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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Sep 25. 2024

1. 답사의 신, 『산사』에 가다! -통도사-

1박 2 일형 답사

 무릇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는 법이다. 이번에는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山寺)로 간다.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이는 그곳에서 비움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1. 유네스코 세계유산산사한국의 산지 승원』 통도사(通度寺)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한국의 삼보사찰 중 하나이자, 5대 총림 중 하나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안치된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어 불보(佛寶) 사찰로도 불린다. 삼보사찰 중 나머지 두 군데는 해인사와 송광사이다.     


 통도사는 영축산 줄기에 자리했다. 매표소를 지나 몇 걸음 걸어 들어가면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열리는데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라는 이름처럼 바람이 춤추고 소나무의 맑은 기상이 가득한 길이다. 숲길 옆에는 살얼음 낀 계곡이 자작 대며 흐르고, 경구(警句)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모든 소유는 괴로움의 근원이니 모든 것을 비우고 들어오라는 사찰 입구의 문구임과 동시에 이 글귀 하나에 불교의 모든 진리가 녹아있는 듯하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갈 무렵, 일본 사람들이 전국의 좋은 소나무들을 거의 다 베어갔다. 통도사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때 구하 스님과 경봉 스님이 지혜를 냈다. “어차피 베어갈 거면 통도사 저 안쪽에서부터 베어 가라.” 영축산 중턱의 소나무부터 먼저 베어가라고 한 것인데 산문 입구 소나무는 산 위쪽의 소나무를 다 베어 가고 난 뒤에 베어가라고 한 것이다. 옛날 절 아래마을에서도 수구막이 소나무는 절대로 베지 못하도록 했다. 마을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스님들이 이런 기지를 발휘해 통도사 입구의 소나무는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통도사의 또 다른 이름 영축총림이다. ‘총림’은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 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 교육 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한다. 총림의 원래 뜻은 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화합해 함께 배우기 위해 모인 것을 나무가 우거진 수풀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나라 5대 총림은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이다.     


‘총림’은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 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 교육 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통도사가 있는 곳은 영축산(靈鷲山)이라는 산으로, 석가모니가 설법하던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에 있는 영축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그로부터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통도사사리가 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따르면 지금의 통도사 자리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곳에 아홉 마리의 독룡이 살면서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연못에 있는 독룡들을 교화하여 날아가게 했고, 연못을 메운 후 그 위에 통도사를 창건했다. 자장율사가 독룡을 물리치고 통도사를 창건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시절 중국 우타이산(五臺山)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이때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문수보살은 자장율사에게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과, 불두골(佛頭骨), 손가락뼈(指節),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석가모니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축서산(鷲栖山: 영축산의 옛 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라고 말했다.     


 자장율사는 그 말을 들고 신라로 귀국하였고, 연못에 와서 독룡 아홉 마리에게 설법을 하니, 독룡 아홉 마리는 곧 교화되었다. 그중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곡동(三洞谷)으로 날아갔는데, 남은 한 마리는 눈이 멀어서 날아갈 수가 없었기에 자장율사에게 이 터를 지킬 테니 남아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자장율사는 그 용의 청을 들어주어 통도사에 남도록 허락하고 독룡 아홉 마리가 살던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세우고 그 안에 중국에서 모셔 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안치하였다. 


 그러나 연못 한 귀퉁이는 메우지 않고 남겨 두었는데, 이곳이 지금의 구룡지로, 마지막 한 마리 남은 용이 있는 곳이다.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자장율사가 모셔 온 진신사리는 당시 통도사와 경주 황룡사, 울산 태화사에 모셔졌는데 통도사 외 사리들은 그 장소에 계속 있지 못하고 현재의 5대 적멸보궁에 모시게 된다.     


 통도사라는 절 이름의 또 다른 의미는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한다는 뜻에서 통도(通度)라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모든 승려들이 통도사 금강계단에 와서 계를 받았고,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사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다는 것은 곧 부처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통도사는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다. 요즘에도 통도사는 조계종 승려들이 계를 받는 곳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로 와서는 선종 2년(1805)에 통도사의 경내임을 나타낸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세울 만큼 절의 규모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통도사 배례석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극락전 앞에 설치되었다.     


 고려는 우왕 3년(1377)과 5년(1379) 두 차례에 걸쳐 왜구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 통도사 주지였던 월송(月松) 대사는 1377년에 왜구들이 통도사에 와서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그것을 가지고 피신했다가 1379년 또다시 왜적이 사리를 침탈하려고 했을 때 사리를 가지고 통도사를 빠져나와 개성 송림사, 서울 흥천사, 금강산 등지로 옮겨 다녔다고 한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왜구의 침탈은 여전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통도사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통도사는 한 차례 소실되었다. 또한 왜군이 통도사에서 석가모니의 진신 치아 사리를 약탈했으나 사명대사가 되찾아서 건봉사에 봉안했다고 하고, 현재의 통도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선조 36년(1603)에 송운대사(松雲大師)가 재건하고 다시 인조 19년(1641) 우운(友雲) 스님이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사찰령을 통해 통도사를 30 본산 중 하나로 선정하였다. 한국전쟁 초반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때 부산 동래 육군병원이 부상병들로 넘쳐나자 낙동강 전선 안쪽 후방인 이곳에도 3천여 명의 부상병들이 보내졌고, 치료 도중 사망한 이들을 불교식으로 화장하는 연기가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그래선지 전투적인 어조나 정전(협상 진행)을 아쉬워하는 낙서들이 곳곳에 있으며, 52년 4월까지 이용하며 묻었던 각종 의료도구들이 몇십 년 뒤에 발굴되기도 했다.     


 한국 3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만큼, 절의 규모가 크고 전각과 수장한 문화재가 많아 한국 불교 문화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총 65동의 건물이 경내에 있으며, 소장한 문화재는 국보 1건, 보물 21건, 지방유형문화재 46건을 포함해 문화재 약 3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신라식 가람배치는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금당과 탑이 놓이는 게 정석이지만, 통도사는 뒤에는 산이 앞에는 하천이 있어 부득이 옆으로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세 건물이 모두 남향을 하고 있어 사찰의 진입체계가 남에서 북으로 이어졌었다. 그러나 일주문, 천황문, 불이문이 건립되면서 통도사의 진입체계는 동에서 서로 향하는 구조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후 조성된 대부분의 전각들도 이러한 동서축에 맞추어 구성되었다.                                        


2. 부처님의 세계를 구현한 통도사의 전각 배치     

 대웅전 및 금강계단을 정점으로 완만한 경사를 따라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으로 나뉜 상중하 방식이 특징인데, 창건 당시부터 이렇게 건립되었다. 하로전의 크기가 200척, 중로전의 크기가 160척, 상로전이 120척으로 상로전으로 들어갈수록 크기가 작아지는데 공간적 긴장감을 증폭하여 부처의 진리에 닿고자 한다는 의미가 있다.     


