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신선이 다스리는 고을, 단양(丹陽)

1박 2일형 답사

by 이재은
단양 온달산성


1. 신선이 다스리는 고을, 단양(丹陽)


단양(丹陽)이라는 도시명은 연단조양(鍊丹調陽)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유래되었다.

연단(鍊丹)은 ‘신선이 먹는 환약’을 뜻하고 조양(調陽)은 ‘빛을 골고루 따듯하게 비춘다’는 의미이며, 뜻대로 해석해보면 단양은 ‘신선이 다스리는 아름다운 고을’이다. 이름의 뜻에 걸맞게 단양은 수많은 문인들과 학자들이 오가며 남긴 명문(名文)이 아직도 전해지며 단양이라는 도시의 매력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단양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지역에 속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에 병합되어 고구려 적성현(赤城縣)이 되었다. 장수왕 사후 고구려가 약화되고 신라와 백제가 힘을 재정비하여 6세기 중반 이 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치열한 경쟁이 발발하였고 550년 신라 진흥왕의 명을 받은 이사부 장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면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때 그 유명한 단양 신라 적성비가 세워졌다.


고려 때는 940년에 단산현(丹山縣)이었다가, 충숙왕 5년(1318) 단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 단양군이 되었고, 고종 32년(1895) 충주부가 관할하다가, 1914년에 영춘면을 병합하여 지금의 단양군이 되었다.


총면적의 80% 이상이 산지이며 농경지는 10%에 불과하다. 그래서 단양군 어디에서나 높은 산을 볼 수 있고 석회암 지대가 많아서 석회암 동굴과 같은 카르스트 지형을 나타낸다. 남한강이 동서로 관통하기 때문에 도시 어디를 가도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기암절벽을 병풍 삼아 다닐 수 있다. 단양군의 별명인 ‘대한민국 녹색쉼표’에서 볼 수 있듯이 상당한 청정지역으로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깨끗한 계곡물을 발견할 수 있으며 산천어, 버들치, 꺽지 같은 물고기들이 청정지역임을 증명하고 있다.


단양군의 가장 큰 산업은 시멘트 산업이다. 매포읍 솔미산 일대에 석회암지대가 발달되어 있어 1964년 한일시멘트와 성신양회 시멘트공장이 처음으로 준공되었으며 국가기간산업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시멘트 운송을 위해 중앙선 철도가 공장으로 바로 연결되며 화물운송만 취급하는 도담역이 위치한다.


또한 단양군은 관광도시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단양군 전체 면적이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간 관광객 천만명 이상을 기록하고 있으며, 국내 최고의 관광지에 선정될 정도로 충청북도를 대표하는 관광도시이다. 예로부터 단양팔경인 도담삼봉, 석문, 구담봉, 옥순봉, 사인암,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이 유명했고, 그다음으로는 제2 단양팔경인 북벽, 금수산, 칠성암, 일광굴, 죽령폭포, 온달산성, 구봉팔문, 다리안산이 있다. 특히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동굴지대로, 온달동굴, 고수동굴, 천동동굴 등의 석회동굴이 있다. 산악 관광지로 소백산과 월악산이 있고 문화재로는 단양 신라 적성비, 수양개 선사유적지, 단양향교, 영춘향교 등을 보유하고 있다.


단양은 또 마늘의 고장이다. 석회암 지대의 알칼리성 점질토로 단양에서 생산되는 마늘은 6쪽인 점이 특이하며 맛과 향이 독특하고 단단하다. 주야간의 큰 일교차라는 기후적 특성으로 인해 단양마늘의 맛은 뛰어나다. 타 지역 마늘보다 조직이 치밀하여 저장력이 강하고 맛과 향이 독특하여 타 지역 마늘을 압도하고 있다. 단양 전통시장에 가면 마늘순대, 마늘빵 등 단양마늘을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단양의 지명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는데 단양의 영춘이란 지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원래 단양은 충북 동북부의 산간 오지인지라 기후도 그에 걸맞게 추우며 봄도 짧은 편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주민들의 아쉬움과 바람이 반영된 것인지 지명을 먼 옛날부터 영춘(永春)이라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1980년대 충주댐 건설 이후 충주호가 생기고 단양군 내의 남한강도 물이 불어 여러 지역이 수몰되는 등 지리적인 변화가 생기자 기후에도 변화가 생겼다. 실제로 봄(春) 날씨가 옛날보다 조금이라도 더 길어(永)졌다고 한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 되어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쉬어가는 휴식의 공간이 되어주는 단양군, 내 마음에 녹색 쉼표를 하나 찍으러 떠나보는 건 어떨까?


2. 도담삼봉과 그 많은 문인들


도담삼봉은 단양군의 명승지로 절경이 특이하고 아름다워 단양팔경 중 으뜸으로 손꼽히며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황준량, 홍이상, 김정희, 김홍도, 이방운 등이 많은 글과 그림을 남긴 곳이다.


