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하기
시스템의 목적은 현상 유지에 있다. 에어컨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에어컨의 온도를 25도로 설정했다고 하자. 실내 온도가 26도라고 한다면 자동 온도 조절 시스템이 가동된다. 센서로 실내 온도를 감지하고, 실내 온도를 25도로 유지하기 위해 냉각기를 가동해 온도를 떨어뜨린다. 마찬가지로 실내온도가 24도로 내려가려고 한다면 25도를 유지하기 위해 가동을 멈추고 약한 바람을 내보낸다. 그러한 항상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시스템은 시스템으로써 작동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에어컨의 경우 기계이기 때문에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기 위한 조건들이 비교적 직렬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의 부품에 문제가 생기면 쉬이 시스템이 무너지게 된다.
시스템은 단순히 기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은 넓은 의미에서 사회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기계는 그 연결 방식이 직렬인 반면, 사회 구조에서 시스템이 정상 작동되는 방식은 촘촘히 얽힌 유기적인 연결망에 가깝다. 어떤 한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1대 1로 수정 보완하여 항상성을 유지하지 않고, 여러 갈래로 얽힌 의미의 연결망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문제를 보완한다.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한번 굳건히 자리 잡은 사회 구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기계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부품을 하나 고장 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차원에서 시스템 안에 놓인 개인들은 불가피한 문제를 떠안고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불가피하다는 것에 있는데,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항상성과 유지이기 때문에 개인이 고통받고 살아갈지언정 그것을 쉽게 문제 삼을 수 없도록(항상성을 깨트리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아무리 대안적 사회를 외쳐도 그것이 쉽게 현실화되지 않는다. 더욱이 새로이 떠오른 대안마저 자본화하여 그 대안으로써의 맥락적 매력을 마케팅화하여 잡아먹는 시장은 너무나 강력하다. (히피 스타일이 패션 컨셉으로 자리 잡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 안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행하며 또 한편으로는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일조해가며 살아간다.
대안적 시스템을 제안하려던 시도는 많았으나, 유기적으로 촘촘히 연결된 시스템의 항상성 유지 장치로 인해 그 시도는 성공적 결론을 맺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는 것일까? 『탈렌트 프로젝트』는 불가피한 선택을 인정하되 개인적 맥락에서의 결말을 맺으며, 시스템으로부터의 탈주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작가는 <가계부>에서 자신의 모든 소비를 기록한 가계부를 선보인다. 각각의 소비 항목에는 11개의 기준(환경, 쓰레기, 탄소 절감, 승수 효과, 유통 경로, 생산자 윤리, 경제 유지, 가치 창출, 삶의 질, 현금 사용, 수준 소비)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 그렇게 합산된 소비 점수는 작가만의 숨겨진 기준에 따라 예술 점수로 통합되고, 한 달간 소비의 예술점수 총합이 145점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145점에 미달할 경우 1점당 1시간의 봉사 형벌이 주어진다.
작가는 각각의 항목에서 본인이 지향하는 소비의 방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항목 별 점수를 매기는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은데 이는 다양한 상상을 자아내게 한다. 예컨대 삶의 질 항목의 경우,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그날 주는 효용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항목이다. 그런 한편 탄소 절감 효과의 경우 음식의 생산 방식이 달라지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다. 소비의 고유 점수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점수판에는 객관과 주관이 혼재되어 있다. 더욱이 숫자화 된 데이터 값은 무언가 객관적이고 엄밀한 것처럼 인식되기에 그 숨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음수와 양수의 방향은 작가의 지향을 의미한다. 특정 지표 안에서 소비 점수를 양과 음으로 표현함에 따라서 작가의 지향점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그 가중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데, 예컨대 +2를 부여한 날에는 +2를 부여해야만 했던 특정한 실천적 맥락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각각의 소비는 작가의 실천 그 자체가 되며, 또한 소비의 대상은 더 이상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작가 본인의 행동을 제한하고 명령하는 거대한 타자로 등장한다.
