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쌓고 고구려가 개축했다는 호로고루성은 고랑포 일대에 임금이 행차하여 다락배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던 곳이며, 송도 팔경의 하나로서 개성 동쪽의 대표적인 놀이공간이기도 했다.
1. 통사(通史)의 고장, 연천(漣川)
연천은 경기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휴전선 바로 아래에 위치한 최전방 지역이다.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자연경관이 수려한 청정지역이며 남토북수(南土北水 - 남쪽의 비옥한 토지와 북쪽의 깨끗한 물)의 환경을 가지고 있는 천혜의 고장이다.
연천(漣川)은, 눈물 흘릴 연(漣)에 내 천(川) 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선 태종과 관련이 있다. 태종은 친구인 이양소를 조선왕조에 참여시키기 위해 무려 다섯 번이나 연천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이양소는 응하지 않았고 거듭되는 거절과 사양에 돌아서며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연천의 연은 눈물 흘릴 ‘연(漣)’, 그리고 이 지역이 원래 냇가가 많아서 ‘천(川)’을 붙여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연천군 은대리 마을에는 태종이 이양소를 만나기 위해 연천으로 행차하던 중 마셨던 우물이라 하여 어수정(御水井)이라고 부르던 우물이 있다.
연천은 역사에서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구석기시대부터 한반도 최초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의 거주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1978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주먹도끼로 인해 한반도의 수준 높은 선사 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백제 온조왕이 한강지역에 수도를 정하고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백제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신라 진흥왕 14년(553)에는 한강 지역을 차지한 신라가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임진강 이남지역이 신라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임진강은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는 국경 하천 역할을 했다. 나·당 연합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던 신라는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와 최후의 혈전을 벌였는데, 그 장소가 기벌포(충남 서천 장항읍)와 바로 여기 매소성(경기도 연천 대전리산성)이다. 매소성에서의 전투는 신라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때부터 연천은 완전히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연천은 철도의 도시이다. 경원선 철도가 지나는 철도의 관문이며 초성리역, 한탄강역, 전곡역, 연천역, 신망리역, 대광리역, 신탄리역이 있다. 군의 산업은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편이며 유적지와 관광지가 많은 관계로 관광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최전방 도시답게 많은 군부대가 밀집되어 있다.
연천은 통사(通史)의 고장이다. 전곡리 인근의 구석기 유적지와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 등의 고구려 성곽유적이 있으며, 백제 시대 돌무지무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릉, 고려조 왕과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의전, 일제강점기 건설되었던 연천역의 급수탑, 6‧25 전쟁 때 서부전선에서 죽은 유엔군의 시신을 화장하던 유엔군 화장장 시설까지……. 인접하고 있는 도시 철원에 이어 또 한 번 통사의 고장으로 부를 수 있다.
연천은 젊음의 도시이다. 3만에 가까운 푸른 청춘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불철주야 성실하게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주말이면 연천역, 시외버스터미널, 전곡역 부근에서 외박이나 휴가 나온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젊은 청춘들과 면회를 하러 온 가족들, 연인들이 매주 왕래하기 때문에 연천은 매우 역동적인 도시이다.
구석기시대부터 현대 한국전쟁까지 수십만 년 역사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고, 젊음 청춘들로 인해 활력이 넘치며, 한탄강과 임진강이 주는 천혜의 비경(祕境)을 간직한 도시, 연천으로 떠나자.
2. 서울과 원산을 잇는 철도, 경원선(京元線)
경원선은 서울 용산역과 강원도 원산역을 잇는 철도로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개통되었으며 총연장은 223.7km이다. 서울과 당시 동해안 제일의 항구였던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선의 중요성은 경의선이나 경목선(京木線 : 호남선)과 비교했을 때 결코 작지 않았다.
