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는 꾸준히 쓰자
일기를 다시 써야겠다고 다짐한 시점, 주변을 돌아보니 봄이 지척에 와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쓴 일기가 겨울이 막 찾아오던 시점인 것을 확인하고 웃음이 났다. 실업 급여를 받으며 집에서 휴식을 즐기던 시절에는 고인물 마냥 평온하기만 했던 그 날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지난 겨울간 많은 일을 겪으며 비로소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이다, 아, 나의 평온하던 날들이여.
나는 지난 겨울간 결국 취업에 성공했다, 말도 안되는 스케쥴을 강요하는 이상한 병원, 인수인계도 수습 기간도 없이 일을 떠넘기는 작은 회사,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나는 아주 만족스러운 근무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다. 또래의 젊은 직원들, 퇴근 시간을 칼 같이 지켜주는 상사. 심지어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모두 고양이 집사라는 것까지.
나비는 그 동안 많이 자라버렸다. 캣초딩을 넘어 이제는 캣중딩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춘기가 왔는지 종종 탈출을 감행하여 식구들을 놀라게 하는 이 작은 짐승은 이제 우리집에 완벽하게 스며들어 버렸다. 아빠와의 트러블은 생각도 나지 않을 지경이다,
나는 이제부터 일기를 쓰지 못한 지난 겨울의 이야기를 하나씩 다시 기억에서 끄집어내 기록하고자 한다. 우선 커다란 이벤트들을 정리해본다.
1.취업
2.남자친구
3.나비
4.가족들
우선 1번은 이미 서두에 적은 바와 같다. 몇 군데 회사를 돌아다니다 지금의 회사를 만났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모두 고양이 집사라 초보 집사인 나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심지어 먹지 않는 간식들이나 사료 샘플도 공유 받았으니, 이보다 얼마나 더 좋아질 수 있으랴.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면허도 차도 없는 나를 가족들이 출근시켜줘야 하지만 그 외에 만족스럽지 않은 것을 아무것도 없을 정도다,
그럼 2번으로 바로 넘어가자.
남자친구는 지난 1월 중순, 경기도의 일을 모두 정리하고 내려왔다. 나는 나 대신 쉼 없이 일해온 남자친구가 느긋하게 쉬길 원했지만 성격이 그리 느긋하지 못한 이 친구는 결국 한달여를 쉬고 2월 말경부터 취직하여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 남자친구가 완전히 해남에 정착한 후에 우리 집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조금 더 시끌벅적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좋은 일이었다, 사실 오늘도 남자친구와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근처 바닷가에 다녀왔다, 김밥을 사고 피크닉처럼 느긋하게 다녀왔다. 햇빛이 너무 좋았지만 바람이 차가워서 조금 고생하기는 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기록하기로 하자.
그럼 대망의 3번이다. 내가 기록을 위한 수단으로 일기를 선택하게 만든 주인공, 나비의 이야기다. 사실 나는 처음에 노동을 결심할 때까지만해도 좋은 사료, 좋은 간식, 좋은 영양제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비는 아직 어리고 더 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렴하게 장만해서 쓰고 있던 캣타워가 흔들리지 시작한 것을 알아차린 순간, 나는 또 다른 지식을 하나 얻게 되었다. 아, 아이는 자라고 자라는 만큼 환경도 달라져야 하는구나. 유명 브랜드의 캣폴을 거의 풀옵션으로 구매했다, 통장이 몹시 아파했다.
나는 취직 후 나비의 사료도 바꾸었다, 기호성 테스트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여러 가지 사료를 시켜서 먹여보고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파우치와 캔도 전부 바꾸었다.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퇴근 후 집에 오면 도착한 택배를 뜯어 기호성 테스트를 하고 잘 먹는 파우치와 캔을 주문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일주일 정도를 걸려 파우치에 정착을 하는가 싶었는데 막상 대량 주문을 하니 이 녀석이 먹지를 않았다, 결국 다른 파우치를 주문해야 했다.
나비는 귀신같이 비싼 파우치를 골라냈다. 이건 잘 먹네? 하면 파우치 하나당 4천원에서 5천원이 기본이었다, 나비는 하루에 한 개의 파우치를 먹는다. 한 달로 계산하면 파우치 값만 12만원이 넘어간다. 게다가 같은 종류의 파우치를 연달아주면 잘 먹지 않다보니 가끔 특식처럼 먹이는 파우치도 있어야 했다, 캔은 다행히 3천원이 초과하지 않는 선에서 먹어주었다. 키튼 사료가 1kg 당 2만원에 육막하니 나비의 밥 값으로 나가는 비용이 월에 30만원 정도가 되었다. 거기에 유산균, 매일 먹는 영양제, 그리고 구강 영양제까지. 가끔 먹는 간식까지 계산하니 얼추 50만원이다.