무한한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은 시스템을 탈주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시스템에 대한 동조는 자아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고정 수입을 마련하고 소비로써 그 효용을 누리기 위한 삶은 사람들이 포기하기 어려운 지극히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동조의 과정이다. 시스템에서 성공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에서 벗어나는 것은 개인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이며, 나아가 시스템의 항상성 유지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개인의 사회적 도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불가피하면서도 자발적인 동조가 지속되게 된다. 자아의 성장을 꿈꾸며 일상을 살아내는 것 같지만, 동시에 자아를 고정적인 것으로 가두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다.
'봉사 형별을 내린다.'는 것은 잘못된 행동을 한 자아에 대한 자아의 처벌이다. 동시의 사물들의 명령이기도 하다. 소비의 대상보다 격하된 지위는 자아의 균열을 야기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균열이란 작가 스스로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한 마감 장치이다. 작가의 자아는 소비의 대상이 공명하며 내뿜는 무한한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형벌로써 소비의 대상은 소비의 주체의 행위를 제한하고 조정한다. 소비의 객체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고 작가 스스로의 자아는 지위가 격하된다. 이는 시스템을 벗어나면 자아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차단하는 선제 조치 격으로 작동한다. 자아의 위치를 한 단계 조정하고, 사물의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아 상실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조정 가능한 무언가로 변모한다.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이자, 주체적 자아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시스템은 작가의 자아를 파괴할 권한을 잃게 된다. 작가는 타자(사물)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하 기꺼이 스스로 자아를 무너뜨린다.
한편 작가가 매일같이 기록해둔 소비 점수 판은 널찍한 벽에 수기로 한 땀 한 땀 기록되어 있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는 마치 디테일하고 객관적인 수치처럼 보이지만, 실은 작가의 주관성 그 자체이다. 하루하루의 유한한 자료가 빼곡히 모여 벽을 가득 채운 모습은 마치 무한함에 도전하기 위한 작가의 수행 정도로 보인다. 고단한 수행 앞에서 사람들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라고 생각하며 의아함과 낯섦을 느끼게 되는데, 여기서 작가는 완벽한 타자로 등장한다. 드러난 데이터와 감춰진 주관 사이 그리고 작품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인지할 수 있는 타자성이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각자의 자아 안에 갇혀 시스템에 대한 자발적으로 동조하는 고리는 여기서 붕괴의 가능성을 마주한다. 서로 긴밀히 연결된 채 각자의 고유성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자아 상실의 두려움 앞에 놓인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 의아함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방법은 사실 꽤나 한정적이다.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은 시스템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데에는 효과적이다. 그러나 지식 혹은 사상이라는 것은 말을 내뱉는 순간 위계를 발생시킨다. 예컨대 프롤레탈리아 혁명을 주창한 마르크스는, 자본에 따라 계급으로 나뉘는 사회를 비판했지만, 본인은 대중들의 선지자임을 자처하며 스스로의 논리에 발목을 잡히는 꼴이 되었다. 더욱이 구조 자체나 혹은 구조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면, 여러 가지 문제에 처한다. 그들은 시스템 안에서 불가피하지만 자발적으로 행위한다.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과 고통을 저울질하며 항상성 유지에 일조하게 되는데, 불필요한 잡음은 시스템 안에서 붙잡고 있었던 실낱같은 행복마저 앗아갈 위험을 내포한다. 따라서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논지를 취하기 위해선, 특정한 방향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층위의 해석적 가능성을 촉발시킬 수 있는 섬세한 접근이 요구된다.