따라서 경의선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외교전 역시 매우 치열하였다. 1896년 9월 30일에 프랑스가 경원선과 경목선 철도부설권을 청구하였으나, 우리 조정은 이를 거절하였고, 1898년 8월 1일에는 독일이 한국 외무대신에게 경원선 철도부설권을 그들이 세운 회사인 세창양행(世昌洋行)에 준허 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역시 거절되었다. 독일은 경인선과 경의선의 부설권이 이미 미국과 프랑스에 허여 된 사실을 들어 같은 요구를 몇 차례 거듭하다가 마지막에는 철도부설 자금의 공급권이라도 얻어내려 하였으나, 그 요구조차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경인선과 경부선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여 공사에 들어간 일본도 경원선 부설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들었다. 경원선 부설권이 일단 다른 경쟁국에 넘어갔을 경우, 그것이 그들의 대한 정책(大韓政策)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일본은 기회를 엿보다가 1899년 6월 17일 한국 정부에 경원선 부설권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역시 즉각 거부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줄기찬 외교적 압력에 대하여 우리나라 정부가 일관하여 내세운 원칙은 「철도와 광산 경영은 일체 이를 외국인에게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경의선 철도 자금 대부 약관의 부수 약관에 들어 있던 「경원선 철도부설을 위하여 기채(起債)할 경우, 일본과 먼저 협의한다」는 의무조항을 교묘히 악용하여 경원선에 대한 출자 권리를 내세웠고, 한편으로 경원선 군용 철도론을 내세웠다.
1904년 6월 29일부터 시작하여 서울-원산 간 철도부설 노선 답사를 한국 정부의 제지 없이 마친 일본은 그해 8월 27일 경원선을 군용 철도로 부설하기로 발표하고, 주한 공사를 통하여 「일본의 경원선 부설과 경쟁 또는 병행하여 다른 철도를 부설하지 말 것」과 「토지 수용 등 필요한 편의를 제공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리하여 경원선 부설권은 경의선과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영 수단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일본은 한반도에 철도를 놓는 과정에서 기차역을 세울 땅은 물론이고 기찻길 주변의 막대한 땅까지 차지했다. 논밭을 가로지르고 조상의 묘를 파헤치면서 철도가 놓이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반대하며 일어났다. 의병들도 철도를 파괴하고 전신주를 자르며 저항했으나 일본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진압당하고 말았다. 일본은 철도를 조선의 식민지 지배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중국 대륙과 러시아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었다.
3. 『철마는 달리고 싶다』, 신탄리역
신탄리 인근의 고대산은 예로부터 산림이 울창했다. 그를 바탕으로 신탄리는 고대산의 풍부한 임산자원을 목재와 숯으로 가공해 생계를 유지했던 마을이었다. 그래서 신탄리 일대를 '새 숯막(新炭幕)'으로 불렀고, 조선 영조 당시에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신탄(新炭)'으로 표기하고 있다. 특히 경원선이 부설된 뒤로는 숯 가공이 더욱 번창했다고 한다. 또한 ‘새 숯막’이라는 지명이 대광리와 철원 사이에 주막거리가 새로 생겼다 하여 ‘새술막(新酒幕)’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신탄리는 지역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이고 역 이름에도 남아 있지만, 현재 이곳의 행정구역은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에 속한다. 신탄리는 과거 철원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으로 대광리로 편입되었다. 또한 38선 이북 지역이어서 북한의 영향을 받았으며, 6·25 전쟁 이후에는 수복하였다.
여기서 잠시, 38선과 휴전선의 개념을 구분해보고 넘어가면 신탄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38선은 1945년 8월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일본 점령지의 전후 처리를 위해 설정한 임시 군사 분계선으로 하나였던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여 모든 도로와 철로를 단절시킨 경계선이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고 적대감이 고조된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이 선이 무너졌으나, 1953년 휴전협정으로 휴전선이 성립될 때까지의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경계선이었다. 북위 38도의 위선인 반듯한 직선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현재의 구불구불한 휴전선과는 달라서 북한의 개성, 연백 등의 도시가 38선 아래로 있었고, 남한의 연천, 철원, 화전, 양구, 인제, 고성, 양양 등의 도시가 38선 북쪽으로 있었다.