나는 또 한 번 깨닫는다,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에는 마음보다 더 무거운 지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사실 내가 나비와 함께 살게 된 이유의 시작은 오로지 책임이었다. 내가 불쌍히 여긴 이 작은 짐승은 사냥이라곤 낚시대를 잡아채본 것이 다인 야생의 약자가 되어버렸으니. 나는 그 감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도덕적 잣대가 생길 즈음에 ‘책임’에 대해 배운다. 나는 여태 체감하지 못했던 그 말의 무게를 나비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거기에 책임만큼 무거운 지갑 사정까지. 그 모든 것이 생명의 무게라는 것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그것은 이미 나를 떠나 고양이 별로 간 애옹이, 그리고 우리집 마당과 축사를 오가는 고양이들로 더더욱 돋보이게 된다. 나는 책임 없는 쾌락을 싸지르지 않기 위해 우리집 마당냥이들의 사료를 매달 따로 주문하고 있다. 부디 우리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배고픔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처음에는 두 마리 정도였던 녀석들도 이제 다섯 마리쯤 되었다. 우리집이 맛집으로 소문이 난 까닭이다. 나는 나비가 먹지 않는 파우치와 간식, 츄르를 마당의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사실 이건 나비가 베푸는 의도치 않는 친절이긴 했다. 하지만 길에 사는 녀석들에게 파우치와 캔은 사치였을테니, 우리집이 맛집으로 소문이 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비는 줘도 안먹는 파우치나 간식을 녀석들은 잘 먹어주었다. 나는 이 문장을 적으면서도 슬퍼졌다. 나비의 아주 단순한 실증과 싫음이 녀석들에게는 소소한 행복일 수 있다는 점. 그래서 나는 가능하다면 아주 오랫동안 마당냥이들의 물주가 되어주고 싶다. 그러려면 당분간은 계속 일을 해야 하겠지만 나는 내 선택에 후회를 하지는 않는다.
나는 원래 먹을 것에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아주 가끔 간식거리들을 주문해 택배로 받는 것 외에는 딱히 돈을 쓰지 않는다. 시골의 작은 회사라 아무도 차림새에 신경쓰지 않으니 옷을 살 일도 없다. 그저 내가 서울에서 지낼 때 당연하게 쓰던 지출이 이제 나비의 것이 되었다는 것 말곤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월세도 내지 않고 약간의 생활비만 매달 엄마에게 내고 있으니 총 지출은 여전히 서울에 살던 시절보다 적다. 그러니 후회할 일도 딱히 없다고 봐야겠다.
그럼 여기에 4번도 조금 끼얹어 보자. 우리는 이제 가족이 되었다. 전에는 가족 중 일부가 나비를 받아드리지 않아 모자란 형태의 가족이었다면 이제는 그저 가족이다. 아빠도 이야기 하기를 ‘정을 주는 바람에 내쫓지도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비는 유독 저를 싫어하던 아빠를 아는지 그렇게 애교를 부리곤 했었다. 낮잠 자는 아빠 옆에 몸을 웅크리고 붙어자기도 하고 종래엔 품에 안겨 잠들기에 성공해버렸다. 이후 아빠는 나비를 미워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아빠 차가 들어오는 소리만 나면 내 품에 안겨 방으로 도망다니던 시간이 있었다곤 생각도 할 수 없게 두 사람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새벽마다 우다다 거리는 나비에게 괜히 한 마디 하더라도 나가라고는 말하지 못하게 되었고 나비의 새 캣폴은 거실 한쪽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을 지경이다. 이제는 누가 뭐라도 이 집의 고양이인 것이다.
내가 출근을 하며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가족들이 나비를 더욱 신경쓰게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일을 하고 있으면 카톡! 하는 알림과 함께 나비의 사진이 전송되어 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걱정이 되고, 내가 없이 긴 시간을 지내는 게 외롭진 않은지 안쓰러워 하면서 가족들은 내가 노동을 하는 시간 내내 나비를 살펴주었다. 식사 자리에선 내가 없이 나비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서로 이야기를 해주며 왁자지껄하게 보낸다. 나는 그래서 지금 상당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보니 또 생각이 나는 것이다,
나비야, 너는 행복하니?
너에게 영원히 대답을 듣지 못할 그 질문 하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