 통도사 각 영역의 전각 배치는 다음과 같다.     


상로전 : 금강계단, 대웅전, 응진전, 명부전, 삼성각, 산신각, 일로향각

중로전 :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 해장보각, 세존비각, 영각, 장경각, 전향각, 불이문

하로전 : 영산전, 극락보전, 약사전, 만세루, 범종루, 가람각, 응향각, 천왕문, 일주문     


 진입로마다 하로전은 일주문(一柱門), 중로전은 천왕문(天王門), 상로전은 불이문(不二門)을 두어 권역을 구분하고 있으며, 상로전은 그중에서도 가장 깊이가 깊고 그 상로전에 대웅전이 위치한다. 참배객은 대웅전을 270도 회전한 뒤 금강계단 입구에 이르는 구조다.     


 보통의 사찰에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다른 전각에서 본존불 외에 다른 불보살을 일부 모시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모든 부처님을 모시고 있지는 않은데 통도사는 불교 건축에 필요한 모든 불보살 전각을 갖추고 있다. 영산전에서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고, 극락보전에서는 아미타불을, 약사전에서는 약사불을, 대광명전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용화전에서는 미륵불을, 관음전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명부전에서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불보살들은 각기 다른 손 모양과 지니고 있는 사물로 구분을 하는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러한 문제점을 통도사에서는 전각 배치의 묘미를 통해 해결해주고 있다.      


 하로전에서는 영산전이 있는데 영산전은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모신 곳이다. 그리고 영산전 바로 앞에는 만세루가 있는데, 만세루는 주로 불자들이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는 곳이다. 즉 설법을 하는 영산전 앞에서 설법을 듣는 만세루를 배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방정토의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극락보전을 왼쪽에 배치하였고, 동방정토의 약사불을 모시고 있는 약사전을 오른쪽에 배치함으로써 부처님 세계를 건축의 배치로 구현하였다.      


 중로전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 진리 그 자체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명전이 있는데 통도사에서는 이 전각들의 크기에 차이를 두고 각각 그 높이를 차별화해 놓음으로써 건축물과 부처의 위계를 구현해 놓았다.      


 또한 불보살과 관련 없는 전각들의 배치를 살펴보면, 먼저 천왕문 옆의 가람각은 사찰의 안녕을 책임지는 토지신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불교와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오랜 시간 동안 민중들과 함께 해온 토속신앙이 깃든 곳이다. 가람각을 옆에서 보면 사찰 경계 밖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담장을 둘러 침으로써 사찰 내로 들어와 있는 모양새이다. 배격하면서도 포용하고 있는 모습은 산령각의 배치에서도 알 수 있다. 산령각은 토속신앙인 산신을 모시는 곳인데 이곳에는 아예 담장이 없는데 이 점은 토속신앙을 대하는 통도사의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      


3. 스님들의 호칭

 역사나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스님들마다 뒤에 붙는 호칭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원효대사, 대각국사, 원광법사 등 다양한 호칭을 붙여서 존칭하고 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행적이나 덕성에 따른 호칭에는,

조사(祖師) :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정통의 학맥을 이어받은 덕이 높은 스님

종사(宗師) : 한 종파를 일으켜 세운 학식이 높은 스님

선사(禪師) : 오랫동안 선을 수행하여 선의 이치에 통달한 스님

율사(律師) : 계율을 전문적으로 연구했거나 계행이 철저한 스님

법사(法師) : 경전에 통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는 스님


 그리고, 국가 직책으로써의 호칭에는,

국사(國師) : ‘나라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스님으로서의 최고의 벼슬 (통일신라, 고려시대)

왕사(王師) : ‘왕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스님으로서는 국사 다음의 벼슬

제사(帝師) : ‘황제의 스승’이라는 뜻

대사(大師) : 큰 스님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승과 시험에 통과 후 일정한 경지에 오른 스님의 직급으로도 사용되었음      


4. 통도사의 국보와 보물

 통도사는 국보와 보물을 비롯하여 무수한 문화유산자료가 있기에 여기서는 국보와 보물 중심으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등록된 국가유산명으로 정리)     


국보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보물

사인비구 제작 동종 - 통도사 동종

양산 통도사 국장생 석표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1963, 지정날짜)

양산 통도사 봉발탑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도

묘법연화경 권 2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 9~10

묘법연화경

묘법연화경 권 3~4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

통도사 괘불탱

통도사 화엄탱

통도사 영산회상탱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2002)

양산 통도사 금동천문도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

통도사 아미타여래설법도

양산 통도사 영산전 벽화

양산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2011)

양산 통도사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양산 통도사 영산전

양산 통도사 대광명전

양산 통도사 천왕문     


5. 통도사의 주요 공간 하로전(下爐殿     

 통도사의 첫 번째 공간인 하로전은 천왕문을 들어서서 불이문에 이르기까지 펼쳐지는 공간이다. 하로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명품길인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 1. 6km를 지나 일주문을 통과해야 한다. 무풍한송로 소나무길에는 용피바위 안내석이 있는데 창건설화에서 나오는 세 마리의 용이 날아가다가 부딪혀 죽은 바위이다.     

통도사 일주문은 네 개의 기둥이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세 칸의 정면을 만들고 지붕은 맞배지붕을 얹어놓았다.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귀퉁이에 네 개의 활주가 세워져 있다. 이 일주문이 처음 세워진 것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의 일주문은 조선 영조 46년(1770)에 중건된 것이다.     


통도사(通度寺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

보통 사찰에서의 다리는 중생의 세계(사바세계)와 부처의 세계(정토 세계)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삼성반월교는 일주문 앞에 있는 세 개의 무지개다리로 1937년 인천의 김치수의 시주로 경봉스님에 의해 건립되었다. 삼성반월(三星半月)이란 마음 심(心) 자를 뜻한다. 삼성(三星)은 세 개의 점을, 반월(半月)은 나머지 한 획을 나타낸다. 즉 사찰에 닿기 전 마음을 가다듬고 한 데로 모아 오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 다리에는 난간도 없고 폭도 좁아 헛된 생각으로 정신을 못 차리면 다리에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다리 기둥에는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와 영조운산리(影照雲山裏)가 새겨져 있다. ‘영조운산리(影照雲山裏)’는 ‘그림자가 구름과 산속에 드리운다’라는 뜻인데 물 위에 비치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올 때 통도사에 들어갈 준비가 된 것이다.      


삼성반월(三星半月)이란 마음 심(心) 자를 뜻한다. 삼성(三星)은 세 개의 점을, 반월(半月)은 나머지 한 획을 나타낸다.


통도사(通度寺일주문(一柱門)

통도사 일주문은 삼문 형태이지만 양쪽의 문에는 턱을 설치하여 출입을 금지하고 가운데 문으로만 출입을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이는 부처님을 향한 길은 여러 길이 아니라 한 곳임을 상징하며, 들어오는 이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가르침을 의미하고 있다.     