1914년 경원선 개통으로 인해 철원과 연천은 많은 물자와 사람이 오가는 도시로 성장하였으며 또한 철원에서 출발하는 금강산 전철이 생겨나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의 비극 6·25 전쟁으로 인해 신탄리역은 우리나라의 최북단 종점이 되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 We want to be back on track』라고 적혀 있는 녹슬어버린 철도 중단점 표지판만이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다. 열차 플랫폼에서도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이 표지판으로 걸어가는 내내 보이는 철길과 그 길가에 홀로 남겨져 있는 오래된 초소로 인해 가슴속에 무거운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나 신탄리역은 언젠가 남북이 평화롭게 통일하는 날이 오면 철도가 중단된 끝이 아니라, 다시 철도가 출발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연천은 평화가 시작되는 평화의 도시이다.
신탄리역은 언젠가 남북이 평화롭게 통일하는 날이 오면 철도가 중단된 끝이 아니라, 다시 철도가 출발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연천은 평화가 시작되는 평화의 도시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 We want to be back on track』라고 적혀 있는 녹슬어버린 철도 중단점 표지판만이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다.
4. 경원선 기차의 휴식처, 연천역 급수탑
연천역은 38선 북쪽에 있어 6·25 전쟁 전에는 북한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연천역의 화물 홈은 오래전 북한이 전쟁을 대비해 만든 장소였다고 한다. 역의 오른편으로는 원통형과 상자형으로 된 급수탑이 2개 남아 있는데 과거 경원선을 달리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등록문화재 제 45호로 지정된 귀중한 철도 문화재이다. 1914년 경원선 전 구간이 완공되면서 먼저 상자형의 급수탑이 건립되었고 1930년대 들어 높이가 3배인 원통형의 급수탑이 만들어졌다. 당시 경원선의 이용이 그만큼 활발해졌으며 연천의 상권 역시 커졌음을 알 수 있다. 6·25 전쟁 당시에는 급수탑이 폭격의 좌표를 잡는 지상의 ‘랜드마크’ 구실을 하였다. 급수탑의 벽돌 위로 깊게 파인 탄환의 흔적들을 통해 6·25 전쟁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원통형의 급수탑에는 벽돌 위로 깊게 파인 탄환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6·25 전쟁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급수탑의 작동원리는, 우선 우물의 물을 땅속에 있는 급수정으로 모은 후 펌프를 통하여 급수탑 위의 급수 탱크까지 끌어올린다. 그리고 기관차가 들어오면 급수 탱크의 물은 높은 곳에서의 수압을 이용해 배관을 타고서 철로로 이동하고, 철로 바로 옆에 설치된 ‘ㄱ’ 자 형태로 된 급수전을 거쳐 기관차로 보내졌다. 연천역 급수 탱크는 최대 100톤까지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99년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는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처음 등장한 증기기관차는 당시 우리나라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1914년 연천역에서 급수탑을 건립할 당시만 해도 증기기관차들의 뒤에 달린 탄수차에 물을 공급하고 있는 동안 사람들끼리의 대화나 물물교환 등의 상거래가 활발하여 연천역 또한 그 상권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증기기관차는 점차 그 역할을 잃었고, 많은 급수탑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강원도 도계역의 급수탑, 추풍령역의 급수탑, 충남 연산역에 있는 급수탑 등 ‘연천역 급수탑’을 비롯해 남아 있는 급수탑들 대부분이 과거에 달리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것들이었다.
원통형의 급수탑에는 벽돌 위로 깊게 파인 탄환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6·25 전쟁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5. 광대 부부의 슬픈 전설, 재인폭포
한탄강과 임진강이 지나는 연천은 발길 닿는 곳, 눈길 가는 곳마다 저마다의 절경을 자랑한다. 약 27만 년 전 분출된 용암이 한탄강과 임진강으로 흘러넘쳐 물길은 곧 용암길이 되었고, 그 용암이 식으면서 생긴 지형은 또 하나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재인폭포는 현무암 주상절리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장관이라서 제주도의 천지연폭포와 견줄만하다. 재인폭포의 높이는 약 18m이고 폭포 아래에는 너비 30m, 길이 100m의 소(沼)가 있고 소의 깊이는 20m에 이른다.
