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이번 글에서 다룰 작품은 국내에서 거의 다뤄진 적이 없는, 매우 오래되었고도 생소한 작품이다. 바로, 데렉 저먼의 <비트겐슈타인>이다.
영화는 통상적으로 사실적인 묘사와 개연성으로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쇼생크 탈출>을 보며 감옥 속 허구의 인물에 대해 감정을 이입하고 결과적으로 카타르시스를 얻게 된다. 혹은 감동을 얻을 수도 있고,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가 결과적으로 ‘좋은 영화다‘라고 평가한다. 반대로, 어떤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곧 그 영화가 관객을 감정이입시키는 데 실패했거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사실 모든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에 대한 고전적인 관점은 곧 감상자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글에서 얘기했듯이, 모든 예술을 답습을 타파하며 진화한다. 마르셀 뒤샹은 <샘>이라는 작품으로, 쇤베르크는 12음기법의 완성을 통해, 니체는 ‘위버멘쉬’의 제창을 통해 각각의 예술 분야에 팽배해있던 고전적 관념에 도전했다. 물론 이뿐만 아닌 많은 예술가들이 관습에 돌을 던져왔고, 그 돌은 역사에 의해 패러다임의 전환을 불러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특히나 ‘실험영화‘라는 이름의 돌은 예술의 패러다임 전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예를 들자면,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저헤드>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이면서 대중적인 실험영화이며, 기존의 고착화된 문법을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 영화들이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 또한 실험영화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실험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비범한 실험은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바로 ‘아방가르드‘와 ‘미니멀리즘’이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전위적’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예술에 있어 매우 실험적이고 급진적이며 관습을 거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 쇤베르크의 12 음기법은 기존의 화성학에서 벗어나 복제, 전환 등의 다분히 수학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음계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하다. <비트겐슈타인>이 가지는 실험의 주요한 정신 중 하나가 바로 ‘아방가르드‘이다. 예를 들어 카페에서 주인공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영화로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일반적인 방식은 ‘카페’라는 공간의 통상적인 이미지를 복제하여 화면에 옮기고, 그 화면 속에서 주인공이 커피를 마시는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복제된 배경 속에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 혹은 어떤 다른 주관적인 잣대를 이 장면에 대입시킨다. 이때 관객이 그 장면에 몰입할 수 있는 여부는 복제가 얼마나 정교하게 이루어졌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어법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카페‘라는 공간을 상상할 때, 테이블, 의자, 책장, 메뉴판을 연상한다고 해보자. 이 요소들은 우리가 ‘카페’라는 공간을 인식하는 데에 있어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요소들을 통해 우리는 ‘카페‘라는 공간을 어떤 다른 공간들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질을 추출해낸 뒤, 이 본질들을 검은 배경의 텅빈 공간 속에 배치한다. 화면에서는 검은 바탕 속에 테이블, 의자, 메뉴판 등이 놓여있고, 주인공은 그 공간에서 커피를 마신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통상적인 이미지 복제를 통한 관객의 몰입 유도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다. 오히려 몰입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인물을 중립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마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방식처럼 말이다. 다만 연극과 비교했을 때 규모가 크고 몰입에도 용이한 영화라는 매체에서 낯설게 하기 방식을 도입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벤치마킹이라는 단어로는 너무나도 부족한, 매우 과감한 선택이다.
또한, 이러한 낯설게 하기 방식을 위한 설정을 활용해 연출의 일부분으로 만들어냈다. 의상디자인을 살펴보면, 비트겐슈타인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의상은 표현 그대로 ‘전위적‘이다. 일상생활에서 절대로 입지 않을 법한 과도한 장식과 선명한 색채의 의상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낡은 정장과 대비가 되고, 또한 검은 배경과는 강한 충돌을 일으켜 시각적으로 큰 자극을 준다. 또한, 인물마다 다른 색을 배치하여 색채를 통해 인물을 구별하도록 한 것도 흥미롭다. 오토라인 부인 (틸다 스윈튼 역)의 의상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특히나 오토라인 부인의 다채로운 색상과 분장은 아방가르드라는 단어 자체를 서술하는 듯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도 아방가드르 정신이 내재되어있다. 특히 각본에서 전위적인 모습이 많이 드러난다. 비트겐슈타인은 작중 소년과 성인, 두 배우가 연기하는데, 주요 사건은 성인이, 나레이션이나 중간에 삽입된 장면에서는 소년이 등장한다. 이때 소년은 비트겐슈타인의 유년 시절을 연기하지만, 그와 동시에 전지적 시점의 관찰자가 되어 계속해서 관객에게 말을 건다. 깃발을 들고 등장하거나, 금장을 하고 나타나거나, 혹은 책상에 앉아 관객에게 철학적인 말을 던진다. 심지어는 화성인 역의 배우가 초록색 분장을 하고 등장해 소년과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심오한 철학과도 분명히 관계가 있지만, 낯설게 하기 기법과 연출 방식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런 표현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놀랍다.