도담삼봉은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원추 모양의 봉우리로 남한강이 휘돌아 이룬 깊은 못에 크고 높은 장군봉을 중심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그 형상이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남한강과 어우러져 뛰어난 절경을 보여주고 있다.


1897년 조선에 와 전국 팔도를 두루 여행했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도담의 아름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강의 아름다움은 도담에서 절정으로 이룬다. 낮게 깔린 강변과 우뚝 솟은 석회 절벽, 그 사이의 푸른 언덕배기에 서 있는 처마가 낮고 지붕이 갈색인 집들이 그럼처럼 도열해 있는데 이곳은 내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지금도 이 도담삼봉을 보러 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단양을 찾고 있는데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도 많고 인기도 많은 도담삼봉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며 우리를 그 매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홍수에 떠내려온 봉우리에 세금을 낸 사연

고려 후기에 강원도 정선에 있던 세 봉우리가 홍수에 떠밀려와 충북 단양의 남한강에 멈추게 되었다. 정선의 관아에서는 떠내려간 봉우리를 찾아 단양에 와서 “저 세 봉우리가 정선의 땅이니 여기 사람들은 정선의 땅에 대한 세금을 내야 한다.”며 해마다 세금을 걷어 갔다. 단양 사람들은 매우 억울하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이 세금을 바치고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단양과 정선에 이중으로 세금을 내야 하는 고통 속에서도 누구 하나 나서서 억울함을 말하지 못하였다. 괜히 말했다가 원하는 것도 이루지 못하고 곤장이라도 흠씬 맞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다음 해가 되자 또 정선의 관아에서 관리가 찾아와 세금을 요구하였다. 그때 한 소년이 앞으로 나와 정선의 관리에게 “올해부터는 세금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하였다. 소년의 말을 듣고 기가 찬 정선의 관리는 “뭐라고? 지금까지 잘 내오던 것을 왜 내지 않겠다는 것이냐! 우리 지역의 소중한 땅덩이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땅값을 내지 않겠다고?” 라며 호통을 쳤다. 소년은 “세 봉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홍수 때문에 떠밀려 온 것이지, 우리 마을에서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세 봉우리가 그렇게 소중하다면 여기서 세금을 받을 것이 아니라, 다시 정선으로 옮겨다가 그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소년이 똑 부러지게 대답하자 정선의 관리들은 차마 대꾸를 하지 못하고 세금도 받아내지 못한 채 돌아갔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부터 단양 사람들은 더 이상 정선 관아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 아무도 나서서 말하지 못할 때에 소년의 용기 있는 발언으로 세금 내는 고생이 끝날 수 있었다.


이 소년이 후에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정도전이었다고 한다. 정도전은 세 봉우리, 도담삼봉의 경치를 사랑하여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지었다고 한다.

본처와 애첩 사이의 애달픈 전설

옛날에 금슬이 아주 좋은 부부가 살았는데 그 부부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자 남편이 대를 잇기 위해 첩을 얻어 아이를 갖게 되자 아이를 가진 애첩이 볼록해진 배를 남편 쪽으로 향하고 이를 뽐내자 이를 못마땅히 여긴 본처가 남편을 등지고 앉았다고 한다. 이를 내려다본 하늘님이 이들을 벌하러 영원히 움직일 수 없는 3개의 봉우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세 봉우리 중 가운데가 남편이고, 왼쪽이 본처, 오른쪽이 애첩이다.

도담삼봉 근처에는 단양 팔경 중 제 2경에 속하는 석문(石門)이 있다.

이 석문에는 마고할미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하늘나라에서 물을 기르기 위해 내려왔다가 비녀를 잃어버린 마고할미가 비녀를 찾으려고 흙을 손으로 판 것이 99마지기 논이 되었다. 마고할미는 이곳의 풍경이 아름다워 평생을 농사지으며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사람들은 선인(仙人)들이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그 논을 선인옥답이라 불렀다.


마고할미의 이름은 원하는 일이 뜻대로 잘된다는 의미의 마고소양(麻姑搔痒)에서 비롯된 것으로 무속신앙에선 그녀를 절대 신으로 숭배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단양읍 도담리에 자리한 석문의 선인옥답에는 사랑, 건강, 사업 등 마음에 담아 두었던 소원을 빌기 위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편 단양에는 또 하나의 할머니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다자구 할머니’ 이야기이다.


