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배트맨
드디어 맷 리브스의 새로운 배트맨이 귀환하였다. 캐스팅부터 제작 과정까지 어느 하나 순탄하지 않았던 것이 없던 <더 배트맨>은 거대한 제작 규모를 등에 업고 찬란히 등장했다.
<더 배트맨>이 개봉하기 전부터 이목을 끌었던 이유는 분명히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때문이다. <다크 나이트> 이후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는 마치 놀란 감독의 트릴로지에 귀속되어있는, 혹은 이미 완결된 인물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기에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 속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이 크리스찬 베일의 배트맨을 능가할 수 있는지, 또한 폴 다노의 리들러가 히스 레저의 조커에 필적할 정도의 임팩트를 가졌는지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박하지만 동시에 당연한 관객들의 수순이었다. 허나 <더 배트맨>은 이전의 배트맨 작품들과는 다른 노선을 선택했고, 그 전략은 충분히 성공적이어 보인다. 놀란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가 배트맨에 대한 이념적 접근이라면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은 시의적절한 장르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우선 <더 배트맨>은 시각적으로 독특하다. 어쩌면 배트맨, 혹은 더 나아가 DC 코믹스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하드보일드의 옷을 입힌 <더 배트맨>은 누아르적 터치로 점철되어있다. 특히 오프닝 부분에서 <더 배트맨>이 서스펜스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잘 드러나는데, TV에서 나오는 빛이 밝게 비추는 고담시 미첼 시장이 옆으로 자리를 비키자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리들러의 형체가 등장한다. 다만 영화는 리들러의 모습을 비출 때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예컨데 음향이나 음악, 혹은 조명으로라도 점프스케어를 줄 수 있는 부분이지만 <더 배트맨>은 특이하게 관객을 전혀 놀래키지 않는다. 그 뒤에 나오는 리들러의 오버 숄더 씬에서도 그렇다. 이후에도 종종 리들러의 오버 숄더 씬이 등장하는데, 오버 숄더 씬은 매우 평상적인 대화의 상황에서 자주 쓰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서스펜스를 매우 조심히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관객이 놀라는 부분은 리들러가 시장을 살해하는 순간이다. 영화는 침묵 속에서 갑작스레 울리는 리들러의 비명과 그 이후 이어지는 클로즈업으로 시청각적 충격을 꾀한다. 어떤 하나의 스케어 시그널 뒤 이어지는 시각적 그로테스크. 이것이 <더 배트맨>을 관통하는 서스펜스의 방법론이다.
이런 <더 배트맨>의 전략 뒤에는 비범할 정도의 만듦새가 뒷받침하고 있다. 작품의 요소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우선 작품의 연출은 흠잡을 곳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작중 렌즈 카메라나 망원경의 시야를 복제한 연출이나 게임 그래픽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매우 섬세하게 소화해냈다. 심지어는 SNS 라이브 장면도 작품의 분위기를 깨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나 <#살아있다> 같은 작품 속에서 SNS 소통 장면은 모두 독으로 작용했고, 그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힘든 연출 방식임이 분명하지만 <더 배트맨>에서는 신기하게도 아주 적절히 사용되었다. 액션 연출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는데, 마지막 리들러 잔당과의 액션 시퀀스가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지만, 장르 자체가 폭력 그 자체보다 그 폭력의 잔혹성을 드러내기 위한 방향성을 가지기에 큰 문제가 되어보이진 않는다.
<더 배트맨>의 연출은 대부분의 장면에서 모두 빛을 발하는데, 그중 특히나 놀라웠던 부분은,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심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단연 배트모빌 장면들이다. 장면과 사건 자체를 전달하기 위함으로 본다면 효과적인 연출이라 칭하기엔 부족함이 분명하다. 하지만, <더 배트맨>의 펭귄 추격 시퀀스는 표현주의적 연출의 정수이다. 애초에 영화의 설정이 이를 반증한다. 무슨 말이냐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와 비교했을 때 <더 배트맨> 속 브루스 웨인의 기술은 하등하다. 고의적으로 다운그레이드시킨 듯한 인상마저 풍기는 배트맨의 과학기술은 그 자체만으로 압도적이지 못하다. 예를 들어 단편적으로 배트모빌만을 비교해보아도 압도감의 차이는 자명히 느껴진다. 그렇기에 <더 배트맨>에서의 배트맨은 현상 자체의 스케일을 살리는 연출로 그 충격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 결국 맷 리브스가 선택한 옵션은 표현주의이다. 작중 배트맨이 배트모빌을 타고 펭귄을 쫓는 장면은 짧은 씬들로 조각나있고, 시각적인 전환의 흐름도 매우 짧다. 마치 사건의 역동성을 카메라에 무형적으로 담은 듯하다. 결과적으로 이 시퀀스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연출로 남았다.
