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잘입는 사람?
1996년 방영한 드라마 '여자 셋 남자 셋'에 나오는 신동엽 씨의 패션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극 중 신동엽 씨는 요즘 유행하는 패션 스타일에 견주어 보아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센스 있는 코디를 갖춰 입었다. 신동엽 씨의 착장은 여느 대학생이 즐겨 입을법한 클래식한 코디이다. 클래식이란 비교적 '고정 불변하는 정답'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25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멋스럽고 세련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는 내가 원하는 컨셉을 상상하고, 적합한 옷을 소비하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옷을 구매할 때마다 처하는 아이러니가 있는데, '이쁘다'와 '이뻐 보인다' 사이의 고민이다. 옷을 구매하기 전에 꼭 해당 브랜드와 모델을 유튜브에 검색해보곤 한다. 올해의 패션 트렌드에 맞는 옷인지, 혹 트렌드에 맞지 않더라도 구매할 가치가 있는 옷인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저명한 패션 유튜버들의 평가는 내 선택에 꽤나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고민한 후에 옷을 구매하고 나면, 옷이 맘에 들지 않아 후회할 일은 잘 없는 편이다. 그러나 두 가지 찝찝한 마음이 남는다. '올해가 지나도 이 옷이 이뻐 보일까?', '너무 유행만 좇다 보니 내 취향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우선 옷이 옷 자체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럼에도 어느 정도의 올곧은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 믿고 살아왔다. 그럼에도 선택에는 의문이 남는다. 다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한 벌의 옷과 내가 1대 1로 마주하는 상황 속에서, 나는 그것을 '이쁘다'라고 여겨 구매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사실 그럴 자신이 없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온전한 내 취향을 과감히 결정하는 것이 더 이상은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때는 2006년, 한국 영화 대상 시상식이었다. 류승범 씨는 80년대 프레피룩 스타일의 착장을 선보였다. 검은 턱시도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배우들 사이, 류승범 씨의 착장은 유독 튀었다. 아니나 다를까 류승범 씨는 해당 시상식의 워스트 드레서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프레피룩 스타일은 한국에서 유행으로 번졌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흥행했기 때문이다. 꽃보다 남자 속 F4는 프레피룩 스타일을 선보였고, 길거리에서는 심심찮게 프레피룩 스타일을 갖춰 입은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워스트 드레서의 착장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올해가 지나도 이 옷이 이뻐 보일까?'라는 의문은 류승범 씨 프레피룩 사건이 발생한 영화 대상 시상식에서 선정한 베스트 드레서의 착장을 보면 명확해진다. 당시 베스트 드레서는 조인성 씨였다. 앞부분이 짧게 크롭 된 턱시도, 광택이 유난히 빛나는 스카프, 독특한 문양의 벨트를 매치한 차림이다. 베스트 드레서 조인성 씨와 워스트 드레서 류승범 씨의 착장 사진은 '패션 리더 류승범 재평가'라는 제목의 짤로 SNS 상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베스트 드레서의 착장이 어색하고 우스꽝스럽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그에 반해 류승범 씨는 역시나 패션 리더답게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선지한 그런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조인성 씨와 류승범 씨의 예시를 든 것은 그들의 패션 센스를 평가하기 위함이 아니다. 누가 먼저 아름다움을 눈치챘는가의 문제와 별개로, 패션의 기본 속성이 그러한 것이 아닐까? 다시 돌아가서, 옷 한 벌을 구매할 때 그 옷 자체에 내재한 아름다움을 간파하고 구매를 결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당장 올해 구매한 옷이 내년엔 아름다움을 잃을 수 있는데?
'유행은 돌고 돈다' 패션계의 유행은 보통 하이앤드 브랜드로부터 시작한다.(보통이라는 말을 넣은 이유는 글 쓰는 사람의 전문 지식 부재를 고백하기 위함이다. 지적 환영) 어마어마한 자본력을 갖춘 명품 브랜드들에서 한 해의 패션 트렌드를 쇼를 통해 선보인다. 물론 명품 브랜드들 사이에서도 위계가 갈린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브랜드가 트렌드를 소개하면, 그보다 하위에 위치한 브랜드에서는 트렌드를 벗어날 수 없다. 트렌드를 벗어나는 것은 '특이함'임과 동시에 '아름답지 않은 무언가'로 평가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명품 브랜드가 시작한 트렌드를 컨템포러리 브랜드, 도메스틱 브랜드, 스파 브랜드에서 카피한다. 비슷한 류의 디자인이 같은 해에 여러 브랜드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유이다.
'컨템포러리'란 동시대성을 의미한다. 동시대성은 비슷한 시점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해석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컨템포러리 브랜드란 동시대의 사람들이 '이뻐 보인다'라고 생각하는 의류를 명품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소비할 수 있도록 대중에게 소개하는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비싸다... 명품에 비해 합리적 이라는 이야기...) '이뻐 보인다'는 것은 설명했듯 해석의 범주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해석 가능한 범주 안에서 패션의 유행이 시작된다.
한동안 즐겨 보았던 어느 패션 유튜브 채널에는 구독자의 착장을 평가하는 컨텐츠가 있었다. 구독자가 착장을 찍어 올리면, 유튜버가 사진을 살펴보고 평가 및 조언을 건네는 방식이다. 간략한 설명을 위해 유튜버를 A, 구독자를 B라고 칭하자. B는 다른 구독자들처럼 A의 평가를 받기 위해 착장 사진을 올렸다. 셔츠와 데님 팬츠를 매치한 차림이었는데, 셔츠와 팬츠 모두 루즈한 핏이었다. 문제는 셔츠를 바지 안에 넣어 벨트를 착용한 것이었다. A는 상 하의가 모두 루즈한 핏인 경우 가운데 벨트를 착용했을 때 핏이 말 그대로 '8' 모양이 되어 어색할 수 있다고 말했다. A의 평소 스타일은 친근한 동네 형 같은 느낌이기 때문에, 지금 글로 옮겨 적는 것보다 더욱 투박한 어투로 B의 어색한 어색한 핏을 지적했다. 그러나 B는 A에게 반박하는 댓글을 남겼다. 요약하자면 'A의 말이 항상 정답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A의 의견은 앞서 설명한 동시대성에 근거했다. A는 보통 사람들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핏에 '8'자 모양의 핏이 속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다수가 A의 말을 일리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의 말이 다수의 해석 범주 안에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전에 A는 업계 종사자이자 다수의 해석을 누구보다 관심있게 연구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A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또한 A가 많은 구독자를 끌어모은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구독자들 또한 A의 의견에 동감했고, 감히 전문가의 의견에 반발한 B를 치기어린 사람으로 취급했다. 나는 별다른 댓글을 남기진 않았지만, A의 의견이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다만 요즘처럼 옷을 구매할 때마다 아이러니에 빠지는 나를 발견할 때면, B가 떠오르곤 한다. 물론 B도 A의 의견을 듣고 싶었기에 기꺼이 평가받고자 했을 테지만, A의 의견에 얽매이진 않았다. 당장 내년에 입기 껄끄러울지 모르지만 올해는 이뻐 보일 것 같다는 믿음으로 옷을 구매한다는 건 우스운 꼴이기도 하다. 사실 난 옷을 잘 입고 싶다기 보단, B가 부러운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