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섬진강 꽃놀이 클라스, 곡성, 구례, 남원

1박 2일형 답사

by 이재은
KakaoTalk_20220930_111553020_05.jpg 섬진강 꽃놀이 클라스
섬진강.png


1. 두꺼비 나루터, 섬진강(蟾津江)


섬진강은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3개 도에 걸쳐 흐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이다. 전라북도 진안군 데미샘에서 전라북도 임실, 전라북도 순창, 전라남도 곡성, 경상남도 하동을 지나 전라남도 광양에 이르기까지 약 220km 길을 흘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 첫 번째는 낙동강, 두 번째는 한강, 세 번째는 금강


섬진(蟾津)이란 이름을 한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두꺼비 나루’가 된다. ‘두꺼비 섬(蟾)’이라는 어려운 한자를 강의 이름에 끌어다 쓴 것은 이 강에 두꺼비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이 강을 거슬러 침범해 왔을 때 밤에 난데없이 두꺼비 떼가 나타나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울었기에 놀란 왜구가 광양 쪽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말하자면 왜구를 물리친 두꺼비의 공적을 기려 강의 이름을 섬진으로 삼았다는 이야기이다.

섬진강은 오래전부터 전라도 사람들의 젖줄이 되어왔으며 그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흐르고 있다. 때론 산골 아낙의 빨래터가 되고 때론 의병들의 타는 목을 축이고 은어와 참게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던 강이다.

그리고 섬진강은 우리에게 사계절 각기 다른 빼어난 풍광을 제공한다. 임실군 장산마을에서 순창군 강경마을까지 30리 길은 섬진강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서정미 넘치는 걷고 싶은 길로 손꼽힌다. 구례에서 하동까지, 곡성에서 광양까지 섬진강 주변 길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아기자기한 풍광을 자랑하며 길손들을 반겨주고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으면 하는 게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추억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낭만이라고 말한다. 섬진강을 노래한 정호승 시인의 『낙화』와도 너무 잘 어울리는 이 계절에 강줄기 따라다니면서 변치 않을 추억과 낭만을 가득 만들어오는 건 어떨까?

낙화/정호승

섬진강에 꽃 떨어진다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결코 향기는 팔지 않는

매화꽃 떨어진다

지리산

어느 절에 계신 큰스님을 다비하는

불꽃인가

불꽃의 맑은 아름다움인가

섬진강에 가서

지는 매화꽃을 보지 않고

섣불리

인생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구례군의 행정구역은 1읍 7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산업은 농업이며 쌀, 보리와 원예 농업 작물이 많이 나며 목재도 많이 생산된다. 그리고 많은 약재가 생산되고 있는데 특히 천혜의 기후조건으로 산수유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산수유 전국 제1의 주산지로 전국 생산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중에도 산동면에서 약 85%를 차지하고 있다. 생산량의 상당 부분은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어 농가 수입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백제 시절에는 구차례현(仇次禮縣)이라고 불렸고 통일신라 시대에 지금까지 사용하는 이름인 구례현으로 개칭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895년 23부제가 시행되었을 때 남원부 구례군으로 개편했을 정도로 남원과 가깝다. 1년 뒤인 1896년에 전국을 13개의 도로 나눌 때 전라북도 구례군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1914년 전라북도에서 전라남도로 이관되었다.


지리산이 품고 있고 섬진강이 키우는 구례에서는 여러 특산물이 있는데 그중 구례의 쌀인 『황새와 우렁이쌀』은 3大 3美를 내세우고 있다. 그 의미는 3大(지리산의 큰 산, 맑은 섬진강의 큰 강, 기름지고 오염되지 않은 큰 들) , 3美(수려한 경관, 넘치는 소출, 넉넉한 인심)이다.


또한 구례의 오이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지리산과 청정수로 이름 높은 섬진강 주변의 오염되지 않은 흙에 지리산 산야초로 만든 퇴비를 많이 주어 맛이 담백하며 균일하고 단단하여 오이소박이를 담그는 데도 좋아 전국 제일의 명성을 얻고 있다. 지리산이 품고 있으므로 각종 산나물과 꿀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리산 자락에서 채취되는 고로쇠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구례라는 도시는 또 우리에게 어떤 추억과 낭만을 안겨줄지 기대하며 지리산을 벗하고 섬진강 줄기를 따라 구례 여행을 떠나보자.

2. 황제를 깨우쳐준 절,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화엄사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의 본사이다.


구례군이 현재 전라남도이기 때문에 화엄사가 백제의 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화엄사는 신라 고승들이 창건하고 중창한 절이다. 오늘날의 구례와 광양, 순천 지역은 6세기까지 가야의 영토였고,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이 가야의 전 지역을 신라에 완전히 병합하면서 이 지역도 신라에 편입되었다. 이 지역을 신라에 편입한 진흥왕은 화엄사를 세움으로써 해당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면서 지배력을 강화하고 아울러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신라의 전통적인 정복 지역 유화정책과 신라 불교 고유의 중요한 특징인 호국불교사상과 연관되는데 실제로 화엄사는 화랑의 정신교육 장소로 이용되는 등 군사적인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신라 진흥왕 5년(544) 신라의 고승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 연기조사는 신라에 대승 불교를 도입했으며 진흥왕의 총애를 받았던 승려였다. 절의 이름은 화엄경의 두 글자를 따서 붙었다. 이후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는 신라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건의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증축하였다.

백제 성왕 22년(544) 음력 3월 어느 봄날, 지금의 화엄사 밑인 지리산 기슭에서 농사를 짓는 박 노인은 이상한 승려를 발견했다. 두 눈이 크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승려였다. 그는 장차 화엄사를 창건할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존자였다.


그는 동토에 불교를 펴려고 비구니인 어머니와 함께 수륙만리를 걸어서 지리산에 당도해 있었다.

