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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Apr 08. 2024

33.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王陵) -김포 장릉

1.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장릉(章陵)』      

 원종은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의 아들이자, 16대 왕인 인조의 아버지이며 15대 왕인 광해군과는 이복형제이다. 선조와 인빈 김 씨의 셋째 아들로 선조 13년(1580) 경복궁 별전에서 태어났고, 선조 20년(1587)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다. 정원군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선조를 모시면서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의연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모두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전란 한가운데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원군(원종)을 영변으로 데려가 왜적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때 정원군이 영변에 이르러 울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온 것은 내가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임금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조는 이를 전해 듣고 가상히 여겨 정원군을 다시 불러왔으며, 그 뒤로 정원군은 선조 곁을 떠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모셨다고 한다.     


 왜란 뒤에 호성공신 2등에 올랐다. 정원군은 광해군 12년(1620)에 사망했지만, 3년 뒤 장남인 능양군(인조)이 반정으로 즉위하면서 정원군도 자동으로 '군'에서 '대원군'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대원군들과 달리 인조가 추존에 성공함으로써 ‘원종’이란 묘호로 통한다.     


 원종의 말년 삶은 불우했는데 총명했던 막내아들 능창군은 역모에 몰려 귀양을 살다 자결을 했고 아들이 터 잡고 살던 서촌 기슭의 땅은 광해군에게 빼앗겨 경희궁 터가 됐다. 원종은 회한에 휩싸여 술만 마시다 마흔도 안 돼 화병으로 숨졌다. 비참한 처지를 한탄한 글귀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先王)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광해군일기》 147권, 광해군 11년 "정원군의 졸기"     


 동생과 부친의 원통한 최후를 지켜본 둘째 아들 능양군(인조)은 마음속 칼을 갈았다. 다른 보수파 공신들과 능동적으로 반정에 동참해 왕이 된다.     


 반정으로 왕이 된 아들 인조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는 데 몰두했다. 서자이고 왕세자 출신도 아닌데 어떻게 사후에 임금으로 추존하느냐는 신료들과 정면 대결하면서 10년 가까이 정쟁을 벌였다. 후대 역사학계는 ‘원종 추숭 논쟁’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인조는 의지를 관철시킨다. 원종이라는 임금의 묘호를 내렸고, 무덤도 왕릉인 장릉으로 승격시켰고, 종묘 사당에 어머니 인헌왕후와 함께 군주로 배향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원종이 왕으로 추존된 이유는 인조의 정통성에 있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정통성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즉위 초반부터 생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선대 왕 선조, 추존왕 원종, 그 아들인 자신으로 이어지는 계통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원종 추존을 둘러싸고 찬반의견이 팽팽하게 맞섰고 결국 인조 10년에 추존되었다.      


 요즘 뉴스에서 회자되고 있는 ‘왕릉 아파트’의 주인공 왕릉이 바로 김포 원종의 장릉이다. 생전에는 이복동생인 광해군의 눈치 보느라, 죽은 뒤 이제 좀 편히 쉬려 하니 아파트 눈치를 보느라 영 좌불안석(坐不安席)의 처지인 장릉이다.      


 인헌왕후 구 씨는 선조 11년(1578)에 태어나 선조 23년(1590)에 선조의 아들 정원군(원종)과 가례를 올려 연주군부인에 봉해졌다. 원종과의 사이에서는 3남(인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낳았다. 1623년에 첫째 아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연주부부인에 책봉되고 계운궁(啓運宮)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이후 인조 4년(1626) 경덕궁(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인조 10년(1632)에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장릉은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 씨의 능으로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 오른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비각 안에는 한 기의 표석이 있는데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세운 표석이다. 비각 옆에는 육경원(毓慶園, 인헌왕후의 추존 전 원의 이름)으로 있을 때 사용한 비석 받침돌이 장릉 근처에서 노출되어 발굴 후 전시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만이 둘러져 있는데, 이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기 전 흥경원을 조성할 때의 호석이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된 이후에 새로 설치한 석물이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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