옛날 죽령 마을에는 산적들이 밤낮으로 나타나 백성을 괴롭혔다고 한다. 산이 험준해 관군도 산적을 토벌하기 힘들었다. 이때 한 할머니가 나타나 산적소굴에 들어가 ‘다자구야’하면 산적이 취침 중이고, ‘덜자구야’하면 도둑이 안 자고 있는 것으로 관군과 계획을 짰다. 산적 두목의 생일날 밤 술에 취해 산적이 모두 잠들자 할머니가 ‘다자구야’라고 외쳐 이 소리를 들은 관군이 산적을 모두 소탕할 수 있었다.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도담삼봉과 석문을 다녀가며 많은 글과 그림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山明楓葉水明沙(산명풍엽수명사)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三島斜陽帶晩霞(삼도사양대만하)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爲泊仙楂橫翠壁(위박선사횡취벽) 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待看星月湧金波(대간성월용금파) 별빛 달빛 아래 금빛 파도 너울지더라

퇴계 이황, 『도담삼봉』


蓬島飛來落翠池(봉도비래낙취지) 봉래섬이 날아와 푸른 물에 앉아 있고

石門穿出釣船遲(석문천출조선지) 석문을 뚫고 나오는 낚싯배 주춤거리네.

誰將一顆雲松子(수장일과운송자) 구름 소나무 씨 한 알을 누가 심어

添得颼飅到水枝(첨득수류도수지) 물줄기에 솔바람 소리 더하는구나

다산 정약용, 『도담에서』

百尺石霓開曲灣(백척석예개곡만) 백 척의 돌 무지개가 물굽이를 열었네

神工千缺杳難攀(신공천결묘난반) 아득한 신의 공력 따라잡기 어렵구나

不敎車馬通來跡(부교거마통래적) 말과 수레가 오간 자국 남기지 않게 하니

只有煙霞自往還(지유연하자왕환) 안개와 노을만 스스로 오락가락하누나.

추사 김정희, 『석문(石門)』


겸재 정선, 기야 이방운, 단원 김홍도 역시 도담삼봉을 다녀간 후 그림으로 그 아름다움을 남겨두었다.

3. 퇴계 이황 기생 두향


퇴계 이황은 21세에 김해 허 씨와 결혼하지만, 아들 셋을 낳고 6년 만에 병으로 아내와 사별한다. 두 번째 아내를 얻었으나 여러 번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정신병으로 고통을 겪다가 이황의 나이 46세 되던 해에 두 번째 아내와도 사별하게 된다. 그 후 2년 뒤 이황은 단양군수로 부임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18세의 관기 두향을 만나게 된다.


두향은 단양군의 관기이며 시와 글씨, 그림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가야금에도 능했으며 매화를 특히 좋아했다. 두 사람은 마음 깊이 연정을 느꼈지만, 9개월 만에 이황이 경상도 풍기군수로 발령이 난다. 관기를 데리고 갈 수 없던 그 시절의 법도로 인해 두 사람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헤어지기 전날 밤에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어 서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먼저 이황이,


“죽어서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가 그지없네”


그러자 두향이 답하기를,


“이별이 하도 서러워서 잔 들고 슬피 울며 어느덧 술 다하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렇게 이별한 후 1570년 이황이 69세로 하직할 때까지 21년 동안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두향은 이황과 헤어진 후에 관기를 그만두고 장회나루 터 인근 남한강가에서 움막을 짓고 평생 이황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간다. 이황 역시 두향을 그리워하며 다음과 같은 두향에게 연정의 시를 보낸다.

黃卷中間對聖賢(황군중간대성현)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속식)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이에 두향은 평소 애절하게 키우던 매화를 이황에게 보낸다. 이황은 두향이 보낸 매화로 인해 이때부터 매화를 특별히 좋아하게 된다. 이황은 나이가 들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당신의 초췌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는 “매화에 물 주어라.” 한마디를 남긴다. 두향이 이황에게 주었던 이 매화는 그 대를 이어서 지금도 안동의 도산서원에 그대로 피고 있다.


그리고 단양의 두향은 안동의 퇴계에게 난초를 보냈다. 단양에서 두향과 함께 기르던 것임을 알아차린 퇴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자신이 평소에 마시던 우물물을 손수 길어 두향에게 보냈다. 이 우물물을 받은 두향은 물을 마시지 못하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퇴계의 건강을 비는 정화수로 소중히 다루었다. 어느 날 이 정화수가 빛깔이 변하는 것을 보고 퇴계가 돌아가셨다고 느낀 두향은 소복 차림으로 단양에서 머나먼 안동 도산서원까지 4일을 걸어서 돌아가신 님을 뵈었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두향의 사랑은 한 사람을 향한 지극히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퇴계 종가에서는 단양에 있는 두향의 묘에 벌초하고 그녀의 넋을 기리고 있다.

두향이 죽은 후 이황의 제자인 아계 이산해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산해는 스승이 아꼈던 두향의 무덤을 대를 이어서 돌보며 제사 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단양의 기생들은 두향이 사망한 이후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 한 잔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두향이 세상을 떠난 후 200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조선 후기 시인 이광려가 두향의 무덤을 찾아 시를 읊었다.


