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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Oct 13. 2024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공유한다는 것

<드라이브 마이 카>

"잘 지내지?"라는 질문을 통화 끝에 습관적으로 건네고는 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종종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상대의 불행이 없기를, 그리고 혹시나 있을지도 그 무엇이 우리의 관계를 위협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방어적 질문일 뿐이다. 당신의 불행은 내게 견딜 수 없는 일이 될 수 있으므로, 우리의 끈질기지만 무신경한 연대가 자칫 무너질 수 있으므로, 우리 입 밖으로 문제를 꺼내어 실재하게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렇기에 이것저것 사사로운 소식들을 나누고 난 뒤, 손에 쥔 뜨거운 불덩이를 던져버리는 듯 마지막 인사로 "잘 지내지?" "별일 없지?"라는 질문을 건네는 것이다. 수화기 건너로 "똑같지 뭐" "별일 없지 뭐"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나면 황급히 "다행이네"라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이와 같은 불안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속에서도 드러난다. 주인공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눈앞에서 보면서도 이를 묵인한다. 그것은 아내와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은 네 살배기 딸을 잃는 큰 상처를 겪은 후, 서로에게 기대어 남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분명하지만, 딸의 이야기 이외의 부가적인 문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둘 힘은 남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가후쿠는 테이블 위에 올라오려는 문제를 굳이 아래로 밀어 넣는다.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불안을 대한다. 오토는 가후쿠와 섹스를 할 때면 자기 자신도 결말을 알 수 없는 이야기(은유)를 내뱉는다. 한 소녀가 짝사랑하는 남자의 집에 몰래 들어가 흔적을 남기고, 야릇한 감정을 느낀다는 이야기다. 소녀의 흔적 남기기는 갈수록 과감해지지만 어떠한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도 그 남자의 가족도 아닌 제삼자인 침입자가 남자의 방에 들이닥친다. 소녀는 몸싸움을 하다 침입자의 눈을 찔러 살해하고 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체도 있고 피도 흥건할 텐데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도 어떠한 내색을 하지 않는다.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인 가후쿠는 워커홀릭이다. 자신의 차 안에서도 아내가 녹음해 준 대본을 틀어놓을 정도로 비어있는 시간을 만들지 않는다. 어느 날 운전을 하던 그는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그 원인이 한쪽 눈에 생긴 녹내장 때문임을 발견한다. 고로 오토의 이야기를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딸을 잃은 슬픔 때문인지, 그저 욕망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오토는 외간 남자를 자주 집에 들인다. 오토는 남편 가후쿠를 사랑하기에 자신의 습관적 외도에 죄책감을 느낀다. 심지어는 가후쿠가 녹내장에 걸린 것도 자기 탓인 것만 같다. 어쩌면 딸의 죽음 또한 그리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남편은 딸의 죽음은 물론 자신의 외도까지 마치 없는 일인 것처럼 대하고 있다. 이는 물론 둘의 관계를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었던 가후쿠의 바람에 기인했으나, 오토에겐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을 홀로 떠안게 한 꼴이 된다. 오토는 이야기(은유)를 통해 자신의 불안을 바라본다. 한낮의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듯, 내면의 불안을 직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기에 오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불안을 바라보는 것이다. 은유로 꽁꽁 감싼 불안은 당장에 자신을 집어삼킬 수는 없게 된다. 반면 가후쿠는 태양이 떠있다는 사실조차 외면한다. 그는 철저히 태양을 등지고 반대편으로 걸어 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토는 이야기의 결말을 내자 죽어버리고 만다. 결말은 다음과 같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소녀는 안절부절못하다 그 남자의 집 앞에 찾아간다. 그리고 대문 앞 cctv에 얼굴을 들이밀고 말한다. "내가 죽였어." 오토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싶었으나 가후쿠는 이를 언제나 외면했다. 그리고 오토가 할 얘기가 있다고 말한 그날 밤, 가후쿠는 괜히 차를 타고 집 앞을 빙빙 돌다 뒤늦게 귀가한다. 마주하기 싫은 진실을 마주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오토는 그날 가후쿠를 기다리다 원인 모를 뇌질환으로 홀로 사망하고 만다. 제때만 들어왔어도 오토는 살아있었을지도 모른다. 가후쿠는 자신의 불안을 외면하는 동안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오토를 영원히 잃어버린다.


