도 남달랐다고 한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정성을 다해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항상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렸고 돌아가신 후에도 형은 아버지의 묘를 동생은 어머니의 묘를 3년 동안 지켰으며 3년상을 마친 후에도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차려 올렸다고 한다. 형제의 우애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세종 2년 효자정려가 내려졌고 당시 내려졌던 정려를 기리기 위해 새워진 효제비가 1979년 예당저수지 내에서 마을 주민들에 의해 발견되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아 보존되고 있다.
*예산(藝山) : 예산은 원래 예산(禮山)이라 예의 고장인데 예당 저수지, 예당 평야등의 산업의 중심고장일뿐만 아니라 충절과 우애의 고장, 최고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고장 등 재주 많은 고장이라는 의미에서 예산(藝山)이라고 불러보았다.
6. 수덕 도령과 덕숭 낭자의 러브스토리, 수덕사(修德寺)
수덕사(修德寺)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조계종 교구에 대한 내용은 지난번 『전주』편에서 알아보았으니 이렇게 말해보자.
수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충남 일원의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수덕사는 백제 때에 창건되어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며 내포 땅 가야산의 가장 이름 높은 명승지이기도 하다. 가야산 남쪽 덕숭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나라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창건설화는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수덕 도령과 덕숭 낭자의 이야기다. 수덕이라는 도령이 사냥 갔다가 먼발치에서 덕숭 낭자를 보고 상사병에 걸린다. 여러 번 청혼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한다. 끈질긴 청혼 끝에 덕숭 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지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수덕 도령은 낭자와 결혼하겠다는 욕심으로 절을 지었으나 완공 직전에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절 짓기를 다시 했으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세 번째는 탐욕을 내려놓고 부처님만 생각하며 짓기를 계속하여 마침내 절을 완공하였다. 그런데 약속대로 결혼은 하였으나 낭자는 도령의 손길을 거부하였다. 도령이 덕숭 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천둥번개가 치면서 낭자는 사라지고 버선 한쪽만 쥐어 있었다.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하얀 버선꽃이 피어있었다. 덕숭 낭자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그 후 수덕사는 도령의 이름을 따고 덕숭산은 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두 번째 설화는 중창불사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절이 낡았다. 당시 스님들로서는 불사금 조달이 어려운 중에 묘령의 여인이 공양주를 자청하여 절에 찾아왔다. 그런데 미모가 뛰어나 많은 이가 찾아오게 되었고 대부호의 아들인 정혜라는 청년이 청혼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불사가 완성되면 청혼에 응하겠다 하니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불사 기간을 앞당겼다. 절은 완공하고 낙성식 후 하산을 재촉하자 잠시 시간을 달라며 여인이 방을 나가려 하기에 그녀를 잡았는데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 짝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로부터 봄이 되면 버선꽃이 피어나게 되었고 관세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하였다 한다.
수덕사의 화재는 단연 국보 제 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을 먼저 꼽을 수 있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건립된 지 700년이 지났다. 1937년 해체 수리를 할 때 중수 년대가 적힌 붓글씨가 발견되어 이 건물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수덕사 대웅전은 단지 오래된 것뿐만 아니라 안정감 있는 모습과 화려하지 않지만 단정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느껴지는 건축이다. 특히 옆면의 공포와 벽이 이루고 있는 환상적인 면 분할은 그대로가 하나의 추상화 작품 같으며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외에도 보물 제1263호인 노사나불 괘불탱과 보물 제1381호 목조 삼세불 좌상 등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5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가 5점, 문화재자료와 등록문화재 4점 등 수덕사는 총 15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을 좀 더 들여다보면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을 모시고 있으며 건축양식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4칸, 주심포식이며 맞배지붕을 올렸다. 기둥은 안정감을 주는 배흘림기둥이며 정면의 각 칸에는 섬세하게 짜인 빗살무늬의 3개의 문이 합문으로 되어 있고 측면에는 맨 앞 칸에 출입문을 설치하였다. 외형을 보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며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재 재료의 구도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표현할 수 있다. 건축된 연대가 확실하고 뛰어난 조형미로 인해 한국 목조 건축사의 백미라고 할 수 있으며 예산 10경 중 당연히 1경이다.