주요 소재인 비트겐슈타인의 생애도 이에 걸맞다. 작중 비트겐슈타인은 진리를 얻기 위해 양차 세계대전에 자원하고, 갑자기 은둔 생활에 빠져 노르웨이로 떠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도 했다가 강의 도중 절망에 빠져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실제 생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신의 이전 주장을 스스로 비판하고 새로운 입장을 써내려간 유일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인물 자체가 아주 역동적이고 입체적이어서 연출 방식과도 잘 어울린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또한 아주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영화 중반까지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이 주요 소재가 되는데, 기존의 관념론 중심 철학과 완전히 반대된다는 점에서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인물 자체는 이 작품이 선택한 아방가르드한 방향과 너무나도 어울리는 소재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한 면모가 아방가르드였다면, 두 번째는 ‘미니멀리즘‘이다. 영화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미니멀리즘은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연출이나 짐 자무쉬의 <패터슨>의 각본과 같이 굳이 빈틈을 메우지 않는 방식이다.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나 지브리 스튜디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같이 넘쳐나는 연출이나 각본과는 반대의 개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미니멀리즘은 우선 연출에서 먼저 등장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연출적 요소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위에서도 이야기한 검은 배경이다. 이 배경은 연출 자체의 필연적인 한계를 부여해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이고 함축적인 표현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새장 안에 갇혀있는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이나, 책상 밑에서 코뿔소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소년의 모습이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표현들은 이 영화의 미니멀리즘을 돋보이게 한다.
두 번째는 사건 전개 속 시간의 흐름이다. 실제로 성인 비트겐슈타인 (칼 존슨 역)이 등장하는 시점과 죽는 시점은 큰 시간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이 전개되는 동안 인물의 겉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틴 스콜세지의 <아이리시맨>에서는 시간의 변화를 인물의 외간을 통해 나타내기 위해 디에이징 기법을 활용했다. 혹은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같은 경우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 작중 시간인 12년에 맞춰 실제 12년동안 제작했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인물의 외관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도 개연성이 높은 방식이기 때문에 아주 흔하게 사용된다. 실제로 나이들어가는 배우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은 쉽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연출에 반영하지 않는다. 마치 사건이 전개되는 동안 시간이 멈춰져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특징이었던 검은 배경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는데, 영화 내내 검은 배경 속에서 사건이 진행되어 마치 한 공간에서 모든 사건이 전개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독특한 방식을 통해 데렉 저먼은 이 영화를, 혹은 영화 속 인물들은 시공간에 분리시켜 놓았다.
시공간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는 아주 미니멀한 연출 방식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하게 쳐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관객은 자신의 시공간과 완전히 분리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며 감정 이입보다 이성적 판단을 통해 이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마치 평전을 읽는 것처럼. 어떤 인물의 평전은 우리와 독립된 어떤 과거 세계의 한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는 그 평전을 읽고 그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기보다는 그 인물의 생애에 대해 도덕적 혹은 성과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에서 관객으로부터 시공간을 완전히 분리시켜 놓은 것 또한 같은 효과를 준다. 관객인 우리는 이 작품을 감상할 때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인물에 우리 스스로를 대입시켜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와 작중 인물을 완전히 분리시켜 이성적으로 인물을 평가하고 관찰한다.