다이아몬드 조각처럼 떨어지는 폭포수가 소 위로 떨어지는 소리와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면 잠시 넋을 잃게 된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많고 많지만 이처럼 조각칼로 병풍을 조각해 놓은 것 같은 배경에 시원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는 그야말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천하절경이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와 천하의 절경을 가진 재인폭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옛날 이곳에 줄타기를 잘하는 재인(才人)이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재인의 아내를 탐한 고을 사또가 계략을 꾸몄다. 폭포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고, 폭포 양옆으로 줄을 매고 재인으로 하여 줄을 타게 한 후 재인이 줄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사또가 미리 숨겨놓은 부하가 줄을 끊도록 하였다. 사또의 계략대로 재인은 줄을 타다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뒤 사또는 재인의 아내를 불러 수청을 들도록 하였다. 재인의 아내는 사또가 남편을 죽게 만들고 자신을 탐하는 것을 알고, 수청을 드는 척하다가 사또의 코를 힘껏 꽉 깨물었다. 그 후부터 재인이 줄을 탔던 폭포를 재인폭포라 하고, 그의 아내가 사또의 코를 문 마을이라 해서 코문리라 했고 세월이 지나면서 고문리로 변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는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차지 도서』의 연천현 산천조에 전하는 내용이다.
옛날에 줄을 잘 타는 재인(才人)이 있었다. 하루는 마을 사람과 재인이 폭포 아래에서 즐겁게 놀았다. 마을 사람 중 아내가 매우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 재인은 폭포 양쪽에 줄을 매고 건너갈 수 있다고 장담을 했다. 그것을 믿지 못한 마을 사람은 자기 아내를 걸고 내기를 했다. 잠시 후 재인은 벼랑 사이에 줄을 매고 외줄을 타기 시작했다. 춤과 기교를 부려가며 줄을 타는 모습이 마치 평지를 지나가는 듯했다. 이에 아내를 뺏기게 된 마을 사람은 마음이 다급해서 줄을 끊었다. 재인은 줄에서 떨어져 수십 길 아래 구렁에 부딪혀 죽었다.
이 일로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과 시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선물을 받고 싶다면, 바로 여기 연천 재인폭포에서 그 소망은 이루어질 것이다.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 앞에서, 그 경이로움과 위대함에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 앞에서, 그 경이로움과 위대함에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6. 한 미군 병사의 위대한 발견, 연천 전곡리 주먹도끼
1078년 4월 주한 미군 병사의 산책은 한반도의 역사의 사실과 그 위상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당시 동두천 미군기지 기상예보대에 근무하던 그렉 보웬(Greg L.Bowen) 상병은 여자친구와 경기도 연천 전곡리 한탄강 유원지를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이상한 돌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냥 스쳐갈 수도 있었지만, 한국에 오기 전 미국 애리조나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였던 그에게 이 돌은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다.
그렉 보웬은 그 둘레를 더 뒤졌는데 곧바로 이상한 돌 3~4개를 더 찾았다. 그가 찾은 돌은 당시 국내 고고학계의 최고 권위자인 서울대 김원룡 교수에게 보내졌고, 놀랍게도 이 돌은 구석기인들의 만능 도구인 주먹도끼였다.
돌의 양쪽 면을 모두 쳐서 만든 주먹도끼는 구석기인들에게는 만능 도구였다. 이것으로 자르고, 두들기고, 땅을 파는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주먹도끼는 인류가 최초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제작한 석기로, 고(古) 인류 문명 발달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만 해도 세계 고고학계는 미국 하버드대 교수인 모비우스의 학설을 정통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구석기 문화를 주먹도끼 문화권과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하였다. 인도를 기준으로 인도 서쪽인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지를 아슐리안 문화권이라 하였고, 인도 동쪽인 동아시아와 아메리카는 찍개 문화권이라 하였다.