조명도 짚고 넘어가자면, 특이하게 <더 배트맨>에서의 조명은 일반적인 영화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쓰였다. 일반적으로 조명은 어두운 부분과의 대비를 위해 사용된다. 주변부가 어두운데 한 부분이 밝아지도록 조명을 설치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부분에 강조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밝음을 위해 어두움을 활용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더 배트맨>의 조명은 그 관계가 완전히 전환된다. 예를 들어 시작의 장례식에서 브루스 웨인이 리들러를 흐릿하게 올려다보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리들러의 뒤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밝게 비추고, 리들러는 그 빛에 가려 완전히 어둡게 보인다. 이때 관객은 밝음 중심에 위치한 어두운 부분에 집중하게 된다. 조명은 어두움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마치 변성현 감독의 <킹메이커>와 같이 <더 배트맨>은 빛을 활용한 어둠의 강조를 통해 통상적 시각의 그로테스크한 반전을 만들어냈다.
다음은 작품의 촬영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작품 내내 드러나는 과감한 아웃포커싱의 사용이다. 피사체를 화면의 중앙에 배치해 나머지 주변부를 흐리는 기법은 작품의 연출과 맞물려 관객의 시야를 통제한다. 그러다 심지어는 초점을 렌즈 아주 가까이에 옮겨 화면 전체가 흐려지게도 만든다. 리들러가 콜슨 검사를 습격할 때나 리들러의 추종자가 배트맨의 이마에 총구를 댈 때가 대표적으로 그렇다. 이러한 아웃포커싱은 우선 표현 수위의 조절을 위함이다. 장르영화로는 드물게도 15세 이상 등급을 받았는데, 영화 중간의 잔인한 묘사를 현명히 살려내기 위해 아웃포커싱을 활용했을 것이다. 마치 홍원찬 감독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속 패스트 포워드처럼. 게다가, 초점이 나가 흐릿한 형체의 움직임으로 묘사하는 잔인함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을 가지고 있고, <더 배트맨>에서는 그 매력이 십분 발휘되었다. 그러다보니 아웃포커싱이 작위적인 인상을 주지 않고 도리어 분위기의 심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만듦새 차원으로 약간의 아쉬움은 음악과 디자인에 있다. 우선 음악은 영화의 장르성에 비해 너무 평이했다. 오히려 음악 탓에 훌륭한 장면들이 평범한 드라마로 전락한 순간들이 종종 있다. 또한 그 외의 인상깊은 음악들도 조니 그린우드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데어 윌 비 블러드>나, 특히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 보였던 조니 그린우드의 기이한 사운드에서 주로 들리던 현악기의 불협화음은 <더 배트맨>에서 조금의 기시감을 야기한다. 디자인적으론 대부분이 만족스러운 가운데, 메인 빌런 중 하나인 팔코네의 외형적 디자인이 작중 중요도에 비해 빈약했다. 의상이나 캐릭터성에서 인물이 더욱 짙게 드러났다면 위압감이 훨씬 컸을 것이다.
지금껏 영화의 형태를 다루었다면, 이제는 그 안을 들여다 볼 차례이다. <더 배트맨>의 각본 또한 그의 만듦새와 비슷한 정도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전반적으로 훌륭하지만 약간의 아쉬운 뒷맛을 남기는 정도. 많은 뛰어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평이함을 넘어섬에는 의심이 없으나, 그만큼 완벽함은 드물기에 <더 배트맨>의 각본은 어느 임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꼴이다.