그때 그는 지금의 화엄사가 있는 터에서 움막을 치고 장차 부처님을 봉안할 법당을 마련하기 위해 서원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연기존자는 박 노인에게 우리말을 배웠다. 연기존자는 천부적인 총명으로 오래지 않아 우리말을 습득했다. 연기존자는 우리말로 박 노인에게 불교를 전해주었다. 박 노인은 연기존자에게 귀의하였고 나날이 귀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사부대중이 형성되었다. 마침내 사부대중은 원력을 세워 움막을 해체하고 최초로 요사이며, 설법전인 해회당(海會堂)을 창건했다. 그다음 해 법당인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을 창건했다.

법당이 준공되는 날, 박노인은 신도들을 대표해서 사찰의 이름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을 연기존자에게 말했다.


“사찰의 이름을 연기존자님의 명호를 감안하여 연기사(緣起寺)라고 하였으면 하는 것이 저희 신도들의 뜻인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연기존자는 잠시 침묵하여 골똘히 생각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빈도는 본국에서 대방광불 화엄경을 수지 독송해왔고, 현재도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수행을 하고 있지요. 빈도가 이곳에 온 목적은 부처님의 화엄 법문을 선양하기 위함이니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였으면 합니다.”


신도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저희는 존경하는 연기존자님의 가르침에 오직 따르겠습니다.”


연기존자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이어서 말했다.


“빈도가 처음 이 산에 들어와 삼매에 들어보니 이 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산맥을 타고 내려와 한 군데로 응집된 천하의 영산이었습니다. 또 이 산은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舍利菩薩)이 상주 설법하는 도량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산의 이름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두류산보다는 앞서 문수보살을 의미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고 명명하였으면 합니다. 따라서 사찰의 이름은 ‘지리산 화엄사(智異山華嚴寺)’라고 하였으면 합니다.”

마침내 연기존자와 그를 따르는 사부대중에 의해 지리산 화엄사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무상한 세월에 의해 연기존자와 박 노인, 그리고 당시의 사부대중이 모두 죽은 후,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 사리 73과를 화엄사에 모셔왔다. 자장율사는 화엄사에 사사자(四獅子) 삼층석탑을 세우고, 그 안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여 중생의 복전을 조성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문무왕 17년(677) 당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대사가 각황전을 창건하고 왕명으로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긴 것을 화엄사에 보관한다. 이 기록은 조선 정조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전라도 구례 현의 읍지인 『봉성지(鳳城志)』에 적혀있다. 그리고 의상은 화랑도들에게 화엄 사상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신라 말 도선 대사가 다시 증축하였다고 한다. 고려 때에도 증축이 이루어졌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 대사의 유지에 따라 중수*한 이후, 광종, 문종, 인종, 충숙왕 때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 중수(重修) :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침.


임진왜란 때 승군과 군량을 지원해 준 보복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고 살아남은 승려들은 지리산과 주변 동굴에서 은신하다가 다시 모여 이 절의 폐허를 본 뒤 분개하고는 이 '대화엄종주'를 다시 세우기로 맹세하고 절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조선 인조 8년(1630)에 벽암 선사가 중심이 되어 재건을 펼쳐서 대웅전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건물들을 완료하였다.


화엄사와 일반적인 다른 사찰들과 차이는,


보통 절이라면 탑이나 대웅전이 가장 큰 건물인데 이 화엄사는 각황전이 압도적으로 크다. 물론 각황전 역시 부처상이 있는 금당이긴 하다. 이러한 크기 차이 때문에 가람의 배치가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각황전 앞의 석등과 그 아래의 서 오층 석탑은 삐뚤게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 앞 아래에 있는 동 오층 석탑 역시 정 중앙에 있지를 않고 삐뚤게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 더 이상한 점은, 중문(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과 각황전을 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보제루를 여느 절과 달리 밑으로 못 지나가고 동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단한 의도가 숨어있다.


절의 방문자가 보제루를 오른쪽으로 멀리 돌게 되면 각황전은 멀어지고 대웅전은 상대적으로 가깝게 된다. 그러면, 원근감에 의해 각황전과 대웅전의 크기 차이가 많이 줄어든다. 또한 보제루를 돌아 각황전과 대웅전, 탑과 석등 전부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되면 그 순간 마치 일직선상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서 오층 석탑-석등-각황전이 일렬로 놓이고, 동 오층 석탑과 대웅전이 일렬로 놓이게 되는 탁월한 시각적 배치를 보여준다. 관람 순서와 방향에 따라 가나다 순으로 정리해보겠다.


가. 대웅전과 동 오층 석탑

화엄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다포식 건물이다. 정유재란 때에 타 없어진 것을 인조 8년(1630)에 벽암(碧巖) 스님이 중건하였다. 삼신 불상은 인조 10년(1632)에 안치되었고 대웅전 편액은 인조 14년(1636)에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義昌君)이 쓴 것이다. 규모가 크고 아름다우며 건축 형식의 특징과 전체적인 균형이 잘 잡혀 있어 조선 중기 이후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통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지만 화엄사 대웅전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한 목조 비로자나 삼신불 좌상을 모시고 있다. 크기가 거대하고 단순하고 깊이의 강약이 느껴지는 굵직한 옷 주름의 표현은 한층 중후함을 더해 준다. 특히 『화엄사 사적기』(1697)에 의해 조성연대를 짐작할 수 있고 도상이나 양식 면에서 17세기의 기준이 되는 불상으로 높은 의의가 있는 불상으로 평가된다. 또한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굉장히 이례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삼신불 중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의 삼신불을 모신 경우는 유일하여 조선 중기 이후 불교 사상 연구와 불교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조형적 수준도 단연 돋보이므로 2021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화엄사 대웅전에는 탱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과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을 그려놓은 삼신불 탱화이다. 이 삼신불 탱화는 18세기 조계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겸 스님 외 13명의 화원이 동원되어 그린 뛰어난 작품으로 필선이 섬세하며 녹색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길이가 4m를 넘는 거대한 3폭의 화면에 삼신불을 완전히 갖춘 매우 드문 예로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도와 더불어 18세기 삼신불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에서 내려오면 마당에 동서로 쌍탑이 우뚝 서 있는데 대웅전 바로 밑에 있는 탑이 동 오층 석탑이다. 동탑과 서탑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서탑이 장식과 조각이 화려한 반면, 동탑은 아무런 장식 없이 단정하다.

