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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i Apr 04. 2024

히말라야가 나를 부른다.

거칠부의 『나는 계속 걷기로 했다』를 읽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처럼, 사람과 장소 사이에도 더 깊은 연이 있는 듯하다. 나에게는 티베트와 히말라야가 그렇다. 설산과 고원을 좋아하는 나는 고도가 3,500~4,000m 이상 넘어가면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산이나 그런 건 아니다. 로키 산맥이나 안데스 산맥,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는 조금도 감흥이 없다. 오로지 히말라야에만 가슴이 쿵쾅대는데 아마도 전생에 히말라야에서 살았나 보다.


 산 이야기를 읽고 싶어 도서관에 갔고, 거칠부의 『나는 계속 걷기로 했다』를 집어 들었다.

 거칠부. 신라 시대 장군 이름을 닉네임으로 쓰는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7년 인도 북부 여행을 준비하면서이다. 블로그에서 여행 정보를 찾다 알게 됐는데 빼곡히 쌓은 히말라야 트레킹 기록은 그녀가 얼마나 산에 진심인지 알려주었다. 그 기록들이 엮어져 책으로 나왔고, 『나는 계속 걷기로 했다』는 네팔 히말라야 횡단 이야기를 담은 그녀의 첫 책이다.


 그레이트 히말라야 트레일(GHT, Great Himalaya Trail)은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 전체를 따라가는 트레킹 루트다. 2002년 모든 히말라야 지역이 개방되면서 영국 산악인 라빈 부스테드(Robin Boustead)에 의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4,200km에 달하는 트레일이 구상됐다. 그는 그중 가장 핵심인 네팔 히말라야 하이루트(High Route) 구간 1,700km를 2011년 150일 만에 완주했고, 이후 수많은 산꾼들이 네팔로 날아가 새로운 루트를 만들어냈다. 거칠부는 2년에 걸쳐 GHT 네팔 구간을 완주했다.


 작가는 180여 일간의 여정을 담담한 필체로 담았다.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산에 있는데 좋은 일만 있을 수 있을까? 자연에 대한 경외,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가이드, 포터와의 갈등, 외로움과 두려움, 트레킹 막바지의 지루함까지 솔직하게 담겨있었다.


 “누군가는 이 길을 걸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지금 걷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앞으로 걷게 될 것이다. 어디에서 무얼 하듯, 필요에 의해 거기에 있을 뿐 특별함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 누구든 각자의 길을 걸으면 될 뿐, 그거면 족하다.”

p.370, 『나는 계속 걷기로 했다』.


 남과 다른 특별한 경험을 내세우지 않고 겸허히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멋져 보인다. 저자는 세 권의 책을 더 냈고, 여전히 일 년의 반을 히말라야에 머물며 걷고 있다.



 내가 처음부터 산을 좋아했던 건 아니다. 어린 시절, 등산을 좋아한 아버지 손에 끌려갈 때는 어차피 내려올 걸 뭐 하러 올라가나 싶었다. 이런 마음은 대학 때까지 계속돼서 지척에 관악산이 있었는데도 다섯 번을 안 올랐다.


 산을 사랑하게 된 건 2009년 세계여행 중 네팔에 가면서부터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산이나 한 번 타고 가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올랐다가 산과 사랑에 빠졌다.


 우뚝 솟은 산은 차라리 성스러운 신전 같았다. 고고하고, 아름답고, 위용 있는 설산에 마음을 빼앗겨 그제야 어릴 때 숱하게 산에 데려가준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산이 왜 좋냐’고 물으면 한없는 마음을 조악한 단어 몇 개로 담아낼 길이 없어 ‘그냥’이라고 답했다. 이유를 찾자면, 산에서는 타인과 나 사이의 긴장되는 조율을 하지 않아도 돼서, 온전히 나인 채로 있을 수 있어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대자연에 압도되는 경이로운 느낌이 좋아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더 깊게는, 내가 곧 ‘그것’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까?


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그냥 그것’


 오래전부터 내가 고원에 가고, 고산에 가서 느낀 것들이 바로 ‘나’를 만나기 위함이었고,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나’가 그냥 그것인데 이걸 어떻게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서울 가까이 있는 북한산과 관악산, 어지간한 국립공원 산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유난히 무기력하고 지루한 지난여름에는 매 주말마다 산으로 달려갔다.


 6월 말, 출장 일정이 취소돼 지리산에 가기로 했다. 지리산은 ‘어머니 산’으로 여겨지는데 지리산에 가면 엄마 품에 안긴 듯 다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우리나라 산 중 가장 좋아한다.


 그런데 날씨가 문제였다. 성삼재행 야간 버스가 출발할 때도 비가 왔지만 산에는 비가 오지 않기 바라며 떠났다. 버스에서 내리니 천둥번개까지 동반한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산에 발 한 번 못 들이고 이대로 집에 돌아가야 하나?’ 울적하던 차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같은 버스에 등산 고수들이 타고 있던 거다. 40년 가까이 산 탄 엄마뻘, 이모뻘 나이의 산 선배님들은 이 정도 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장비를 챙겼다. 조금 있으면 갤 거라고 한 것처럼 정말로 비가 그쳤고 1박 2일 산행 내내 선배들을 쫓아다녔다.


 내가 중히 여기는 걸 소중히 여기는 이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생기는 걸까? 산을 사랑하는 선배들 보기에 똑같이 산을 사랑하는 내가 예뻐 보였나 보다. 나는 예전에 무릎을 다친 적이 있어 하산 때면 유달리 힘들다. 선배가 말하길, 무릎도 안 좋은데 비 내리는 날 밤에 혼자 지리산에 가는 건 산을 정말 좋아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나중에 같이 네팔에 가자고 했다.



 네팔!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히말라야는 2010년 안나푸르나 라운딩 이후 가지 못했다. 함께 갈 팀을 꾸리고, 믿을 수 있는 여행사와 가이드를 찾는 게 막막하게 느껴져 선뜻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내년 4월에 가기로 한 선배들의 트레킹 일정에 나를 초대해 준 것이다.


 지리산에 간 건 이 사람들을 만나, 히말라야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2023년에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변화가 생기기 간절히 바랐다. 꽉 막힌 내 삶에 물줄기가 트여 새로운 곳으로 나를 이끌어주기 바랐는데, 다시금 가슴이 쿵쾅거렸다. 잊고 있던 보석을 발견하고, 사라진 에너지가 채워지는 기분이다.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산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년 네팔 트레킹은 내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리란 예감이 든다. 그리고 나는 아마 이후로도 끝없이 히말라야의 길 위에 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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