그녀의 죽음은 태양 가까이 날아가다 추락해 버린 이카루스의 죽음과도 같다. 흔히 이카루스 신화는 '과도한 욕망'에 대한 경고로 해석되지만 사실 이 신화는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카루스의 태양은 단순한 외부의 위험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무의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철학자 자크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현실의 질서와 무의식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무의식은 우리의 억눌린 욕망과 억제된 충동을 담고 있는 공간이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이러한 무의식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무의식은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지만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거나 직면하기 어렵다는 면에서 태양과도 같다. 이카루스의 날갯짓은 단순히 욕망에 대한 갈망과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무의식에 대한 탐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로 태양 가까이 날아가던 이카루스의 추락은 자신 안에 숨겨진 무의식과 숨은 진실을 마주하려는 시도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가늠할 수 있다. 내면에 무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바로 볼 수도 없다는 지점이다.  오토는 은유로 포장해려 했지만 결국 자신의 마음속 죄책감의 실체를 마주하고 만다. 오토의 죽음은 무의식의 실체를 마주해 버린 인간의 말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내면의 무의식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분열된 자아를 갖고 살아간다. 근본적으로 무의식적 욕망과 충동을 해소할 수 없는 결핍된 존재이다. 종종 분열된 자아는 문제를 일으킨다.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소외될 수 있으며, 정체 모를 불안(무의식)에 휩싸여 현실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자신의 무의식을 직면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그 불안을 외면해 버리는 것도 아니다. 풀리지 않은 문제를 가슴속에 품은 채 그 문제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현실을 살아내야 한다. 번번이 실패하겠지만 인간은 날갯짓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다만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서도, 너무 낮게 날아서도 안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요컨대 오토는 날갯짓 끝에 태양 가까이까지 날아가버린 것이고, 가후쿠는 그런 오토를 외면한 채 날갯짓을 멈추고 우두커니 땅 위에 서있던 것이다.