동탑은 신라 말기 헌강왕 1년(875)에 도선 대사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한 탑이다. 화엄사가 백두산의 웅대한 힘과 섬진강의 힘에 술렁거리는 배와 같은 형국이라서 두 탑을 세워 움직임을 가라앉히고 원만한 기운이 감돌도록 하였다. 탑의 오층은 삼계*, 보살계, 불계를 표현하고 단층의 기단은 일승법*을 뜻하며 장식이 없는 것은 청정한 마음을 표현한다. 동 오층 석탑 역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삼계 : 중생이 생사 왕래하는 세 가지 세계. 욕계, 색계, 무색계

*일승법 :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함께 성불한다는 석가모니의 교법


나. 각황전과 석등, 서 오층 석탑

각황전은 대웅전과 함께 화엄사의 주불전이며 정면 7칸, 측면 5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다포식 중층 건물이다. 원래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육전이 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조각 파편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육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각황(覺皇)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깨달음의 최고봉, 즉 석가모니’를 나타내는 말이고, 또 하나는 ‘황제를 깨닫게 하였다’는 의미이다. 각황전이란 이름이 정해진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장육전 복원에 필요한 시주를 구할 사람을 정하기 위하여, 커다란 항아리에 밀가루와 엿을 넣어놓고 차례로 엿을 꺼내게 하되, 손에 밀가루를 묻히지 않은 사람을 뽑기로 하였다. 매월이라는 중이 엿을 꺼내는데 그의 손에는 밀가루가 전혀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선택되었다.


매월이 탁발을 떠나기 전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반드시 아침에 첫 번째 만나는 사람에게서 시주를 받으라고 하였다. 매월이 꿈을 깨고 길을 떠나 처음 만난 사람은 아랫마을의 가난한 거지 노인이었다. 매월이 시주를 청하자 노인은 계곡의 물에 뛰어들어 자신의 목숨을 시주하였다.


그 뒤 8년의 세월을 탁발하며 헤매다가 당나라에까지 가게 된 매월은 어느 날 길가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당나라의 황자로서 태어날 때부터 벙어리였는데 매월을 만나자마자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전후의 사연을 다 들은 황제는 그 거지 노인이 자신의 아들로 환생한 것이라 하고 많은 시주를 하였다. 이렇게 매월이 당나라 황제를 깨우쳐준 뒤 중건되었다 하여 ‘각황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 여래 불상과 4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 자 모양인데, 벽 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다보불과 아미타불의 3불 좌상과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 지적보살의 4 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불상을 조성할 때에는 숙종을 비롯하여 인현왕후, 경종, 숙빈 최 씨, 영조 등의 왕족과 여흥 민 씨, 해주 오 씨 등 당대 권세가들이 대거 참여한 18세기 초 최대의 왕실 불사였다.


각황전의 불보살상은 1703년 10월 4일에 조각승 색난(色難)을 중심으로, 충옥(沖玉), 일기(一幾) 등 24명의 조각승이 함께 만든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석가여래좌상은 색난, 다보여래상과 문수보살상은 충옥, 아미타불상은 일기, 보현보살상은 웅원, 관음보살상은 색난과 추붕, 지적보살상은 추평이 각각 주도하여 조성한 사실을 통해 당시 최고 권위의 왕실 발원 불상 조성에 색난이 초빙된 것은 조각승으로서 그의 명성이 대단히 높았음을 입증해 준다.


각황전의 8개 기둥 주련*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1 연부터 4연은 화엄사를 창건한 인도에서 온 연기 조사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이고,


*주련(柱聯) :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문구


偉論雄經罔不通 (위론웅경망불통) 위대한 논서와 웅혼한 경전을 모두 통달하시고

一生弘護有深功 (일생홍호유심공) 일생을 불법 널리 펴고 지키는 공덕이 깊도다

三千義學分燈後 (삼천의학분등후) 뜻있는 삼천의 제자가 나누어 법등을 이어가니

圓敎宗風滿海東 (원교종풍만해동) 화엄 원교의 종풍이 해동을 휩쓸었네


5연에서 8연은 설암(雪巖) 추봉 선사의 문집인 ‘설암난고’에 나오는 글의 일부이다.


西來一燭傳三世 (서래일촉전삼세) 서쪽 인도에서 온 등불 하나 삼세로 전하니

南國千年闡五宗 (남국천년천오종) 남국인 이 나라에 천년을 전하여 다섯 갈래가 되었구나

遊償此增淸淨債 (유상차증청정채) 이 많은 청정한 빚 노닐면서 갚으려 하니

白雲回首與誰同 (백운회수여수동) 흰구름이 머리에 감도는데 누구와 더불어 할 것인가


앞서간 고승들의 공덕을 기리는 문장이라는 해석할 수도 있고, 동시에 불사 지원을 아끼지 않은 왕실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에는 매화나무가 하나 서 있는데 이 나무는 수령이 300년이 넘었다. 조선 숙종 때 각황전을 중건하면서 계파 선사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매화도 장륙전의 이름을 따서 '장륙화'라 불렀으며 꽃이 붉다 못해 검다고 '흑매'라고도 불린다. 가지마다 매달고 있는 붉은 꽃망울이 엄숙했던 각황전의 위엄을 한순간에 흔들어 놓는다. 평소 화엄사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각황전이지만 봄에는 흥행의 주인이 따로 있는 듯한데 바로 이 매화나무이다. 매화가 만개하는 봄철이면 관광객들의 사진 행렬이 끊이지 않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참고로 화엄사 천연기념물인 매화나무는 각황전 앞의 매화나무가 아니라 산으로 오르다 보면 길상암 앞에 있는 나무이다.