孤墳臨官道 외로운 무덤 길가에 있고

頹沙暎紅 버려진 모래밭엔 붉은 꽃 피어있네

杜香名盡時 두향의 이름 잊혀질 때

仙臺石應落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두향에 대한 기록으로 조선 후기 문신인 임방도 시를 남겼다.


一點孤墳是杜香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이라네

降仙臺下楚江頭 강 언덕의 강선대 아래에 있네

芳魂償得風流價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絶勝眞娘葬虎丘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


4. 우리나라의 구석기 유적지


한반도의 구석기 유적지는 북한 두만강 유역에서부터 제주 빌레못 동굴까지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 산악지대에 거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한반도 전역이 구석기인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석기 유적은 한데 유적(Open Site)과 동굴유적(Cave Site)으로 구분된다.


한데 유적은 주로 큰 강가나 해안가에 일시적으로 막집을 짓고 살았거나 지낸 자리이며, 동굴유적은 석회암지대에 주로 분포한 동굴 형태의 유적이다. 또한 바위 밑의 가려지는 지형을 이용한 바위 그늘이 있다.

한데 유적은 석기제작을 위한 좋은 돌과 사냥거리가 풍부하고 물을 구하기 좋은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동굴유적은 구석기인들의 이동생활 중 비바람을 막아주고 야생동물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주요 구석기 유적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 연천 전곡리 : 아시아 최초 아슐리안계 주먹도끼 발견

평양 상원 검은모루 동굴 : 동물화석, 주먹도끼 발견

충북 청원 두루봉 동굴 : 어린아이 유골 발견 (흥수아이)

충북 단양 금굴 : 70만년전 유물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

충북 단양 수양개 : 유물의 종류, 제작 수법, 유물의 양에서 국내 최대

함북 웅기 굴포리 : 찍개, 긁개 등 중기 구석기 유물 발견

평남 덕천 승리산 동굴 : 한반도 최초의 인류화석

평양 만달리 : 만달사람으로 불리는 인류화석

충남 공주 석장리 : 남한 최초 구석기 유적 발견


구석기 유물은 선사시대 유물이기 때문에 역사시대 유물보다 사람들의 관심이나 흥미가 덜한 편이다.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역사시대에 비해 유적과 유물로만 접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원주 편에서 『존재하지 않음』의 아름다움에 감격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구석기시대도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 역사적 사실로써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의 무한한 상상력과 호기심으로 구석기 이야기에 빠져 보는 건 어떨까?


3. 단양 수양개


수양개(垂楊介)란 수양버들 나무가 많은 개울을 뜻이다. 수양개 유적은 남한강 상류의 강가에 있는 유적으로 충주댐 수몰지역 지표조사의 일환으로 충북대 박물관이 1980∼1981년에 발견하고, 1983∼1985년까지 4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석회암 동굴과 남한강을 낀 자연환경으로 선사인들이 살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을 갖추었기 때문에 제천의 점말용굴, 단양 상시바위그늘, 단양 금굴 유적 등과 가까이에 있다.


수양개 Ⅰ지구에서는 50여 곳의 석기 제작소가 확인되어 이 시기 구석기인들의 석기제작방법을 추정,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슴베찌르개·좀돌날 몸돌 등 후기 구석기시대의 전형적인 석기들이 같은 문화층(文化層)에서 출토되었으며,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후기 구석기 문화 전통의 전파경로를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수양개Ⅱ지구는 마한시대 생활유적으로, 26채의 집터가 확인되었으며, 다양한 기형의 토기와 더불어 석기, 철기 등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수양개Ⅱ지구 유적은 대규모 취락을 이루는 생활 유적으로, 집터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서까래 구조나 벽체를 이루는 나무판자 등이 불탄 채로 확인되어 당시 건축방법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집터 내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불탄 낟알이 출토되어 마한시대 농경과 식생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수양개 유물전시관은 중기 구석기부터 마한시대(철기시대)까지의 문화층(文化層)에서 발굴된 수양개 유적의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제 1전시관에서는 『태고의 숨결-구석기시대』라는 테마로 우리나라 선사문화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단양지역의 여러 동굴유적과 한데 유적의 유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제 2전시관에서는 『성장의 터전-수양개 구석기시대 유적』이라는 테마로 중기 구석기부터 후기 구석기까지 수양개 Ⅰ, Ⅱ지구의 구석기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제 3전시관에서는 『번영의 자취-수양개 마한시대 유적』이라는 테마로 우리나라 중부내륙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마한시대 생활유적을 만나볼 수 있다. 국사시간에 철기시대를 공부할 때 들어봤던 철(凸) 자형 집터의 축소모형과 주거유적에서 발굴된 다양한 기형의 토기, 석기류 등을 만나 볼 수 있다.

