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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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는 누군가 내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세상이 망하고 사람이 다 죽었으면 좋겠어요.’
다만 지금의 나는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말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의 시간이 필요한 소원이 한 가지 추가되었다.
‘고양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내가 이런 소원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히 나비 때문이다. 나비라는 작은 고양이는 이제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이 망하고 사람이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소원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를 더 바라게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고양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하고.
최근 나비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간식이나 용품 체험단을 신청하고 하는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캣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캣맘. 사실 나는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싫어하는 편이었달까? 어릴 때는 발정이 온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아이 우는 소리 같아서 무서웠다. 그리고 커서는 거리에서 생활하며 쓰레기봉투를 찢거나 음식물 통을 엎지르는 등의 사고들을 보다 보니 고양이를 조금 꺼리게 되었다. 그래서 캣맘이라 불리는 사람들 역시 내게는 그다지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흔하게 볼 수 있는 미물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인간이 다 사라지면 저런 안타까운 삶도 없으리라는 생각만 더 자주 하게 될 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캣맘을 ‘책임 없는 쾌락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있기도 했다. 길 위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녀석들을 챙겨주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살기 위해 먹이를 받아먹는 녀석들이 귀여워서? 간혹 여러 매체를 통해 캣맘들이 중심에 있는 갈등을 보곤 했던 나는 그들에게 공감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의지로 캣맘이 된 그들은 이웃들과의 갈등을 풀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도 딱히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들이 내게는 제대로 책임도 지지 못할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그저 착한 사람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모든 캣맘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험난한 하루를 사는 길고양이들에게 밥만은 편하게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 캣맘이 되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게 되면서 발생하는 갈등을 대면할 준비가 되어있는 캣맘들도 많다. 편히 쉴 공간조차 없는 녀석들을 구조해 좋은 환경으로 입양을 보내고자 하는 따뜻한 사람들 역시 많이 있다.
다만 내가 색안경이 아니라 안대를 쓰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러하다. 세상은 어둠으로 깜깜하고 빛을 낼 작은 성냥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것에도 선의를 베풀 수가 없었다. 그러던 내가 세상의 멸망과 인류의 멸종이라는 소원과 함께 떠올리는 소원이 ‘고양이의 언어 능력’이라니.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나비와 몇 마디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나비의 화장실을 청소하며, 또는 나비가 주로 생활하는 내 방과 거실을 청소하며 나중에 나비와 대화할 때 묻고 싶었던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곤 한다.
새로 바꾼 파우치는 맛이 있었는지. 장난감은 어떤 형태가 좋은지. 네가 조금 더 크면 원목 캣타워를 맞출 예정인데 괜찮은지. 펫 빈백을 하나 사줘야 할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묻고 싶은 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늘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지금 행복하니, 나비야?’
사실 나비와 대화가 된다면 가장 묻고 싶은 것이면서도 가장 대답이 무서운 질문이기도 했다. 나를 만나서, 나와 내 가족들과 살면서 너는 행복하니? 하지만 돌아올 대답이 무섭기도 했다. 행복하지 않다는 대답을 듣게 되면 나는 괜찮을까?
최근에 나는 나비의 장난감을 몇 종류 새로 샀다. 나비는 마음에 드는 장난감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가 더 이상 쓸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낚싯대의 미끼는 여러 개를 쟁여두고 주기적으로 교체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제 곧 나는 지독히도 힘들었던 사회로 다시 뛰어들어야 한다. 그동안 나비가 혼자서도 지루하지 않게 장난감을 꾸준히 사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소원을 떠올린다. ‘고양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최근 인스타그램의 집사들이 자주 애용하는 장난감을 사러 나는 다이소에 다녀왔다. 다녀오는 길에 면접 때 신을 신발을 하나 사러 읍내 번화가도 들렀다가 왔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는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요즘은 나비랑 대화를 하고 싶어. 나비야 뭐 필요한 거 없어? 하고 물어보면 나비가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다니까? 애미야 이 간식은 맛이가 없구나. 이렇게라도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남자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양이가 말을 하게 될 날은 아마 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간절히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너의 행복을 묻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무겁고 눈가가 시큰해지는 일이다. 그렇게 남자 친구와 몇 마디 수다를 떨다 전화를 끊은 나는 신발을 사러 갔다가 가게 앞에 가지런히 세워진 밥그릇에 또 작은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아마 길고양이를 위해 차려진 것인 듯했다.
