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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Apr 10. 2023

《 무진기행 》

억압에 대한 동조

유토피아는 어느 곳에도 없는 사회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 사이다 같은 결말은 사실 어느 곳에도 없지만, 인간은 그것 비슷한 것에라도 닿으려 애를 쓰고, 아쉽게 빗겨나가기도 하고,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쟁취하고 더 이상의 불편함과 불만족이 없는 삶은 인간에게 없다.


무진기행 _ 작가의 말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무진기행은 그러한 억압과 해방의 굴레에 놓인 인간의 처지를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의 말처럼 무진기행은 추체험의 기록이자,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이자,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이다. 작가는 구제받지 못한 상태를 벗어나려 애쓰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노력할 뿐.


무진은 작은 항구 도시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안개다. 안개는 시야를 흐릿하게 하여 무언가를 바로 볼 수 없게 하면서 자신에 대한 타인의 시선 또한 무뎌지게 한다. 그래서인지 희중은 휴식을 취해야 할 때,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면 어김없이 무진을 찾는다. 무진에서는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충동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죽어버린 시체를 보고 흥분을 느끼고, 새벽 사이렌 소리에 타인의 정사를 상상한다. 발가벗겨진 채 살아가는 현실과 달리 안갯속에 몸을 꽁꽁 숨길 수 있는 탓이다.


그러나 무진을 단순히 비일상(해방)이라 칭할 수는 없다. 무진은 그의 고향이다. 전쟁이 일어난 당시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작은 독방에 가두어 두었다. 전쟁 통으로 아들이 끌려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희중은 그 방 안에서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차라리 이럴 거면 총을 들고 전쟁에 나가는 편이 낫겠다 생각한다. 도시로의 해방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텼고, 결국엔 전쟁이 끝나 희중은 그렇게 바라던 서울에 자리 잡게 된다. 서울에서 부잣집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 그의 친구 '조'의 말처럼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 그야말로 벼락 출세한 셈이다. 때문에 서울에서의 일상이 그리 떳떳하고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진이 그에게 온전한 해방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무진은 희중에게 현재(도시)의 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과거의 결핍을 마주하는 억압적 공간이다. 억압과 해방은 그렇게 변주한다.


희중은 무진중학교의 음악 교사 인숙을 만난다. 인숙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무진으로 교사 발령을 받았다. 인숙에게 무진은 재미없고 따분한 곳이다. 인숙도 오래전 희중과 마찬가지로 무진을 떠나 서울에 가고 싶어 한다. 결혼을 하든 무얼 하든 말이다. 인숙은 희중을 자신을 서울로 끌어올려줄 인물이라 생각하며, 희중에게 어떻게든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며 애원한다. 희중은 그런 인숙에게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의 사랑은 일탈(해방)일까? 부잣집 딸과 결혼해 곧 한 기업의 전무가 될 사람으로서, 고향의 어느 교사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물론 어떤 의미에선 파격적인 일탈이다. 현실에 불만족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럴 터이다. 그러나 갑작스레 회의가 잡혀 서울로 돌아가기 전, 그는 인숙에게 남기는 편지를 통해 그의 사랑이 과거의 억압에 대한 재동조였음을 고백한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다 써내리고 희중은 편지를 찢어버린다. 어렴풋이 사랑했던 자신의 옛 모습, 당시의 억압으로 인해 정의할 수 있었던 그때의 안식을 잠시 잠깐이나마 맛보고, 그는 다시 그때의 자신이 해방이라 여겼던, 그리고 현재는 억압이 되어버린 꽉 막힌 현실로 돌아간다. 어느 것을 그의 일탈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억압과 억압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정의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다시금 그 기억은 새로운 갈망이자 해소되지 않은 무언가로 남는다. 희중에게 인숙은 해방에 대한 간절한 손짓이자, 또 다른 억압에 대한 투신이다.  


희중에게 유토피아는 그대로 남아있다.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완전한 해방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방이라 여겼던 것은 흘러가는 시간에 그 몸을 맡긴 채 억압이 되어 버리고, 그 억압은 삶의 의미로 자리하며, 또 다른 해방을 위한 허덕임과 갈망은 삶의 실천으로 남는다. 유토피아는 그 과정 어딘가에 놓여있다. 유토피아에 닿기 위한, 닿을 수 없는 삶의 굴레에 놓여있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는 김승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의미 없는 삶이라 자조할 수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숙명에 조명을 비추어보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과 억압의 변주, 궁극적 의미에 닿을 수 없지만 닿으려 분투하는 인간의 숙명적 삶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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