4. 가장 오래된 구석기인들의 집, 단양 금굴(金窟)


단양 금굴은 전기 구석기시대(약 70만 년 전)부터 청동기 시대(약 3천 년 전)까지 선사시대 전 시대를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선사문화의 표준 유적이다. 이렇게 한 유적이 선사시대 전반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다. 동굴의 규모는 입구 높이 8m, 넓이 7∼10m이며 확인된 동굴의 길이는 85m이다.


발굴 결과 7개의 문화층(文化層)이 발견되었는데 1문화층부터 7문화층까지의 유물의 특징과 시기를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단양 금굴은 전기 구석기시대(약 70만 년 전)부터 청동기 시대(약 3천 년 전)까지 선사시대 전 시대를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선사문화의 표준 유적이다.


5. 단양 신라 적성비


단양 신라 적성비는 충청북도 단양군에 위치한 적성에 있는 신라 시대의 비석으로,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장수왕 이후로 백여 년간 고구려 영토였던 충북 단양 지역을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정복 군주 진흥왕 시대 공격해 차지한 뒤 현지 주민들을 신라의 백성으로 포섭하기 위해 만든 비석이다.


진흥왕 때 세운 여러 비석 중 하나지만 다른 비석들과 달리 단양 적성비는 진흥왕 순수비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단양 적성비는 4개의 순수비들(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비)보다 먼저 세워진 것으로, 이사부와 그 휘하의 신라 장군들이 고구려 영토였던 적성(赤城)을 공략하여 영토로 편입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순수비보다는 영토를 개척한 것을 기념하는 척경비(拓境碑)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순수비는 신라가 한강의 하류까지 차지하는 등 영토를 최대로 확장한 뒤, 진흥왕이 직접 손에 얻은 영토를 돌아다니며 세운 것으로, '순수' (巡狩)란 '왕이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살피다'라는 의미다.


신라 장군 이사부

여기서 잠시 신라 장군 이사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보통 아이들이 부르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 ‘신라장군 이사부~’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보통 이사부 장군을 이 씨로 알고 있겠지만, 이사부는 김 씨 왕조인 내물 마립간의 4대 자손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성명이 ‘김이사부’이다.

《삼국사기》 권 44 열전(列傳) 중 제4 이사부(異斯夫) 중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전해진다.


異斯夫【或云苔宗】, 姓金氏, 奈勿王四世孫…

이사부(혹은 태종이라고도 한다)는 성이 김 씨이고, 내물왕의 4세손인데…


신라 전기 최고의 명장으로,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시기인 6세기 초중반에 활약하였으며 신라군을 지휘하여 전성기 영토확장에 최고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때 이사부는 거칠부, 구진 등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공략하였으며 경상도 일대의 소국이었던 신라를 한반도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지증왕 13년(512)에 하슬라주(오늘날의 강원도 강릉시)군주로 임명받았고 우산국 정벌을 개시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귀환했다. 정벌 과정은 삼국시대의 양대 역사책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실려 있다.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 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13년(서기 512) 여름 6월


우산국 정복에 사자 목상을 사용했다는 기록 덕분에 현재 강원도 삼척시에는 '이사부 사자공원'이 있고 지역 축제 때도 나무사자를 깎는 행사를 한다. 신라 사람이던 이사부가 먼 서역에서나 볼 수 있는 사자를 알았던 것은 신라에 뒤늦게 들어온 불교의 경전에 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자를 직접 본 적은 없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전설 속의 동물로만 알았을 가능성이 크나 한반도에 사자의 존재가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져 영향을 끼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사부가 정복한 우산국은 신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빠르게 신라 문화에 동화되었다. 국립박물관 연구팀이 울릉도의 고분을 조사 발굴한 결과 우산국에 존재하는 다수 고분이 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우산국의 역사는 신라의 진출 이전에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신라에 복속된 뒤 동해안 지방에서 문화가 유입된 뒤 울릉도에 거대한 돌무지무덤을 축조할 만큼 문화가 융성하고 국가 형태로 존재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신라 때부터이다.


신라 전성기를 이끈 3대 왕을 섬기면서 평생에 걸쳐 업적이 상당한데도 김유신과 비교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라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정복 전쟁의 영웅'이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만하다.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의 기틀을 다지는데 앞장선 장군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양면 공격에 시달리는 신라를 지켜내었음은 김유신과 함께 신라 최고의 영웅으로 꼽아도 모자라지 않다.


강원 영동지역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어서 강원도 지자체에서도 이사부 콘텐츠를 많이 내세우고 있다. 삼척시에서는 이사부 광장, 이사부 사자공원 등이 있고, 매년 11월에 이사부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이사부 초상화도 도시 곳곳에 걸려있다.


적성비 발견과 관련된 이야기도 매우 흥미롭다.