수덕사 대웅전을 좀 더 들여다보면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을 모시고 있으며 건축양식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4칸, 주심포식이며 맞배지붕을 올렸다.
7. 조선의 천재 예술가, 추사 김정희
19세기 최고의 예술가를 꼽으라면 단연 추사 김정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 최고의 글씨는 물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 예술가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그림과 서예뿐만 아니라 금석학* 연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국보) 임을 밝혀내었다. 당시 이 비는 아련히 조선 태조 때의 국사였던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져 있었는데 김정희가 친구 김경연과 직접 올라가 비문에 새겨진 68자를 판독하여 <眞興太王巡狩管境 - 진흥태왕순수관경> 이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내었다. 그리고 그는 비석의 측면에 다음과 같이 직접 새겨놓았다.
*금석학 : 금석(金石)에 새겨진 다양한 문자를 탁본이나 다른 방법을 통해 문자를 해독하고 연구하는 학문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讀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의 순수비이다. 병자년(1816) 7월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고 감.
그리고 또 김정희는 이듬해에 조인영과 함께 비봉에 다시 올라 다음과 같이 새겨놓았다.
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
정축년(1817)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식별가능한 68자를 해독함.
김정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비석의 탁본을 떠서 자신의 책에 실었다. 그 책이 우리가 국사 시간에 실학 파트를 공부할 때 항상 외우곤 했던 그 유명한 『금석과안록』이다. 돌로 만든 비문이 이 상태로 더 있다가는 언젠가 풍화되어 소실될 것임을 감안하면 실로 탁월하고 위대한 업적이었다. 실제로 19세기 김정희 이후로 2백여 년간 추가로 풍화되어 비문을 거의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김정희의 연구는 금석학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참고로 이 진흥왕 순수비는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신라관 한 편에 보관하고 있으며 북한산에 세워 놓은 비석은 복제본이다.
서예 하면 우리에게 떡과 관련된 일화 덕분에 한석봉이 가장 유명하지만 한석봉의 글씨는 긴 사자관* 생활로 단정하고 품위가 있기는 하나 예술성 면에서는 평가가 높지 않다. 글씨 자체의 예술성과 독창성 면에서 단연코 추사 김정희가 독보적이며 가장 많이 배우고 사용하는 서체이기도 하며 제사 때 쓰이는 병풍 등을 보면 추사체로 쓰인 병풍이 많다. 난초 그림 역시 독보적인 수준으로 석파란으로 유명하며 한국 근대사를 주름잡은 흥선대원군을 직접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다.
*사자관 :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담당했던 관청인 승문원의 사자관청에 소속되어 외교문서와 왕실 기록물 작성을 담당한 관원
김정희의 생애를 살펴보면 1786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경주 김 씨 김노경과 기계 유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큰아버지가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어머니 기계 유 씨가 임신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젖을 떼자마자 붓을 가지고 놀았는데 아버지가 붓을 빼앗으려 하자 사력을 다해 붓을 꽉 잡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릴 정도로 붓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를 보고 주변에서는 훗날 필시 명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러한 추사가 태어나고 자라고, 그리고 묻혀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이번 마지막 여행지 추사고택이다. 추사고택은 추사의 옛집만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추사를 기억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 순서를 잡으면 먼저 주차를 한 후 추사기념관부터 시작하여 추사 김정희 묘역, 추사 고택, 월성위 김한신 묘역, 화순옹주 홍문, 예산 백송(천연기념물) 순으로 돌아보면 좋다. 그리고 코스 마지막인 예산 백송은 추사고택에서 거리도 좀 있거니와 찻길로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으니 자동차로 이동할 것이 좋다.
