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은 다름 아닌 믿음의 영역이다. 믿음은 인간을 결단하게 만든다. 관조적으로 볼 때 세상은 무의미로 가득하고 한 사람의 생은 허무하다. 그 안에 놓인 인간은 확신할 수 없는 자유 안에서 삶의 가치를 획정해야 한다. 믿음은 이를 가능케 한다.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풍기는 특정한 행위를, 누가 뭐래도 굳이 해내야 하겠다는 결단의 과정에서 말이다. 여기서 인간의 의미가 탄생한다. 그렇기에 기분 탓은 중요하다. 우리가 만들어낸 의미를 체감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직장 동료는 "오리탕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고 말했다. 오리탕 중에서도 광주에서 먹는 오리탕은 어떤 음식도 따라올 수 없는 음식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서울 어느 유명 음식점에 가도 그보단 맛있는 오리탕을 만날 수 없었다면서, 어느 날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생각나 당장 광주까지 내려가 오리탕을 먹고 왔다고 했다.
돌아 생각해 보자면, 나도 같은 경험을 했다.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할 때였다. 일과를 마치고 나면 일주일에 세 번은 컵라면을 먹었다. 한 방에 둘러앉아 먹었던 컵라면이 그렇게 맛있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3주 정도 간격으로 집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은 진수성찬을 차려주셨고, 그 음식들을 먹고도 기숙사 컵라면이 생각나 물을 올렸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컵라면임에도 불구하고, 맛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 물론 컵라면과 달리, 광주 오리탕은 다른 비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 친구들도 집에 가서 컵라면을 먹었는데 이 맛이 아니더라며, 또 같이 둘러앉아 컵라면을 먹으며 말했다. 오리탕도 컵라면도 유달리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기분 탓이었을 테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맛도 달리 느끼는 존재가 인간이다.
'기분 탓'이라는 단어는 '기분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함'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탓은 덕분에 와 다르다. 그것이 향하고 있는 대상 때문에, 어떤 부정적인 상황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한동안 세상을 지배해 온 논리인 경제학은 언제나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합리적 인간을 전제했다. 물론 인간이 기분 탓에 행동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행동경제학이 그 아성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으나, 지향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든 비이성적 존재이든 그에 걸맞은 방법으로 합리적 결정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비합리적인 결정에는 '굳이'라는 꼬리표가 달린다. 맛있는 오리탕을 먹으려고 굳이 굳이 광주까지 내려가는 일도 그렇다. 편리는 그 굳이 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인간은 좀 더 편리한 삶을 위해 발전해 나간다. 그 발전의 당위는 어디까지나 효율적인 경제학적, 과학적 논리 위에서 기틀을 다진다. 합리적 결정을 하기 위함이다. 끝내는 광주 오리탕과 서울 오리탕의 맛 차이를 숫자로 표현해 주는 기술이 개발된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무리일까.
우리는 언제까지 기분 탓을 할 수 있을까. chatGPT의 출시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고, AI는 인터넷의 발명에 비견할만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한다. AI가 그린 그림은 대회에서 수상을 하고, AI가 쓴 인간을 위한 자기계발서가 출간됐다. 광주에서 오리탕을 먹는 일은 물론이고, 조만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책을 쓰는 것도 '합리적 관점'에서 '굳이 하는 일'에 포함될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굳이 요리하는 걸 좋아한다. 메뉴를 정하고, 하나씩 재료를 구매하고, 단계별로 맛을 끌어내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흘러간다. 막상 밖에서 사 먹거나 배달을 시키는 것보다 돈이 더 많이 들지만, 공들여 조리한 음식을 누군가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게 좋다. 그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내겐 기쁨이다. 그렇게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 어느 때보다도 맛이 좋다. 말마따나 기분 탓일 거다.
우리는 무얼 위해 발전하는 걸까. 굳이 하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