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는 법이다. 이번에는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山寺)로 간다.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이는 그곳에서 공백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1.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법주사(法住寺)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내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법주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義信祖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조사가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구법 여행을 떠났다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돌아와서 머물렀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法]이 머무는 [住] 절’이라는 뜻인 법주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창건 설화에 따르면 의신조사가 노새에 불경을 싣고 절터를 찾던 도중, 노새가 갑자기 현재의 법주사 터에 주저앉아 울부짖기 시작했다. 노새의 기이한 행동에 놀란 의신조사는 자리에 멈춰 산세를 둘러보다가 수려하고 장엄한 산세가 가히 천년 대찰을 지을만한 곳이라고 판단하여 이곳에 절을 짓게 되었다.
절이 위치한 속리산(俗離山)은 예로부터 조선 8경으로 꼽히던 산인데, 산 자체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법주사가 위치한 산이었기 때문에 명산에 빠지지 않았다.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이라 불리어 왔었는데, 속리산이라는 산 이름 또한 법주사와 연관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4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따르면 766년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보살의 계시로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가던 중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진표율사 앞에서 우는 소들을 보고 달구지를 탄 사람이 신심을 얻어 입산한 곳이라 하여 세속(俗)을 떠난(離) 산이라는 뜻의 속리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법주사는 31 본산(本山)의 하나로 고려 숙종이 그 아우인 대각국사 의천을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1년(1341년)에는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를 세웠다.
조선 세조 역시 법주사에 들러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대사를 도와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지닌 큰 사찰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 38년(1605)부터 인조 4년(1626)까지 사명대사와 벽암 각성 스님이 팔상전 등 전각을 중건하였다.
조선 고종 9년(1872년)에는 경복궁 재건에 사용할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사찰 내의 커다란 미륵장륙상과 철 당간이 수거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오랜 노력 끝에 대형 금동미륵불상이 자리 잡게 되었으며, 철 당간까지 복구를 해 놓았다. 보통 철 당간을 고정하는 돌로 된 당간지주만 존재하는 절이 많은데 철 당간까지 복원된 드문 사례다.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이다.
경내에는 국보 3점, 보물 13점,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22점 등 수많은 국가유산이 있으며 특히 팔상전과 대웅보전, 금동미륵대불은 법주사를 상징하는 국가유산이다.
2. 법주사의 국보와 보물
법주사는 국보와 보물을 비롯하여 수많은 국가 유산자료가 있기에 여기서는 국보와 보물 중심으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등록된 국가유산명으로 정리)
국보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보은 법주사 팔상전
보은 법주사 석련지
보물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보은 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법주사괘불탱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보은 법주사 철솥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
보은 법주사 동종
보은 법주사 천왕문
3. 법주사의 주요 공간
말티재
본래 사찰로 들어가면 처음으로 일주문을 통과해야 하나 법주사는 들어가는 고개인 말티재를 먼저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빼놓고 갈 수 없다. 말티재는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장재리와 갈목리를 연결하는 고개로써, 속리산으로 진입하는 해발 430m의 언덕이다. 말티고개 또는 마치(馬峙)라 불리기도 한다. 말티재 고갯길은 고려 태조인 왕건이 속리산을 오르기 위해 고갯길에 엷은 박석을 깐 것이 시초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 인도에 다녀온 의신조사(義信祖師)가 법주사를 창건하려고 당나귀의 등에 불경을 싣고 이 고개를 처음으로 넘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법주사가 완성된 후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깨우치려 말티재를 넘어 법주사로 향했다. 그러다 보니 말티재에는 수많은 사연과 애환이 서려 있다.
고려 공민왕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홍건적의 난을 피한 후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고자 이 고개를 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100일 기도를 하러 말티재를 넘어 법주사로 향했다. 조선시대의 임금 가운데 태종과 세조도 법주사로 향하는 길에 이 길을 이용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들이 법주사로 집결하러 가는 길로 이용되었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법주사를 고치기 위해 통과한 길도 말티재이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 장재리의 별궁에서부터 타고 왔던 가마에서 내려 이곳에서 말로 갈아타고 넘었다. 이로부터 말티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세조가 고개를 넘을 때 길바닥이 진흙이어서 박석을 가져다 깔았다.
