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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Nov 05. 2022

「본 투 비 블루」

해방과 억압의 변주, 숙명적 인간의 삶 속 아름다움

가볍다는 것은 무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고, 반대로 무겁다는 것은 가볍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벼움은 무거움에 대한 정의를 전제하고, 마찬가지로 무거움 또한 가벼움을 정의함으로써 개념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억압과 해방도 마찬가지이다. 꽉 막혀버린 욕망, 결핍, 불만족의 상태가 전제되어야 인간은 비로소 해방을 꿈꿀 수 있다. 억압된 상태가 없으면 해방도 없고, 해방된 상태를 꿈꾸지 않는다면 억압이 개념화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가끔은 사이다 결말을 간절히 바라는 때가 있다. 플롯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인물들의 억압과 욕구를 느껴볼 수 있는 탓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게 되며, 그 바람대로 이야기가 전개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사이다 결말을 마주하고 나면 간접적인 해소감을 느낄 순 있지만, 긴 여운이 남지는 않는 경우가 다수이다. 그 간접적인 해소를 위해서 억지스럽고 비현실적인 사이다 결말을 삽입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더 중요한 건, 생각의 여지를 빼앗긴다는 점이다. 여지란 남겨진 억압과 앞으로 펼쳐질 해방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이자, 끊임없이 흔들릴 처지에 놓인 인간의 타자성을 인지할 수 있는 공간이다.


본 투 비 블루는 쳇 베이커의 짧은 생애를 조명한다. 재즈 씬에서 스타덤에 올랐지만 마약 중독으로 인해 몰락하고, 버드랜드에서의 공연으로 재기에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챗 베이커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지만, 기존의 재즈 신을 주름잡고 있던 뮤지션들로부터 괄시를 받는다. 그의 연주와 노래 스타일이 너무 가볍다는 이유다. "좀 더 삶을 살아보고 와라"라는 말을 들어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취급을 받는다. 아버지 또한 이러한 괄시에 한몫을 보태는데, 노래를 왜 여자처럼 부르냐며 그의 음악 활동을 집안의 수치로 치부한다. 한편 그는 마약 중독으로 인해 교도소를 들락거렸고, 마약으로 인해진 빚을 갚지 못해 빚쟁이에게 쫓기는 신세다. 끝내는 빚쟁이들을 만나 흠씬 두들겨 맞고, 트럼펫 연주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는다. 과거의 명예는 처참히 무너진다. 기본적인 트럼펫 연주마저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 만다.


제인은 그러한 쳇의 삶의 구원자이다. 마약 중독으로부터 정상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그의 옆에서 헌신적으로 돕는다. 쳇도 그녀와의 일상에서 점차 정상 궤도로 회복하게 된다. 과거 명성을 떨치던 시절, 게을리했던 연습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임한다. 그렇게 다시 재즈 씬의 인정을 받고, 꿈에 그리던 '버드랜드'에서 공연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공연을 앞둔 그날 문제가 발생한다. 그동안 헤로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복용했던 약이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공연 직전 극도의 긴장에 빠진 그의 앞에는 헤로인이 놓여 있었다. 그의 매니저 딕은, 그동안 마약 없이도 잘 연주해 온 모습들을 쳇에게 상기시켜 주며 방을 떠난다.


'텅 빈 채로 올라가지 말라는 말이네'


제인은 쳇의 연주만 듣고도, 그가 다시 마약에 손을 대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쳇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자신을 멸시했던 재즈 씬에 한방 먹이기 위해, 마약을 하고 무대에 오른다. 무대는 성공적으로 마치고 버드랜드는 쳇을 다시금 재즈 씬의 스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에게는 삶의 회복이자 안식처였던, 제인은 더 이상 없다. 그의 음악을 아름다움의 극치로 만들어준 그리고 그의 삶을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마약과, 화려한 껍데기뿐인 스타로서의 삶만 남아있을 뿐이다.


마약을 하고 연주한 음악은 그에게 텅 빈 것일까 꽉 찬 것일까?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일까? 또 다른 억압으로의 자발적 구속일까? 마약 없이도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에 임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으로 안정적인 일상을 살아가던 쳇의 모습. 그러한 쳇이 마약 없이도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결말은 모두의 바람을 배신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아이러니한 물음 남긴다. 그리고 그 물음을 셈하며 아름다움을 취할 수 있다. 사랑과 안정적인 삶은 잃었지만, 반쪽 짜리 인간으로서 화려한 스타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아이러니. 그의 삶에 또 다른 결핍과 억압을 기꺼이 또 여전히 그대로 둔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성공을 위해 다가선 것 같지만, 실은 억압과 또 다른 억압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그를 억압하고 있던 무언가로부터 벗어났지만, 또 다른 억압이 기다리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로 인한 결핍, 화려하지만 외로운 삶, 다시금 마약 중독에 휘말려 살아가는 의존적 삶.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는 영화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데, 사이다 결말이 아닌 여전한 해방의 가능성과 그로 인한 간절함의 뉘앙스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해방에 닿을 수 없지만 닿으려 노력했던 그러나 닿지 못했던 부정성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쳇의 '블루'는 그렇게 정의된다. 완전한 긍정의 결말이었다면,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이었다면 발견할 수 없던 '블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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