화엄사 홍매화에 대해 이재호 작가는 다음과 같은 시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겨울이 옷고름 풀고 살색 햇살 늘어놓으면

밤새 잠든 별의 새순을 털면서 일어나는

화엄사 홍매화를 보러 가겠네

삼월 젖동냥에 지친 바람을 잠재우고 피어나는 홍매화

아, 성삼재로부터 뼛골 시린 엄동을 지켜낸 홍매화

원통전에 글 한 줄 놓고, 그 향기에 취해 천년을 살아지려나

아, 탄하고 탄해서 무릎 헤지도록 달려온 바람과 함께

나는 삼월이면 어김없이 화엄사 홍매화를 보러 가겠네


각황전이라는 거대한 스케일의 국보와 그 옆에서 채색으로 꾸며주고 있는 홍매화를 보고 나서 고개만 옆으로 살짝 돌리면 각황전 앞 석등이 눈앞에 다가온다. 이 석등은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조성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석등으로 높이가 6.36m이다. 석등의 형태는 3천 년 만에 한 번 핀다고 하는 우담바라화의 꽃잎인데 이 꽃은 부처님 오심이 지극히 드문 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8각의 바닥돌 위에 있는 아래 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구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구 모양의 특이한 기둥 형태는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했던 것이다. 이 기둥에는 8개의 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8정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8정도란, 정견(正見),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 정명(正命), 정업(正業), 정어(正語), 정사유(正思惟), 정정 (正定)을 말한다.


기둥 위로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 받침돌을 두어 화사석(불을 밝히는 곳)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는데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높은 깨우침과 부처님의 광명을 비추어준다. 그리고 장구는 진리의 소리이다.


이러한 석등의 구조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8정도로 열심히 수행하여, 사성제 진리의 이치를 밝히고, 광명을 놓고, 진리의 소리를 중생들에게 들려주어, 마음의 등불로 세계를 밝혀 주시는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이다. 각황전 앞 석등 역시 국보이다.

KakaoTalk_20220930_111553020_02.jpg
KakaoTalk_20220930_111553020_01.jpg
보통 절이라면 탑이나 대웅전이 가장 큰 건물인데 이 화엄사는 각황전이 압도적으로 크다.


다.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

각황전 서편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적멸보궁과 4사자 삼층석탑을 만나볼 수 있다. 이 탑은 불국사 다보탑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이형석 탑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 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 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바로 앞에는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기 1개씩으로 일반형 석탑의 탑신부와 같으나 초층 4면에 각각 자물쇠를 새겨놓았다. 이것은 안에 모신 사리나 유골,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누구도 열지 못하게 굳게 닫아놓는다는 의미인데 이런 문양의 문짝을 문비형(門扉形)이라고 한다. 그리고 각각 4개의 문을 지키는 여러 수문장을 돋을새김으로 장식하여 놓았는데 정면에는 인왕상, 양측면에는 사천왕상, 후면에는 보상상이다.


고려 시대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은 연기조사의 효심을 기려 효대라는 시를 남겼는데 후대 사람들은 이곳 탑이 놓여 있는 언덕을 효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寂滅堂前多勝景 吉祥峯上絶纖埃 (적멸당전다승경 길상봉상절섬애)

적멸당 앞에는 빼어난 경치도 많은데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끊겼네

彷徨盡日思前事 薄暮悲風起孝臺 (방황진일사전사 박모비풍기효대)

온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날은 저무는데 효대에 슬픈 바람 이누나

3. 우리 마음의 고향, 섬진강과 곡성(谷城)


곡성군의 행정구역은 1읍 10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산업은 농업이며 쌀농사와 보리농사가 활발하고 양봉, 양잠, 축산도 하고 있으며 전체 면적의 약 70%가 임야이다.


곡성 이름 뜻은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바뀌어 왔다.


백제 때는 욕내군(欲乃郡)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곡성(曲城)으로 바뀌었다. 이 동네 길이 너무 험해서 장사꾼들이 곡소리를 하며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시대로 와서는 한자가 哭聲(울다 곡, 소리 성)으로 바뀌었는데 그 뜻이 좋지 않아 穀城(곡식 곡, 도읍 성)으로 변경되었으나 나라에서 곡식 곡(穀) 자를 보고 풍족한 동네로 착각해서 조세를 많이 부과한다고 하여 다시 谷城(골짜기 곡, 도읍 성)으로 변경되었다. 1914년에 창평군이 옥과군 일원과 고달면을 편입하였고 1979년 곡성면이 곡성읍으로 승격하였다.

섬진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참게와 은어요리가 유명하며 유명한 특산물로는 멜론과 토란이 있다.

곡성이 영화 제목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동명이지만 한자의 뜻은 다르다.

그에 대해 당시 유근기 곡성군수는 다름과 같은 사설을 전남일보에 기고했는데 곡성군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명문이다.


봄날의 곡성은 아침이면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에서 표현한 대로 '피부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으로 상쾌하다. 해가 산머리 위로 오르면 따스한 봄볕은 어느새 새벽의 기운을 물리치고 섬진강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온기를 나눈다. 10㎞에 이르는 강변길에는 가지와 이별한 벚꽃 잎이 강바람을 타고 미처 다 날아가 버리기 전에 철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5월이면 열흘간 열리는 곡성 세계 장미축제에는 1004종 수천만 송이 장미가 내뿜는 향기가 가득하다.


곡성은 길의 고장이다. 하늘 닮은 섬진강은 쉴 새 없이 흐르면서도 속도로써 우리를 재촉하지 않는다. 그 옆에는 물길 따라 자전거길, 자동차 길, 기찻길, 숲길이 겹을 이루고 있다. 길과 길이 만나는 곳에서는 사람도 서로 만나 소담한 마을이 만들어지고, 마을마다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우리네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그리워 어깨를 한껏 낮춘 산들은 토란과 능이버섯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들녘에는 새벽이면 이슬로 변하는 섬진강을 머금은 채 딸기, 멜론, 블루베리 등이 영글어 간다. 저녁이면 아이부터 어른까지 한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정담을 나눈다.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희망들이 섬진강 윤슬처럼 함께 반짝이는 곡성은 그야말로 자연 속의 가족 마을이다.