속세와 이별하고 도를 닦기 위해서는 험준한 말티재를 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보은읍에서 법주사 방면으로 오르는 말티재는 대단히 가파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자동차 기술이 미약했던 때에는 속리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탄 버스가 말티재 입구에서 학생들을 모두 하차시킨 후 빈 버스로 올라야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임금의 행차에 도움을 준 정이품송(正二品松)
조선 세조는 피부병과 눈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하루는 한 신하가 “충북 보은 속리산에 탈골암이라고 있는데 그곳의 물이 좋아 여러 병에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세조는 그 말을 듣고서 병을 치료하고 심신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 속리산에 행차하기로 하였다. 세조 일행은 서울을 떠나 보은으로 향했다. 수레를 타고 말티고개를 넘어 속리산면 상판리에 이르렀다. 가다 보니 길가에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세조는 “그늘에서 잠시 쉬어가도록 하자.”라고 하고는 수레에서 내렸다. 내려서 거닐며 쉬다가 나무를 쳐다보니 우산 모양처럼 축 늘어진 소나무가 크고 아름다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다시 수레를 타려고 보니 늘어진 가지가 수레에 걸릴 듯하였다. 세조는 수레를 메는 사람들에게 “소나무 가지가 수레에 걸릴 것 같구나.” 하며 수레에 올랐다. 그런데 그때, 수레 앞에 늘어져 있던 소나무 가지가 하늘을 향해 번쩍 올라갔고 덕분에 세조가 탄 수레가 걸리지 않고 잘 지나갈 수 있었다.
세조는 이 광경을 보고 소나무를 기특하게 생각하고는 속리산으로 향했다. 세조는 속리산에 머물며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때 또다시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다. 소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가자 갑자기 소나기가 오기 시작했고 소나무 덕분에 갑작스러운 비에 젖지 않고 잠시 비가 멎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세조는 “여기에 올 때는 수레에 걸리지 않게 나뭇가지를 올려주더니, 다시 돌아갈 때는 비를 막아주는구나. 참으로 기특하고 아름다운 일이로다!”라며 칭찬하였고, 소나무에게 정이품(正二品)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임금이 타는 수레를 ‘연’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 소나무는 ‘연걸이 소나무’ 혹은 ‘정이품송’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법주사(法住寺) 일주문(一柱門)
산사로 가는 길에는 일주문이 있다.
하나의 기둥으로 된 문을 하나의 마음으로 통과해야 하는 문(門).
그 마음은 오로지 불법과 진리로 향한 마음, 지극한 일심(一心)이어야 한다.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보통의 일주문 정면 현판에는 산 이름과 사찰 이름이 같이 나오는데 법주사 일주문 정면에는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현판이 적혀 있다. 충청남도, 충청북도를 통틀어 으뜸 사찰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뒤쪽 현판에는 원래대로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가 쓰여 있다.
법주사(法住寺) 금강문(金剛門) - 사찰을 지키는 헤라클레스
불교의 여러 호법신들 중에 갑옷을 몸에 걸치고 무기를 든 채 성난 표정을 하고 있는 무인상(武人像)이 있는데, 이들을 일러' 신장형(神將形) 신중'이라 한다. 금강역사(또는 仁王), 사천왕(四天王), 12 신장(十二神將), 16 선신(十六善神)이 그들이다.
일주문을 지나 사찰의 중심 공간으로 이동하다 보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금강역사가 지키는 금강문이고, 다음 만나게 되는 것이 천왕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두 문으로 모두 갖춘 사찰은 많지 않다. 금강문은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금강문에 있는 금강역사가 잡귀를 물리쳐 사찰을 수호하는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역사는 인왕역사라고도 불리기 때문에 금강문을 인왕문이라고도 한다.
금강문은 보통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구조로 되어 있고, 정면 중 가운데 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양쪽 칸에는 금강역사상을 세우는데 왼쪽이 밀적금강, 오른쪽이 나라연금강이다. 밀적금강은 야차신(夜叉神)의 우두머리로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쥐고 있는데 이 금강저는 지혜의 무리로서 번뇌를 부수고 깨달음을 발휘하는 역할을 한다. 밀적이란 붓다의 비밀스러운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라연금강은 천상계(天上界)의 역사로서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히 힘만 있는 신중(神衆)이 아니라 이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광이 있는데, 그것은 신성한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상징한다.
