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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부터 시작하는 대한민국 생활

by May

이세계물 애니를 즐겨본다. 현실에서의 완전한 리셋, 제로 베이스에서의 새로운 삶. 단순히 킬링 타임 용으로 즐기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최근에서야 그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어느 것에도 엮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새로운 시작. 아마 난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을 갈망해 왔다. 주인공은 막막하고 답답하겠지만, 내가 가장 집중할 수 있던 건 현실을 버리고 이세계로 떠나는 대목이었다.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받아둔 대출로 인해 마이너스였던 내 자산이 곧 제로가 될 거란 걸. 언제쯤 상환할 수 있을까. 머지않은 과거에, 옥상에 올라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막연히 불안에 떨던 기억이 있다. 어려운 일을 겪는 이에게 나는 항상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니게 될 딱 1년 뒤의 미래의 나를 상상하라고 조언하고는 하는데, 역시나 유효한 조언이었다. 딱 지난달 월급을 기점으로 부채와 자산을 딱 제로의 균형에 이르게 되었다.


괜히 웃음이 났다.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이었을까, 해방감이었을까. 어플에 찍힌 '현재 자산 0원'이라는 글자는 내 삶을 향한 차가운 농담 같았다. 잘 모르겠는 마음으로 '제로부터 시작하는 대한민국 생활'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실없이 소회를 풀기도 했다. 그렇게 쌓아 나가는 거라고, 이제 진짜 시작이라고 축하를 받았다. '이제 시작이네.'라는 음성이 수능 직전 들리는 링딩동처럼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 돈을 애써 부정하며 살아왔다. 돈 보다 중요한 건 수도 없이 많다며, 큰돈을 벌 수 없는 나를 수도 없이 많이 달랬다. 맹목적으로 돈을 추구하는 이들을 폄훼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해왔다. 일종의 돈의 힘을 견디기 위한 자기 방어 기제였을 테다. 그런데 이 해방감과 만족감은 무엇인가. 더해서 다음 챕터를 향한 설렘마저 느낀다.


돈과 건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한다. 건강한 방식은 무엇일까.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 중 대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지속가능성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가 현실적인 문제라고 부르는 것들.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돈은 어떻게 생각해도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관리하고, 규정한다. 중력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야 할 인간에게, 중력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라는 말은 얼마나 부조리한가.


인간이 부조리에 대응하는 방식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부조리를 외면하거나(깨닫지 못하거나), 그것에 치여 좌절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거나. 역시나 내가 택해야 할 길은 세 번째다.


이세계물의 주인공 삶처럼, 제로부터 시작하는 대한민국 생활이 내게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 테다. 당면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 필요를 인정하는 것, 큰 희망과 기대를 버리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내게 주어진 방향은 고작 그런 것들이다.


제로의 기점에서 스스로를 속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은 명료해진다. 돈은 기꺼이 벌어주겠다. 돈을 부정하지 않되 그것이 날 부정하도록 두진 않겠다. 놓지 말아야 할 건 '돈은 무엇인가?'라는 반복적이고 지리한 질문이다. 이 정도가 내가 시작하고픈 진짜 제로다.


제로에서 시작하는 대한민국 생활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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