일주문 현판에는 ‘靈鷲山通度寺(영축산통도사)’라고 적혀 있는데 이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쓴 글씨이다. 그리고 전면 기둥에는 國之大刹(국지대찰) 佛之宗家(불지종가)라는 해강 김규진의 글씨가 적혀 있다. 이는 나라의 큰 사찰이며,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종갓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통도사의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일주문 앞에서는 두 개의 돌기둥이 있는데 왼편에는 異姓同居必須和睦(이성동거필수화목)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전국의 많은 스님들이 통도사에 와서 동고동락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 화목해야 함을 이르고 있다. 오른편에는 方袍圓頂常要凊規(방포원정상요청규)라고 쓰였는데 불제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으러 온 스님들은 가사를 입고 삭발을 했으니 통도사의 규율을 잘 따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수많은 스님들과 불제자들을 길러낸 통도사만이 내릴 수 있는 메시지이다.      


일주문 현판에는 ‘靈鷲山通度寺(영축산통도사)’라고 적혀 있는데 이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쓴 글씨이다.


통도사(通度寺천왕문(天王門)

 일주문을 지나 야외유물관을 지나다 보면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불국토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대천왕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이들 사대천왕은 제석천왕의 명을 받아 인간 세상을 두루 살피고 있는데 동서남북 순으로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이다.      


 동쪽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손에 칼을 들고 있으며 인간의 감정 중 기쁨의 세계를 관장한다. 계절 중에서는 봄을 관장하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다는 음악의 신인 건달바와 부단나의 신을 거느리며 동쪽 하늘을 지배하고, 동쪽을 상징하는 청색을 띠며, 착한 이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준다는 존재이다.      


 서쪽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손에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으며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한다. 계정 중 가을을 관장하며 용과 혈육 귀로 불리는 비사사 신을 거느리고 서쪽 하늘을 다스리며, 얼굴색은 백색이고, 악한 자에게 고통을 주어 불법에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는 존재이다.     


 남쪽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사랑의 감정을 주관하고, 여름을 관장한다. 구반다(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 말머리에 사람의 몸을 취하고 있다)와 아귀를 거느리고 남쪽 하늘을 다스리고 있으며, 남쪽을 상징하는 적색을 띠며,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푼다고 하는 존재이다.     

 북쪽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손에 비파를 들고 있으며,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한다. 계절 중 겨울을 관장하며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북쪽 하늘을 지배하고 있으며, 얼굴색은 흑색이고, 어둠 속에서 헤매는 중생을 인도한다는 존재이다.     


 통도사 천왕문은 숙종 39년(1713)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다음 해인 1714년에 중건했다는 『영산전천왕문양중창겸단확기문(靈山殿天王門兩重創兼丹雘記文), 1716년』 기록과 천왕문 내부에 봉안된 사천왕상이 숙종 44년(1718)에 제작됐다는 묵서(墨書)가 확인되면서 건립 시기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는 사찰의 산문(山門)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202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통도사 천왕문의 특이점은 사천왕상의 발밑에 유생이나 관료 복장을 한 인물들이 깔려 있는데 이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대한 항변의 표시로 볼 수도 있다.     



통도사(通度寺가람각(伽籃閣)

천왕문 왼쪽으로 사방 한 칸인 아주 작은 전각이 있는데 이 절터를 지키고 있는 가람신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가람신은 불교의 신이 아닌 민간신앙에서 융합된 신이기에 경내에 모시기는 했지만 위치상으로는 천왕문 밖으로 배치하였다.      


‘가람’은 산스크리트어 ‘상가 아라마(sangha-arama)’를 가리키는 승가람마(僧伽藍摩)를 줄인 말이다. 상가(sangha), 곧 승가는 불교공동체, 아라마(arama)는 ‘뜰이 있는 즐거운 집’으로  ‘상가라마’는 스님들이 즐거이 머무는 곳(절)이라는 뜻이다.      


 통도사의 가람각에는 토지대신이 봉안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토지대신은 백발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곳 통도사 가람각에 모셔진 토지대신은 검은 옷에 회색 수염을 단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통도사에서는 가람신을 높이 받들어 주지 스님이 부임하면 가장 먼저 가람각에 들려서 인사를 드린다. 한편 순천 송광사에 있는 가람각의 경우는 죽은 자의 영혼인 영가가 경내에 들어가기 전에 속세에 찌든 몸과 마음을 씻기 위해 잠깐 모셔지는 곳이기도 하다.     


 통도사 가람각은 숙종 32년(1706) 처음 세워졌고 외벽에는 적마(赤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원명(圓明) 스님에 의해 신축되었다.     


통도사(通度寺범종루(梵鍾樓)

통도사의 하루는 새벽부터 스님들의 의식 중 하나인 도량석(道場釋)에서 시작한다. 보통 사찰의 범종루에는 사물(四物)이 있는데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이르는 말이다. ‘범종’은 지옥에 있는 중생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에게 불법의 진리를 전하는 기능을 한다. ‘법고’는 가죽 가진 모든 들짐승을 제도한다. ‘목어’는 물속 짐승을 제도하고 구름 모양의 ‘운판’은 하늘 위 모든 생명체를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 사물은 삼라만상 모든 생명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의 진리를 깨우치기 바라는 간절한 염원의 상징이다.      


 통도사 범종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이며, 팔작지붕을 사방의 활주로 받쳤는데 특이하게도 활주가 2층에 있다. 조선 숙종 12년(1686) 건립되었다고 하난 현재 건물은 최근에 중건한 것이다.     

 

통도사(通度寺동종(銅鐘)

 조선 중기 승려 사인비구가 만든 종이다. 이 종은 맨 위의 용뉴, 종 몸통의 상대와 하대, 유곽 등을 고루 갖춘 전통적인 범종의 모습이다. 상대에는 위, 아래 두 줄로 범자가 배치되었고 유곽 안에는 아홉 개의 유두가 있는데 중앙의 하나는 특별히 돌출되었다.     


종 몸통 가득히 명문이 새겨진 까닭에 유곽 사이의 보살상은 작게 표현되었다. 종으로는 유일하게 팔괘를 돌려 새겨져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종의 명문에는 1686년에 사인비구가 만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사인비구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약 50여 년 동안 경기, 경상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승려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종 만드는 장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통도사(通度寺영산전(靈山殿)

 통도사 영산전은 조선시대의 불전으로 2014년 6월 5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산전은 팔상도가 봉안되어 있어 팔상전(八相殿)이라고도 부르는데, 고대 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주위에 있는 영축산(靈鷲山)을 사찰안에 모시고자 의도한 곳으로 석가모니가 이 산에서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설법했다고 해서 신성하게 여겨지는 곳이다. 영산(靈山)은 영축산(靈鷲山)의 줄임말이다. 일반적으로 영산전에서는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하며 후불탱화로는 영산회상도를, 그리고 그 주위에 부처가 태어나 도를 닦고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8 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다. 통도사 영산전은 단청이 오랜 세월로 인해 없어진 상태로 있으나, 오히려 꾸미지 않고 고고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통도사(通度寺영산전(靈山殿다보탑벽화(靈山殿 壁畵)

 영산전 내의 다보탑 벽화 역시 보물로 지정되어 있기에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영산전의 서측 벽에는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땅속에서 보탑이 출현하여 석가모니의 설법을 증명한다는 법화경 『견보탑품』에 나오는 내용을 그린 다보탑 벽화이다. 영산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영산전 다보탑벽화는 측면 3칸의 서쪽 벽에 나뉘어 그려져 있다. 건축으로 표현된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 외에 회화작품으로는 유일한 다보탑 그림이다.      