보통 입을 열고 있는 역사를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훔금강역사'라고 한다.
법주사 금강문에는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고 그 옆으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불 오른쪽에서 진리를 퍼트리는 보현보살은 자비와 덕을 상징하는 흰 코끼리를 타고 있고, 석가모니불 왼쪽에서 지혜를 맡고 있는 문수보살은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는 사자를 타고 있다.
법주사(法住寺) 석연지(石蓮池)
법주사에 있는 석연지는 다른 사찰에는 없는 특이한 형태의 유물로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연꽃을 띄어 두어 극락세계를 표현하였다. 석연지는 물을 담는 용기이다. 사찰에서 이처럼 물을 담아 사용하는 용기를 석조라고 한다. 석조는 용도에 따라 수조(水槽)와 연지(蓮池)로 크게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수조는 흐르는 물을 담아 두면서 마시거나 그릇이나 곡식을 씻는 물통이다. 반면 연지는 연꽃을 심는 연못으로 둥근 형태의 물통에 연꽃을 심어 법당 앞에 설치한다.
수조와 연지는 사용 목적과 형태가 다른데, 연지는 석재를 반구 형태로 가공한 후 속을 파내어 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반구형 물그릇 아래에는 간대석으로 부르는 받침돌 위에 얹고, 사각형 지대석 위에 견고하게 고정하였다. 반면 수조는 대형 석재를 사각형으로 가공 후, 역시 내부를 파내어 곽 모양으로 조성한 것이다. 내부 바닥에는 담긴 물을 빼기 위한 배수구를 만들기도 했다.
돌로 연지를 만든 이유는 물에서 사는 연꽃을 연못이 없는 사찰 경내에 심기 위한 것이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는 불교 경전에는 중생들이 열반 후에 갈 수 있다는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칠연지(七蓮池)가 있고, 그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연꽃이 자라고 있다는 내용이 전한다.
법주사 석연지는 이처럼 불교에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연지를 사찰 경내에 구현한 것이고 또한 연꽃이 진흙에서 자라면서도 청정(淸淨)을 잃지 않는 부처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반구형의 연지 표면에 연꽃을 조각해 연지 자체가 연꽃을 상징한다.
팔각형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이나 상징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 두 겹을 겹쳐놓은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는데, 현재는 표면이 갈라져 철제 꺾쇠로 연결해 놓았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팔상전이나 금동미륵대불, 대웅보전에 비해 그 존재감이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8세기경 제작된 통일신라 시대의 걸작으로, 절제 속에 우아함과 화려함이 피어나는 석조 연지의 대표작품으로 평가되어 1962년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법주사(法住寺) 철확
솥은 오래전부터 정(鼎)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춘추전국시대의 『우공(寓公)』이라는 책에는 “정은 중국 하나라 우왕이 주조한 정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한다. 이것은 본래 음식을 조리하는 기능뿐 아니라 왕위 계승의 상징으로 삼은 뒤 국가와 왕위, 제업 등의 의미를 지닌 신성한 물건으로 간주하였다.
솥은 취사 용구로 밥을 짓거나 국을 끓이는 데 사용되는데 주로 무쇠(주철)로 만들었다. 종류로는 다리가 없는 부(釜)와 다리가 있는 정(鼎), 그리고 자유로이 옮겨 걸고 사용할 수 있게 만든 노구솥이 있다. 조선시대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原經濟誌)』에는 다리가 있으면 기(錡)라 하고, 없으면 부라고 했다. 또한 입이 넓은 것은 부(釜), 좁은 것은 복(鍑)이라고 기록했다.
이외에도 철확(鐵鑊)이 있다. 확은 다리가 없는 큰 솥을 지칭하는데 과거에는 죄인을 삶아 죽이는 팽형(烹刑)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확은 대형 사찰에서 일시에 수백 명의 공양을 마련하기 위해 사용했다.
