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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모아 Sep 21. 2022

04. 직원은 아니지만 직원 숙소에 살아요.

때는 A타운행 비행기를 타기 하루 전,


ANUM(Acting Nursing Unit Manager; 수간호사 선생님 대리)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었다. 지금까지 내 채용 프로세스를 담당하던 NUM이 장기휴가를 내서 본인이 채용과정을 도맡아 관여하게 되었다고 했다. ANUM은 현실적으로 지금 상황에 오퍼 레터가 9월 말까지 도착하지 않을 것 같다며 적어도 10월 4일은 돼야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대신 내가 A타운에 도착하는 다음 날(9/16)부터 직원 숙소를 제공하겠다며 나를 다독였다.


그 외에도 A타운에서 진행되기로 했던 신입사원 연수 또한 일정 변경으로 인해 타운즈빌(Townsville)에 있는 대형병원에서 8주간 진행될 것 같다는 뜬금없는 뉴스도 전해왔다.


8월 말에 예정됐던 입사일이 9월로, 이제는 10월로 미뤄진 상태라 나와 동기는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미 비행기표도 구매했고, 플랜 B 없이 여기 너무 오래도록 올인을 해온 터였다.




9월 16일 아침, 체크아웃을 마친 나와 동기는 ANUM에게 전화를 했다. 워낙 작은 타운이다 보니 호텔이 병원 차로 2분 거리에 있어서 ANUM이 우리를 직접 데리러 왔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짐을 실은 후 차에 탑승하자마자 ANUM이 하는 말:

"내가 정말 너네 둘을 같은 숙소에 넣어주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는데, 안타깝게도 둘이 따로 지내야 할 거 같아. 소피(가명, 대학 동기)는 병원 바로 옆 직원 숙소에 배정됐는데, 모아는 오프사이트(off-site)라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가게 됐어. 소피 숙소가 위치적으론 훨씬 좋긴 한데, 그 숙소는 에이전시 간호사들(단기 계약직)이 우선적으로 배정되기 때문에 나중에 타운즈빌에서 트레이닝하고 오면 소피도 결국은 오프사이트로 옮겨야 해. 모아는 그곳에 그대로 있어도 되고."


오 마이 갓. 우리 둘이서 ANUM을 기다리면서 '설마'하며 주고받았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ANUM은 일단 내 숙소로 먼저 가서 체감상 얼마나 먼 지, 집 상태는 어떤지 한 번 보고 정말 그곳에서 지낼 수 없다 싶으면 소피와 내가 병원 옆 직원 숙소를 셰어 해도 된다고 했다. 우선 내가 배정받은 집에 먼저 도착. 방 세 개짜리 하우스였고, 이미 다른 방에는 브리즈번에서 온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사람은 없었으나 소지품에 브리즈번 소속 병원 이름이 적혀있었음).


방과 집 상태는 나쁘지 않았지만, 난 차가 없었기 때문에 섭씨 35도를 웃도는 날씨에 병원으로 30분을 걸어서 출퇴근하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만약 차를 구매한다 해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이곳에 짐을 푸는 건 무리였다. 소피도 구글맵상 숙소 위치를 보더니 "그냥 내 방 셰어 해. 난 상관없어“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하여 우린 함께 소피네 숙소도 둘러보기로 했다.


소피네 숙소는 병원에서 걸어서 1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방 컨디션도 아주 좋았다. Ensuite 룸이라 욕실도 방 안에 있었고, 테이블, 책상 등 모든 것이 갖추어진 숙소였다. "어떻게 할래?" ANUM이 물었다. 난 고민의 여지도 없이 “소피만 괜찮다면, 이곳을 셰어 하고 싶다”고 했고 소피도 전혀 개의치 않은 말투로 "그래, 네 숙소는 현실적으로 너무 멀어"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소피와 난 졸지에 킹사이즈 베드 하나를 셰어 하게 됐지만, 워낙 성격과 라이프스타일이 비슷한 친구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내 상황을 이해해준 소피에게 고마울 따름.


짐을 대충 푼 우리는 바로 옆 병원 건물에 가서 투어와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동료들, 환자분들과 간단한 인사를 마쳤다. 예상은 했지만 당일 인사를 나눈 환자 100%가 이곳 원주민이었다.


간호사 중 한 분이 세미나실에서 마침 'drivers' orientation'라는 걸 하고 있다고 하여 나와 소피는 아직 오퍼 레터는 없지만 슬쩍 오티에 조인했다. 발표자는 운전학원에서 나온 강사로 운전을 못하는 직원들을 위한 연수코스를 홍보하고 있었다. 신선했다. 실제로 이곳 오지 병원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간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호주 내 도로교통법에 익숙해지고, 오지 비포장도로에서 운전할 경우를 대비해 연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오티 후에는 ANUM이 우리를 데리고 한창 직원 바비큐 파티를 준비하고 있던 Director of Nursing(간호부장)에게 인사를 시켰고, 그분은 우리에게 이따 오후 1시에 별 약속이 없으면 바비큐 파티에 조인해도 된다고 했다. ANUM도 병원을 빠져나오며 "오늘 병원 투어한 거 중 가장 중요한 게 바비큐 어디서 하는지 아는 거야“라며 농담을 던졌다.


나와 소피는 점심시간까지 남은 자투리를 활용해 Woolworths(호주 대표 식음료점)에 장을 보러 갔다가 바비큐 시작시간에 맞춰 파티에 조인했다.

병원에서 열린 직원들을 위한 바베큐

분명 어제 A타운으로 오는 비행기에서는 여자 승객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이곳 병원 이벤트는 80% 이상이 여자였다. 대부분이 유니폼을 입고 있거나 적어도 ID배지를 목에 걸고 있었기에 사복을 입은 우리가 유난히 튀었지만 그 누구도 우리의 대범한 버거 서리(?)를 제지하지 않았다.


넉살 좋게 버거를 두 개씩 만들어 배를 채운 우리는 동네에 하나뿐인 마트에 들러 세상에서 제일 후줄근한 색깔과 디자인의 옷을 하나씩 세트로 구매했다. 이유는 즉슨 우리가 입은/갖고 온 사복이 너무 이방인(오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아서.


장을 보고 오니 벌써 4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이 정도 했으면 오늘 하루 일정 다 끝난 거지 뭐. 아직 공식 입사일까지 2주는 더 남았는데 하루에 하나씩만 하자, 소피“ 내가 말하자 소피가 웃으며 동의했다.


장 봐온 식재료로 일찌감치 저녁 준비를 하고, 창 너머로 퇴근하는 직원들을 구경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해가 저무는 시각 숙소 창으로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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