우선 <더 배트맨>의 각본은 야망으로 가득 차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종결된 듯한 배트맨의 서사를 되살리는 데에 장르적 요소까지 더한다니. 물론 <더 배트맨>은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에서의 배트맨에 관한 성찰을 답습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논란 작품에서의 배트맨은 살상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대표되는 특정 형태의 좁은 정의를 실현시키는 행위에 대한 딜레마를 주로 다뤘다면 <더 배트맨>에서는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관찰자 테마’가 서사의 주를 이룬다. 그 대신 총을 사용하지 않는 배트맨의 소신은 작중 고든과의 대화에서 잠깐 등장하는 정도이다. 도리어 영화 초반 나레이션에서 등장하는 배트맨의 관찰자적 자세는 본작의 빌런인 리들러의 서사와 혼합되어 새로운 논점을 만들어낸다.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도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가까워지는 것, 특히 망원경의 시야로 시작해 배트맨의 가면 쓴 얼굴 클로즈업으로 마치는 영화는 그 촬영과 편집으로 서사에 힘을 얻는다. 그 때의 서사가 바로 ‘관찰자 테마’이다. 공포와 폭력의 관찰자에서 희망과 구원의 영웅으로 변화하는 것이 바로 이번 배트맨의 메인 플롯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본의 구조와 이를 구현한 촬영도 고담의 비밀과 작중 인물 혹은 관객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생기는 몰입을 활용해 배트맨의 성장 과정을 기술적으로 반영하였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 배트맨의 관찰자 테마는 빌런인 리들러의 존재 덕분에 성립할 수 있었다. 리들러의 캐릭터는 무엇보다 그만으로 흥미롭다. 디자인적으로는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에서 나오는 조디악을 크게 닮아있다. 복면과 의상, 목소리와 거친 숨소리. 특유의 시그니처와 암호문까지. 그렇기에 리들러는 조디악과 마찬가지로 큰 영화적 매력을 지닌다. 이름 그대로 수수께끼를 즐겨 내는 성격과 범행 방식도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데 일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들러의 수수께끼가 더 많았다면 어땠을까도 싶지만 어쩌면 현재의 조율 방안이 영화의 흐름을 위한 최선이리라.
더 나아가 리들러라는 인물은 배트맨의 서사를 촉발하는 요소이다. 리들러가 내러티브 속에서 가지는 상징성은 고전적인 배트맨 서사 속에 시의적 관점을 주입한다. 리들러의 배경이나 동기는 크게 특별할 것이 없다. 개인적인 원한에서 사회적 불만 표출로 확장되는 빌런의 동기는 클리셰적이다. 중요한 지점은 이렇게 단편적인 부분이 아닌, 그 내부에 깔려있는 심부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드러나는 리들러의 최종 계획에서 우리는 리들러가 오직 개인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곧 영화의 중간에 종종 나타나는, 리들러 사인을 들고 재판을 소리치는 시민들의 연장선 상에 있다. 조 크라비츠 역의 캣우먼도 지나가듯 리들러가 시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특이하게 리들러는 기득권층의 비리를 들춰내기 위한다는 명분을 등에 업고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고담시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콜슨 검사를 죽일 때 리들러는 실시간 SNS 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보여주었으니, 흔한 여느 빌런 캐릭터처럼 과시욕의 표출과는 결이 다른, 어떤 한 정치집단을 대표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허나 가면을 벗은 리들러의 모습은 한없이 초라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리들러가 한 개인이 아닌, 가면을 쓴 공통된 자아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리들러는 우리에게 아이러니를 제공한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이덴티티를 없애기 위함이지만, 리들러에게 가면은 도리어 아이덴티티를 창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아캄에서 했던 배트맨과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또한 가면 속의 모습이 매우 초라하게 연출된 것을 보았을 때 가면이란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시사한다. 이러한 가치관하에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미 아이덴티티가 존재하는 한 개인이 왜 가면을 썼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마 “아이덴티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리들러는 가면을 쓰기 전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았다. 아이덴티티가 없던, 개개성의 몰락이다. 그렇기에 리들러의 가면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새로운 자아이며, 동시에 타인과의 유대감을 나타내는 증표이기도 하다. “가면 속의 나는 비루하나, 가면 밖의 나는 가치있는 인간이다.”