'곡성(谷城)' 50여 년간 부르는 이름이지만 여전히 촌스럽다. 우리네 부모들의 골짜기 같은 주름을 옛날처럼 닮았다.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이름이 투박하다. 그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이라면 태어난 곳과 상관없이 곡성은 누구에게나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전남일보》, 2016년 4월 22일 자 -


이 봄 우리 마음의 고향인 섬진강과 곡성으로 떠나보자.

4. 이야기의 도시, 남원시(南原市)


남원은 예로부터 ‘천부지지 옥야백리’(天府之地 沃野百里)라고 했다. 천부지지는 하늘이 고을을 정해준 땅이라는 뜻이고 옥야백리는 넓고 비옥한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다는 의미다. 그만큼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1읍 15면 7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시의 이름은 통일신라 시대 행정구역인 9주 5소경 중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南原京)에서 유래되었다. 9주 5소경 다른 도시들은 현재는 전부 다른 이름을 쓰고 있는데 남원경만 현재까지도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백제 교룡군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원경(청주)과 함께 옛 백제 영토의 양대 도시였다. 고려 후기에는 왜구의 침입을 이성계가 지금의 운봉 지역에서 대격파한 황산대첩이 일어나기도 했던 도시였으며 조선 태종 때 남원도호부로 주변의 고을들은 관할하였다. 1895년(제 2차 갑오개혁) 23부제 개편 때 전라도를 전주부, 남원부, 나주부로 나눌 만큼 규모가 큰 지역의 중심도시였다.


남원은 지리산의 고장이다. 지리산은 1967년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 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915m로 신라 5악의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불렸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황봉(1915m)을 주봉으로 하여 노고단(1507m), 반야봉(1735m) 등 3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00리 3개도(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5개 시군(남원시, 하동군, 함양군, 산청군, 구례군)에 걸쳐있는 민족의 명산이다.


남원을 예향이라고도 부르는데, 전통문화예술이 잘 보존되어 있고 현재도 그 활동이 활발한 문화예술의 중심이 되는 고장을 예향이라고 한다. 그러한 예술적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문학에서 전래동화의 쌍두마차인 춘향전과 흥부전의 고장이고, 현대소설로 와서는 ‘혼불’이라는 명작의 본무대이기도 한다. 또한 음악분야에 있어서는 신라시대 거문고 명인인 옥보고가 있고, 오늘날 동편제* 판소리를 정형화한 가왕 송흥록,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인 국가무형문화재 안숙선 명창의 고장이기도 하다.


*동편제 : 판소리 유파의 하나로 호남 동부 지역에서 발달한 소리


5. 전 국민의 보양식, 추어탕(鰌魚湯)


추어에서, 추자는 미꾸라지 추(鰍)로 고기 어(魚) 자와 가을 추(秋) 자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글자이다. 말 그대로 가을철 보양식인 셈이다.


추어탕은 가을바람이 불 무렵 무더위에 지친 서민들의 기를 보충해주고 영양을 공급하던 보양식이었다. 그 종류도 지역별로 다양하여 사골국물에 미꾸라지를 통째로 끓여내어 식감을 살린 서울식 추어탕, 고추장을 풀어 넣고 매운탕처럼 얼큰하게 끓여내는 강원도 지방의 원주추어탕, 미꾸라지와 민물고기를 섞어 맑고 시원하게 끓여내는 경상도 지방의 청도추어탕 등이 있다. 그리고 미꾸라지를 통째로 갈아서 된장에 버무린 시래기 등과 함께 끓여낸 남원 추어탕이 있다.


추어탕의 효능에 대해서는 옛 문헌에서도 많이 소개되었다.

중국 송나라 사신의 눈에 비친 고려의 풍경을 담은 『고려도경』에는 “귀한 손님은 육류를 즐겨 먹었으나 가난한 백성들은 수산물을 많이 먹는다. 미꾸라지, 전복, 조개, 새우 등은 귀천이 없이 따로 먹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육류를 먹는 게 쉽지 않았던 백성들은 미꾸라지를 이용하여 단백질을 보충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명나라 이시진이 엮은 약학서인 『본초강목』에는 “미꾸라지를 추어라고도 하는데, 미꾸라지의 성품이 뛰어나게 튼튼하고 잘 움직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시진은 미꾸라지의 효능에 대해 “속을 따뜻하게 하고 기를 북돋워 준다. 술에 취한 것을 깨도록 하며 소갈(消渴)*을 풀어준다.”라고 했으며, 조선 시대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에서는 “미꾸라지는 따뜻한 성질이 있으며 단맛이 나고 무독하다. 속을 보호하며 설사를 그치게 한다. 형체가 작아 항상 진흙 속에 산다. 추어라고도 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 고종 때의 명의 황필수의 『방약합편』 에서는 “미꾸라지는 기를 더하고 주독을 풀고 당뇨병을 다스리며 위를 따뜻하게 한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인들도 추어의 효능은 익히 알고 있었는지, 미꾸라지를 수중 인삼이라고 표현하였다.


*소갈(消渴) : 갈증으로 물을 많이 마시고 음식을 많이 먹으나 몸은 여위고 오줌의 양이 많아지는 병.


6. 조선판 ‘사랑과 영혼’,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남원은 사랑의 도시이다. 남원을 대표하는 사랑이야기는 두 개가 있다. 그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춘향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만복사저포기’이다.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다소 생소한 내용으로 접했던 김시습의 한문소설이다.


조선 전기,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매월당 김시습은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는데, 그중 현재까지도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가 있다. ‘금오신화’의 특징은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기이한 내용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과 주인공들이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 전기소설(傳奇小說) :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기이한 이야기


김시습의 이러한 문학적 경향은 그의 기구한 삶과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1세 때인 1455년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철원에 은거하였으며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규탄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김시습은 이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거열형(車裂刑) : 사지와 목을 다섯 개의 수레에 따로따로 매달고 소나 말을 달리게 하여 찢어서 토막 내는 형벌


어쨌든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의 ‘만복사’라는 절에서 주인공 양생이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사랑을 다룬 명혼소설(冥婚小說)이다.


