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생활의 장점
입사일을 기다리며 오지에서 보낸 첫 일주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이곳에 오기 전 두 달가량 입사일만을 기다리며 멜번에서 백수 생활해온 짬밥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멜번과 이곳에서의 공통점은 내가 여전히 '백수'라는 사실이었지만, 두 곳이 극명하게 다른 점은 기온과 날씨였다.
내가 떠나올 때 멜번의 평균 기온 섭씨 8도. 이곳은 '초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벌써 기온이 섭씨 25~36도를 넘나들고 있었다. 게다가 매일같이 비가 와서 야외활동을 하기 힘들었던 멜번과 달리 이곳은 매일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실제로 건조한 공기 때문에 구름 형성이 더디다고 한다).
게다가 멜번에서는 도심 대로변 가까이에 살아 매일 밤 차, 경찰차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는데, 이곳은 매일 밤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땅거미가 진 후 어둑어둑한 뒷마당을 내려다보니 어렴풋이 보이는 풍경이 마치 한국 시골의 앞마당의 모습 같아서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건 매일 아침 알람 없이 8-9시간을 푹 자고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새소리에 깰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해'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소피와 나는 치안문제 때문에 모든 것을 함께 했는데, 아래가 그나마 인상 깊었던 장소들이다:
전망대
도착한 다음 날 바로 했던 건 A타운에서 꼭 해봐야 할 것으로 알려진 뒷동산(?) 하이킹이었다. 동산 위에는 전망대가 있어서 A타운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올라가는 길에 각각 화려한 색깔과 고급스러운 느낌 때문에 눈에 띄는 꽃이 두 종류가 있었는데, 사진을 찍어 앱으로 찾아보니 첫 번째는 "종이꽃(paperflower)" 두 번째는 "고양이 꼬리(pussy tail)"이었다. 종이꽃은 말 그대로 떨어져 바람에 날리면 '바스락' 종이같이 건조한 소리가 났고, 고양이 꼬리는 이름 자체가 너무 인상적이라 둘이서 그 꽃이 보일 때마다 "look! pussy tails!", "there's another pussy tail" 거리며 동산을 올라갔다. 워낙 작은 타운이라 숙소에서 전망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기온이 너무 높고 공기가 좋지 않아서 자주 오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이커리
하루는 소피가 잠자기 전에 "나 원래 아침마다 아몬드 크루아상 먹거든. 내일 일어나자마자 아몬드 크루아상을 너무 먹고 싶은데 어쩌지?"라며 노래를 불렀다. 별 수 있나. 찾아줘야지. 콩알만큼 작은 A타운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진 적어도 하나라도 있을 건 있었다. 역시나 타운에 유일한 베이커리를 하나 찾았는데, 리뷰를 보니 아몬드 크루아상을 파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우린 아침부터 크루아상에 대한 설렘을 안고 베이커리까지 뜀박질을 했다. 모든 상점이 그렇듯 여기도 바깥 햇살이 너무 밝아 가게 안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문을 안 연 건가?' 생각함과 동시에 손님 한 분이 미닫이 문을 열고 나왔다. "아싸 문 열었다 (Yayy it's open!)" 빵집이 문 연게 그렇게 설렐 일이었나. 빵집은 생각대로 꽤 단출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짭조름하고 건조한 비프 파이들 사이로 창의적인 모양의 아몬드 크루아상이 보였다 (크루아상이라고 하기엔 피자빵 같이 너무 납작하고 네모난 모양이었다). 크루아상을 하나씩 사고 베이커리를 나오는데 카우보이 모자를 쓴 한 50대 남자분이 우릴 보고 물었다. "너네도 광산에서 일하는 인부들이니?" '푸하하' 속으로 웃음이 절로 났지만, 낯선 사람한테 우리 직업을 알려주기가 싫어서 그냥 "네"라고 대답하고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개인적으로 나는 독서를 좋아하는 편이다. 마침 소피도 책을 즐겨 읽는 편이라 숙소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종종 들르곤 했다. 작은 타운이었지만, 생각보다 도서관이 크고 잘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아직 이렇다 할 거주지 주소가 없었지만, "방문객"으로도 한 번에 3권씩은 빌릴 수 있다고 하여 당장 임시 도서관 카드를 만들었다. 숙소에는 와이파이가 없는데, 도서관에 가면 무료로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어서 갈 때마다 넷플릭스 영상들을 다운로드하여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화관
'정말 할 게 없을 때 하루를 죄책감 없이 날리기에 가장 좋은 게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거다'라고 멜번에서 스스로 깨우쳤다. 마침 A타운은 화요일마다 파격적인 할인가 $9에 영화를 상영하고 있어 예전부터 보고 싶던 조지 클루니와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Ticket to Paradise>를 봤다. 컬처쇼크였던 건 영화관에 지정 좌석이 없었고 (방콕 이후로 처음이었다), 영화 도중 아르바이트생이 30분에 한 번씩 상영관에 들어와서 통로를 앞뒤로 걸어 다니며 좌석들을 확인했다 (아직 이건 뭘 한 건지 모르겠는데, 매번 사람 머리가 스크린을 계속 가리니까 너무 거슬렸다). 그리고 대망의 제일 컬처쇼크였던 건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한 마디씩 한다는 것. 가족이랑 영화 보는 것도 아니고 "저거 완전 나다 (that's so me)!", "진짜 너다 크크크 (yeah it's so you haha)" 등등 끊임없이 말을 해서 처음엔 '한 소리 할까' 하다가 소피와 나를 제외한 관객 모두가 그러고 있길래 이게 '로마 법'인가 보다 하고 그냥 영화보기를 포기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영화관은 안 가게 될 것 같다.
그 외에 대부분의 시간은 숙소에서 오매불망 오퍼 레터를 기다렸고, 숙소 뒷마당에 있는 수영장에 가서 태닝을 하거나 독서를 했다. 선베드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들리는 건 새소리요, 보이는 건 물과 나무뿐. 건조한 30도 안팎의 날씨에 선선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잠이 스르르 왔다.
'아 - 이게 낙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