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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Nov 19. 2022

타인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사실

차가운 귤
                                                임지은

퇴근한 남편이 재활용품을 분리하러 갑니다
나는 큰 상자를 질질 끌며 따라갑니다
넓고 길쭉한 마음을 접어놓지 않았습니다

돌아와 유통기한이 지난 식빵에
설탕을 뿌리고 달걀을 입힙니다
하고 싶은 말이 프라이팬 위에서 까맣게 타고 있습니다
저녁의 한쪽 면을 뒤집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담은 박스처럼
나란히 앉아 코미디를 봅니다
오늘은 왜 야구를 보지 않아요?
남편이 자기 마음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편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립니다
마음을 글러브처럼 들고 있고 싶습니다
던지면 어디서든 받을 수 있게

있잖아요, 수요일이 창문을 흔듭니다

남편은 저녁도 거른 채 잠이 들었습니다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냉장고로 가
다정함을 꺼내 먹습니다
다정함은 차갑습니다
말랑말랑합니다
하필 귤 맛이 납니다

나는 미처 닫지 못한 창문처럼 앉아 있습니다
크고 두툼한 손에 다정함을 쥐여줍니다
그가 자는 잠에서 귤 향이 나는 것 같습니다
잠에서 깬 그가 손 안에 노란색을 발견합니다

그는 다정함을 야구공처럼 굴려봅니다
껍질을 벗겨 입안에 넣습니다
남편의 뒷모습이 둥글어지고 있습니다
어디로든 굴러갈 수 있게

있잖아요, 7시가 아침을 흔듭니다

다정함은 이제 우리 사이에 투명하게
넓고 길쭉한 상자처럼
어느 방향으로도 접을 수 있게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어
휴지통을 들고 그가 따라나섰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데 어려움을 겪지도, 또 애착 관계를 맺고 있는 가까운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외롭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상대의 처지에 깊은 공감을 하고 있다는 자만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대화를 마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면, 다시금 외로움과 불안에 빠진다. 내 처지를 안다는 것,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나의 경험, 그로 인한 감정, 감정에서 비롯한 육체적 변화들까지 그 온전한 흐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인간은 타자를 말 그대로 '몸소' 느낄 수 없다. '내 속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이라는 나의 처지를 잘 이해한다는 느낌을 나타내는 관용표현이 있지만, 정말로 타자가 내 속에 들어왔다 나갈 수 있을까? 소통의 전제는 고립이다. 타자의 자아에 닿을 수 없기에, 닿으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을 소통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모든 사람의 뇌가 연결되어 있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 타자에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떠한가? 소통할 필요가 사라질 것이다.


임지은 작가의 시 「차가운 귤」 속 '남편에게 마음이 잊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립니다'라는 문장은 타자를 자아의 인식적 대상으로써 바라보게 되는 작가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설명한 대로, 소통은 고립을 전제로 정의되는 개념이다. 닿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차원이다. 타자의 마음은 자아의 입맛대로 변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예측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늘, 작가는 '오늘은 왜 야구를 보지 않냐'며 자아의 경험적 논리에 근거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타자의 마음은 글러브처럼 들고 있을 수 있지 않다. 어디서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아와 타자의 고립을 인정하기 못하기에 발생하는 역설적 상황이다.


남편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작가의 고백에,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렸을 적엔 나는 동생이 생각을 하고 산다는 사실을 자주 잊곤 했다.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재수를 해서 대학교에 입학했다. 스스로 재수를 택한 것은 아니었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억지로 등을 떠밀려 재수학원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론 현역 때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긴 했지만, 그 경험 자체가 꽤나 고역이었다.


동생의 상황은 나와 반대였다. 동생은 재수를 하지 않고도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목표로 설정한 학교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마저 동생의 성에 온전히 차는 결과는 아니었던 탓에, 동생은 '오빠처럼 나도 재수를 하겠다.'라고 선언했다. 나의 재수는 내게도 고역이었지만, 그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부모님께도 고역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생의 재수를 만류했다. 나 또한 당시에는 충분히 목표한 바를 이루었음에도 굳이 재수를 하겠다는 동생이 이해가지 않았다. 아닌 척하면서, 부모님의 만류에 보탬을 했던 기억이다. 동생은 매일같이 악을 쓰고 울었다. 