아슐리안 문화권은 1859년 프랑스의 생 아슐(St.Acheul) 지방에서 발견된 주먹도끼에서 유래하는데, 그의 이론에 따라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는 동아시아 지역이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열등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78년 그렉 보웬에 의해 우리나라 연천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되면서 모비우스의 이론은 뒤집히게 되었고, 세계 구석기 문화 연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이후 전곡리뿐만 아니라 여러 구석기 유적에서 이 주먹도끼가 발굴되었고,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많은 양의 주먹도끼가 출토됨으로써 모비우스 이론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이런 위대한 발견의 당사자인 그렉 보웬은 지난 2005년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그는 한국인 부인, 딸과 함께 방한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발견 당시에도 강변의 돌조각을 살피다 주먹도끼를 발견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지금은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고 일반인들에게도 상식처럼 된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는 고고학을 전공한 한 미군 병사로 인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보웬은 “한국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 두 가지를 주었다”며, “그것은 전곡리 구석기 유적과 나의 아내”라고 말했다.
7. 삼불(三佛) 김원룡 선생
1922년 평안북도 태천 출생으로 1945년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국립박물관에 재직한 바 있으며, 뉴욕대학(박사)과 런던대학에서 수학했다.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교수로 봉직하면서 당시 불모의 한국고고학을 이끌었다. 독보적인 고고학자·미술사학자로서 방대한 연구업적을 남기며 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기에 한국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1984, 은관문화훈장). 선생은 초창기 전곡리 유적 발굴(1979~1986)의 조사단장으로 유적을 널리 알렸고, 전곡리 유적 보존을 위해 학자의 의무를 뛰어넘는 노력과 애정을 쏟았다.
1993년 4월 투병의 와중에도 불구하고 ‘제1회 전곡 구석기 문화제’에 참관하였던 선생은 그해 11월 타계하여 유지에 따라 전곡리 유적에 산골(散骨)되었다. 1주기 추도식에 모인 이들은 ‘삼불 김원룡 선생 추모비’를 건립하여 유적지에 서린 고인의 뜻을 기리고 있다. 현재 전곡리 유적 관리사무실 뒤에 추모비와 선생의 흉상이 위치하고 있다.
추도식에 모인 이들은 ‘삼불 김원룡 선생 추모비’를 건립하여 유적지에 서린 고인의 뜻을 기리고 있다. 현재 전곡리 유적 관리사무실 뒤에 추모비와 선생의 흉상이 위치하고 있다.
8. 전곡리 선사유적지
인간은 자신들의 노동을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였다. 사용되는 재료와 도구 제작의 발달 정도에 따라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로 분류되고, 사회 모습에 따라서는 무리 사회, 씨족 사회, 노예 사회, 봉건 사회로 구분할 수 있다.
인간이 원숭이류에서 가장 진화한 유인원(類人猿)과 구분되는 시기는 구석기시대부터이고, 구석기시대는 무리 사회에 해당한다. 그들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 것은 200만 년 전쯤 되고, 그로부터 150만 년 뒤에야 비로소 제작기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등장한다는 게 고고학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지구의 역사 중 인류의 역사 차지하는 비중을 서울대학교 이선복 교수는 『고고학 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고학자들이 만든 지구 달력에 의하면, 지구의 역사 45억 년을 1년에 비유할 때, 사람과에 속하는 동물이 지구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태양이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갈 무렵인 오후 5시경(500만 년 전)이며, 오늘날의 인간과 똑같은 현생 인류는 자정을 5분 정도 남기고(약 35만 년 전) 등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토기의 제작과 농경의 시작은 자정을 1분 남기고 있었던 사건이며, 최초의 국가가 성립된 것은 자정을 30초쯤 남겼을 때의 일이었다고 한다. 즉, 인류의 역사는 지구의 역사에 비해 극히 짧은데, 그 기간 중에서도 문자와 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선사시대가 인류가 존속한 기간의 99.8% 이상을 점하고 있다.”
사적 제26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전곡리 선사유적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밝혀 줄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동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면적이 80만 제곱미터에 달한다.