 화면 구성은 기둥을 경계로 크게 삼분되어 있는데, 두 고주 사이의 중앙에 높이 솟은 다보탑을 배치하고 좌우 협칸에 나누어 탑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 10대 제자상과 용왕, 용녀, 상왕, 사자왕 등을 그렸다. 다보탑은 9층 목탑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탑문이 열려 있는 3층 탑신에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마주 보며 합장하고 있다. 2층과 3층 탑신의 좌우에는 각각 두 구의 보살상과 나한상이 있다.     


 통도사 영산전 다보탑벽화는 『법화경』의 견보탑품의 확인을 그린 벽화로 국내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며 그 규모나 내용 면에서 국내 벽화 자료로는 유례가 없는 작품이다. 조선 후기 『법화경』을 주제로 하는 다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와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통도사(通度寺삼층석탑

 통도사 영산전 앞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 시대의 일반형 석탑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의 높이는 3.9m, 기단 폭은 1.8m이며, 기단은 여러 매의 장대석을 사용해 지대석을 구축한 후 올려놓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1개의 부재로 조성되었다. 이 탑은 하층 기단의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인 우주(隅柱)와 중간 기둥인 탱주(撑柱)를 생략하고 기단부에 안상(眼象)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통일신라 시대 말기인 9세기 후기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점에서 보물로서 지정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통도사(通度寺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은 극락세계에 머물며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전각으로 통도사 극락보전은 서방세계인 서쪽을 향하고 있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다.      


 불가에서 극락을 서방정토라고 하는 것은 인도 사람들이 방위와 시간을 일치시키는 인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동쪽으로 서서 앞쪽을 과거, 뒤쪽을 미래라고 한다. 따라서 극락은 내세에 왕생할 세계이며, 그것은 서방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사바세계가 곧 극락정토요, 현실세계와 극락세계가 불이(不二)라고 주장하였으며, 현실 속에서 극락세계의 실현을 추구하였다. 이는 자기 마음 가운데 본래 갖추어져 있는 성품이 아미타불과 다르지 않지만 미혹하면 범부가 되고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며, 아미타불이나 극락정토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수행법 중 ≪유마경≫에서는 정토에 태어나는 길이 여덟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① 중생을 도와주되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중생을 대신하여 모든 고생을 달게 받을 것, ② 모든 중생을 대할 때 평등하고 겸손할 것, ③ 모든 사람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할 것, ④ 모든 경전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것, ⑤ 대승법(大乘法)을 믿을 것, ⑥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지 않을 것, ⑦ 자신의 허물만 살피고 남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을 것, ⑧ 늘 온갖 공덕을 힘써 닦을 것 등이다.     


 억불정책을 펼친 조선시대에는 승속을 막론하고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신앙이 유행하였기 때문에 사찰에서도 극락전(極樂殿)이 가장 중요한 법당으로 건립되었으며, 사찰 주위에도 안양교(安養橋)를 두는 등 극락과 관계된 많은 사항들이 수용되었다.     


 통도사 극락보전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 성곡대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순조 1년(1801) 지홍스님이 고쳐 지은 후 20세기 초에 다시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측면의 가장자리인 부분의 협실이 아닌 중앙의 어칸에 출입문을 두는 점이 특징이다.      


 극락보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외벽에 그려진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이다. 험난한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향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의 모습은 앞은 용머리(龍頭), 뒤는 용꼬리(龍尾)로 나타내었고, 앞과 뒤에는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이 합장한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다.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현실의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배다. 반야(般若)는 진리를 깨달은 지혜를 의미하고 용선(龍船)은 용으로 극락세계로 가는 배를 상징한다. 배의 가운데는 비구와 아낙, 선비, 노인 등 신분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결같은 표정으로 극락왕생한다는 기대에 젖어 있다. 그림 중 뒤편에 있는 한 사람 혼자 뒤를 돌아보고 있는데 이는 아직 속세에 미련이 남아있거나 남겨 둔 가족들이 걱정되어 극락을 가면서도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통도사(通度寺약사전(藥師殿)

 통도사 약사전은 극락보전과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약사전은 약사불의 동방정토를 상징하는 전각이다.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 약사전에는 주불인 약사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일광보살이 협시를 하고, 우측에는 월광보살이 협시를 하고 있다. 약사전은 다른 말로 유리광전(瑠璃光殿)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동방정유리광 세계의 교주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월보전(滿月寶殿)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약사여래가 상주하는 곳이 동방만월 세계이기 때문이다.    

 

통도사 약사전은 공민왕 18년(1369) 성곡대사(星谷大師)가 세웠으며, 현재의 건물은 그 양식으로 보아 18세기 후반 극락전과 함께 중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옆모습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불당에는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약사여래불은 중생의 질병을 고치고 목숨을 연장시키는 부처로, 약병이나 약그릇을 손에 들고 있으며 특히 현세 이익적 성격이 강한 부처로 특히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대중들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는 부처이다.      


통도사(通度寺만세루(萬歲樓)

양산 통도사 만세루는 법회를 열기 위해 별도로 지어진 건물로서, 그 기능과 규모로 볼 때 통도사가 수사찰(首寺刹)로서의 위용을 갖추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익공식 공포와 가구 구조에서 조선 후기의 건축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통도사 만세루에는 큰 글씨의 ‘만세루(萬歲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찰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현판을 6세의 신동이 썼다고 한다. 그리고 약사전 기둥의 주련은 84세의 구하선사가 썼다.     


四海浪平龍睡穩 (사해랑평룡수온)

九天雲靜鶴飛高 (구천운정학비고)

千古金沙灘上水 (천고금사탄상수)

琅琅猶作誦經聲 (낭랑유작송경성)

天下溪山絶勝幽 (천하계산절승유)

誰能把手共同遊 (수능파수공동유)     


사해의 파도가 잔잔하니 용은 잠자듯 숨고

구천의 하늘이 고요하니 학이 높이 날도다.

천고의 금사강 개울에 흐르는 물소리는

그 낭랑함이 경을 읽는 소리를 내는구나.

천하 계산의 이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누구랑 손잡고 함께 놀 것인가?