말린 생선 조금, 사료, 그리고 물그릇.
시골은 고양이들에게 도시보다 시리고 차가운 동네다. 먹을 것을 구하기는 힘들고 사람들의 정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내가 아는 사실은 그러했다. 하지만 이렇게 번화가 한가운데에 밥그릇을 내두고 녀석들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놀라우면서도 마음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긴, 나비를 보내주신 먼 이웃집의 어르신도 고양이를 잘 챙겨주시는 분이었지. 그래서 나는 정정했다. 시골과 도시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따듯한 정은 어디에도 있다. 다만 따듯하지 않은 정이 문제였다.
내가 캣맘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런 이유다. 최근 SNS를 통해 고양이를 좋은 환경으로 입양 보내려는 노력들을 자주 보곤 한다. 그리고 그 녀석들의 안타까운 이야기 속에서 자주 보이는 단어가 ‘캣맘’이었다. 고양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없이 그저 자신의 욕심대로 정을 퍼주다가 오히려 고양이들을 힘들게 하는 존재들. 아이를 구조했지만 임보도 입양도 할 생각이 없는 그들. 한겨울에 꽁꽁 얼어버린 물그릇을 갈아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간식만 퍼주던 사람들. 이게 책임 없는 쾌락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책임 없는 쾌락일까.
그래서 나는 이 소원을 마음에 품게 된 것이다. ‘고양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사실 이 소원은 ‘나비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였다. 영원히가 어렵다면 1년만이라도. 그마저도 길다고 하면 6개월. 욕심내지 말라고 하면 3개월. 힘든 소원이라면 한 달. 제발, 제발 나비랑 1주일 만이라도 대화를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힘들까요? 아니면 하루만이라도. 내가 소원을 흥정하고 있는 존재가 램프의 지니인지 다른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한 시간만이라도 나비와 대화를 하게 해 주세요. 종내에 나는 거즘 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고양이가 말을 할 수 있기를, 하고 바라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혹독한 환경에서 그저 살고자 하는 녀석들의 이야기를 아주 잠깐은 들을 수 있게 될 테니까. 이왕 정을 나눠주기로 했다면 그저 불쌍한 고양이를 챙겨주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의 하루에 잠시나마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나비야, 행복하니?’
그래도 나는 저 질문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누군가가 고양이가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생각해보자. 그 순간이 10년이든 1시간이든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고민할 것이다. 나비야, 행복하니? 그러다 나비와 대화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겨우 물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고양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때, 내 앞에 있던 작은 고양이 나비는 그르릉거리며 내게 몸을 부벼올까? 아니면 그만 뒤돌아서 타박타박 멀어질까?
그렇다면 집사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고양이는 이것이 궁금하지 않을까? 집사야, 너는 나를 만나서 행복하니? 화장실의 감자를 캐고, 낚싯대를 흔들어주고, 물을 얼마나 마셨는지 확인하고, 아픈 곳은 없는지 관찰하는 하루는 행복하니?
혹여 나비가 나의 행복이 궁금해서 내게 질문한다면 나는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행복해.”
내 편의를 포기하는 것.
내가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갖는 것.
부지런한 사람이 되는 것.
지겨운 사회로 돌아가는 것.
다 내가 싫어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번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꼬리를 세우고 다가와 반겨주는 작은 고양이가 지친 하루를 다독여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