법주사 철확은 높이 120㎝, 지름 270㎝로 무게는 20t가량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없어 제도연대와 제작자, 제조 방법 등은 알 수 없지만 용해 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 주물솥이란 점에서 기술사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법주사의 사세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철확은 국내에 전하는 희귀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당시의 주조 기술을 살피는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대형 철솥으로 한 번에 승려 3,000명이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려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기도 했다고 한다. 2004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철확과 관련되어 지나가는 일화로, 송광사 주지 스님과 법주사 주지 스님이 만나 나눈 환담이 있는데 각자의 절의 규모에 대해 이야기하다, 송광사 주지 스님이 “우리 절의 문고리들을 다 모으면 5자루는 나온다.”라고 말하자 법주사 주지 스님이 “우리 절은 국을 끓이려면 배 타고 노를 저어서 국을 끓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송광사 주지 스님께서 규모 자랑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법주사(法住寺) 천왕문(天王門)
법주사 천왕문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국내 천왕문 중에 제일 크다. 가운데 통로 말고도 양쪽 한 칸씩에 판문을 달아 출입문으로 쓰고 있다. 천왕문만 큰 게 아니고 안에 모신 사천왕상도 높이 5.7m나 되는 국내 최대 사천왕상이다.
법주사 천왕문은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세워졌고 그 후 몇 차례 다시 지어졌다가 조선 인조 2년(1624)에 벽암선사가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8년 천왕문 기둥과 사천왕상에 대한 분석 결과, 기둥이 1619년과 1620년에 수렴하는 건축연대가 측정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또한 법주사 천왕문의 사천왕상은 규모나 완성도에서 우리나라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4년 4월 2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팔상도(八相圖)
법주사 팔상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팔상도에 대해 알고 들어가면 더 많은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있으니 팔상전에 대해 살펴보고 들어가도록 하자.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생애 중 주요 장면을 여덟 장의 그림으로 그린 불화이다. 여덟 장이라고는 하지만 한 장의 그림 안에 시간 차가 있는 것은 아니고, 심지어 발생한 무대가 서로 다른 에피소드가 같은 화면에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의 표현은 일본 학자들은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 한국 학자들은 '다원적 구성 방식'이라고 해서 특히 주목하였는데, 시간의 흐름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 선택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서사적 표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팔상도의 경우는 순차적인 장면의 전개에 주안점을 두기보다는 관련 장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점에서 다원적 구성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이미 기원전 2세기경 석가모니 부처의 생을 묘사한 불전도가 스투파(탑)의 평두 또는 탑문 등에 조각되었다. 다만 그 그림을 보면 주로 <출생, 성도, 전법륜, 열반> 또는 <입태, 출유, 출가, 항마> 이렇게 네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4~5세기경의 키질 석굴도 <출유, 고행, 항마, 열반 장면>이나 <출가, 수도, 항마, 전법륜> 등의 장면이 확인되고 있다. 이는 불전도에 표현되던 석가모니의 생에 있어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네 곳의 성지 즉 룸비니(탄생), 부다가야(성도), 사르나트(초전법륜) 그리고 쿠시나가르(열반) 네 곳의 성지를 표현하고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부터 팔상도가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1446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450년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팔상성도도를 제작하였다는 문종실록의 기록이 있어 조선 초기에 '팔상도'로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를 그려냈음을 알 수 있다. 1447년의 석보상절에서 팔상을 도솔래의-비람강생-사문유관-유성출가-설산수도-수하항마-녹원전법-쌍림열반으로 밝힌 이후 모든 팔상도가 같은 화제 아래 제작되었다. 현재 일본에 전해지는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 역시 팔상도의 구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팔상도를 구성하는 여덟 그림은 다음과 같다.
①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마야부인의 꿈속으로 입태하여 도솔천으로 내려오는 장면
도솔천에 있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인 호명보살이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인간 세상에 여러 번 내려갔던 금단천자(金團天子)는 호명보살에게 가비라성 석가족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태어날 것을 권했다. 이에 호명보살은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갔다. 낮잠을 자던 마야부인 역시 여섯 이빨을 가진 코끼리가 금으로 이빨을 단장하고 허공을 날아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꾼다. 마야부인은 신기한 꿈의 이야기를 정반왕에게 이야기한다. 정반왕은 바라문을 불러 꿈의 의미를 물으니, "마야부인이 낳을 아들은 삼계에서 더없이 높은 어른이 된다."라고 하여 기뻐하였다.
②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싯다르타 태자로 탄생하는 모습
마야부인은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향했다. 마야부인은 친정으로 향하는 길목인 룸비니의 무수 나무에 이르러 출산한다. 나뭇가지를 잡고 선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태자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고, 일곱 발자국에서는 연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을 땅을 가리키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를 외친다. 그러자 용 아홉 마리가 감로수를 부으며 태자를 목욕시키고, 천인들이 나타나 비단옷으로 태자를 입혔다.