인간은 자신들의 노동을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였다. 사용되는 재료와 도구 제작의 발달 정도에 따라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로 분류되고, 사회 모습에 따라서는 무리 사회, 씨족 사회, 노예 사회, 봉건 사회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전곡리 선사 박물관은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전곡리 선사유적을 배경으로 한 이 박물관에는 전곡에서 출토된 석기 유물들을 중심으로 추가령 지구대의 자연사, 인류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화석 및 인류 모형, 환경에 대한 적응과 확산, 동굴벽화 재현 등의 주제로 전시가 이뤄진다.
건물이 지상으로 돌출되지 않고 자연환경 속으로 스며들어 그 위에 산책로를 만들고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외관의 재질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하여 현대적인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데 야간에는 조명으로 멋진 분위기를 연출해주고 있다.
구석기 대표 유적지답게 공원 내의 분리수거함도 석기처럼 만들어 놓은 점이 흥미롭다.
구석기 대표 유적지답게 공원 내의 분리수거함도 석기처럼 만들어 놓은 점이 흥미롭다.
9. 고려왕조의 한(恨), 숭의전(崇義殿)
연천 임진강변에 있는 숭의전은 조선왕조에서 전(前) 왕조인 고려의 왕들과 고려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즉 조선의 종묘와도 같은 공간이다.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현종, 문종, 원종까지 4명의 왕과, 16명의 충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왕조는 역성혁명 후, 정권이 안정된 후 승자의 여유로 이전 왕조인 고려에 대한 너그러운 조치를 취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고려왕조의 종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흩어진 민심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묘 건물의 관리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김으로써 고려 유민들의 불평을 없애는데 활용하였다.
다만 고려의 종묘를 개성에 세우게 되면 기존 세력의 부활이 염려되어 위치를 개성에서 얼마간 떨어진 연천으로 정하였는데, 원래 이곳 숭의전 터에는 고려 태조의 원찰(願刹)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성계가 1397년에 고려 태조 왕건의 전각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2년 후인 정종 원년(1399)에는 태조 외에 고려의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의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세종 7년(1425)에 이르러 당시 조선의 종묘에는 5명의 왕만을 모시고 있는데, 고려왕조의 숭의전에서 무려 8명의 왕을 모시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명의 왕만을 남기도록 하였다. 이 4명의 왕이 남게 된 이유는 모두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의 정체성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조금이라고 부각할 수 있는 왕들만 선별한 것이다. 먼저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왕이기에 가정 먼저, 당연히 모셔진 왕이고, 두 번째 현종은 고려의 문치주의를 확립한 왕이다. 세 번째 문종은 현종의 아들로서, 재위 37년간 고려의 문물과 제도를 크게 정비하였다. 네 번째인 원종은 62년간 지속된 무인정권을 종식시킨 왕으로 조선의 역성혁명에 어느 정도 명분을 보태준 왕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철저하고 치밀한 계산하에 만들어진 숭의전이다.
숭의전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번의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하며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한국전쟁 때 전소(全燒)하게 된다. 연천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그 안에 있었던 숭의전 역시 전쟁의 포화를 피해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1971년 사적으로 지정된 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숭의전은 총 5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면에서 바라보면, 왼쪽부터 앙암재, 전사청, 숭의전, 이안천, 배신청이다. 각각의 건물의 용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사청(典祀廳) :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 숭의전의 제사는 생식 제사이므로 굴뚝이 없음.
앙암재(仰巖齋) :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한편 이렇게 조선에서는 역대 왕조의 시조 및 특별한 사연이 있는 왕의 위패를 모시고 기리는 경우가 많은데 다음과 같은 공간들이다. 이들 공간과 숭의전과 더불어 팔전(八殿)이라고 한다.
숭령전(崇靈殿) :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며, 북한 평양에 있다.
숭인전(崇仁殿) : 기자조선의 시조인 기자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며, 북한 평양에 있다.
숭덕전(崇德殿) :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며, 경상북도 경주에 있다.
숭렬전(崇烈殿) : 백제 시조 온조와 이서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에 있다.
숭신전(崇信殿) : 신라 석탈해를 모시고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에 있다.
숭혜전(崇惠殿) : 신라 미추왕, 문무왕, 경순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에 있다.
숭선전(崇善殿) : 가야연맹의 시조 김수로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며, 경상남도 김해에 있다.