6. 통도사의 주요 공간 중로전(中爐殿     


통도사(通度寺불이문(不二門)

 통도사 불이문은 대웅전과 금강계단으로 향하는 마지막 문인 동시에 통도사의 세 영역 가운데 중간 영역인 중로전 출입구에 해당하는 문이다. 불이(不二)란 '진리' 그 자체를 다르게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는 이 문을 통해야만 만날 수 있으며, 이 속에서 참된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실현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문을 통해 참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 모든 번뇌를 벗게 되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통도사 불이문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의 건물이 언제 중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지만, 중앙 기둥의 간격이 넓어 훨씬 웅장한 느낌을 준다. 정면에는 벽이 없이 각각의 칸마다 판문(板門)을 설치한 점과,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을 얹은 점이 천왕문과 다른데, 이것은 아마도 불이문을 경계 삼아 나누어진 중로전과 하로전의 위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특히 중앙에 대들보를 쓰지 않고 코끼리와 호랑이가 양쪽에서 이마로 받쳐서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코끼리는 보현보살을, 호랑이는 문수보살을 상징한다. 대승불교에서 보현보살은 실천을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데, 진리로 가기 위해서는 실천과 지혜가 그것이 둘이 아니며 그런 인식을 뛰어넘어야만 진리에 닿을 수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기둥도 통도사 건물 중에는 가장 뚜렷하게 배흘림 양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보통 일주문, 불이문에는 담장이 없는데 이는 사찰의 문이 경계를 나누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통도사는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각각의 문루에 이르는 과정을 높이로 표현해 놓았는데 이는 각각 서로 다른 높이에 오름으로써 진리로 다가서는 자기 존재에 대한 변화를 직접 체험하도록 만든 것이다.      


 목수 한 사람이 도끼 하나로 쇠붙이를 전혀 쓰지 않고 지었다는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면 중로전이다. 불이문(不二門) 편액은 송나라 미불의 글씨이다. 그 아래 원종제일대가람(源宗第一大伽藍) 편액은 명 태조 주원장 친필로 전해지는데 원래는 일주문에 걸었다고 한다.     


통도사(通度寺관음전(觀音殿)

 중노전의 세 법당인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이 남북으로 일렬로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 가장 남쪽에 자리 잡은 법당이 관음전이다. 영조 1년(1725)에 용암대사가 지었고 그 뒤 여러 번 보수를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내부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으며 벽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있다. 또한 따로 기둥을 세우지 않아 공간을 넓게 꾸몄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이 관음전의 네 기둥의 주련에는 북송시대의 대문장가인 소동파의 누이 소소매가 섬에 유배되었을 때 관세음보살을 정성껏 염송하여 섬에서 벗어난 후 지었다는 시귀가 적혀있다.      


一葉紅蓮在海東(일엽홍련재해동) 한 떨기 홍련이 해동에 있으니

碧波深處現神通(벽파심처현신통) 푸른 파도 속에 신통을 나투네.

昨夜寶陀觀自在(작야보타관자재) 엊저녁 보타산의 관자재보살이

今朝降赴道場中(금조강부도량중) 오늘아침 도량 중에 강림하셨네     


통도사(通度寺관음전(觀音殿앞 석등(石燈)

 관음전 앞에는 사각 석등이 놓여 있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8각의 받침돌을 3단으로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었다. 아래 받침돌의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했다. 이 연꽃 받침은 물속에 있는 탁한 진흙과 같은 세상을 뜻한다. 

     

 가운데 기둥은 중앙에 3줄의 테를 둘렀다. 이 세 줄은 천, 지, 인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불가에서 부처님의 목에 난 삼도와 같은 의미라고도 한다. 이 팔각의 기둥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불교의 올바른 길인 팔정도를 상징한다.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인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말한다.     


윗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 문양을 장식하였다. 위로 향한 연꽃을 조각한 연화대는 광명, 청정, 부처, 보살의 세계를 상징한다.      


 4각의 화사석은 각 면에 네모난 창을 크게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에는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달았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 장식 받침)과 보주(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 장식을 하고 있는데 그 조형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석등의 용도는 절 안의 어둠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을 온 누리에 비추어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등불은 수미산과 같고, 등을 밝히는 기름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는 등에서 나간 불빛이 고루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석등은 언제나 석탑과 함께 전각의 앞에 자리하는데 이는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 중에서도 등불 공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갖가지 형태의 많은 석등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폐사지 등에도 석등이 남아있는 숫자가 많은 것을 보면, 석등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다고 볼 수 있다.    

  

통도사(通度寺용화전(龍華殿) 

 미륵불이 출현하는 곳이 용화세계의 용화수 아래이므로 용화전(龍華殿)이라고 하며, 장륙존상을 모신다고 하여 장륙전(丈六殿)이라고도 한다. 또한 미륵불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미륵전(彌勒殿)이라고도 한다.    

 

 통도사의 용화전은 통도사 내 다른 법당과 더불어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지었으며, 영조 1년(1725)에 청성대사(淸性大師)가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붕을 받치기 위하여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매우 화려하다. 세부 장식으로 용무늬를 많이 썼고 건물 앞면 중앙 칸에 문짝을 단 것이 특징이다. 내부에는 약 2m 정도의 미륵불상이 모셔져 있다.      


 용화전 내부에는 ‘서유기(西遊記)’의 내용 일부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서유기’는 중국의 고전 소설로 당나라 승려 혜초가 서역으로 가서 불경을 구하러 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의 동료들과 겪는 다양한 모험과 시련의 과정을 담고 있다. 용화전의 이 서유기 벽화가 주는 메시지는 인간의 욕망, 무지, 분노 등을 극복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과 방법을 전해주고 있다.     


통도사(通度寺봉발탑(奉鉢塔)

 용화전 앞에는 봉발탑이 세워져 있는데 처음 보는 탑의 모양이다. 탑신의 모양이 마치 스님들이 공양을 하는 발우라는 그릇같이 생겼는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가 열반하자 그의 제자 가섭존자는 석가모니에게 받은 가사와 발우를 들고 계족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섭존자는 미래에 오실 미륵불을 기다리는 징표로 발우를 남기고 열반에 들어갔다. 통도사의 봉발탑이 용화전 앞에 모신 것은, 훗날 석가모니 부처의 뒤를 이어 중생을 구제해 줄 미륵부처님에 대한 중생들의 뜨거운 열망의 표시이다.     


 특이한 점은 봉발탑은 용화전 앞에 있으나 그 방향은 금강계단을 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발우는 나중에 미륵불이 받지만, 현재는 부처님의 발우이기 때문에 그렇게 의도적으로 배치하였다. 통도사 봉발탑의 높이는 약 3m이고 하대석은 사각형 지대석 위에 놓였고 원형의 측면에 두 줄의 테를 둘렀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통도사(通度寺대광명전(大光明殿)

 대광명전은 중노전 영역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통도사 창건 당시에 건립된 건물로 추정하고 있으며 조선 영조 원년(1725)에 중수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고 정면 어칸 앞쪽에는 폭이 넓은 석계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정면 어칸의 기둥 상부에는 섬세하게 조각한 용두(龍頭)가 돌출되어 있고, 불전의 내측에는 용미(龍尾)가 돌출되어 있어 당시의 장식적 경향과 세련된 조각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단청은 외부는 대부분 퇴락하여 흔적만 남은 상태이나 내부는 문양은 물론 색까지도 선명하게 잘 남아있다.     