1978년 1월 6일,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학교 조사단이 충북 단양을 찾았다.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해서였다. 조사단은 단양 읍내 성재산(해발 323m, 적성산성)을 올랐다. 진흙밭을 지나 산성터로 이르렀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산에 오르는 길은 진흙탕이었다. 옛날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신라 토기였다.


조사단이 신발에 뭍은 흙을 털려고 주변을 살피다가 흙 묻은 돌부리가 지표면을 뚫고 노출된 것을 발견했다. 그 돌부리에 신발 흙을 털어내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무슨 글자가 보였다. ‘대(大)’자였고, 흙을 닦아내니 ‘아(阿)’자, ‘간(干)’자도 보였다. 그들은 허겁지겁 야전삽으로 흙을 걷어내고 보니, 30cm 정도 비스듬히 누워있는 신라시대 비석을 발견했다.


실로 위대하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 고장 노인들은 남한강을 경계로 북쪽에는 고구려가, 남쪽에는 신라가 진을 치고 지켰다는 얘기를 전하고 있다. 또 한때 백제군이 적성을 차지한 적이 있는데 젊은 성주가 아랫마을 주막의 주모에게 넋을 잃어서 방비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성을 신라군에게 빼앗겼다는 전설도 있다. 주모는 백제군에게 죽은 신라 병사의 아내였다. 신라군이 적성을 되찾은 후 주모는 자결했는데, 1970년대 초까지도 성안에 그녀를 기리는 성황당이 있었다고 한다.

적성비를 보러 올라가는 길은 자동차로 외길이라 주의해야 한다. 곳곳에 회차 지점이 있긴 하지만 올라가다 내려오는 차를 마주치면 난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적성비는 중앙고속도로(춘천 방향) 단양팔경 휴게소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우연히 이 고속도로를 지나게 될 때는 잊지 말고 잠시 들어 호두과자 한 봉지를 들고 적성비와 적성을 보고 가는 행운을 놓치지 말자.


6. 절벽에 새겨진 탄로가(嘆老歌), 사인암


적성비에서 자동차를 타고 남쪽으로 약 9km 정도 이동하면 대강면 사인암리에 있는 사인암(舍人巖)을 만나볼 수 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기암절벽이 마치 다른 색깔의 비단으로 무늬를 짠 듯 독특한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인암 앞으로 흐르는 계곡을 운선구곡이라 하며 단양팔경 중에서도 제일 빼어난 경승지로 손꼽는다.


추사 김정희가 이곳을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 그림과 같다고 극찬했을 정도로 그 경관이 특이하고 아름답다.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 역시 사인암을 그림으로 옮기기 위해 1년을 바라만 보며 고민하였다고 한다.


사인암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고려 때 유학자인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행적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당시 우탁은 임금을 보필하는 직책인 정 4품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지냈고 이후 그의 고향인 단양 땅으로 낙향하여 이곳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다. 이런 이유로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 임제광이 우탁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이 바위를 사인암이라 지었다고 전해진다.


암벽에는 우탁 선생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卓爾弗群 確乎不拔 獨立不懼 豚世無憫(탁루불군 확호불발 독립불구 돈세무민)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유할 것이 아니며 확실하게 빼지 못한다. 혼자서도 두려운 것이 없으며, 세상에 은둔해도 근심함이 없다.


그리고 사인암 왼편으로는 우탁 선생이 남겨놓은 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제목은 탄로가(嘆老歌)이다.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은 가시 덩굴로 막고, 찾아오는 백발은 막대로 치려고 했더니,

백발이 (나의 속셈을) 제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지 간 곳이 없다.

잠시 동안 (그 봄바람을) 빌려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 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백발)를 다시 검은 머리가 되게 녹여 볼까 하노라.


늙음이라는 현상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절절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잘 음미해 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늙음, 나아가 인생무상을 달관(達觀)한 경지를 느낄 수 있다. 즉 늙음은 막대로도, 가시로도, 봄바람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천리(天理)이다. 사인암의 천하절경도 영원하고 그 앞을 흐르고 있는 운선구곡의 아름다움도 영원하지만, 우탁 선생도, 추사 김정희도, 단원 김홍도도 모두 세월의 흐름 속에서 없어져 갔다.


막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부질없는 일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은 대부분이 시간의 가치를 모르는 법이다. 우리도 거스를 수 없는 세월 앞에서 보다 겸손하고 순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탁 선생처럼….


거스를 수 없는 세월 앞에서 보다 겸손하고 순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탁 선생처럼….