③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태자가 사대문 밖에서 늙음, 병듬, 죽음과 수행자를 목격하는 장면
싯다르타 태자가 화려한 마차를 타고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카필라바스투 궁전의 동문을 나섰다. 그때, 정거천인(淨居天人)이 어린아이에게 부축받는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으로 변신하여 태자의 눈앞에 나타났다. 태자는 노인의 추레하고 볼품없는 모습에 대해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누구나 다 그렇게 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다음에는 남문을 나섰다. 남문 밖에서는 정거천인이 돗자리 위에 누워 가족의 시중을 받는 피폐하고 마른 병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태자는 병자를 마주하고, 인간이 병드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다음으로는 서문을 나섰다. 서문 밖에서는 작병천자(作甁天子)가 시체로 변하여 태자 앞에 나타났다. 태자는 시종에게 저 시체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죽어서 저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마지막으로 북문을 나섰다. 북문 밖에서는 정거천인이 지팡이를 들고 출가한 사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태자는 시종에게 이 사람은 무엇인지 묻는다. 정거천인은 시종의 입을 빌어 "인간은 누구나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사문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수행과 명상을 통해 해탈을 구하고, 중생을 구하려는 사람이다."라고 답한다.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④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태자는 출가를 결심하고 말을 타고 야반도주하는 장면
싯다르타 태자는 수행자를 만난 후, 출가를 결심한다. 하지만 정반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정반왕은 왕손을 얻기 전까지는 허락할 수 없다며, 태자는 이웃 나라 공주인 야쇼다라 공주와 결혼을 하고 곧 아들을 얻게 된다. 정반왕은 아내와 자식까지 얻게 된 태자가 마음을 돌려 정착하기를 바랐지만, 태자는 출가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정반왕은 밤낮으로 유흥을 제공하였으나 오히려 태자는 더욱 출가를 꿈꾸게 되었다. 태자의 나이 29세가 되던 해 음력 2월 8일 밤, 자신이 좋아하던 백마 칸타카, 마부 찬다카와 함께 성을 나섰다. 왕궁이 멀어지자 말과 마부를 돌려보냈다. 이어 태자는 머리를 깎고, 수행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수행길에 들었다.
⑤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고된 수행을 계속하는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그린 장면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 후 여러 스승을 찾아 나섰지만 결국 도를 얻지 못하였다. 결국 혼자 이루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고, 마가다국 서쪽에 있는 설산으로 들어갔다. 태자는 모든 수행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고행을 하기로 했다. 태자는 하루에 쌀 한 톨과 통 반쪽으로 연명했다. 씻지도 못했고, 머리를 깎지도 못했으며, 날이 갈수록 야위어갔다. 몸의 먼지를 털면 털이 부스러져 떨어지고, 배를 만지면 등뼈가 만져졌다. 태자는 고행을 6년간 계속하였다. 결국 이 또한 길이 아님을 깨닫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6년 동안 함께 수행하던 다섯 비구는 태자의 모습에 실망하고 떠나버렸다.
⑥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깨달음을 방해하는 마왕 파순을 물리치는 장면
마왕은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방해하고자 아름다운 세 딸 '욕염(탐욕)', '능열인(성냄)', '가애락(쾌락)'을 보낸다. 세 딸은 교태를 부렸지만 태자는 결코 현혹되지 않았다. 오히려 세존은 유혹에 넘어가긴커녕 파순의 세 딸을 눈물이 쏙 빠지도록 꾸짖었다. 그런데 유혹하러 온 파순의 딸들은 그토록 심한 말을 듣고도, 오히려 석가모니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그녀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꽃을 바쳐 용서를 구한 다음 자기 아버지한테 가서 석가모니에 대한 찬양을 잔뜩 늘어놓았다. 세 자매는 이후 불도에 귀의하여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
이에 마왕은 직접 나선다. 세속의 권력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통하지 않았다. 결국 코끼리와 말이 끄는 군대를 앞세워 굴복시키고자 하였으나 태자는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그러자 대지가 진동하며 지신(地神)이 나타났다. 마왕의 군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땅을 가리킨 이 자세를 ‘항마촉지인’이라고 한다.