<가계부>의 경우 위 두 가지의 문제점 모두로부터 자유롭다. 우선 작가는 선지자가 아니다. 작가는 스스로의 위치를 가장 낮은 곳으로 정의한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시스템과의 투쟁 속에서 작가의 지향점을 지켜내지 못하면 작가는 시스템에서 말하는 '자신에게 생산적이지 않은 일_봉사'로 형벌을 받는다. (봉사는 시간 대비 수익을 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지만, 꽤 좋은 일 아닌가? 시스템은 종종 사회적으로 문제를 야기한 사람들에게 봉사 처벌을 내리기도 한다.) 작가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다시 한번 그 문제 안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스스로 고백하며 수용자와 동등한 입장에 위치한다. 리아미라클버거를 먹으면 소비 점수 12점이 깎이지만, 주기적으로 리아미라클버거를 소비하는 그의 모습은 불가피한 자발적 동조와 다름 아니다. 동시에 그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작가 스스로에게 돌리고 있다. 이는 비판의 방향과 관련이 있는데, 삶의 질 항목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작가는 스스로의 행복감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있다. 또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시 형벌받을 가능성은 상승한다. 타자의 행복감에 대해서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고 있으며, 충족과 결핍에 대한 반응 그리고 처벌은 오로지 작가의 자아 안에서 순환한다. 따라서 수용자들은 자아에 대한 어떠한 공격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롭다. 경계 지워진 자아와 자아의 만남에서 타자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묘행 1>에서 작가는 마트에서 당근을 먹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가계부>에서 보여준 작가의 태도와 맥락을 같이 하는 작업물이다. 마트는 그야말로 소비의 장이다. 인간과 사물이 소비라는 행동 매개를 통해 관계 맺는 구역이다. 따라서 소비 외에 다른 것들은 암암리에 통제된다. 암암리에 통제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익히 합리적이라고 알고 있는 행위만을 하는 공간임을 의미한다. '시식'이라는 제도를 통해 소비를 결정하기 위한 힌트를 얻어낼 수는 있지만, 그 자리에서 구매한 것을 먹어 치우는 것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또한 항상성 유지를 위함이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전복시킨다. 할 수 있는 것을 해버릴 뿐이다. 마켓이라는 인위적 공간에 상품으로써 환원된 당근의 처지는 작가의 행위로 인해 뒤바뀐다. 당근이 그 자체로 당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전복이 아닌 회귀를 의미할 수도 있는데, 당근은 소비와 효용 관계에 얽힌 대상으로써 존재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부품으로써 역할이 규정되기 전부터 말이다.
<징후>는 작가가 오랜 기간 신었던 신발로 추측된다. 식탁 위에 올려두었을 뿐 다른 특수한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 또한 다면적 의미의 사물이라 일컬을 뿐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어쩌면 작가의 실천 그 자체와 맞닿아 있는 물건이라 해석할 수 있는데, 사실 그 해석의 여지는 가계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미시적인 일상의 맥락으로부터 파생된다. 리아미라클버거를 먹은 날에는 소비 점수를 깎더라도 먹고 싶은 걸 먹어야겠다는 발걸음과 동행한 물건이며, 친환경적 소비를 위해 좋은 제품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한 도구이다. 한편 그것이 <가계부>와 맞닿아있지 않는 행위일 때도 작가는 신발을 착용했을 것이다. <가계부>를 통해서 작가는 하나하나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여 보여주려 했지만, <징후>에서는 굳이 그러지 않는다. 이 또한 사물은 작가에게 더 이상 대상이 아님을 의미하는데, 신발은 놓여있음 그 자체로 다양한 해석을 자아낼 수 있는 사물이 되며, 또한 그 해석의 범주 안에 속하지 않은 의미로 공명하고 있음을 의심하게 한다. 그 의심의 여지가 사물의 주체성이자 무한한 타자성이라 짐작해볼 뿐이다.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작가의 예술은 실천적 삶과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매일의 실천을 기록하고, 실천에서 발견한 의아함을 다시 한번 행동으로 옮겨 촬영하고, 그 실천과 함께한 사물을 그대로 전시한다. 이로써 예술과 작가의 삶은 동일시된다. 예술이란 작가에게 인간의 활동과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 자체이다. 이러한 명제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시스템 안에서는 외면받는다. 자본의 태동 이래 모든 인간의 행동 양식은 노동에 국한되어 왔다. 합리적인 인간은 시장의 균형을 만들어 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 행위한다.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 받은 만년필과 문구점에 아무렇게나 놓인 만년필의 가격은 다르지 않다. 노동을 기계적으로 평가하고, 행복은 효용으로써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로 국한된다. 작가는 이렇듯 자본으로 환원된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을 다시 예술이라 호칭한다. 하루하루의 소비는 현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론인 가계부에 의해 기록되지만, 그 형식만 빌려왔을 뿐 그 안에는 주관적 해석이 가득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며, 모든 인간의 선택은 예술일 수 있다. 한정적 의미의 '합리성'이 아닐지라도. 작가에게 예술적 삶이란 거창한 의미의 '승화'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삶으로의 복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