7. 산성(城)의 나라


우리나라 사적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성(城) 또는 성터인데 이처럼 많은 성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기원전 194년에 위만이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고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기원원 18년에는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즉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성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나라마다 많은 성을 축조하였는데 이때부터 축성술이 발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축성술은 지형과 환경에 적응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의 성은 여러 가지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성의 ‘지위 및 기능’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도성 : 수도를 둘러싼 성

읍성 : 지방 고을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싼 성

장성 : 적군이 넘어오지 못하게 국경선을 따라 길게 쌓은 성

관문성 : 주요 교통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쌓은 성

진성 : 군대 주둔지인 진을 둘러싼 성

창성 : 주요한 창고를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성


그리고, 성의 ‘입지조건’에 따라 분류를 해보면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산성 : 산 위에 쌓은 성

평지성 : 평지에 쌓은 성

평산성 : 배후에 산을 끼고 쌓은 성


우리나라는 산지가 국토의 대부분인 지형적 특성 때문에 산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산성은 다시 테뫼식과 포곡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테뫼식은 산 꼭대기를 둘러싼 방식을 말하며, 포천의 고모리 산성, 단양의 온달산성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포곡식은 계곡을 낀 몇 개 봉우리를 둘러쌓는 방식이며 서울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부산의 금정산성, 공주의 공산성, 청주의 상당산성 등이다. 한편 테뫼식과 포곡식을 결합한 형식으로 복합식 산성이 있는데 이러한 산성은 대개 일정 규모 이상의 산성으로 포곡식 산성 보다도 더 크며, 부여의 부소산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성은 ‘성을 쌓은 재료’에 따라서도 분류를 할 수 있다.


나무 : 목책성 (행주산성)

흙 : 토성 (고구려 평양성, 백제 풍납토성, 몽촌토성, 신라 반월성)

돌 : 석성 (남한산성, 북한산성, 온달산성 등)

흙과 돌 : 토석혼축성

벽돌 : 전축성

돌과 벽돌 : 전석혼축성 (수원화성)

테뫼식 산성(왼쪽)은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단기 전투에 대비한 성곽인 반면, 포곡식 산성(오른쪽)은 규모가 크며, 성곽 내에 물자자원이 풍부하고 공간도 넓어 장기간의 전투에 적합하다.


8. 고구려의 전쟁영웅, 온달 장군


온달 장군은 고구려의 전쟁영웅이자 봉성 온씨의 시조(始祖)이다. 보통 위인전에서는 바보 온달로 많이 알려져 있다. 고구려 25대 왕인 평원왕(559~590)의 딸인 평강공주와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되었고 전장에서 큰 전공을 세워 장군의 반열에 올랐으며 26대 왕인 영양왕 때까지 활약하였다.


溫達 高句麗平原王時人也 容貌龍鍾可笑 中心則睟然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가 못생겨 우스꽝스러웠으나 마음은 순수하였다.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집이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온달’이라 했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


온달은 본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 생김새가 우스울 정도로 못 생겼다고 전해진다. 어릴 적부터 홀어머니와 살았는데 어머니가 두 눈이 멀자 일을 하지 못하였고 집안이 가난하여 먹고살 길이 없어 동네를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며 먹고살았다. 평강공주를 처음 만난 날도 온달은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려고 산에 올라가 있었다.


온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온달은 가난해서 산을 뒤져서 먹고살았는데 귀한 약재를 발견해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의 형편을 감안해 그냥 주거나 적은 대가만 받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를 두고 바보라고 불렀는데 온달은 별 말하지 않고 웃어넘겨 더욱 바보 취급을 당했다.’


이런 이야기로 말미암아 온달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손해 보고 사는 사람이라서 바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어쨌든 평양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국왕까지 바보 온달의 소문을 듣고 딸에게 말했을 정도라면 온달의 소문이 널리 퍼져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고구려 왕이었던 평원왕에게는 평강공주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자주 울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평원왕은 "너는 너무 잘 울어서 시끄러우니 귀족의 집안으로는 시집을 못 보내겠다. 아무래도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야겠는걸?"하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놀렸다고 한다.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평원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놀리며 말했다.


“汝常啼 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가야 되겠다.” 왕은 매번 이런 말을 하였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 中


후에 평강공주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평원왕은 딸을 귀족 집안인 고씨(高氏) 집안에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아버님이 옛날에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했으니 그 사람에게 시집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평원왕은 어이가 없었으나 평강공주는 고집을 부렸다. 결국 평원왕은 크게 실망하였고 화가 난 나머지 궁 밖으로 나가버리라고 꾸짖었다. 물론 아버지 마음에 진짜 나가라는 것은 아니고 아빠 말을 들으라고 으름장을 놓은 거겠지만 평강공주는 금팔찌와 패물을 챙겨서 진짜로 궁을 나가버렸다.


평강공주는 그 길로 온달의 움막집을 찾아가서 온달에게 청혼하였다. 온달은 처음에는 영문도 몰라 귀신에 홀렸다 생각하고 거절했지만 이후 그녀의 진심을 알고는 결혼한다. 평강공주는 궁 밖으로 나오면서 가져온 예물을 팔아서 집, 땅, 노비를 구입하여 살림살이를 갖추었고, 온달에게는 말을 사 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사꾼이 원하는 말은 사지 말고, 국마(國馬)인데 병들고 여위어 버려진 말을 사도록 하세요.”