숭의전 동쪽에는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잠두봉 절벽이 있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마전 군수였던 한문홍(韓文洪)이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옛 망조의 영화와 쇠락 속에 당시 무상함을 그 절벽에 새겨 놓았다.
<重作崇義殿> 숭의전을 중수하고
麗祖祠宮四百秋 숭의전을 지은 지 사백 년 되었는데
誰敎木石更新修 목재와 석재로 새로 수리하게 되었구나
江山豈識興亡恨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요
依舊蠶頭出碧流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은 잠두봉은 푸른 강물 위에 떠 있구나
往歲傷心滿月秋 지난 세월은 달 밝은 가을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如今爲郡廟宮修 지금은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하였네
聖祖更乞麗牲石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에게 제사토록 하였으니
留與澄波萬古流 아마도 숭의전은 징파강(임진강의 별칭)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10. 연천 경순왕릉
경순왕릉은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 연천에 있다. 경주에 있어야 할 신라 왕릉이 왜 연천 땅에 있게 된 것일까? 경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왕, 마지막 왕이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천년 제국 신라가 망국의 길을 걷던 시기였다. 서기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당시 왕이었던 경애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고려의 군사가 미치기 전에 견훤에 의해 강제로 자결하게 되었다.
경애왕의 일가친척이었던 경순왕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원치 않던 왕의 자리에 올랐다. 경순왕은 이듬해 신라에 도착한 태조 왕건을 극진히 대접하고 친분을 쌓았으며, 935년 신라 주변의 땅이 모두 다른 나라의 소유가 되자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태자는 울면서 경순왕에게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그가 바로 마의태자이다.
왕건은 경순왕이 도착했을 때 직접 나가서 맞이하였으며, 궁궐 동쪽의 가장 좋은 집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왕건은 자신의 맏딸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에 봉하고 지위를 고려 태자보다 위에 있게 하였으며, 봉록(俸祿) 1천 섬을 주는 등 경순왕을 크게 우대했다. 그리고 왕건 자신도 경순왕의 사촌과 혼인하여 경순왕은 고려의 왕족이 되었다. 경순왕은 태조 20년(937) 5월에 왕건에게 진평왕이 차던 천사옥대를 바쳤다고 한다. 천사옥대는 하늘의 천사가 궁중에 내려와 왕에게 주었다는 옥대(허리띠)로, 황룡사 구층 목탑, 황룡사 장육존상과 함께 신라 3대 보물이다. 이로써 고려는 신하의 정통성을 이어받는다는 상징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경순왕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왕들과는 달리 91세라는 장수를 누렸다. 생년이 불분명하긴 하지만 927년에 왕이 되어서 978년에 사망했다. 그동안 고려 임금 5명을 보았다. 망국의 임금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화병으로 죽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수치스러움과 괴로움을 못 이기는 것이다.
경순왕이 승하하자 신라 유민들은 경순왕을 왕의 고향인 경주에서 장사 지내고자 하였으나,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는 고려 왕족이 된 경순왕의 능을 경주에 만들 수는 없었다. 경순왕의 능이 경주로 내려갈 경우, 그 지역 백성들의 민심이 동요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왕의 무덤은 도성 밖 100리 이상을 나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경순왕의 능은 고려 수도 개경과의 거리가 80리 정도인 임진강의 포구인 고랑포에서 멈추게 된다.
경순왕릉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조선 영조 때 지석이 발견되어 새로이 무덤을 쌓았다. 6.25 전쟁 후 수십 년간 돌보는 이가 없어 다시금 소실될 위기에 처했으나 1970년대에 한 병사가 숲 속에 쓰러져 있는 묘비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사적 제244호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경순왕릉은 연천에서도 서쪽 외곽지역으로 한참 나가야 하고 휴전선 인근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시설은 찾아볼 수 없다. 경순왕릉은 그렇게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는 승자의 몫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후삼국의 치열한 통일 전쟁에서 승자는 궁예도 아닌, 견훤도 아닌, 경순왕도 아닌 왕건이다. 그리고 패배한 왕들은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향에서나마 고향을 그리워하며 잠들어 있다.