정사와 비교했을 때에도 이 영화의 미니멀리즘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 인물 중심의 실화를 각색하여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특정 시점부터 다른 시점까지 그 인물 주변의 모든 사건을 나열하거나, 일부 사건만 고르고 나머지는 폐기하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조 라이트의 <다키스트 아워>나 브라이언 싱어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좋은 예시일 듯하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서는 실제 있는 사건을 그리되 주요 인물만을 활용해 사건을 임의로 조작하여 다루는 방법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전기 철학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사건을 다루기 위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실제로 당시 대화를 나눴던 철학자를 작품 속에 넣어야 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길을 가다가 자전거를 탄 여인들을 보고 깨달은 것으로 표현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수많은 연애 상대가 있었고 각각 얽혀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모든 연인을 대표해 ‘조니’라는 인물을 설정하고 각각의 이야기를 모두 조니와의 이야기로 표현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실제 사건을 다루면서 그 규모가 방대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검은 암막과 텅빈 공간 속에서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의 갈등 구조는 분명히 한정적이기에, 전체 스토리를 최대한 미니멀하게 구성한 것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제 모두 짚고 넘어간 듯하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평론에서 이 작품의 엔딩을 빼놓고 마무리할 수는 없다. 필자의 개인적인 감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엔딩은 여태껏 보아왔던 영화 중에서, 또 아마 이후에 보게 될 영화 중에서도 최고의 엔딩으로 손꼽힐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엔딩은 이 작품의 모든 매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엔딩은 비트겐슈타인의 죽음이다. 엔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 어둠 속 인물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을 감는 장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침대에 누워 어둠 속 인물에게 자신의 삶을 조소한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어둠 속의 인물은 비트겐슈타인에게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곧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이며, 젊은 날의 이상과 열정이 식고 성숙한 늙은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이상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는 비트겐슈타인의 내면을 비유하는 우화이다. 우화 중간중간에는 소년 비트겐슈타인이 등장해 영화 초반에 소개되었던 모티브를 재등장시켜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때 어둠 속 인물은 조명의 조작을 통해 얼굴만 드러나고, 수직적인 이미지의 인물의 모습은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비트겐슈타인과 강렬히 대조된다. 색채 또한 인물은 검정색, 이불 속의 비트겐슈타인은 흰색으로 배치하여 직관적인 대비 관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러한 단순하고도 명료한 연출은 곧 그 어둠 속 인물이 죽음을 상징하고, 비트겐슈타인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임을 직감하게 한다. 결국 이 장면은 죽음과의 대화를 통한 비트겐슈타인의 내면 세계를 마지막으로 들여다 보는 장면이고, 매우 짧은 시간동안 연출만을 활용해 이 모든 메시지를 내비친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은 정체 모를 인물이 등장해 방백을 펼치는 장면이다. 매우 작은 체구에, 신비로운 분위기로 비트겐슈타인의 침대 위에 앉아있는 이 인물은 자신을 쿼크라고 소개한다. 왼손에는 깨져 있는 거울 조각을 들고 있는데, 조명에서 나오는 빛을 카메라에 그대로 비춰 마치 타오르는 불을 들고 있는 듯한 효과를 연출한다. 쿼크는 비트겐슈타인의 사망을 선고하며 방백을 시작한다. 아래는 이 인물의 방백의 내용이다.
“Concerning the philosopher Ludwig Wittgenstein deceased. The solution to the riddle of life in space in time lies outside space and time. But as you know and I know, there are no riddles. If a question can be put at all, it can also be answered.”
그리고는 거울 조각을 천천히 내려서 빛을 위로 쏘아 올린다. 그 뒤 카메라는 죽어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을 비추고, 세자르 프랑크의 소나타가 재생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장면은 마치 평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집필자가 자신의 평가를 정리하듯 감독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생각을 한마디로 정리하여 붙인 듯하다. 인물의 정체가 쿼크인 점이나, 그로테스크한 분장을 하고 거울 조각을 들고 있는 인물 디자인을 생각하면,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어떤 전지적인 존재가 등장해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방백의 내용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부분인 언어의 한계에 대한 내용이다. 그렇기에 이 방백은 죽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당신이 맞았다고 속삭이는 위로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노력이 그저 발버둥에 불과하다는 비관의 한마디일 수도 있겠다. 이 장면에서는 전위적이면서도 미니멀한 연출과 디자인, 독특한 조명의 사용과 시적인 대사와 촬영의 미학이 압축되어있다.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 거대한 실험에 걸맞은 절묘하고 완벽한 마침표를 찍으며 마무리를 맺는다.
이번 글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실험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아방가르드와 미니멀리즘 사이에서 아주 당돌하고 과감한 작가주의를 보여주었고, 혁신적인 표현 방식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이야기한 부분은 오직 영화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감독인 데렉 저먼과 배우들의 연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풀어내는 방식 등 많은 부분을 배제했다.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작품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저 현학적인 수사에 빠진 영화로 기억되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영화는 매우 비범하다. 이는 영화가 시작한 순간부터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비범함이란, 엄청난 영향력은 아니더라도, 다른 어떤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히나 현대 영화 산업 속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을 법한 것이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0108583/mediaviewer/rm1420856065?ref_=ttmi_mi_all_sf_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