리들러가 제공하는 아이러니는 우리 사회의 내면을 닮아있는 듯하다. 가면이란 익명성, 특히나 인터넷과 커뮤니티 문화 속의 익명성일 것이다. 현실의 무력함과 상대적 박탈감을 익명성으로 극복해 인터넷 속 삶에 만취하는, 급기야 현실의 삶보다 인터넷 속 삶이 더욱 가치있다는 믿는 인간군상. 몇 년 전부터 수면 위로 부상하여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이러한 인간군상이 리들러의 모습인 것이다. 이들은 가면 속에서 매우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언행을 보이며, 서로의 무모함에 동조한다. 도리어 그런 것들을 치켜세우기도 한다. 일부는 정치적 세력으로 결집하기도 하고, 일부는 종합적 대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대부분은 가면 사회 외부 세계에 대한 혐오를 내뱉는다. 리들러가 고담 시민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미 우리 사회에 그 실증은 널려있기 때문이다.
<더 배트맨>은 이러한 우리 사회를 꼬집는다. 가면이 만들어내는 아이덴티티에 숨어 폭력을 표출하는 집단. 기시감이 넘친다. 그러나 <더 배트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좁은 정의의 실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다. 배트맨이 악당들을 때려눕히는 행위를 보면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는가. 단순한 폭력의 카타르시스가 아닌, 배트맨이 보이는 좁은 정의의 실현에서 비롯된 카타르시스이다. 이런 좁은 정의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대해 <더 배트맨>은 날선 반증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리들러와 그 잔당들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리들러의 추종자 중 한명이 가면을 벗고선 ‘나는 복수다’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복수라고 소개하는 배트맨의 말을 그대로 따라한 것인데, 이 순간 브루스 웨인과 관객 모두 영화의 시사점을 깨닫게 된다. 배트맨의 정의와 리들러의 정의가 다르지 않다는 시사점. 영화에서 등장하는 망원경 장면도 그를 바라보는 주체가 리들러일 때와 배트맨일 때의 차이가 전혀 없는 연출이나, 리들러가 배트맨과 함꼐 자신의 계획을 실행해나갔다고 이야기할 때에도 암시되어있었으나 후반부 리들러의 추종자가 던진 한 마디는 그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큰 충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충격이 스크린 밖으로 우리를 관통한다. 우리는 영화 너머 가지고 있던 배트맨에 대한, 또 좁은 정의에 대한 환상과 인터넷에서 혐오를 쏟아내는 무리들에 대한 경계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아주 날선 태도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더 배트맨>은 시의적 상징을 담아낸 빌런의 설정, 주인공의 사유를 위협하는 성장의 요소, 또한 관객의 비약을 꿰뚫는 날선 논증으로서 리들러를 성공적으로 기용해냈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을 초월하는 경이로움이다.
그래도 <더 배트맨>의 각본은 몇가지 흠집이 남아있다. 우선 토마스 웨인과 관련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반전이 빈약하다. 토마스 웨인이 자신의 사생활을 보도하려던 기자를 묵살시키려 팔코네에게 부탁했으나 팔코네가 그 기자를 죽여 약점을 잡으려던 함정에 넘어갔다는 알프레드의 설명에 따르면, 과연 토마스 웨인이 리들러가 죽인 이들만큼 부패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만일 알프레드가 객관적인 사실을 브루스 웨인에게 말해준 것이라면 고담 시에 팽배해있는 권력의 부패에 토마스 웨인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전혀 없다. 또한 마찬가지로 브루스 웨인에게 이 사실이 끼치는 영향도 불분명하다. 만일 초반부에 브루스 웨인이 아버지가 남겨준 가업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거나, 아버지의 유산을 유일한 정의로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었다면 물론 토마스 웨인의 범죄 사실 (혹은 의혹)이 브루스 웨인에게 큰 충격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브루스 웨인은 애초에 토마스 웨인의 그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있다. 물론 그의 아버지에 대한 환상도 존재하지만, 한 기자의 죽음에 간접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설명이 과연 이때까지 브루스 웨인 자신의 신념을 위협할 정도의 큰 충격을 주었는가. 이 또한 전혀 아니라고 본다. 위에서 상술헀듯 초반에 브루스 웨인이 아버지의 유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웨인 기업의 일을 하거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관객에게 보였다면 그 서사의 설득력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더 배트맨>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연출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온 리들러의 영상은 관객에게 ‘이걸 보고 놀라야 하는 것인가’ 하는 당황스러운 인상을 남긴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은 관객에게 충분한 충격을 선사하는 데에 실패했다.