 건물 안의 뒷면에는 옆면의 기둥 배열에 맞추어 고주(高柱) 4개를 세웠고, 이것에 의지하여 불단(佛壇)을 조성하였다. 3칸의 불단은 가운데 부분이 돌출하여 독특하며, 위에는 목조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었다. 후불벽에는 비로자나불 탱화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노사나불 탱화와 석가모니불 탱화가 각각 걸려 있다. 이 밖에도 제석 탱화, 천룡 탱화, 팔금강 탱화 등도 걸려 있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본전(本殿)으로 건립하고, 『화엄경』에 근거한다는 뜻에서 화엄전(華嚴殿), 『화엄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는 뜻에서 비로전(毘盧殿), 또한 『화엄경』의 연화장세계가 대정적의 세계라는 뜻에서 대적광전이라고도 한다. 비로자나불은 우주 어디에나 광명을 비춘다고 해서 대광명편조(大光明遍照)여래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불을 모신 불전을 대광명전이라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智拳印)이라고 하는 독특한 수인을 결하고 있다. 지권인은 곧추 세운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잡고 검지 끝에 오른손 검지를 포개듯이 올려놓은 형식의 수인을 말하는데, 이것은 일체의 무명 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비로자나불상은 수인만 여타 불상들과 다를 뿐이지 전체적인 모습은 일반적인 불상과 큰 차이가 없다.     


통도사 대광명전


통도사(通度寺해장보각(海藏寶閣)

 통도사 해장보각은 절의 창건주인 자장율사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영조 3년(1727) 건립되었고 그 후 고종 4년(1900) 중수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 앞쪽에는 내진 기둥이 있는 특징이 있다.      

 이 전각을 해장보각이라고 하는 이유는 불경의 보관처를 용궁(龍宮)에 두기도 하고 또한 대장경(大藏經) 진리의 내용이 바닷속 수많은 보배에 비유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자장율사의 진영을 모신 전각을 해장보각이라고 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미 기록된 바와 같이 자장율사가 당나라로부터 가져온 대장경을 통도사에 봉안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통도사(通度寺개산조당(開山祖堂)

 개산조당 역시 해장보각과 마찬가지로 영조 3년 창건, 고종 4년 중수되었다. 자장율사의 진영을 모신 해장보각의 출입문으로 전각의 정면에 3칸의 문이 있으며 가운데 칸은 솟을대문 형식이다. 문 앞에는 두 대의 석물이 개산조당을 지키고 있다.      


 개산조당은 3칸 모두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건축기법으로는 조선시대 말기의 수법으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유교 건축의 사당 형식을 취하고 있다.      


통도사(通度寺) 37 조도품탑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37가지 방법을 조도품(助道品)이라고 하는데 이 내용을 새겨놓은 탑이다. 4념처(四念處), 4 정근(四正勤), 4여 의족(四如意足), 5근(五根), 5역(五力), 7 각지(七覺支), 8 정도(八正道) 등을 모두 합한 것으로, 다른 말로는 혹은 37 보리도법(三十七菩提道法)이라고도 한다.      


4염처(四念處) : 범부 중생의 주관을 바꾸어 출세간(出世間)의 불법(佛法)을 배우도록 하는 수행 방법이다.   

四念處1 신념처(身念處)는 몸은 부정하다고 관하고,

四念處2 수념처(受念處)는 수(受)가 고통이라는 것을 관하며,

四念處3 심념처(心念處)는 마음이란 무상(無常) 한 것임을 관하며,

四念處4 법염처(法念處)는 모든 법이 무아(無我)라는 것을 관하는 것.     


4 정근(四正勤) : 모든 악을 끊고 선(善)을 키우기 위해서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율의단(律儀斷):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을 끊기 위하여 힘쓰는 것.

단단(斷斷): 이미 생긴 악을 끊기 위해서 힘쓰는 것.

수호단(隨護斷):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을 나타내기 위하여 힘쓰는 것으로서 즉, 부처님의 정도(正道)를 보호하여 악법(惡法)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선이 생기도록 힘쓰는 것.

수단(修斷): 이미 생긴 선을 잘 키우는 것을 말한다.     


5(五根) : 불법(佛法)으로 도(道)의 뿌리를 깊이 내려 세속법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五根1 신근(信根): 신념이 도법에 굳게 뿌리를 내리는 것.

五根2 정진근(精進根): 정진함에 있어서 물러섬이 없는 것.

五根3 염근(念根): 불법을 항상 생각하는 데 뿌리를 내리는 것.

五根4 정근(定根): 선정에 뿌리를 내리는 것.

五根5 혜근(慧根): 불법의 진리를 여실히 아는 올바른 지혜를 뿌리내리게 하는 것을 말한다.     


7 각지(七覺支) :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며,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일곱 가지의 수행 방법을 말한다.     

七覺支1 택법각지(擇法覺支): 진실된 것을 선택하고 거짓된 것을 버리는 것.

七覺支2 정진각지(精進覺支): 불법 수행에 일심(一心)으로 정진하는 것.

七覺支3 희각지(喜覺支):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기쁨.

七覺支4 경안각지(輕安覺支): 몸과 마음을 가볍고 쾌적하게 하는 것.

七覺支5 사각지(捨覺支): 온갖 집착을 버리는 것.

七覺支6 정각지(定覺支): 마음을 집중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

七覺支7 염각지(念覺支): 정혜(定慧)를 잊지 않는 것이다.     


 중간 부분에는 8면을 빙 둘러 팔정도(八正道)를 새겨놓았는데 이는 중생의 고통의 원인인 탐(貪), 진(瞋), 치(痴)를 없애고 해탈(解脫)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 실천하고 수행해야 하는 8가지 방법이다.     


① 정견(正見) : 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유(正思惟) : 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 : 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 : 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 : 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⑥ 정근(正勤) : 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 : 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正定) : 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     


통도사 37 조도품탑


통도사(通度寺세존비각(世尊碑閣)

 통도사 세존비각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셔 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불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크고 작은 2개의 함 안에 보관하였고 그 후 한 개는 통도사 금강계단에 봉안하였고, 또 다른 하나는 태백산(太白山) 갈반사(現 정암사)에 봉안되었음을 새긴 비석이다.     


 자장율사는 화엄불교의 진수를 얻고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믿던 청량산으로 들어가서 문수보살에게 지극정성으로 예배했다. 그런 정성 끝에 꿈속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자장율사에게,     


“이 세상 만물의 바탕은 본디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알라. 이처럼 진리의 본성을 이해한다면 곧 밝고 밝은 진리의 몸체를 보리라" 그러면서 더불어 가사 1벌과 사리 1백과 부처님의 머리, 손, 발가락뼈, 나뭇잎에 쓴 경전 등을 주며 말했다.     