⑦ 녹원전법상(鹿野轉法相) - 태자가 깨달은 뒤 녹야원(사르나트)에서 처음 설법을 하는 장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 석가모니는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하기로 했다. 이들에게 설법을 하기 위해 수백km 떨어진 녹야원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두 명의 상인 '발타라사나'와 '발타라리'를 만났는데, 이들이 최초의 귀의자들이다. 녹야원에 도착한 석가모니는 처음으로 설법을 했는데 여기에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는 말이 생겼다. 다섯 비구에게 사정제, 팔정도, 12 연기를 설했다.
⑧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열반에 든 부처님의 모습과 슬퍼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린 장면
초전법륜 이후 21일 동안 일곱 곳에서 아홉 차례 화엄경을 설했다. 하지만 중생들은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여, 중생들의 이해 능력에 맞게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였다. 그리고 아함경을 8년, 방등경을 8년, 반야경을 21년, 법화경을 8년, 총 45년 동안 법문을 설하고 80세에 열반에 들었다.
열반을 앞둔 석가모니는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진리에 의지하고, 진리를 스승으로 삼아라. 진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의심 나는 것이 있는가를 세 번이나 물은 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다.
석가모니는 침상에 올라 오른쪽 옆으로 누워 얼굴을 서쪽으로 향하고, 머리를 북쪽에 두고 다리를 포갰다. 이 장면은 열반상이라 불린다. 머리를 북쪽으로 둔 이유는 부처님이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불법은 북천축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기 때문이다.
법주사(法住寺) 팔상전(捌相殿)
법주사 팔상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축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팔상전이 전각인지 탑인지 의견들이 분분했지만 1968년 팔상전을 해체 수리할 때 심주(心柱) 밑에서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불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판명되었다.
탑의 내부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현판에는 팔상도의 팔(八) 자가 아니라 팔(捌) 자로 쓰여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자는 ‘깨뜨리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는 이 공간에서는 모든 근심과 집착, 욕심과 번뇌를 없애버리고 깨끗하고 부지런한 마음으로 정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건물의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포의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1층과 2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5칸, 3층과 4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이며, 5층은 정면과 측면 각각 2칸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꼭대기 꼭짓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 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 안쪽에는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남북에 배치된 기단에 올라서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의 네 벽에 각각 두 폭씩의 팔상도가 모셔져 있고 각 벽면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였다. 불상 앞에는 수많은 불상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대부분 사찰의 팔상전에 모셔진 팔상도는 불단을 향해 평면적으로 나열되어 한꺼번에 전체를 볼 수 있지만 법주사 팔상전은 한가운데 조성된 네 벽을 돌아가면서 각 벽면에 두 폭씩을 배치했기 때문에 한 곳에서 전체를 다 볼 수가 없다. 팔상도의 8폭을 전부 보기 위해선 팔상전 안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팔상도를 따라 돌다 보면 결국 가운데 벽인 심초석(心礎石)에 봉안된 불사리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탑돌이를 하게 된다.
팔상전 내, 여덟 번째 그림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과 그 앞에 놓인 불상은 누운 상태로 열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데 후대에라도 앉아서 열반하면 도력이 뛰어난 훌륭한 분이고, 누워서 열반하면 그렇지 않은 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에 석가모니 본인이 손수 누워서 열반하였다. 불가에서 가장 경계하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평가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이다.
법주사(法住寺) 청동미륵대불
법주사 청동 미륵 대불은 높이 33m, 무게 160여 톤으로 청동 입상(立像)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이는 아파트 12층의 높이이며 무게는 점보 비행기의 무게와도 맞먹는다.
신라 제36대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조성되어 1000년이 넘도록 속리산과 법주사를 지켜왔다. 하지만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경북궁 중건공사를 위한 당백전의 재료로 쓰기 위해 훼손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다가 1939년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인 김복진 선생이 독립의 염원을 담아 시멘트로 대불을 다시 조성하기 시작하였지만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 1964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조선 순종의 비인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완공되었다.
