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구구절절하게 정의하자면, 국가 권력을 획득해 다양한 의견을 가진 국민들의 이해를 조율해 국민이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의 질서와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행위이다.
작금의 가장 뜨거운 정치적 이슈는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 문제다. 개인적으로 오염수를 방류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입장이 있었기에, 이미 오염수가 방류되고 있는 지금 이런 글을 적는 심정은 꽤나 씁쓸하다. 방류는 이미 시작됐고, 쉽게 멈출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이미 늦어버렸을지라도 그동안 아무런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자조를 뒤늦게나마 존중하는 차원에서 몇 글자 적어둬야겠다 다짐했다.
과학이라는 무책임
정부는 과학적으로 안전하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과학만이 국민을 지킬 수 있다며 호언장담하는 중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과학자라도 특정한 과학 지식에 대해 절대불변할 것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 최소한 과학을 응용한 과학 기술에만 천착한 학자가 아니라면, '과학은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이라도 고민해 본 학자라면 그렇게 답하긴 어려울 것이다. 과학은 '실험과 검증'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다른 학문에 비해 객관에 근접한 학문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천동설이 절대적 진리로 여겨지던 시절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던 갈릴레이가 사형에 처할 위기에 처했던 것처럼, 어떤 시대에는 터무니없는 지식이 절대적 진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물론 천동설이 주류 지식이던 사회와 지금을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면 가까운 역사를 살펴보자. 석면 가루는 1987년에 들어서야 WHO에서 1급 발암물질로 지정됐다.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은 물론, 또 기준치가 마련되지 않았거나 안전성 검증을 소홀히 하여 심지어는 87년 이후 지어진 건물에도 석면이 포함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은 어떨까? 시간이 흘러 또 어떤 물질이 발암물질로 판명되어 안전에 대한 이슈가 뒤늦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모습. 상상하기 어려운 미래가 아니다. 라돈 침대, 가습기 살균제, 전자 담배까지. 이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현상이다.
과학이 그렇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절대적 진리라 땅땅 못을 박아두는 것이 아닌,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보편적 합의에 불과하다. 비전공자의 과학에 대한 개인적 입장이 아닌,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수식어가 달린 책들 중 하나인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과학은 진리가 아닌 당대 사회의 믿음에 가깝다. 과학지식은 보편성을 획득한 가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새로운 관측 기술이 등장하거나 과학 이론에 대한 사회적 해석이 재구조화됨에 따라서 과학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과학적이니 안심하란 말은, 백번 양보해 봤자 당분간만 유의미하다. 물론 개중에는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절대적인 진리에 근접한 보편적 합의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부분은 확신할 수 없는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100%의 확률로 예측할 수 있는 과학자는 어디에도 없다. 과학을 믿으라는 말은 무책임한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는 없다
앞서 설명했듯 정치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합의하고 결정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정치는 가치의 영역이어야 한다. 가치관이란 스스로 결정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이다. 그렇게 보자면 작금의 상황에서 정치는 어디에도 없다.
오염수를 방류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과학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효율적'으로 오염수를 처리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과학과 경제 논리가 결합해 무언갈 결정하면, 그것에 반하는 의견을 내는 자는 무지몽매한 대중이 된다. 안전하다는데, 효율적이라는데 네가 뭐라고 반대를 하냐는 식이다. 정치가 과학화되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기준, 즉 가치관은 무의미해진다. 과학적으로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것이라면, 따라오는 질문은 "할 수 있는데 왜 안 해?"가 되어 버린다. 오염수 방류는 물론 지금의 우리 세상이 발전하는 방식 대부분이 그러하다.
여론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불안과 걱정을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부의 과학적 검증을 믿는 사람들. 두 입장의 논쟁의 중심에는 '팩트 체크'가 있다. 팩트 체크에 천착하다 보면 정작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할 가치들은 뒷전으로 밀린다. 예컨대 '인간의 기준에서 무해하다는 과학적 검증을 차치하고서라도, 더 이상 인간이 자연을 제 멋대로 활용하는 것이 정당한가' '인간은 원자력 없이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 그야말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보다 인간적인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우리는 과학적 안전성을 검증하기에 앞서 논의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선 취급대상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어떤 정치인들도 이 물음에 답하려 하지 않는다. '먹어도 안전한 수산물'을 증명하기에만 급급하다.
가치를 논의할 수 있는 공론장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이상적 공론장'은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개념이다. 절차에 의해 조정되고 합의될 수 없는 이해관계란 없으며, 그러한 모든 입장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공론장 위로 올라와 논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말 그대로 이상적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비판을 받는 개념이긴 하지만, 흔들릴지언정 민주주의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의가 있는 개념이다. 이상은 현실에 없기 때문에 이상으로 남는 것이지만, 적어도 닿기 위한 노력은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이니 안심하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정부는 '이상적 공론장'에 정확히 반하는 행보를 보이는 꼴이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여겨지는(앞서 말했듯 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과학은 일종의 '가불기'로 작용한다. 딴 소리를 할 기회조차 앗아가는 것이다. 다른 입장을 가진 국민은 비과학적 괴담에 휩쓸린 무지몽매한 대중이 되어버릴 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가치의 영역은 과학적인 주장과 동등한 입장에서 공론장에 오를 수 없다. 비단 현 정부를 겨냥한 비판만은 아니다. 정치는 그리고 정부는 이렇듯 중대한 결정을 전후로 언제나 과학 뒤에 숨어왔다.
실제로 과학적으로 안전한 것인지, 혹은 위험한 것인지 나는 마음이 가는 쪽인 있지만 확신할 수 없다. 10년 동안 안전한 줄 알았지만, 10년 뒤에 어떤 위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과학적 안정성의 영역에 대한 소모적인 논의는 우리를 가치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 세상, 정치는 없고 과학만 있는 세상으로 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라면 무엇이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일까? 정치는 가치의 영역이고, 가치는 인간다운 것에 대한 물음이다. 과학은 이러한 가치의 영역에 대한 충분한 논의 뒤에 우리가 그 가치에 닿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다. 가치에 앞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선택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과학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충분히 이해타산을 검증한 영역일지라도,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겠다 다짐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