리들러의 서사에도 약간의 문제는 있다. 리들러의 배경이 자세히 설명됨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리들러의 동기는 명확하지 못하다. 리들러가 브루스 웨인을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히려 고담시의 거짓을 시민에게 알리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방향성이 비교적 명확했을 테지만 영화에선 토마스 웨인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근본 동기인 것으로 보인다. 우선, 왜 토마스 웨인인가. 토마스 웨인이 만들어낸 재개발 펀드가 거대한 비리의 트리거가 되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토마스 웨인의 죽음은 잘못이 없다. 정조가 세도 정치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는가. (역사적 책임은 있지만 말이다.) 되려 리들러는 토마스 웨인이 없었다면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리들러는 이상하게도 토마스 웨인을 모든 비리에 대한 중심 원흉으로 삼고 있으며, 급기야 새로 당선된 시장 후보에게도 화살을 돌린다. 리들러의 범행은 인상깊지만, 그 동기가 대응되지 못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처럼 동기의 상실도 아니다. 그저 이상하고 비약적인 동기인 것이다.
또한 리들러는 이 모든 사실, 특히나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던, 아는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했던 팔코네의 마로니 밀고 사실은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 심지어는 그의 최측근인 펭귄도 이를 알지 못했다. 그런 비밀스러운, 또 도시 전체가 덮으려한 사실을 고아원 출신의 뒤틀린 인격을 가진 이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는가. 각본의 중심 뼈대에 이런 디테일을 놓친 것은 전체적으로 높은 퀄리티를 깔끔하지 못한 정도로 끌어내리는 옥의 티이다.
결국 전반적으로 <더 배트맨>의 각본은 두 가지의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배트맨과 리들러, 그리고 브루스 웨인이다. 핵심은 각각 전개되던 스로리라인이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인데, 그 부분에서 살짝 헐거워진 듯하다. 필자에게 이러한 모습들은, 맥거핀의 필요성으로 다가왔다. 너무 많은 요소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려고 하다보니 이상하게 꼬인 형태이다. 불필요한 것들은 그대로 두고, 핵심적인 소재들만을 엮어 하나의 줄기를 만들어내면 더욱 완성도 높은 각본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덧붙이자면, 하드보일드 장르에서 맥거핀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인간이 가지는 근원적 한계에 대한 회의라는 장르적 표현에서 비롯된, 관객과 작중 인물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실존적인 상징성을 가진 소재이기 때문이다. <더 배트맨>에서도 그러한 터치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은, 이렇게나 잘 만들었음에도, 여전히 약간 부족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훌륭한 제자일수록 꾸짖음이 잦은 법이다. <더 배트맨>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착수된 프로젝트이고, 캐스팅도 지속적으로 바뀌었고, 루머와 유출에도 심하게 시달려왔으며, 스태프와 배우진의 코로나19 감염 사태에 제작기간도 걷잡을 수 없이 길어졌다. 20억 달러의 천문학적인 제작 비용을 들여 만든 작품인 만큼 힘도 많이 들어갔을 테고, 탈도 그만큼이나 많았다. 프로젝트 자체도 절대 쉽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배트맨의 서사를 다시 꺼내 무슨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꾸준히, 그리고 자주 소비되던 캐릭터를 새롭게 대중 앞에 등장시키는 작업은 무모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완성도와 스케일, 또 개성과 창의성을 담아냈다는 것은 경이로운 성취이다. 약간의 아쉬움을 제외하면, 우리가 찾던 배트맨의 성공적 귀환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1877830/mediaviewer/rm3550344193?ref_=ttmi_mi_all_sf_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