그러나 100년을 넘기 힘든 시멘트와 철근의 한계로 시멘트 미륵 대불을 그대로 본떠 서울대 공과대학 비철 금속 분야 연구진까지 참여한 가운데 청동 116톤이 소요된 청동 미륵 대불이 1990년 완성됐다. 이후 10년 뒤인 2000년 진표율사가 금동 미륵 대불을 모셨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개금불사가 시작됐고, 긴 우여곡절 끝에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불상의 광배(光背)는 전신이 빛을 발하는 신광(身光)과 머리 부분에서만 빛을 발하는 두광(頭光)으로 구분되는데 법주사 청동 미륵 대불은 이 가운데 두광을 하고 있다. 두광 부분을 잘 살펴보면 그사이에 작은 불상인 화불(化佛)이 조성돼 있다. 화불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소형 불상을 말한다.
법주사(法住寺) 쌍사자 석등(石燈)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성덕왕 19년에 조성된 것으로 통일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석등이다. 석등의 기둥 부분이 평범한 돌기둥이 아니라 사자 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신라의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혀 1962년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석등이란 돌로 만든 등기(燈器)를 말하는데, 불교에서 등기는 예불을 올리는 의식에서 기본적인 도구일 뿐 아니라 사찰에서 행하는 모든 행사 가운데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도구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석등을 중대석의 형태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하는데, 일반형 석등과 고복형(鼓腹形) 석등, 쌍사자 석등으로 구분한다. 일반형은 팔각형을 이루는 형태이고, 고복형 석등은 기둥이 원형이고 중앙에 굵은 마디를 둔 형태, 쌍사자 석등(雙獅子 石燈)은 중간에 기둥 대신 두 마리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배치해 놓은 형태이다.
쌍사자 석등의 경우, 현재 대한민국에는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중에서도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과 함께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은 크게 훼손된 부분 없이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을 지키고 있어, 2점 모두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석등의 구조적 형태는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으로 구분된다. 상대석은 석등의 머리 부분으로 지붕 역할을 하는 부분인 옥개석과 불을 피우는 창이 뚫린 화사석(火舍石)으로 구성된다. 그 단면은 보통 팔각형으로 되어 있다.
중대석은 간주석이라고도 부르며 석등의 기둥을 이루는 부분을 지칭한다. 기둥의 위로 연꽃잎 무늬를 새긴 연화석을 둔다.
하대석은 지면과 맞닿아 바닥에서 석등을 받치는 부분인데, 탑으로 치자면 기단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대석은 지대석 부분과 이 위에 올리는 하대석으로 구분이 되는데, 지대석 위에 올라가는 하대석은 2단으로 하부하대석과 상부 하대석으로 나누어진다. 지대석(地臺石)은 말 그대로 땅과 닿는 받침돌이며, 지대석 위에 올라가는 하대석 중 상부 하대석에는 중대석을 꽂는 구멍을 파놓고 구멍 둘레에 연꽃무늬를 새겨놓는다. 지대석은 주로 네모나고, 상부 하대석과 하부하대석의 단면은 대체로 둥근 원형이거나 팔각형이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의 구조를 살펴보면, 하대석의 경우 지대석은 따로 없고 상부 하대석과 하부 하대석만 두었다. 상부 및 하부하대석 모두 팔각형으로 조형되었고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도 여느 석등들과 마찬가지로 상대석과 하대석은 팔각형의 구조를 보인다. 그러나 중대석에서 사자 암수 한 쌍을 조각하여 기둥으로 삼는 큰 파격을 보여준다.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동물인 사자를 등장시킴으로써 진리를 밝히고 불법을 널리 퍼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을 위로 치켜세우고 상대석을 떠받치는 형태로 서 있어서, 옆에서 보면 안정적인 X자형 자세를 이룬다. 사자 두 마리의 조형도 뛰어난데, 상체는 우람하고 다리는 곧게 뻗어 있어서 힘차고 유연한 느낌을 주면서도 머리의 풍성한 갈기, 엉덩이에 붙어 있는 꼬리 등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사자 한 마리는 무거운 상대석을 떠받치느라 힘이 드는 듯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근엄하게 입을 앙다물고 있는 표정까지 세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법주사(法住寺) 원통보전(圓通寶殿)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을 모셨기 때문에 관음전(觀音殿)이라고도 하며,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권능이 모든 곳에 두루 통한다고 하여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법주사 원통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건물 안에는 목조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법주사 원통보전은 추녀마루가 한 곳에 모인 사모지붕이라는 특이한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이다.