엠마뉴엘 레비나스는 '타자성'에 대해 무한한 타자의 얼굴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이라 말했다. 그에 따르면 자아의 경험과 이성을 바탕으로 타자를 인식하는 것은 동일성에 대한 강요이다. 이는 타자를 자아로 환원하려는 시도이며, 전체주의적 폭력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동일한 모습으로의 타자와의 만남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차원에서 타자와의 관계 맺음은 타자에 대한 절대적 환대여야 함을 역설한다. 절대적 환대란 타자가 자아의 경계를 자유로이 범람하는 것이다. 자아는 그 호소에 대해 응답해야 하는 주체이다. 그 책임은 윤리가 되어, 자아의 존재론적 인식관을 무너뜨린다.


동생의 재수를 만류한 일은, 부모님과 나의 존재론적 인식관으로부터 비롯된 타자(동생)에 대한 전체주의적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이성적으로는 동생이 합격한 대학에 가도, 충분히 동생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자아 안에서 갇혀버린 가능성이다. 좋은 말로 설득하려는 시도(소통)는 닿을 수 없을 것이란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그 전제를 인지하지 못한 채 마치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유한한 동일성 안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며 일방적인 강요가 되어 버렸다. 나는 눈물을 흘리는 동생의 얼굴에 응답하지 못했다. 동생은 외로웠을 것이다.


타인도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 일은, 아찔하게 느껴진다. 내가 가진 자아의 이성과 경험적 논리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그 무너짐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완벽한 객관이 존재할 수 없듯이, 모든 의미는 주관에서 파생되며, 의미란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타자의 자아에 대한 범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타자에 닿을 수 없음에도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는 것과 같으며, 타자를 자아의 경계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이는 타자에 대한 전체주의적 강요임과 동시에 모든 독립적 주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위기에 처하게 한다. 나도, 타자도 외로운 삶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동생과의 일은 그동안의 나의 인식을 뒤흔들었다. 은연중에 친척들을 비롯한 온 가족이 장남인 내게 큰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은 알았으나, 그것이 나에 대한 특혜이자 동생에게 부당한 대우였고 한편으론 가부장제의 폐해였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하나하나 퍼즐 조각 맞춰지듯 동생이 재수를 포기할 때까지 이어져 왔던 차별적 대우들이 떠올랐다. 동생은 가부장제의 전체주의적 동일성에 의해 욕망을 실현할 수 없는 자아였다. 그날에서야 난 동생의 얼굴을 바로 보았고,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다소 시간이 흐른 뒤였다.)


「차가운 귤」에서의 '다정함'이 타자에 대한 응답이 아닐까 한다. '타자의 마음을 글러브처럼 들고 있고 싶다.'는 문장은 어디까지나 소망일 뿐,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망에 닿으려 애쓰는 대신, 작가는 남편의 손에 '다정함'을 쥐어준다. 다정함은 작가의 입에서 귤 맛을 내기도, 남편의 잠에 귤 향을 입히기도 하며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넘나 든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사람의 얼굴은 제각기 표정을 달리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표상이다. 무방비한 채, 타자의 얼굴을 만나 변화하는 자아의 표정이란, 타자에 대한 절대적 환대라 할 수 있으며 관계를 통해 자아를 만들어가는 윤리적 수용의 과정이다. 무조건적 환대, '다정함은 우리 사이에 투명하게 넓고 길쭉한 상자처럼 어느 방향으로도 접을 수 있게' 놓여있다. 연민도 동정도 아니다. 어느 방향으로도 접힐 수 있는 투명함일 뿐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서로가 공유하는 의미를 과대평가할 때가 있다. '이쯤이면 이해할 수 있겠지'하는 착각이다. 재수를 만류하며 건넸던 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난 동생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타자로서의 동생은 없었고, 말 그대로 내 동생으로서의 동생만 존재했던 꼴이다.


ps. 발행 전에 동생에게 글을 보여줬는데, 알아줘서 고맙지만 지금은 잘 살아서 만족한다고 답했다. 그때의 기억이 결핍이자 발전의 동력이라고. 동생은 알아서 잘 살고 있다. 아직도 철이 안든 오빠만 좀 정신차리면 될 듯하다. 동생의 대답을 듣고 나니 동생 이야기를 길게 늘여 써놓은 것도,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내 주관에서 만들어진 동생의 모습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타자성을 느끼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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