*저포놀이 :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승부를 겨루는 놀이


전라도 남원에 사는 총각 양생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의 구석방에서 외로이 지냈다. 배필이 없음을 슬퍼하던 중에 부처와 저포놀이를 해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처녀를 얻었다. 그 처녀는 왜구의 난 중에 부모와 이별하고 정절을 지키며 3년간 궁벽한 곳에 묻혀서 있다가 배필을 구하던 터였다. 둘은 부부관계를 맺고 열렬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양생은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났다. 여기서 양생은 자기와 사랑을 나눈 여자가 3년 전에 죽은 그 집 딸의 혼령임을 알았다. 여자는 양생과 더불어 부모가 베푼 음식을 먹고 나서 저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사라졌다. 양생은 홀로 귀가했다.

어느 날 밤에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은 타국에 가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당신도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라고 했다. 양생은 여자를 그리워하며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지냈다. 그 마친 바를 알 수 없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남원의 만복사지이고 현재에도 그 전설을 간직한 채 절터로 남아있다. 지금은 절터 가운데로 도로가 나 있어 이등분으로 되어있지만 절터에는 오층 석탑, 석조대좌, 당간지주, 석조여래입상까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4점이나 있다.


KakaoTalk_20220930_111553020_05.jpg 절터에는 오층 석탑, 석조대좌, 당간지주, 석조여래입상까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4점이나 있다.


7. 조선판 ‘파리의 연인’, 『춘향전(春香傳)』


『만복사저포기』가 산 자와 죽은 자의 다소 생소하고 섬뜩한 사랑이야기라면, 『춘향전』은 우리가 보통 많이 알고 있는 스토리의 소설이다. 『만복사저포기』가 생사를 초월한 사랑이야기라면, 『춘향전』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야기이다.


조선 숙종 때, 전라도 남원 고을에 월매라는 기생이 있었다. 월매가 기생 일을 그만두고 서울 성 참판의 둘째 부인이 되어 정성껏 기도한 끝에, 하늘나라 선녀가 품에 날아드는 꿈을 꾸고서 딸 춘향을 낳아 귀하디 귀하게 키웠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춘향이 열여섯 나던 해, 음력 오월 오일 단옷날이었다. 남원 사또의 아들 이몽룡이 방자를 데리고 봄 경치 구경을 하러 광한루에 나갔다가 그네 타는 춘향을 보고 만나고자 한다.

방자의 주선으로 이몽룡과 춘향은 광한루에서 처음 만나게 되고, 한눈에 서로에게 반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비록 혼인식을 올리지는 못했으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꿈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몽룡은 동부승지 벼슬을 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가게 되었다. 몽룡은 어머니께 춘향을 한양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으나 기생첩을 들여서 한양으로 데려갈 수는 없으며 앞으로 벼슬을 하는 데도 방해가 될 거라는 꾸중을 듣는다.


그래서 결국 춘향에게 이별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춘향은 발을 동동 구르며 서럽게 울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이몽룡은 그런 춘향에게 한양으로 올라가서 장원 급제하여 데려가겠노라 약속을 하고 떠난다. 남은 춘향도, 떠나가는 이몽룡도 좀처럼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여러 달 뒤에 남원 고을에 변학도라는 새로운 사또가 부임하게 되었는데, 이 사또는 오로지 기생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름답다고 소문난 춘향을 보고 싶어 했다. 변 사또의 아랫사람들이 춘향은 이미 지난번 사또의 아들 몽룡과 혼인을 하였고 오직 한마음으로 몽룡을 기다리는 중이라 일러 주었다.

하지만 변 사또는 어떤 양반이 엄한 부모 아래 살면서 혼인도 하기 전에 그저 놀던 계집을 데려가겠느냐며 춘향을 관아로 데려오라고 한다. 하지만 춘향은 변 사또의 요구를 거절한 끝에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만다.


한편, 한양에 간 이몽룡은 밤낮으로 공부하여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하고 전라도 암행어사에 임명된다. 거지꼴로 변장하고 전라도 땅으로 들어간 이몽룡은 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고 매 맞고 감옥에 갇힌 춘향의 소식을 듣고 남원으로 가 월매를 만난다. 월매는 거지꼴을 한 이몽룡을 박대하지만 춘향의 몸종 향단은 이몽룡을 정성껏 대접한다.


이몽룡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감옥에 갇힌 춘향을 만나는데, 춘향은 이몽룡을 원망하지 않는다. 어머니 월매에게 이몽룡을 잘 대해 줄 것을 당부하고, 이몽룡에게는 변 사또의 생일인 내일 자기가 맞아 죽으면 서방님의 선산 발치에 자기를 묻어 달라고 부탁한다.

이튿날 남원 가까운 고을의 수령들이 남원 관아로 모여들고 변 사또의 생일잔치가 열린다. 이몽룡이 거지 차림으로 잔치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가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가득하다는 뜻의 시를 짓는다.


그 시를 돌려 읽은 이들은 하나둘 관아를 빠져나갔으나 변 사또는 술이 잔뜩 취해서 춘향을 대령하라 한다. 그때 "암행어사 출두야!" 요란하게 외치는 역졸들 소리가 나며 어사또가 관아로 들어온다.

어사또는 감옥에 갇혀 있던 죄인들을 불러 하나하나 조사해서 죄 없는 사람들은 풀어 주었다. 그리고 춘향의 차례가 오자 짐짓 거짓으로 춘향에게 자신의 수청을 들면 목숨은 살려 주마고 한다. 하지만 춘향은 자기를 죽이라며 거절을 하고 향단에게 몽룡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그때 어사또가 "얼굴을 들어서 나를 보아라." 한다. 춘향은 어사또가 이몽룡임을 확인한다. 춘향 모녀와 향단은 어사또를 따라 한양으로 들어가는데, 임금은 이몽룡에게 더 큰 벼슬을 내리고 춘향에게는 정렬부인이라는 호칭을 내린다. 이몽룡의 첫째 부인이 된 춘향은 이몽룡과 오래도록 함께 살았다.


