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은 조선의 제6대 국왕으로 만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 비운의 소년 군주라고도 불린다.
세종의 적장손이자 문종과 현덕왕후의 적장남으로 태어나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세종이 사망한 뒤 문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현덕왕후가 산후 후유증으로 죽었고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도 단종이 어렸을 때 사망했으며 마지막 남은 직계 존속인 부왕 문종마저 지병의 악화로 승하하면서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혈혈단신의 어린 나이(12세)로 보위에 올라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 고명대신들의 보좌를 받게 된다.
즉위한 뒤 1년 후 숙부 수양대군이 반란(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 반강제적으로 실권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왕위를 빼앗겼다. 상왕 재위기에 일어난 단종복위운동의 여파로 자신의 권력에 위협을 느낀 숙부 세조에 의해 폐위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하고 17살이 되던 해에 끝내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조선 27명의 임금을 거치며 적장자 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아무 탈 없이 왕위에 오른 임금은 오직 7명(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뿐이다. 그중 단종은 유일하게 적장자 출신 왕세자의 아들로 태어난 적장자, 즉 적장손 출신 국왕으로,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 중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국왕이다.
아버지 문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장남이었고, 단종 본인 또한 문종이 세자 시절에 본 유일한 아들이다. 단종이 태어난 세종 23년(1441)에는 아버지인 문종이 세자였고, 할아버지인 세종이 왕이었다. 또한 할머니인 소헌왕후는 중전이었으며 어머니인 현덕왕후 또한 세자의 정실인 세자빈이었다. 따라서 단종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원손(1441~1448)으로 시작하여 이후로 세손(1448~1450) - 세자(1450~1452) - 왕(1452~1455)을 모두 차례대로 거친 조선 유일의 정통성 끝판왕 국왕이다.
단종 외에도 세손 시절을 거친 왕이 몇 명 있기는 한데, 현종의 경우 원손 – 세손 단계를 밟긴 했지만 아버지인 효종이 아직 봉림대군일 때 태어났으며, 봉림대군의 형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엄연히 있기에 인조의 적장손도 아니었다.
정조나 헌종의 경우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효명세자가 먼저 죽어 '원손 → 세손 → 바로 왕'의 단계를 밟았다. 게다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의 정실부인이 아닌 후궁 영빈 이 씨의 몸에서 난 서자였고 자신도 사도세자의 차남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도세자가 역적까진 아니어도 반쯤 죄인으로 죽은 상황이었다. 헌종 역시 아버지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죽어버려 세자의 단계를 밟지 못하고 8살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었다. 거기다가 정조나 헌종은 아버지(사도세자)나 할아버지(영조, 순조)가 서출이라는 아쉬움이 있어서 단종과는 처첩제 기반의 신분제 측면에서는 레벨이 다르다. 장자가 일찍 죽는 경우야 흔하던 시대이니 장자가 아닌 것은 문제가 없으나, 적자가 아닌 것은 보이지 않는 미세한 차별 대우가 있었다.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은 장자는 아니나 어머니가 왕비인 적자였고, 세종의 아버지 태종도 장자는 아니나 역시 적자였다.
단종과 마찬가지로 정통성을 지닌 국왕이 숙종인데 숙종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현종이 세자가 아닌 왕이었기 때문에 원손 – 세손 시절이 없이 원자 - 왕세자 - 왕 단계를 거쳤다.
단종 1년(1453) 10월 10일 계유정난은 일어난다. 이날 단종의 보호자, 지지자 대부분이 살해당하거나 유배되면서 자신의 세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이다. 그 자리를 고스란히 차지한 수양대군의 세력은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후 수양에게 양위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하기 시작하였고, 단종 3년인 1455년,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밀려나고야 만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도 숙부 수양대군이 전권을 행사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는지 경복궁 자미당 난간을 보더니 서서 "할바마마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탄식하자 단종을 따르던 시종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자미당에서 할아버지 세종을 떠올린 이유는, 세종이 말년에 자미당에서 거처했었기 때문이다.
2년 후인 세조 2년(1456),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난다. 단종은 복위를 꾀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성삼문에게 칼을 하사하며 지지를 표명했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국문장에서 성삼문이 자신에게 단종이 칼을 주었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단종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금성대군 등 계유정난의 화를 피해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지지자들도 이 일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상왕 단종은 팔자에도 없었던 군호인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머나먼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다. 두물머리를 비롯한 단종의 영월행 유배길 곳곳에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온통 눈물바다였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는 영월 장릉(영월)에 꾸며진 단종기념관 등에도 잘 전시되어 있다. 영월로의 압송 임무를 수행한 금부도사 왕방연이 이때의 심정을 남긴 시조도 유명하다.
귀양지인 영월 청령포는 영월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육지의 섬'인 곳이다. 남한강의 지류인 영월 서강이 삼면을 둘러싸고, 유일한 육지에 접한 남쪽은 가파른 절벽이어서 도주가 거의 불가능한 곳이다. 지금도 청령포에 들어가려면 나루터에서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다.
세조 3년(1457)에 금성대군이 사사(賜死)되고 장인 송현수의 교형(絞刑)이 결정되자, 단종은 나중에 영월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사사 역시 이때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고달프고 서러운 유배 생활의 최후였다. 흔히 영월 청령포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청령포에는 몇 달 머물지 않았고, 여름이라 홍수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곧 영월 관아 내의 객사로 옮겨졌으며 단종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는다.
