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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Nov 10. 2022

예술가가 현재를 기억하는 방법, 정서영 「오늘 본 것」

'현재'를 포착하는 건 가능할까? 다음 문장을 써 내려가는 지금을 현재라 표현하고 싶지만,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문장이다. “순수한 현재라는 건 미래를 먹어가는, 과거의 붙잡기 어려운 진행이다. 사실은 모든 지각은 이미 기억이다.” 현재는 그것을 인지하는 그 순간 과거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현재의 흐름이란 미래를 야금야금 갉아내 과거의 덩어리에 붙어버리는 모양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가 없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따지고 보면 현재는 실제로 인지할 수 없고 포착할 수 없는 시간과 움직임을 가두어 정의 내린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정확히 포착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딱딱한 고체라면 그 형태를 비교적 고정 불변하다 할 수 있을까? 실은 어느 것도 우리 곁에 고정 불변의 형태로 남아있지 못한다. "인간도 지구도 사라질 것이 명확해 보이는데, 사물이 사라지는 거야 말해 뭐하나."라는 정서영 작가의 말처럼 모든 존재는 필히 나타나고 사라진다. 존재를 '거기에 있는 것'이라 착각하지만, 우리는 존재의 나타나고 사라지는 시간 속에 잠시 머물며 그 시간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차원에서 무언가를 '존재한다' 정의한다. 모든 존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즉 움직임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속도가 우리가 인지하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현격히 느리기 때문에, 우리는 머릿속을 뱅뱅 돌리며 사고하고 있지만 우리가 인지하는 대상은 그 자리에 정박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잘만 하면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하여 사물은 정체된다.(실은 정체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정체된 사물은 우리의 주관이 쳐 놓은 경계를 범람하지 못한다. 사물은 사물 그대로 또 인간은 인간 그대로 위치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마르크스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자본에 의해 매매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물화'되는 현상을 지적한 바 있다. 물화란 모든 것을 자본이 해결해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하여, 화폐라는 물질의 성질로 모든 것을 계측할 수 있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생산으로부터 분리된다. 물화는 인간 소외이자 사물 가치의 고정이다. 절대적 기준 '화폐'로 결정된 사물의 물성은 효용과 수요 공급 곡선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를 아무리 귀중하다 외쳐봐도, 그것의 가치는 시장의 논리에 의해 특정 수준에만 놓여있을 뿐이다. 변동의 가능성은 오직 수요와 공급에 변화에만 의존한다. 이로써 사회에는 소비하는 인간,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 사물, 그리고 소비할 가치가 없는 사물만이 남는다.


따라서 사물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인지하고 그것이 우리의 주관에 범람하게끔 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사물을 인지하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사물의 움직임 자체에 집중하여 물화된 시간의 흐름과 인지의 역사를 다시 주관자의 것으로 되돌리는 차원에서다. 이를 위해서는 움직임의 전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움직임은 변화이다. 변화는 방향을 내포한다. 사물이 그 자체로써 지시하고 있는 방향, 그리고 우리에게 사물의 얼굴이 다가오고 있는 방향, 또 인간으로부터 결정된 인식적 방향 등이 얽혀 '움직이는 사물'을 주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게 한다. 정서영 작가의 오늘 본 것」전시는 그러한 사물의 동적 양상을 예민하게 관찰하여, '조각한다는 것' 혹은 '대상을 변주한다는 것'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 전망대 >  편지로 부터 등장한 전망대의 이미지가 전시장에 재현되었다는 사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득함 덕인지 모든 작품을 관찰해내야 한다는 조급함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전망대>는 작가의 친구가 작가에게 보낸 편지로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편지에 동봉된 사진에서 전망대를 보았고, 그 전망대를 어떻게 조각으로 재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전망대>는 사진 속 전망대의 재현이기는 하지만 실제 전망대는 아니다. 전망대로써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좁고 낮다. 재현이지만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전망대는 사물로써의 용도를 잃음과 동시에 고정적 이미지를 탈피한다. 편지에 나타난 전망대는 / 작가의 그날의 인식적 상황에 기반한 이미지로 각인되고 / 다시금 <전망대>로 전시장에 나타나는 과정을 거친다. 각각의 전망대는 다른 움직임을 취한다. 사진은 순간을 사실적으로 포착하는 도구이며, 인상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고, 전시는 다층적 이해의 가능성을 열고자 하는 시도이다. 전망대라는 동일한 사물에서 파생된 다른 움직임들이 <전망대>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또한 그 움직임은 수용자의 주관에 따라 방향을 달리한다. 그저 작은 사이즈의 전망대가 전시장 바닥에 놓인 것으로도 그것이 예술적일 수 있는 이유이다.