이 춘향전의 무대가 바로 남원 광한루(廣寒樓)이다. 광한루는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알려진 황희가 1418년 고향인 남원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 조그마한 누정인 광통루를 지었는데 그것이 광한루의 시작이었다. 그 후 1434년 남원부사인 민여공이 개축하였고, 1444년 정인지가 누정에 올라 “달나라에 있는 궁전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라고 그 아름다움을 월궁(月宮)에 비유한 것에서 ‘광한루’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1582년 전라관찰사 정철은 호수에 물을 끓어들여 삼신산을 만들었고, 남원부사 장의국은 오작교를 축조하였다. 하지만 1597년 정유재란 당시에 모두 불타버린 것을 1626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한 후 여러 차례 중수가 이루어졌다.


현재의 광한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중수하면서 익루(翼樓)*를 추가로 설치하여 마치 조선왕릉 정자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누각과 달리 2층 누각의 기둥 사이에는 문을 달아 겨울에 문을 내리면 커다란 방과 같은 모습이고, 여름에 문을 올리면 널따란 대청마루가 되는 형태이다. 광한루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연못을 포함한 광한루원 일대는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익루(翼樓) : 부속 누각


광한루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 걸려있다. 호남제일루라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며, 광한루는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 속 ‘광한청허부’를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이처럼 달나라 궁전이라고도 불리는 광한루는 많은 문인들이 아름다움을 예찬하였고 과연 춘향전이라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전개될 만큼 아름다운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은하수 떠 있는 차가운 밤 광한루

오작교가 북두와 견우 사이에 있네.

천상의 사람들 좋은 곳 유람하면서

계궁에 달을 천년이나 붙들어 두었네.”

(조선 후기 문인 이경여)


“용성의 남쪽 물가에 있는 광한루

누각 아래 구름다리로 푸른 물을 건너네.

은하수가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월궁이 오히려 세상에 있네.”

(조선 후기 문인 홍석기)


광한루 서편에는 오작교가 있는데 동쪽과 서쪽으로 떨어져 살던 견우와 직녀가 1년에 단 하루 칠월칠석에 만나는 다리이다. 옥황상제의 딸 직녀와 미천한 소몰이였던 견우의 사랑은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이도령, 성춘향의 사랑과 닮아있다. 그래서 ‘오작교’는 ‘까마귀 오(烏), 까치 작(鵲), 다리 교(橋)’자를 쓴다. 그런 연유에서 일까.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슬이 좋아지고 연인은 영원한 사랑을 꿈꿀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KakaoTalk_20220930_111553020_12.jpg
KakaoTalk_20220930_112427562.jpg
광한루 서편에는 오작교가 있는데 동쪽과 서쪽으로 떨어져 살던 견우와 직녀가 1년에 단 하루 칠월칠석에 만나는 다리이다.


8. 소년 장수 아지발도 vs 백전노장 이성계, 황산대첩(荒山大捷)


고려 말 한반도는 외부의 침략으로 의해 혼란에 빠져 있었다. 북쪽에서는 홍건적 세력이 남하하여 개경에 이르렀으며, 남쪽에서는 왜구가 남부 내륙을 비롯하여 해안을 따라 약탈을 자행하던 상황이었다. 이 두 난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국가를 안정시킨 인물이 바로 이성계였다.

개경 탈환에 큰 공을 세운 이성계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한 그를 국가적인 영웅으로 이끈 전투가 바로 고려 우왕 6년(1380) 남원 운봉에서 있었던 황산대첩이다. 지리산 자락까지 내륙을 침략했던 왜구의 세력은 이 전투를 기점으로 약화되었다. 황산대첩을 계기로 이성계는 조선 건국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또한 전북 지역에 전하는 이성계 설화의 시초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전투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이성계를 사령관으로 한 고려군은 남원에서 운봉을 거쳐 이 좁은 통로로 다가서고 있었다. 왜구는 지형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미리 확보하고 고려군을 기다렸다. 오후 햇살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울 즈음 이성계는 결단을 내리고 왜구가 포진한 양쪽 산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끈질기게 저항하는 왜구를 몰아붙여 남쪽 산간에 집결시킨 고려군은 희생을 각오하고 왜구와 정면 대결을 벌인다.

왜구는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다. 나름의 편제를 갖추고 나름의 전술로 고려군을 괴롭혔고, 혼전 중에 사령관 이성계를 집중 공격하여 이성계가 허벅지에 화살을 맞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다. 또 이성계의 뒤에서 접근하는 왜구를 의형제 이지란이 화살로 쏘아 맞혀 이성계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악전고투였다. 사방을 포위하고 악착같이 달려드는 왜구는 결국 이성계의 활 솜씨에 8명이 쓰러지고 나서야 공격을 중단했다.

고려군은 일단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이대로 싸움을 멈추면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채 장기적인 대치 상태로 갈 가능성이 컸다. 이때 이성계가 칼을 빼 들고 선두에서 맹렬하게 돌진하여 다시 적군을 몰아붙이자 이번에는 왜구가 위기에 빠졌다.


이때 분노한 왜구 장수 한 명이 튀어나왔다. 왜구의 연합군을 이끈 소년 장수 아지발도였다. 15~6세 정도로 나이는 어리지만 신분은 높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장수는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돌격전을 벌였고 고려군은 그 기세에 눌려 금세 허물어졌다.

그의 용맹에 이성계도 감탄했다. 조금은 심리적 여유가 생겼는지 평생 전장을 함께 누빈 이지란에게 사로잡자고 말한다.


"형님. 사로잡으려면 아군의 희생이 너무 커질 겁니다."

"할 수 없군. 그럼 내가 저 놈 투구의 정자(頂子)를 쏴서 투구를 벗길 테니 그 틈에 그대가 즉시 쏴서 죽여라."


말을 끝내자마자 이성계는 채찍을 들고 말을 몰았다. 온몸을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아지발도에게 말을 달려 접근한 이성계는 연달아 활을 쏘아 정자를 맞혀 투구의 끈을 끊어놓았다. 아지발도의 투구가 떨어지자 이 틈을 기다린 이지란이 바로 활을 쏴서 그를 죽였다.