단종이 죽은 뒤에는 그 시신을 영월의 호방(지방 아전)인 엄흥도(嚴興道)가 남몰래 거두어 매장했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영월부사가 부임하는 날에 급사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때문에 영월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영월은 폐읍이 될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에 한 대담한 사람이 영월부사를 자청하여 부임하였다.
부임 첫날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더니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소년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신임 부사가 곧 단종임을 직감하고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니 단종은 "내가 죽을 때 목을 조른 활줄이 아직 남아 있어 목이 갑갑해 그것을 풀어달라고 하려고 왔는데 지금까지의 영월 부사들은 겁이 많아서 나를 보자마자 급사했다"는 것이다.
신임 영월 부사가 단종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를 묻자 단종은 "엄흥도 호장이 알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 날 영월 부사가 엄흥도 호장을 불러 전날의 이야기를 해주자 엄흥도는 자신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밝힌다. 단종의 무덤을 파보니 과연 활줄이 목에 얽혀 있어 활줄을 푼 뒤 다시 묻고 정중히 제사 올리고 나니, 그 이후 영월 부사가 급사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엄흥도와 그의 아들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할 곳을 찾아 헤맸으나 눈보라가 내리치는 엄중설한이라 땅이 모두 얼어붙어 무덤을 파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어디선가 노루 1마리가 홀연히 나타나 눈밭에 앉아 잠시 쉬고 가니 그 눈 녹은 자리를 파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날 복위된 단종의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조정에서 지관을 보내어 장릉의 지세를 살폈는데 실제로 가본 지관들은 엄흥도가 임시방편으로 모셨던 그 자리가 이미 천하길지라는 것을 알고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왕릉의 격식에 맞추어 고쳤다고 한다.
또한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몰래 묻을 때 자신의 노모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관과 수의를 썼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후환을 두려워해 그를 말리자 "옳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괜찮다"며 강행하고야 만다. 매장을 마친 후 엄흥도는 그 길로 가족들과 함께 영월을 떠나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엄흥도의 일가족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던 주변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아무도 관에 고하지 않았으며 현지 주민들은 단종이 묻힌 무덤을 묘가 아닌 왕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엄흥도는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 이듬해 공조좌랑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 공조참의, 공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때는 장릉배식록에 포함되었고 순조 33년(1833년)에는 공조판서로 추증되었다. 6부 중 공조로 추증되었던 것은 왕릉의 조영(건설)을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였으며 엄흥도의 일을 왕릉 조성으로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고종 14년(1877년)에는 '충의공'이란 시호와 함께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란 정승급 벼슬이 추증된다. 엄흥도가 원래 지방의 미관 말직이었던 점에 비추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낸 그의 충의를 후세가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 만하다. 세조가 얼마나 살벌하게 집권했는지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신과 일가족의 목숨을 걸고 한 일이다.
한편 생육신 중 하나였던 조려가 단종의 죽음을 전해 듣고 영월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했다는 말도 있다. 이때 강물이 불어서 영월로 건너가지 못한 조려가 통곡을 하자 호랑이가 나타나서 등에 태워 강을 건넜다는 설화도 존재한다.
생전에 산군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에 종묘 신위에서도 빠져있었고 왕실 족보에서도 빠져있었다. 그러나 숙종이 추증과 복위를 승인함에 따라 뒤늦게 공식적으로 종묘 신위에 포함되어 역대 선대왕의 신위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단종 신위는 종묘 정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녕전에 모셔진 유일한 조선 국왕의 신위이다.
장릉은 조선 6대 왕 단종의 능으로 단종이 세조 3년(1457) 노산군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숙종 24년(1698) 단종대왕으로 복위되면서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영월 장릉의 진입공간에는 재실 외에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있다.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묘를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재실 옆에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영월군수로 부임하는 군수가 7개월 동안에 3명이 별세하자 영월군수로 가기만 하면 죽는 자리로 알려져 부임하기를 꺼렸으나 낙촌 박충원이 자청하여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하였다. 박충원은 영월군수로 부임한 첫날밤에 단종을 만나는 현몽에 의해 가시넝쿨에 가려진 묘를 찾아 봉축하고 전물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 하였다.
박충원 낙촌비각
또한 단종의 능침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가 묻혀있는 남양주 사릉에서 재배된 소나무를 영월 장릉으로 옮겨 심었다. 어린 나이에 생이별을 하고 평생을 만나지 못하고 살았는데 죽어서도 함께 하지 못한 이 두 부부의 애석한 사연을 그나마 위로해주고 있다.
남양주 사릉에서 옮겨온 소나무, 죽어서도 함께 하지 못한 이 두 부부의 애석한 사연을 그나마 위로해주고 있다.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한 번 꺾여있다. 능침에는 추존 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도 한 쌍만 조성하였다. 그 밖에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석마 등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으며, 무석인은 생략하였다.
2. 영월 장릉의 부속건물
장판옥(藏版屋)
이 건물은 정조 15년(1791)에 건립된 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자군노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이들은 살아 있을 때도 그리고 죽어서도 단종의 곁에서 단종을 호위하고 보필하고 있다.
영월 장릉의 장판옥
배식단(配食壇)
이곳은 장판옥에 모셔져 있는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위, 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영월 장릉의 배식단
엄흥도 정려각(旌閭閣)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고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조 33년(1833)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