추사기념관은 추사 김정희의 창조 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건립하여 작품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하고 있다. 지하 1층은 수장고이고 지상 1층은 상설 전시장과 다목적 영상실 및 체험실과 기념품 판매장이 있다. 2층은 기획 전시실과 사무실과 도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사기념관에는 46점의 유물과 작품이 전시, 소장되어 있다.
추사고택은 약 266.11m²(80.5평)으로 사랑채와 안채와 추사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 시대 가옥 관념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윤리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사랑채 댓돌 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 된 석주가 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하였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 기둥마다 주련이 걸려있으며 추사의 작품들과 손길에 따듯한 감성이 충만해진다. 추사 고택은 걸으면 걸을수록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세련되고 멋있는 고택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안채에는 6칸 대청과 두 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 등을 갖춘 'ㅁ'자형 가옥이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대청은 그리 흔하지 않은 규모이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는 밖에선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의 특이한 점은 안채 내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는 점인데 이는 왕실 주택의 구조로써 왕실 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기 때문이다. 안채에 들어가 있으면 더없이 아늑하고 안정된 편안한 느낌이 들며 고택인데도 이질적이지 않고 포근함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고택에서 나와 왼쪽으로 거닐다 보면 조선 후기 문신인 김한신의 묘를 볼 수 있다. 1732년 13세 때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글씨를 잘 쓰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도장을 새김에 있어서도 뛰어나 임금의 도장인 인보를 새기기도 하였다. 그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애도의 정이 극에 달하여 곧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현재 묘역에는 화순옹주가 합장되어 있다. 이 묘의 특징은 조선시대에는 양반이라 하더라도 묘막*을 설치할 수 없었으나 정조대왕께서 특별히 고모인 화순옹주를 위해 하사하신 것이다. 묘소 바로 옆으로는 화순옹주의 홍문이 세워져 있는데 홍문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열녀문과 같은 것이다. 홍문으로 들어가 보면 큰 돌들이 여럿 놓여 있는데 이것은 묘막이 있던 자라에 남은 주춧돌들이다.
*묘막 : 무덤 가까이에 지은, 묘지기가 사는 작은 집.
마지막 코스로 자동차로 조금만 이동하면 추사의 삶과 죽음을 하나의 나무로 표현할 수 있는 예산 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을 볼 수 있다. 이 백송은 추사가 25세 때 중국 연경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세 그루였으나 한 그루만 남아 있다. 화려하고 치열했던 일생, 실학자로 금석학자로 서예가로 역사학자로 우리에게 최고의 문화유산과 예술적 감수성을 안겨준 추사의 넋은 저 백송처럼 오랜 세월 꿋꿋하게 서 있어 줄 것이다.
추사고택은 약 266.11m²(80.5평)으로 사랑채와 안채와 추사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오른쪽 사진은 묘막의 주춧돌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추사고택은 약 266.11m²(80.5평)으로 사랑채와 안채와 추사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오른쪽 사진은 묘막의 주춧돌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이번 서산과 예산 여행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 예술의 걸작 중의 걸작인 추사의 세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여행을 마치도록 하자.
세한도(歲寒圖)는 추사가 그린 그림으로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그림은 추사가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이 북경에서 귀한 서책을 구해와 유배지까지 찾아와서 전해준 것에 감명해 그려준 그림이라고 전한다. 세한도 한편에는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감사의 글을 썼는데 이해하기 쉽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다. (중략)
공자께서는‘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겨울이 되기 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겨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공자께서는 특별히 겨울이 된 뒤의 상황을 들어 이야기한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이라고 해서 더 잘하지도 않았고 이후라고 해서 더 못하지도 않았다. 아! 쓸쓸한 마음이여
완당 노인이 쓰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편에 나오는 아래 글귀로 추사는 제자 이상적에 대한 칭찬과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