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연과 상상>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나약한 인간의 처지를 고백하는 작품에는 하염없이 마음이 끌린다. 생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달떠있던 마음은 인간의 보편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이야기 앞에서 재촉을 멈춘다. 나도 한 인간일 뿐이라는, 그래야 별 수 없는 것이라는 헛헛한 위로에 외려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음이 끌리는 것이야 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뒤늦게 "그래서 뭘 어떡하라고?"라는 질문이 떠오를 때면 내 안에 최소한의 합리적 희망에 대한 바람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워진다. 인간의 숙명이야 알겠는데, 적어도 그것을 깨치게 했으면 뒤처리까지 감당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다.
그 이기적인 마음까지 보듬어 주었던 작품을 꼽자면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이다. 제목 그대로 삶이라는 우연, 그리고 그 삶 안에서 상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세 편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세 번째 이야기를 옮긴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모카 나츠코는 우연히 너무나 보고 싶었던 동창을 만난다. 둘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동창의 집으로 가 마저 회포를 푼다. 그러나 얼마간의 대화 끝에 둘은 서로를 아는 사람이라 착각했음을 깨닫는다. 나츠코는 학창 시절 자신이 짝사랑했던 미카를 생각했고, 그녀가 동창이라 여겼던 고바야시 아야는 학창 시절 종종 같이 피아노를 쳤던 이름 모를 동급생을 떠올렸던 것이다.
둘은 당황했지만, 왜인지 서로를 착각했음에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단 사실에 아쉬움을 느낀다. 그래서 곧바로 헤어지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 기막힌 우연에 대해 책임을 지기로 한다. 서로 착각했던 그 상대가 되어 주기로 한 것이다. 나츠코는 과거의 자신이 되고, 아야는 나츠코가 짝사랑했던 미카가 된다. 나츠코는 고백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미카의 역할을 맡은 아야에게 털어놓는다.
둘은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나츠코는 미카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해소하고, 아야는 피아노를 함께 쳤던 동창의 이름을 떠올리며 과거의 기억을 되찾아낸다. 그렇게 둘은 함께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어 낸다. 영화는 마치 두 사람이 서로를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진짜 동창이라도 된 것처럼, 깊은 포옹을 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인간은 삶이라는 이름의 우연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존재다. '나'라는 이름의 주체성이 실은 좌우로 흔들리는 진자 운동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인간은 한없이 나약해진다. 그러나 그 순간 인간은 세상을 허물없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상상이다. 나약한 인간이지만, 서로에 대한 상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형태의 삶도 이해할 수 있다. 나츠코와 아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행히도 나약한 나이기에 나약한 너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인간에겐 연대의 가능성이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