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도 없고 펌도 없다.
작년엔 히피펌에 도전했다. 장발로 머리를 기른 김에 갈 때까지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펌이 끝나고 미용사분은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내 머리는 힘이 없는 탓에 파마를 하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꼬불거리는 컬이 만들어진다. 아마 생각보다 훨씬 강하게 펌이 말려 당황한 모양이었다. 미용사는 "원래 히피펌은 이렇게 부스스하고 거지 같은 멋으로 하는 거예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다. 사실 난 꽤나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는데... 미용사의 너스레가 사족처럼 느껴졌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다만 '거지 같은 멋'이라는 표현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거지 같은 멋을 소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히피'는 정말로 거지였다. 자발적인 거지...
'히피족'은 베트남 전쟁 반전 운동을 계기로 반사회적 문화를 향유하며 '인간성 회복', '친자연적 삶'등의 대안적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반사회적 문화란 물질주의, 소비주의에 반하는 행동 양식을 의미한다. 예컨대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는 행위는 그들의 선택지가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 자유분방하고 거적때기 같은 옷차림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물질적인 무언가에 반하는 모습을 동경했으니, 기존의 세상에서 일컫는 '거지'의 행색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히피는 물질, 소비주의적 문화에서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삶의 양식을 과감히 배제하고 인간성의 회복, 자연으로의 귀의 등의 가치를 지향했다. 그렇다면 히피펌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의 외양적 매력을 카피한 컨셉,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히피펌'에는 물질주의에 반대하고 기꺼이 거지에 준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없다. 난 그들의 문화의 복제품을 아주 일시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히피펌을 소비했다. '조금 덜 단정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잠깐 고민했을 뿐 내 삶의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히피펌에는 히피도 없고 펌(permenant)도 없다. 소비주의적 시도였을 뿐이다. (히피펌은 7만 원 짜리였다.)
'나는 자연인이다'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자연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이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진행자가 낯선 삶의 방식을 경험하며 발생하는 아이러니한 유머가 꽤 재미있다. 더해서 시청자들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자연 친화적 삶에 대한 동경을 간접 체험으로나마 해소할 수 있다. 티비만 돌리다 보면 재방송이 계속해서 방영되고 있을 정도로 흥행한 프로그램이다. (우리 외할머니도 애청자셨다.) 자연인들은 허름한 집에서 불편을 감수하고 살아간다. 계곡물을 길어와 식수와 목욕물을 마련하고, 끼니때에는 자연에서 식재료를 구한다. 점심 식사를 하고 나면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한 노동을 시작한다. 어두컴컴한 밤이 되고 나서야 진행자와 함께 저녁식사를 나누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때 꼭 나오는 장면이라고 한다면, 도시에서의 삶을 회고하는 모습이다. 자연인들은 숨 가쁜 삶, 만성 질병, 인간관계 등 현대인의 고통을 총망라할 만한 갖가지 삶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때문에 자연으로 들어왔고, 지금은 조금 불편하지만 도시에서 생활보다는 행복하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소소한 감동과 부러움을 자아내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씁쓸함을 남긴다. 진행자와 자연인의 시선 너머에는 자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십 명의 스태프, 또 그들과 엮여 있는 기업이 있다. 자연인의 가치에 대한 과감한 결단과 해석은 결국 방송 매체의 소비주의적 대상으로 몰락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바라보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동경하는 시청자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하다.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셈하며, 포기한 자의 회고를 통해 욕망을 간접적으로만 해소하고, 바로 다음 날은 그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차곡차곡 쌓으려 일상으로 돌아간다. (심지어는 자연인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자연인 배우를 섭외하는 것이다.)
한병철 씨는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의 긍정성 과잉을 지적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회의 요구에 맞춰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선택할 수 없는 현대인의 처지를 폭로한다. 한편 <에로스의 종말>에서는 그러한 현대인의 긍정성 과잉은 자아에 대한 과잉보호를 야기하고, 나아가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다름'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적 태도로 변모하고 있음을 역설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실증주의(Positivism)'를 맹목적으로 좇는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지식과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자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실증주의에서는 현상을 관찰하고 실험하여 데이터를 쌓아간다. 차곡차곡 쌓이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고하고 논리를 발전시켜 나간다. 반면 해석은 부정성을 내포한다. 실증주의는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발전하는 방식이라면, 해석은 기꺼이 포기함(-)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서 무언갈 계속해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 거두어냄이고 과감한 선택과 배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가치 지향에는 포기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포기'는 성과주의 사회에서 꽤나 한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성과를 쌓아나가며 발전하는 인간으로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인간됨을 내려놓는 것쯤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인간됨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과 과감한 결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앞서 언급한 해석의 영역이며, 기꺼이(willing to)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과감히 배척하고 거지에 준하는 꼴로 살아가는 히피, 그리고 계곡 물을 길어와 목욕하는 자연인의 모습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영역마저도 자본의 힘 아래에서는 알게 모르게 일시적으로 소비 가능한 대상으로 변모한다. 완전한 포기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포기를 향한 갈망마저도 소비욕구를 자극하는 마케팅 아이템으로 활용된다. 아주 잠깐 포기의 복제품, 또 그로부터 오는 쾌감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기반으로 소비의 즐거움을 느끼며 또 소비하기 위해 생산활동에 임하는' 굴레에 놓인 사람들은 도저히 그 굴레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포기를 서로서로 권유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런 세상에서 살았으면 한다. 포기는 우리가 끝없이 나아가야만 하는 길목에서 멈추는 것 혹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무수한 갈래의 삶의 방식 중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다. 당연히 그 선택은 나머지 다른 갈래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 선택에는 필연적으로 포기가 따른다. 이러한 포기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의 다양한 층위의 욕망은 성공하는 사람과 낙오자를 구분하는 구조 아래에서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히피도 자연인도 사회의 낙오자 취급을 받아선 안 된다. 구조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포기하지 않고 있을 때에 비로소 작동한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우리 사회는 비로소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 아무도 포기하지 않고 데이터를 쌓아가듯 발전하는 방식. 이것이 자포자기 아닐까? 과감한 결단과 해석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이라 생각한다.
( 정말 히피다운 이미지를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무료 이미지 사이트에는 히피 '컨셉' 스냅 사진만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