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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ery scenes Oct 02. 2022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_2022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를 보았다. 우리나라 제목으로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로 번역되어 개봉하였다. 이 제목보다는 원제목이 조금 더 영화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노르웨이 영화라서 그런지 우리나라 감성과 다른 장면들이 있어 당황하기도 했지만 몰입해서 보았다. 


*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율리에라는 인물은 매우 자유분방한 성격이다. 의사가 되려고 공부를 했지만 갑자기 심리학이 공부하고 싶어 졌고 그러다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제멋대로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함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사진작가를 하면서 악셀을 만나게 되었다. 악셀은 20대인 그녀와 달리 40대의 성공한 만화작가로서 이미 직업적인 성공을 이루었고 이제는 가정을 꾸릴 단계에 놓여있었다. 

악셀과 율리에는 소울메이트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대화가 잘 통했고 뜨겁게 연애했다. 그러나 악셀의 성공을 바라보면서 율리에는 작아져가는 느낌을 느꼈다. 그의 전시회 파티 때 이런 감정을 견딜 수 없어 뛰쳐나와 우는 장면에서 많은 것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지만 나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 자신이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그가 너무나도 부러워 질투심이 났을 것이다. 이러한 질투심을 가진다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날을 응원하지만 나보다 잘 되어가는 그를 봤을 땐 씁쓸할 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빠져나와 에이빈드를 만나게 된다. 에이빈드와 첫눈에 반해 그와 바람 아닌 바람을 피우게 되고 그 뒤로 악셀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악셀과 율리에는 서로 다른 단계에 있기에 어쩌면 함께 갈 수 없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에이빈드와 함께 하기로 한 율리에는 행복한 나날들을 지내는가 했지만 결국 그와도 마찰이 일어난다. 자신의 글을 이해하고 그의 관점으로 평가해주었던 악셀과 달라 보였던 에이빈드를 보고 순간 그녀는 화를 내었다. 

그리고 그의 아이까지 가지게 된 율리에는 악셀을 찾아간다. 악셀을 만나고 나서야 율리에는 깨닫는다. 다신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악셀이 율리에에게 말했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어떤 연인도 우리와 같이 대화하지 않아. 네가 앞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도 이런 사랑은 하지 못할 거야. 나는 경험을 많이 해봐서 알아. 이런 사랑 다시 찾기 힘들어."

 

 처음엔 그의 이 대사가 너무 자기중심적인 것은 아닌가 싶었다. 자신은 경험할 것을 다 해보았지만 율리에는 아직 어린 나이고 경험해 보지 못했다. 앞으로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그는 자신의 경험 안에서 단정 지어 버린 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율리에가 악셀을 다시 찾아갔을 때 느꼈다. 율리에도 액셀도 다신 그때 같은 사랑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액셀이 죽음을 앞두고 있지 않았고 율리에가 악셀이 그리워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해도 그들은 전과같이 연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의 악셀과 율리에는 그때뿐이다. 다시 그 시절은 오지 않는다. 


 율리에는 임신 사실을 깨닫고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 것이라 생각했기에 악셀을 찾아갔을 것이다. 자신의 상황에 공감해주고 어떤 말을 해줘도 위로가 될 것 같은 사람이 악셀이었을 것이다. 그 기분이 이해가 갔다. 악셀과 율리에는 단순히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이상의 관계였다. 인생에 있어 한때이지만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이다. 연애를 할 때 우리는 서로 누구보다 가깝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위치에 놓여있다. 잠시지만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서로의 모든 것을 알아가려 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도 있다. 그러다 헤어지게 되면 우리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나는 그런 상황이 씁쓸하고 아이러니하다고 느꼈다. 한 때 나를 제일 잘 알고 누구보다 대화가 잘 통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연락하기 어렵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허무하다. 연인이라는 틀을 넘어서 내 인생에서 한 시기를 함께했고 한때지만 나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이기에 나의 고민에 대해서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율리에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영화의 원제처럼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악셀과 연애를 하면서 에이빈드를 만나고, 바람피우는 것을 즐기며 결국엔 감정에 이끌려 에이빈드에게 가버렸다. 그리고 에이빈드와 연애하며 계획하지 않았던 아이를 갖게 되자 바로 전 애인이었던 악셀에게 찾아가 이를 털어놓는다. 에이빈드에겐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율리에는 몹시 이기적이고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사랑할 때는 누구나 이기적이게 된다. 이 모든 것의 허용은 사랑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이렇게 보면 제목을 잘 번역한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할 땐 이기적이어야 하는 것 같다. 남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야 후회가 없다고 생각한다. 율리에처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율리에가 악셀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면 그녀는 행복했을까.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그녀는 그러한 삶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힘들지만 악셀과 헤어지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행동으로 할 수 있는 율리에가 자신의 인생을 찾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결국 사진작가로서의 삶을 택하고 아무와도 함께하지 않은 채 삶을 살아간다. 사랑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데 아이를 갖고 가정을 꾸리고 타인을 위해 사랑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율리에의 선택이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계속해서 곱씹어 봤을 때 여러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여운이 남는다. 율리에가 에이빈드를 향해 가는 장면에서의 연출은 너무 좋았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멈추고 세상에 에이빈드와 율리에만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고전적인 할리우드 로맨스를 보는 듯했다. "온 세상이 멈추고 너와 나 둘만 있는듯한 기분이야"라는 말이 실제로 영화적 허용으로 일어났다. 이런 연출이 너무 귀엽고 좋았다. 





 사랑을 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남에게 있어서일지도 자신에게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남에게 있어 최악이 될지라도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랑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율리에처럼 바람을 피운다는 게 좋은 선택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 선택을 함에 있어서 자신도 떳떳하지 못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결국 그 선택이 타인에게도 최악이지만 훗날 나 스스로에게 있어도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악셀을 포기하고 에이빈드에게 간 율리에가 악셀에겐 최악이지만 훗날 악셀을 찾아간 율리에의 상황은 율리에한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이다. 결국 율리에는 혼자를 택했다. 그때의 자신이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최악이 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율리에가 사진작가로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고 악셀을 만났더라면, 둘의 결말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이와 같은 사랑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모든 상황이 맞았기에 율리에와 악셀은 다시 못할 사랑을 할 수 있었고 그 둘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랑에 있어서, 연인관계에 있어서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우리가 조금 더 달랐더라면, 이런 말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다른 선택을 했기에, 다르지 않았기에 그때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었고 지금 와서 그런 사랑을 했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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