“너희 나라에 신령스러운 독수리가 깃든 산(영축산) 아래 독룡이 사는 연못이 있다.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아 이들을 봉안하라. 부처님의 진리가 오래 머물면 하늘의 용이 그곳을 보호할 것이다.” 이후 자장율사가 서해로 배를 타고 돌아오는 중 서해 용왕이 나타나 배례하며 말했다.     


“신라 황룡사의 호법용은 제 아들입니다. 나라의 남쪽 강 언덕에 절을 짓고 탑을 봉안해 주시면 저는 서해 용왕과 함께 하루 세 번씩 나아가서 가르침을 듣고 계속 부처님을 옹호하겠습니다."     


 이렇게 문수보살과 서해 용왕의 계시를 받고 돌아와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쌓아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의발을 모셔두고 이후 스님으로 계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이곳 통도사의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만 스님으로 인가를 받았다.      


 현재의 세존비각은 조선 숙종 때인 1706년 계파대사가 금강계단을 새롭게 중수하고 그 불사리의 내력과 임진왜란 이후의 역사를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고 비각이다.     


7. 통도사의 주요 공간 – 상로전(上爐殿)     


통도사 대웅전(大雄殿), 금강계단(金剛戒壇), 대방광전(大方廣殿), 적멸보궁(寂滅寶宮)     

 통도사 대웅전은 보통의 사찰 대웅전과 다르게 건물의 이름이 4개이다. 먼저 동쪽은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불전이라는 의미의 ‘대웅전(大雄殿)’이고, 서쪽은 영원한 진리와 우주의 본체를 상징하는 법신불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의미의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은 절대 깨지지 않는 금강석처럼 지켜야 할 계를 받는 단(壇)이라는 뜻의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은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의미의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북쪽 벽면을 유리로 만들어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불상 대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의 사리탑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전을 ‘보궁형 불전’이라 하고, 예배 대상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일 경우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부른다.     


  통도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은 그 형태가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다. 대웅전의 형태를 사방으로 개방이 되어 정면이 따로 없는 듯하다. 정면이라 할 수 있는 남쪽을 포함해 동쪽과 서쪽 3면에 모두 합각면을 두었다. 팔작지붕에서 합각면은 측면을 의미하는데 이 대웅전은 3면 모두에 정면과 측면의 구분을 없앤 것인데, 이는 곧 3면 모두 정면이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전당인 대웅전에 들어올 때는 어느 방향에서나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구현하였다. 그래서 대웅전은 지붕이 남쪽을 향해 T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남쪽 면이 3칸으로, 각각 5칸인 동, 서쪽보다 더 좁다.     


 대웅전은 이처럼 특이한 구조뿐만 아니라, 이 건물 사방에 편액이 걸려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네 개의 편액 중 ‘금강계단’ ‘대방광전’ ‘대웅전’이 흥선대원군의 글씨다. ‘금강계단’과 ‘대방광전’에는 석파 이하응의 낙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대웅전’은 그런 표시가 없으나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전하고 있다. 대원군에 봉해진 1863년 이후에 쓴 글씨로 전하는 ‘금강계단’은 특히 당시 왕인 고종의 아버지가 쓴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금강과 같이 굳건한 계율이 수여되는 곳이어서 그런지 글씨 부분에는 금칠을 했다. 금강계단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굳건한 필체의 반듯한 해서체로 썼다. 나뭇잎 모양의 두인(頭印)도 눈길을 끈다. ‘대방광전’은 검은색 바탕에 글씨는 흰색으로 되어 있다. 금강계단보다 좀 더 부드러운 필체를 보여주고 있다.     


 계단(戒壇)이란, 우리가 생각하고 매일 이용하는 층계, 계단이 아니라 불교에서 수계(受戒) 의식을 행하는 장소를 말한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자장율사가 수계를 목적으로 조성하였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을 중심으로 계단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이곳에서 계를 받는다는 것은 석가모니의 명으로 계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강계단은 고려 우왕 5년 월송대사, 조선 선조 30년 의영대사에 의해 6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지난 1911년 구하선사가 7번째 중건을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 사리와 가사를 덮은 석종이 개봉된 사실이 있는데 당시 고려의 관리가 계단의 돌 뚜껑을 들어내고 사리를 들여다보니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사리를 보관한 석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으며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 뒤로는 감히 돌 뚜껑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이 계단을 파괴하고 사리와 영골을 탈취했으나 포로로 잡힌 백옥거사가 회수해 도망쳐 왔으며 그로부터 11년 뒤인 선조 36년(1603년) 사명대사 유정은 왜적의 침탈을 염려해 사리함을 두 개로 나누어 은사인 금강산 서산대사 휴정에게 보냈다. 휴정 스님은 금강산도 안전하지 못하다며 통도사 계단을 수리해 사리를 다시 봉안하게 하고 다른 한 개의 함은 태백산 갈반사(오늘날 정암사)에 봉안케 했다.     


 대웅전 옆에는 구룡지(九龍池)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창건 당시 자장율사가 연못을 메우고 계단을 쌓고자 할 때 연못 속에는 아홉 마리의 악한 용이 살고 있었다. 자장율사가 설법으로 교화시키니 그중 다섯 마리는 통도사 앞산 넘어 오룡골로, 세 마리는 울산 삼동골로 도망갔다. 나머지 한 마리는 눈이 멀어 떠나지 못하고 사찰에 남아서 도량을 지키고자 간청했다. 자장율사가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머물도록 했으니, 그 연못이 구룡지다.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고 깊이도 한 길이 채 안 되는 조그마한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통도사에선 매년 단오에 구룡지 옆에서 용왕 대제를 지내고 있다.     


통도사의 3면, 대방광전, 금강계단, 대웅전


통도사(通度寺응진전(應眞殿)     

 수도승의 신앙 형태를 나타내는 사찰의 당우가 응진전(應眞殿) 석가모니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번뇌를 멸하고 세간에서 교법을 수호하는 16 나한, 오백나한을 모시는 법당이다. 보통 석가모니불이 주불이 되고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모신다. 그리고 그 주위에 16 나한상을, 양 끝에는 범천과 제석천을 함께 봉안하는 경우가 흔하다. 삼세불을 모시는 경우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을 봉안한다.     


 응진전이라는 이름은 나한(羅漢)에서 나온 것이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수행을 마치고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이들로, 산스크리트어 ‘아라하트’를 음역한 것이다.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수행이 있다고 해서 응공(應供),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친다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에 나한을 모신 건물을 응진전이라 한 것이다. 큰 영험을 가진 나한들은 일찍부터 민간에서 신봉되어 나한신앙으로 발달하였으며, 별도로 전각을 지어 봉안하였다.    

