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수컷의 영역
민병식
수년 간 나의 충성스러운 동료이자 부하였던 리모컨을 잃었다.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소파에 누워서 명령을 해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하루에 수십 번씩 명령을 내려도 싫어하는 기색없이 주인의 명령을 철썩같이 따르던 충성스러운 신하였으니 갑작스러운 부재에 상실감이 컸다. 그렇게 내 말을 잘듣던 리모컨이 TV를 따라 안방으로 투항을 한 것이다. 다시 리모컨을 찾아오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의 침대이면서 내 방이나 마찬가지인 소파만큼은 결단코 사수하기로했다. 덩치가 커서 사실 다른 곳에 가져다 놓을 수도 없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그 언제였던가. 소파에 누워있기만 한다고 가져다 버리겠다고 했을 때 나는 기를 쓰고 반대했다. 이것마저 뺏겨버리면 나의 영역은 완전히 소멸될 것이다. 소파마저 없다면 어떻게 나의 영역을 유지할 것인가. 누워서 책을 읽지도 못할 것이고 친구나 타인과 통화할 때도 편히 기댈 곳도 없을 것이며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할 공간도 없어질 것이다.
집에 방이 4개나 되건만 내 방은 없다. 나도 서재도 갖고 싶고, 생각할 공간도 갖고 싶고 어떨때는 그냥 하릴없이 빈둥거리다가 잠이 들거나 행여 잠못드는 날이면 휴대폰이라도 만지작 거려야할 공간이 필요한데 내 방은 커녕 혼신의 힘을 다해 지켜온 내 영역의 상징인 리모컨과 TV를 빼앗겨 버렸으니 소파마저 내어준다면 그나마 거실 한 귀퉁이에 있던 나의 왕국은 소멸될 것이기에 소파 사수를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해야했다. 아울러 수컷으로써의 전투력 상실일지도 모르는 위기감은 나를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좁은 공간이지만 내겐 표범의 광활한 초원만큼이나 중요한 곳이었다. 전투가 쉽지는 않았으나 결국 소파는 내 차지가 되었다. 처음부터 소파가 날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소파의 마음을 얻기위해 무한한 노력이 필요했다. 매일 깨끗한 천으로 닦아주면서 보살폈고, 계속 곁에 앉아서 나의 체취를 각인시켰으며, 소파가 가장 싫어하는 곳, 혼자 어찌할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밑바닥의 동전부터 과자부스러기, 머리카락, 먼지 뭉텅이까지 온갖 쓰레기 들을 수시로 청소하면서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얼마나 심하게 거부하던지 조금만 누워있어도 목이 아프고 등이 축축하도록 땀이 났다. 노골적으로 나를 밀어내어 민망하기도하고 부대끼기도 하여 포기할까도 생각했으나 이곳이 아니면 집안 어느 곳도 내가 갈 곳은 없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하여 얻었듯 한참동안의 정성들인 구애끝에 소파는 어느날부터 날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자 나의 진실한 사랑을 알아챘는지 예전의 리모컨 만큼이나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누우면 눕는대로, 발을 등받이에 올리면 올리는 대로 거절하는 법이 없다. 얼마전부터는 소파와 한 이불을 덮고 잔다. 등을 대고 누우면 내 몸에 딱 맞도록 자신을 맞춰주고 팔걸이로 내 목을 부드럽게 감싸 받쳐주며 등 밑에 쿠션도 폭을 넓혀 잠든 나를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지 해준다. 이제 소파는 나의 휴식처이며 잠자리이며 서재다. 비록 이제 리모컨은 없지만 내겐 더 든든하고 다정한 소파가 있다.
이쯤되면 욕심이난다. 소파에 누워 상상을한다. 거실바닥으로 몸을 굴려 일어서면 앞에 욕조가 있고, 벽난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자다가 일어나 한기가 돌면 그대로 욕조로 들어가 몸을 녹이고 개운한 기분으로 바로 벽난로 앞에 앉아 차 한 잔 하면 딱 좋겠는데, 그러다가 그 자리에서 꾸벅꾸벅 조는 것도 좋겠지 싶다. 상상의 나래 속에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어느덧 새벽이다. 창밖을 바라본다. 창문 가득 불빛과 함께 앞 동의 콘크리트 숲이 보인다. 출근하기엔 이른 시간, 아직은 어두컴컴하다. 따뜻한 커피를 준비해 다시 소파에 앉는다. 뜨거운 목 넘김으로 속을 데우며 앉아있자니 푹신푹신한 것이 아늑한 느낌이 최고다. 지구상 모든 동물들이 자신의 영역을 보존하기 위해 배설물로 표시를 하는 것처럼 나는 지금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오로지 나만을 위해 마련된 영역을 만끽하며 당당한 하루를 준비 중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빼앗기고 싶지 않은 금지선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내게 사소해 보일지라도 상대방에게는 무척 소중한 것, 그것을 서로 인정하고 배려할 때 존중과 이해의 마음이 효력을 발휘하여 삶도 세상도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영역은 누군가로부터 침범당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일 수도 있으나 다른 사람의 것도 소중히 여기자는 마음일 수도있다. 내 것만을 주장하고 내세우는 세상에서 상대의 것도 중요함을 헤아리는 마음이 다시 나의 소중한 것을 지켜주는 긍정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침, 쌀쌀한 기온 속에서도 소파는 어김없이 나를 데우고 있다.
사진 윤서인 및 위 배경사진 네이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