< 파도 > 파도 모양 타투를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는데, 이 작품을 보고 다시금 마음을 굳혔다. 조만간 하고 말 거다.


작품은 누가 보아도 파도의 형상을 하고 있다. 제목을 듣고 '어 그래 파도네...'하고 쉽사리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이다. 아무렇지 않게 파도라 인지하지만, 어디에도 파도의 움직임은 없으며 엄밀한 의미로 이를 파도라 칭할 수는 없다. 파도는 물의 움직임이다. 연속적이며 유동적인 흐름이다. 반면 < 파도 >는 고정적인 형체이다. 우리는 움직임을 멈춘 파도를 파도라 부를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의 모양만 보고도 그것이 파도임을 인지할 수 있다. 별다른 분석적 과정 없이도 작품은 파도라고 불릴 수 있다. 이로써 인지의 가능성이 펼쳐진다. 특정한 현상, 개념, 사물을 정의하고 있는 말과는 별개로 각자 처한 위치에서 촉발되는 해석의 가능성이다. 파도를 < 파도 >라 칭하며 고정체로 전시한 이 작품은 <전망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물에 대한 주관의 변동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코너스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이다. 코너 스톤이 전시장 내 두 개 자리하고 있다.


코너 스톤, 구석에 놓인 돌덩이이다.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니, 무언가를 지탱하는 돌기둥쯤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어느 부분은 직각의 형태를 하고 있는 반면, 다른 부분은 불규칙적이다. 불안정한 형태감은 기둥으로써 역할을 할 수 없을 터이다. 그렇다면 구역을 나누는 기준선일까? 두 코너스톤을 기준으로 두어 나뉜 작품들의 경향성을 생각해보아도, 도저히 찾아낼 수 없다. 작품의 제목과 형태를 둘러싼 의문들이 풀리지 않는다.


겨우 한 가지 명확히 이해되는 지점은 제목이 '스톤'이고 작품은 실제로 '돌'이라는 점이다. 돌은 사전적으로 '흙 따위가 굳어 만들어진 광물의 덩어리'를 의미한다. <코너스톤>은 사전적 의미로도 돌이다. 그런데 그 돌이라는 의미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무수히 많은 종류의 딱딱한 덩어리들을 '돌'이라는 말로 묶어 설명하기로 약속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상형문자를 제외하고,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와 그것이 표상하는 사물이나 개념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없다. 언어는 대상의 물적 특성과 관계없이 우연한 계기로 인위적으로 형성된다. 우연한 계기는 인간의 미시적 실천에서 비롯된다. 돌은 우연히 또 반복적으로 돌이라고 불려 돌이 되었을 뿐, '돌'이라는 문자 자체에 딱딱하고 덩어리 진 사물의 이미지는 투영되지 않는다. 언어는 사물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그럴듯한 이유나 해석을 내포하지 않으며, 사물은 이름 붙이기 나름인 무언가가 된다.