 

보통 나한을 몇 명 모셨느냐에 따라 건물의 명칭이 달라지는데 응진전이라고 할 때는 16명의 나한을 모신 경우이며, 5백 나한을 모시면 5백 나한전이라고 한다. 통도사의 응진전은 삼세불을 봉안하고 그 주변에 16 나한상이 있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미륵보살, 오른쪽에는 제화갈라보살을 같이 모시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지금 시대의 부처이고, 미륵불은 석가여래 다음 성불할 미래불이며, 제화갈라보살은 석가여래 이전에 성불한 과거불이어서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삼세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이러한 불상 배치는 부처가 시방(十方) 삼세(三世)에 가득하다는 이야기인데, 곧 부처는 예나 지금이나 미래를 막론하고 우주의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는 대웅전의 삼신불(三身佛)과는 다른 의미인데, 대웅전의 삼신불은 불교의 가르침을 세 가지 부처로 표현하고 있는데 비로자나불을 통해 불교의 진리를 설명하고, 노사나불을 통해 가르침이 면면히 이어짐을 설명하며, 석가모니불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와 있는 대표적인 부처를 표현하고 있다.     


 통도사의 응진전에는 석가모니 좌우로 8명씩 16 나한상이 모셔져 있는데, 우리가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1, 3, 5, 7, 9, 11, 13, 15 존자가 모셔져 있고, 15 존자의 옆에는 제석천이 앉아 있고 그 아래 바닥에는 사자(使者)가 서 있다. 왼쪽으로는 2, 4, 6, 8, 10, 12, 14, 16 존자가 모셔져 있고 범천(梵天)이 앉아 있고 그 아래에는 판관(判官)이 서 있다. 또한 삼세불의 뒤로는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고, 나한상의 뒤에도 16 나한도가 걸려 있다.      


 통도사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지붕을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비교적 간결하다. 그러나 공포의 구조가 주심포 이외의 양식을 쓰고 있어 절충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정면이 3칸이므로 4개의 기둥이 있는데 이 기둥에 적혀 있는 주련은 다음과 같다.     


有山有水乘龍虎 (유산유수승용호) 산수간에 용과 호랑이를 타고

無是無非伴竹松 (무시무비반죽송) 시비 없이 송죽을 벗하네.

曾昔靈山蒙授記 (증석령산몽수기) 일찍이 영산회상에 수기를 받은 분들이

而今會坐一堂中 (이금회좌일당중) 지금 한 집안에 모여 있네.     


이 글귀를 한마디로 말하면, 석가모니가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영산회상에서 석가모니로부터 수기를 받은 분들이 여기에 모여 있다는 내용이다.     


통도사(通度寺)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통도사 일주문 편액인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 는 흥선대원군의 글씨다. 역시 흥선대원군이 쓴 ‘금강계단(金剛戒壇)’과 같이 금색 글씨이고, 글씨체도 굳건한 해서체로 비슷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대법회 등 행사 때 대중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사용된 ‘원통방(圓通房)’ 편액도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원통’의 의미는 ‘이근원통(耳根圓通: 청각에 집중해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통도사에는 이처럼 흥선대원군의 글씨 편액이 많이 남아있다.      


 대원군은 추사(秋史) 김정희에게 서화를 배웠고,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그의 난초는 ‘석파란(石坡蘭)’으로 불리며 운미 민영익의 ‘운미란(芸楣蘭)’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다.     


통도사(通度寺)와 추사 김정희     

 통도사에는 추사의 글씨 편액도 적지 않게 걸려 있다. 그 대표적 작품으로 주지실의 ‘탑광실(塔光室)’과 ‘노곡소축(老谷小築)’ 편액을 꼽을 수 있다. ‘소축(小築)’은 ‘소실(小室)’과 같은 의미다. 두 작품 모두 추사의 행서 중 보기 드문, 강건한 필력이 느껴지는 글씨다. ‘산호벽수(珊瑚碧樹)’라는 편액도 그의 글씨다. 어느 사대부 집이나 사찰이 융성하라는 의미로 써주는 글귀로, ‘과칠십(果七十)’이라는 낙관 글씨로 보아 추사의 과천 시절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통도사성보박물관에 있는 ‘성담상게(聖覃像偈)’ 현판도 추사의 글씨로, 선운사의 백파대사비(白坡大師碑)에 버금가는 추사의 대표적 행서 글씨다. 이 글의 주인공 성담(聖覃) 스님은 통도사에서 이름을 떨친 스님이다.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 등 사대부들과 깊은 교분을 가졌고, 추사가 성담 스님 진영에 써준 이 글은 70세에 썼다는 낙관글씨 ‘阮堂老人題 時年七十’이 있다.     


통도사(通度寺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사찰에서 저승의 유명계를 상징하는 불교건축물로 유명계주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불교에서의 구원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 도량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 시왕은 지옥에서 죽은 자의 죄의 경중을 가리는 10명의 왕이며,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지옥의 왕이라고 생각하는 염라대왕도 이 10명의 왕 가운데 다섯 번째 왕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뒤에는 100일, 소상(小祥), 대상(大祥)까지 열 번에 걸쳐 각 왕에게 살아 있을 때 지은 선악의 업을 심판받게 된다고 하여 죽은 사람의 명복을 위하여 절에서 재(齋)를 모시게 된다. 이때 명부전에서 재를 모시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자비와 구원을 받아 시왕의 인도 아래 저승의 길을 벗어나 좋은 곳에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는 데 있다. 명부전에 봉안하는 후불탱화는 소재회상도(消災會上圖)로, 지장보살 뒤에는 지장탱화를 봉안하고 시왕 뒤편에는 명부시왕탱화를 봉안한다.   

  

 통도사 명부전은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짓고 1756년에 불에 탄 것을 영조 36년(1760) 춘파대사가 다시 지었다. 고종 24년(1887) 화재가 발생하여 다음 해인 1888년 호성대사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명부전중수기』에 의하면 1891년이 되어서야 현재의 명부전이 완성되었다고 전한다. 법당 내부에는 지옥을 관장하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시왕도를 모셔 놓았고 건물의 내벽과 외벽에는 수궁도와 삼고초려도 등 조선 후기 유행한 소설류의 내용을 표현한 다양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통도사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고, 정면 기둥의 주련은 다음과 같다.     


慈仁積善誓救衆生(자인적선서구중생) 자비의 인연으로 적선하고 중생구제를 서원하니

常揮慧鎰斷滅罪根(상휘혜일단멸죄근) 항상 지혜의 칼로 죄의 뿌리를 잘라버리고

手中金錫振開玉門(수중금석진개옥문) 손안에 쇠지팡이는 지옥문을 열어주네

掌上明珠光攝大天(장상명주광섭대천) 손바닥 위에 맑은 구슬 대천세계를 비추고

倘切歸依奚遲感應(당절귀의해지감응) 간절히 귀의하면 어찌 감응이 더디리오

業鏡臺前十殿調律(업경대전십전조율) 업경대 앞에서는 시왕(十王)이 법률로 다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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