여기서 평강공주의 경험과 지혜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고구려가 국가 차원에서 기르던 전투용 말은 민간의 말과는 그 종자가 달랐으니 아마도 한(漢) 나라의 한혈마(汗血馬) 같은 명마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국가의 말이 병들거나 약해지면 시장에 나왔던 듯하다. 온달은 평강공주의 말을 그대로 따랐고, 공주는 온달이 사온 말을 정성 들여 길러 다시 준마(駿馬)로 만들었다.


당시에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마다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었는데, 이때 산짐승의 고기로 하늘과 선천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평원왕과 여러 신료들, 5부(五部)의 병사들까지 모두 참석하였다.

이때 온달은 평강공주가 잘 기른 말을 타고 대회에 나갔는데, 수많은 짐승을 사냥하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평원왕은 대회에서 우승한 온달을 불러 그 이름을 듣고는 크게 놀랐으나, 아직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후에 중국 후주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고, 평원왕은 그에 맞서 싸웠다. 온달은 이때에도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선봉에 서서 수십 명의 적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온달이 맹렬한 기세로 앞장서서 적을 무찌르자 뒤따르던 군사들도 사기가 올라 후 주군을 공격하니, 결국 고구려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다.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策一.


이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그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삼국사기》

그 뒤에 주(周)의 무제(武帝)가 중국 대륙 북쪽을 통일하여 위엄을 떨쳤고, 고구려의 요동에 침입해와서 배산(拜山)의 들에서 싸우는데, 어떤 사람이 혼자서 용감하게 나가 싸웠다. 칼 쓰는 솜씨가 능란하고 활 쏘는 재주도 신묘하여 수백 명 적의 군사의 목을 순식간에 베었다. 알아보니 그는 곧 온달이었다.

《조선상고사》


이후 평원왕이 사람들을 모아 전공을 평가하는데, 참전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온달의 전공이 최고라고 평하였다. 이에 평원왕은 "이 사람이 내 사위다!"라고 말하며 기뻐하였다. 평원왕은 예를 갖추어 온달을 맞이하였으며, 대형(大兄) 벼슬을 내렸다. 이후로 온달은 평원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위엄과 권세가 대단해졌다고 한다.


평원왕이 승하한 후 영양왕이 뒤를 이었다. 이때 온달은 영양왕에게 신라에게 빼앗긴 옛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출정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고 수락받는다. 4세기 광개토 대왕이 남진 때 남한강 상류 58개의 성을 차지한 고구려였지만 551년에 신라 거칠부에게 죽령 이부의 10군을 빼앗기게 된다. 이에 온달은 총사령관이 되어 군을 이끌었다.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甞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徃必還吾地.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의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병사를 주신다면 한번 쳐들어가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나이다.”

온달, 《삼국사기》 온달 열전 中


온달은 본격적인 출전에 앞서,


“죽령 이서 땅을 되찾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맹세하고는 신라 정벌에 나서다가 격전 끝에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전사했다. 이후 병사들이 온달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려 하는데 시신을 담은 관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생과 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편안히 가시옵소서."라고 애원하자 그제야 땅에서 떨어져 움직였으며 한편 온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양왕은 크게 애통해했다.


요즘 흔히 광고 문구에 이런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


충북 단양 영춘면 온달산성에 가면 이 말은 여기를 위한 장소임을 느낄 수 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

9. 마을 속의 보물, 단양 향산리 삼층석탑


온달산성에서 서쪽으로 10km 정도 이동하면 농촌 마을이 있는데, 바로 향산리이다. 단양군 영춘면과 어성천면을 연결하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이 한적하고 평화로운 농촌 마을이다. 마을의 밭 한가운데 탑이 하나 서 있는데 단양 향산리 삼층석탑이다. 현재는 마을 속에 위치하고 있어 절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3층으로 된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다. 이 석탑은 머리장식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으며 석탑의 형태는 비례가 충실하며, 조각 수법도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현지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 한다. 이 석탑은 묵호자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일제강점기 사리를 도난당해 그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처럼 전해지는 설명에 따르면 탑은 원래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므로, 승려의 사리를 모신다고 하니 승탑이라 할 수 있다.


보통 탑이나 불교 유적을 보러 갈 때면 산속이나 도심과는 좀 떨어진 절로 가야 하는데 여기 향산리에 오면 오랜만에 고향 마을을 찾은 자식, 손주를 반겨주는 포근한 할머니 같은 향산리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오랜만에 고향 마을을 찾은 자식, 손주를 반겨주는 포근한 할머니 같은 향산리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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