법주사(法住寺) 능인전(能仁殿)
‘능인(能仁)’이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별칭 중 하나로 ‘능히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법주사 능인전은 고려 말 1362년에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법주사에 행차하여 경상도 양산 통도사에 있던 사리 1개를 법주사로 옮겨와 봉납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뒤쪽에 석가세존의 사리탑이 있어 원래는 사리탑을 예배하는 적멸보궁의 역할을 한 건물이지만 현재는 불상과 16 나한상을 봉안해 영산전 또는 나한전의 기능을 갖는다.
조선 후기 호영(呼映) 스님이 작성한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이라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전각이 원래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법주사의 금강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에서 왼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사리각 옆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져 있는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磨崖如來倚坐像)을 만날 수 있다.
‘마애여래의좌상’은 경내 자연 암반에 의자에 앉은 형상의 여래상을 부조로 조각한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상은 2.84m 높이의 연화대좌에 앉아 있다. 머리에는 육계가 있고 나발이 표현돼 있으며 귀가 길어서 어깨에 닿을 정도다. 얼굴은 둥글게 표현됐는데 눈은 가로로 길게 트여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가 새겨져 있다. 목에는 삼도가 두껍게 표현돼 있으며, 어깨는 널찍하고, 왼쪽 어깨는 법의로 덮었다. 벌리고 앉은 무릎 사이에는 법의가 흘러내리는 모습이 묘사돼 있고 두 발은 연꽃을 밟고 있는데 지금은 불단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불상의 오른쪽 바위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앉은 소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 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한다는 법주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이 있다.
법주사 희견보살 입상 (法住寺 喜見菩薩 立像)
『법화경(法華經)』의 ‘약왕보살본사품’을 보면 약왕보살의 전생담에 희견보살이 등장한다. 약왕보살이라는 이름이 다소 생소하지만 경전에는 문수, 관음, 대세지 등과 함께 약사 8대 보살로 등장하고 실제로 석가여래의 협시보살로 조성된 예가 있다. 약왕보살은 전생에 ‘일체중생희견보살’이라는 한 보살님이셨는데 어느 날 일월정명덕이라는 부처님이 설해주는 ‘법화경’을 듣고 고행하며 정진하여 삼매에 들어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일월정명덕불과 ‘법화경’에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1200년 동안 최고의 향을 자신의 온몸에 바르고 먹는 정성을 들이고 마지막에는 몸을 향처럼 불태우는 소신(燒身) 공양을 올렸다. 이 소신공양이 상징하는 뜻은 몸을 태워 일신을 버리고 불법을 소중하게 여겨 목숨을 바쳐 도를 구했다는 신심의 극치를 나타낸 것이다.
이후 다시 몸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난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탑을 세우고 장엄하는 소임을 맡아 이를 수행하면서 탑 앞에서 또다시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7만 2000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다. ‘법화경’에서 희견보살이 자신의 몸을 불태워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던 일을 두고 ‘제일의 보시’라고 한 것에서 소신공양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하며 소신공양은 중국에서 ‘법화경’이 번역된 이후 현실에서도 행해졌다고 하는 궁극의 공양법이다. 『범망경(梵網經)』에는 보살도를 닦는 이는 몸을 태우거나 팔, 손가락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해야 한다는 말이 설해져 있다. 『능엄경(楞嚴經)』에는 불상 앞에서 손가락을 태워 속세의 업장을 소멸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법주사 희견보살상은 머리에 커다란 찻잔을 이고 있는데 마치 시골 여인네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있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신라 33대 성덕왕 19년에 조성된 희견보살상은 미륵부처님께 차공양을 올리는 공양상으로 뜨거운 찻잔과 찻잔 받침을 머리에 이고 있다. 희견보살이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은 차를 담아서 부처님 전에 올리는 헌다의식(獻茶儀式)에 사용되는 도구로 흙으로 만든 토제 다기에서 시작해 구리와 상감청자와 같은 예술적 작품으로 발전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유기 제품으로 제작되고 있다. 맑고 신성한 성품의 차는 불교의 여섯 공양물(향, 등불, 차, 꽃, 과일, 음식)의 하나이다. 따라서 다기는 향로·촛대·화병 등과 함께 불단 위에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도구이다.
법주사 희견보살상은 불도와 깨달음을 향한 끊임없는 정성과 희생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국가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