아지발도가 전사하자 왜구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고려군은 기세를 타고 왜구를 몰아붙여 남쪽 협곡 아래로 밀어내 마구잡이로 몰살시켰다. 하천은 피로 물들었고 하천에 있었던 큼지막한 바위에는 피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최소 1만여 명 이상을 헤아리던 왜구는 약 70여 명만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남부지방의 육지를 자기 땅처럼 누비며 약탈을 일삼았던 왜구의 기세가 꺾인 대표적인 전투, 바로 황산대첩이다.


이 황산대첩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1575년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비석의 건립을 조정에 건의하여 조선 선조 10년(1577) 황산대첩비와 부속 건물이 건립되었다. 비석이 건립되고 15년 만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남원을 지나면서 이 비석을 보고 크게 미워했지만 비석 부수는 것을 꺼려서 탁본 한 점만 가지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렇게 임진왜란도 무사히 넘긴 황산대첩비였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무참하게 파괴된다.

KakaoTalk_20220930_111553020_09.jpg 이 황산대첩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1575년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비석의 건립을 조정에 건의하여 조선 선조 10년(1577) 황산대첩비와 부속 건물이 건립되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가 기안한 ‘유림의 숙정과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에 의해 파괴가 되었다. 이 문서에는 총 20점의 비석들이 명시되었는데 이미 파괴된 2점을 제외하고는 황산대첩비만 파괴한 것으로 보아 당시 총독부가 생각했던 이 작품의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비신(碑身)만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귀부와 이수도 여러 조각으로 부수었고 새겨진 글씨들은 철정으로 쪼아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하였다.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일제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 선조가 크게 당한 전투였고 자기들이 멸망시킨 조선 왕조를 건국한 인물과 관련된 유적이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을 것이다.


황산대첩비지 입구는 3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아마도 왕과 관련된 건물이기에 3문 체제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문을 통해 들어가면 정중앙에 대첩비각(大捷碑閣) 안에 높이 4.25m의 황산대첩비가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파괴된 것을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 있던 좌대에 세워 놓은 것이다.

대첩비각의 오른편으로는 파비각(破碑閣)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쪼고 파괴해놓은 비석의 조각들을 모아서 안치해놓은 곳이다. 비석 조각들을 자세히 보면 글씨가 남아있는 부분과 철정으로 쪼아서 매끄럽게 처리된 부분이 확연히 구분된다.


대첩비각의 왼편으로는 황산대첩 사적비를 세워 놓은 사적비각(事蹟碑閣)이 있다. 이 비는 황산대첩의 전황과 비각 건립 취지가 기록되어 있다. 고종 19년(1882) 운봉 현감 이두현이 세웠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황산대첩비와 함께 파괴되었다가 1958년에 중건하였다.


정리해서 다시 말해보면 황산대첩비지에서는 비가 3개 있는데, 중앙의 황산대첩비, 오른편의 파괴된 비, 오른편의 황산대첩 사적비이다.


입구인 3문을 나와 오른편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바위 위에 전각을 세워 놓은 장소가 있는데 여기는 어휘각(御諱閣)이다. 이 어휘각은 이성계가 황산대첩이 자기 혼자만의 공이라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공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을 돌에 새긴 유적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렷하였던 기록은 일제강점기 민족 말살 정책에 따라 폭파되고 철정으로 쪼아버려 현재는 그 잔영만이 남아있는 것을 1973년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KakaoTalk_20220930_111553020_10.jpg
KakaoTalk_20220930_111553020_11.jpg
대첩비각의 오른편으로는 파비각(破碑閣)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쪼고 파괴해놓은 비석의 조각들을 모아서 안치해놓은 곳이다.


9.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남원에는 국보 1개와 보물 22개 등 23개의 국가지정문화재가 있는데, 그중 무려 15개가 실상사와 만복사지에 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당연히 국보 10호인 백장암 3층 석탑을 들 수 있다.


백장암의 연혁을 살펴보면 실상사는 신라 말기인 828년 홍척국사가 현재 백장암이 있던 곳에 창건했으며, 절의 규모가 커지자 제자인 수철 화상이 현재의 실상사 자리로 옮겼고 이곳은 암자가 되었다.

1468년 실상사가 화재로 폐허가 되자 약 200년가량 실상사 승려들이 백장암에 머물며 기도 정진했으며 1679년 이번에는 백장암이 화재로 소실되자 폐허로 남아 있던 옛 실상사에 절을 중창하고 백장암은 부속 암자가 된 것이다.


국보인 백장암 삼층석탑은 탑의 형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볼 수 있으나 우리가 흔히 보는 석탑과 달리 매우 화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받침대는 일반적인 석탑과 달리 작고 받침석 위에 석탑을 한 층씩 쌓아 올렸다. 높이는 5m 정도이며 군데군데 훼손되어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봤던 탑들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현존하는 대다수의 다른 탑들은 지붕의 머리 장식(상륜부)이 사라지고 없지만 본 석탑의 머리 장식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상태도 양호하다.


1층 몸돌은 문비형으로,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으로 장식하였고, 이 문을 지키는 사천왕과 보살(普薩) 및 신장(神將)을 새겨놨다. 2층과 3층의 몸돌에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천인(天人)을 조각해 놨다. 2층 탑신에 새겨진 것들은 입상으로 면 당 2구씩 배치되었고 3층의 것들은 좌상으로 각 면에 1구씩 배치되었다. 각층의 지붕돌 밑면에도 역시 조각들로 채워져 있는데 1, 2층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3층에는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고 아름다운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어 신라 후기를 대표하는 이형 석탑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국보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백장암 올라가는 길은 승용차를 가지고 올라올 수 있지만 길이 좁고 가파르며 곡선 구간이 많아 차가 올라가는 차와 내려오는 차가 서로 마주치면 곤란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 특히 운전을 조심해서 다녀와야 한다.


KakaoTalk_20220930_111553020_06.jpg 국보인 백장암 삼층석탑은 탑의 형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볼 수 있으나 우리가 흔히 보는 석탑과 달리 매우 화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keyword
이전 08화8. 백제의 미소에 반하다, 서산(瑞山), 예산(禮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