가후쿠는 아내의 죽음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워커홀릭으로 살아가면서 지난날의 상처를 애써 외면한다. 두 해가 지나, 가후쿠는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연극제에 참여해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게 된다. <바냐 아저씨>는 극 중에서 가후쿠가 이미 연출한 바 있고, 심지어는 '바냐'역으로 직접 출연해 연기까지 해보았던 작품이다. 중요한 건 이번엔 스스로 바냐역을 맡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바냐는 다양한 삶의 우연들로 인해 깊은 실존적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바냐 아저씨>는 바냐에게 희망적인 말을 건네는 소냐의 대사로 막을 내린다. 요컨대 '삶은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다. 가후쿠는 소냐의 말을 도저히 소화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아내의 외도 그리고 죽음 이후 가후쿠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흘러가고 있지만, 가후쿠는 그 자리에 멈춰 삶의 다음 단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가후쿠의 회복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 우리는 두 가지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가후쿠의 독특한 연출 방식이다. 가후쿠는 배우들이 스스로 가장 편하게 사용하는 언어를 활용해 연기하는 것을 허용한다. 요컨대 한국인은 한국어, 일본인은 일어, 중국계 미국인은 영어, 언어 장애인은 수화를 사용한다.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제각기의 언어로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가후쿠의 극에 참여한 배우들은 꽤나 큰 어려움을 겪는다. 연극이라면 자고로 배우들 간에 긴밀한 교감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제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꽤나 커다란 장벽이기 때문이다. 가후쿠는 배우들에게 수십 수백 번 반복되는 대본리딩을 요구한다. 배우들은 자신의 대사가 끝나면 턴을 넘기기 위해 책상을 한차례 두들긴다. 다른 언어를 활용하는 배우는 턴을 이어받아 자기 몫의 대사를 읽는다. 중요한 포인트는 어떠한 감정도 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엇도 담겨있지 않은 빈 그릇으로서의 언어다. 지겨운 대본 리딩이 끝나고 배우들은 그제야 연기 연습을 시작한다. 언어의 차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배우들에게 이제 언어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가후쿠가 배우들 사이에 '무언가 일어났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들은 꽤 좋은 연기를 펼치기 시작한다. 언어가 다른 이들 사이에서 무언가 일어났다는 건, 그들이 교감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의 무용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가늠하는 일이다. 이로써 가후쿠에겐 오토를 이해할 여지가 주어진다. 자신과는 다른 언어(은유를 활용한 비일상의 언어)를 사용해 무의식을 드러내려 했던 오토와도 교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둘째로 가후쿠는 극을 준비하며 각자의 한계 속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 역을 맡은 한국인 배우 유나는 원래는 무용수였다. 그러나 딸을 유산함과 동시에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유나는 언어장애를 갖고 있어 수화를 사용한다. 두 가지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연극배우의 꿈에 도전한다. 바냐 역의 다카츠키는 가후쿠의 아내 오토의 내연남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성공가도를 달리던 젊은 배우였으나 사람들과 어울려 사회인으로 살아가기엔 절제가 부족하다. 각종 성추문과 폭행 사건으로 인해 인기를 잃고 근근이 살아가던 와중 가후쿠의 <바냐 아저씨>에 지원하게 되었다. 배우로서는 꽤 훌륭한 재능을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부족한 절제심은 다시 한번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가 홧김에 휘두른 주먹으로 인해 한 청년이 사망해 버리고 그는 <바냐 아저씨>에서도 하차한다. 마지막으로 가후쿠의 운전수 미사키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폭력에 시달렸다. 그녀는 마을에 눈사태가 일어나 집이 무너져 내리던 날 엄마를 홀로 두고 빠져나와 자신이 엄마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영화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을 공유하고 있는 미사키가 가후쿠의 심리적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후쿠의 회복은 점진적이다. 아이를 잃고 자신의 꿈도 잃었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는 유나, 내면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해 번번이 삶에서 미끄러지고 말지만 스스로를 인정하기로 한 다카츠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가정 폭력을 당했지만 어머니를 태우기 위해 배운 운전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미사키. 그들의 공통점은 각자가 가진 한계 속에서 그야말로 발버둥을 치며, 그럼에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멀찍이서 바라보자면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삶은 이처럼 실패와 좌절의 역사로 얼룩져 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특별하지 않은 인간의 삶 그 자체라는 것을 가후쿠는 알게 된다. 미사키는 가후쿠를 눈사태로 파묻힌 고향 집에 데려간다. 그리고 그에게 묻는다. "오토가 다른 남자를 집에 들이면서도, 여전히 가후쿠씨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나요?" 가후쿠는 이제 깨닫는다.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순과 부조리를 끌어안고 계속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모두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오토의 삶도 그와 다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제 가후쿠는 그 모순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가후쿠는 하차한 다카츠키를 대신해 바냐역으로 무대에 오른다. 삶의 궤도로 재진입하는 가후쿠를 상징하는 이 장면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소냐(유나)의 수화다. 물론 다른 말들과 마찬가지로 규칙과 기호를 갖추고 있지만, 다른 말들보다 비언어적 표현들이 수화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손가락의 섬세한 움직임, 들썩거리는 어깨, 얼굴의 표정, 표현하는 이와 받아들이는 이 사이의 분위기 등 말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수화는 수평선 상에 놓고 보자면 다른 언어들보다 우리의 무의식에 닿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소냐(유나)가 바냐아저씨(가후쿠)에게 보여주는 수화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바냐 아저씨, 사는 거예요. 길고 긴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 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내요. 지금도, 늙은 후에도 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찾아와 조용히 죽어 무덤에 가면 얘기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하느님이 가엾게 여기시겠죠. 우리는, 아저씨, 사랑하는 아저씨, 밝고 아름답고 우아한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기뻐하며, 지금 이 불행을, 감격에 젖어 미소를 띠며 돌아보겠죠. 그리고 쉬는 거예요. 나는 믿어요, 아저씨. 나는 뜨겁게, 간절히 믿어요."


우리는 감당할 수도 없고 정확히 무엇일지도 알 수 없는 무의식을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훼방을 놓는다. 게다가 우리는 이를 무어라 표현할 수단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자명하다. 첫째로 인간으로서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둘째로 타인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은 인간일 뿐이란 걸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로써 우리 삶에 훼방을 놓는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타인의 문제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도 해결해 줄 수도 없지만, 적어도 모두가 그 비슷한 것 하나쯤은 갖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연결될 수 있다. 그것이 <드라이브 마이 카>가 우리에게 건네는 희망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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