경순왕릉은 그렇게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11. 기다림의 길목, 호로고루
호로고루는 임진강 북쪽 현무암 절벽 위에 있는 고구려성이다. 호로고루(瓠盧古壘)라는 명칭은 일대의 임진강을 삼국시대부터 호로하(瓠濾河)라고 불렸던 데서 유래되었다. 성의 둘레는 401m로 그리 크진 않지만 특이하게도 남쪽과 북쪽은 현무암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고 평야로 이어지는 동쪽에만 너비 40m, 높이 10m, 길이 90m 정도의 성벽을 쌓아 삼각형 모양의 성을 만들었다.
호로고루성의 내부 발굴에서 고구려 와당(추녀 끝 기와) 같은 여러 고구려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종류와 수량이다. 비교적 좁은 구역이지만 발굴된 와당이나 치미(기와지붕 장식)로 미루어 볼 때 기와지붕을 가진 관아가 있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거류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특히 방 안에서 소변을 볼 수 있는 흙으로 만든 호자(虎子)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높은 신분의 귀인이 살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출토된 유물로 보아 호로고루성은 다른 성들을 거느리는 치소, 즉 사령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삼국 통일을 위한 격전의 전장
호로고루는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인 호로탄(瓠蘆灘)이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육로를 통해 개성 지역에서 서울 지역으로 가는 최단 거리에 놓여 있으며, 장마철을 제외하면 물의 깊이가 무릎 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거나 걸어서 건널 수 있으므로 이 여울목을 통제할 수 있는 호로고루의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호로탄은 ‘표주박 형태를 가진 하천’이라는 뜻으로, 임진강이 구불구불하여 흐르는 모습에서 생겨난 명칭으로 보인다. 호로고루라는 명칭은 이 성이 호로탄 위에 축조되었기 때문이다.
6세기 중엽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이후 고구려 멸망까지 120여 년 동안 임진강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하천이었다. 개성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거쳐야 하는 임진강에서 배를 이용하지 않고 도강이 편리한 여울목 지점은 방어의 요충지이자 공격의 루트가 된다. 삼국시대 국경지대로 남진이나 북진의 거점으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며, 통일 전쟁의 마무리를 위한 신라와 당나라 간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던 곳이다.
조선 후기에는 호로탄이라 하여 개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가 개성에서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강을 건너온 지점이었다.
1945년 국토가 분단되기 이전에는 임진강은 수도 서울을 관통해 흐르는 한강과 연결된 수로로서 번성하였다고 한다. 특히 호로고루 부근의 고랑포까지 대형 선박들이 운행되면서 임진강 수운의 거점을 이루었다고 한다. 고랑포구는 1930년대 개성과 한성의 물자교류를 통하여 화신백화점의 분점이 자리 잡을 정도로 번성하였으나,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으로 쇠락하고 지금은 군사분계선이 부근을 지나고 있어 강에는 배를 띄울 수 없으며, 남북 간의 대립이 심하던 시기에는 민간인 통제구역에 해당하는 접근금지지역이었다. 현재는 이곳에 대한 규제도 많이 완화되었고 그 멋진 절경이 많이 알려져 많은 관광객들과 사진작가들이 찾는 연천의 핫플레이스로 탈바꿈하고 있다.
연천에는 고구려 3대 성(城)이 있는데, 호로고루와 함께 당포성, 은대리성이 있다. 모두 고구려 시대의 축성, 건축, 주거 문화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백제가 쌓고 고구려가 개축했다는 호로고루성은 고랑포 일대에 임금이 행차하여 다락배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던 곳이며, 송도 팔경의 하나로서 개성 동쪽의 대표적인 놀이공간이기도 했다. 「고호팔경」은 연천의 고랑포를 중심으로 임진강의 절경을 노래할 만큼 경치가 아름다워 선조들이 자주 찾아 풍류를 즐기던 지역이며, 고호팔경이라 하여 노래하던 곳은 다음과 같다.
1. 나릉낙조(羅陵落照):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 앞 숲 위에 비치는 석양의 붉은 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