만약 <코너스톤>이 구석진 벽에 놓여 있었다면 어떨까? 또 완벽히 각진 형태였다면? 제목과 사물이 1대 1로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인식된다면 우리는 의아함을 느낄 수 없다. 의아함은 낯선 경험에 대한 반응이다. 이미 정의되어 널리 사용되는 말은 사물을 낯설게 보기 어렵게 만든다.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사물을 통해, 수용자는 말과 사물의 거리를 최대한 넓혀 새로운 차원의 상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유령은 좋아질 거야> 전시를 설명해주신 도슨트 님은 작가가 긍정적인 사람이라 추측했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작 <불안>에서 현대인의 불안을 야기하는 원인 중 하나로 능력주의 사회를 지적한다. 과거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신분이 정해지는 사회에서는, 한번 귀족은 영원한 귀족으로 한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로 살아야 했다.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기에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없던 것이다. 반면 오늘 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능력에 의해 신분이 결정된다. 능력을 키우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다는 희망은 오히려 불안을 야기하게 된다. 능력을 키우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뒤처질 것이다. 신분 하락의 가능성이다. 더 나은 상태에 대한 희망은 더 나쁜 상태에 대한 불안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Ghost will be better'라는 문장은 작가 스스로 더 나은 상태를 전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 나은 상태의 전제는 실체 없는 불안과 연결된다. 장판에 쓰인 것처럼 최고를 향해 최상의 품격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알 수 없는 불안을 마주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불안은 위협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야 하는 연속선 위에 놓여있는 것만으로 생겨날 수 있는 감정이다. (돌돌 말려있는 장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계속 밀어 펼쳐놔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유령은 실체 없는 불안과 같은 맥락에 두고 볼 수 있다. 유령은 관측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이지만, 모두가 그 형체를 떠올릴 수 있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Ghost'라고 쓰여 있는 것만으로 장판 위 하얀 무언가가 유령이겠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그러한 유령을 작품 속에서 만질 수 있는 존재로 구현한다. 인간의 상상만으로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추상적 대상이 구체적 사물로 드러나는 것이다. 작가는 <유령은 좋아질 거야>를 통해 불안, 유령 따위의 형체 없는 상상의 영역을 조각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다.


<세계> 호두와 호두를 둘러싼 주변이 아주 미세하게 변화한다.


두 달 동안 5kg가 넘게 빠졌는데, 거의 매일같이 만나는 친구는 내가 살이 빠졌는지 안 빠졌는지 알지 못다. 오랜만에 본 가족들은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냐며 걱정다. 자주 볼 수록 그 변화를 알아챌 수 없다는 사실이 우습다. <세계>는 작가가 조각한 호두를 촬영한 영상이다. 호두와 호두를 둘러싼 주변이 10여 분의 러닝타임 동안 아주 미세하게 변화한다. 몇분 간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작품을 바라보면 그 변화를 인지할 수 있다. 변화는 시간과 방향의 문제이고, 그 폭이 클수록 알아채기 쉽다는 건 당연하다. 가까이서 관찰하려 할수록 그 폭은 좁아지고, 대상의 변화를 인지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거리 두기는 대상의 움직임을 다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이다.


작가가 '오늘 본 것'들을 관찰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시의 타이틀은 「오늘 본 것」이지만, 실제로 그 '오늘'들은 지나온 작가의 과거에 붙어있는 기억이다. 기억을 되짚어 사물을 관찰하는 과정은 현재에 대한 거리두기이다. 서문에서 언급했듯 현재는 포착할 수 없다. 현재를 인지한 순간 미래를 갉아먹고 과거의 덩어리에 달라붙기 때문이다. 사물의 존재와 주관의 관계도 그러하다. 계속해서 변동하는 움직임으로써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술은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정은 필연적이다.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판단하는 관습적 기준은 우리가 손쉽게 일상을 살아가게 한다. 그러한 일상에 관계된 대상들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쓰임을 어필하고(실은 사회가 지시하고 있는 쓰임이다.),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로 인해 의미는 고착화되고 인간의 활동 또한 하나의 기준으로 환원될 위험에 처한다. 예술은 그 일차원적 환원, 절대적이고 고정 불변한 하나의 의미에 대한 동조를 뒤흔드는 데에 의의가 있다. 주관자가 손쉽게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차원에서 벗어나 기꺼이 알 수 없는 처지에 놓임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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