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말할 수 있다. 이번 주가 A타운에서 지금까지 보낸 기간 중 가장 하이라이트였다고.
(그래 봤자 고작 2주 있었지만)
예상외로 ANUM은 일 없이 지내고 있는 나와 소피를 지속적으로 잘 케어해주었다. 거듭 오퍼 레터 때문에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숙소는 괜찮은지 정착에 불편한 점은 없는지 안부를 물어왔고 심지어는 이번 주 목요일로 예정되었던 '직원' 피크닉에 우리를 초대했다.
ANUM 이메일에 의하면 팀원 중 한 명이 우리에게 픽업 시간을 컨펌해줄 거라고 했는데, 수요일 오후 저녁까지 우린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다.
"여긴 모든 일을 일단 벌여놓고 잠수 타는 게 일상인가 봐."
"그러게. 우리 내일 가는 거야 마는 거야?"
소피와 난 아직 "정식직원"은 아니었기에 번거롭게 ANUM에게 다시 연락하여 시간 확인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우린 답을 찾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목요일 당일)
09:00 AM / 그래도 혹시 모를 연락에 대비해 피크닉 갈 채비를 함
11:30 AM / 이때까지 연락이 없자 소피와 나는 사실상 포기하고 전망대 하이킹을 감 ('피크닉'은 보통 점심을 겨냥해서 가기 때문)
01:00 PM / 다시 타운으로 내려와서 케밥집에서 점심을 해결함
02:30 PM / 대충 슈퍼에서 저녁 장을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
[띠롱!]
소피가 ANUM에게 문자 연락을 받았다.
2:45 PM에 숙소 앞에서 픽업 괜찮냐고.
오. 마이. 갓. 우린 이미 하이킹도 다녀오고, 장도 보고, 사실상 탈진상태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는데, 오늘 하루가 시작도 안 한 거였을 줄이야! 하지만 보스가 오라면 가야지. 우린 장바구니를 들고 숙소로 한달음에 뛰어간 다음 쏜살같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15분 안에 피크닉 갈 채비를 마쳤다.
ANUM 차에 탔더니 뒷좌석엔 4살짜리 아들(Matthew, 가명)이 방긋 웃으며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 ANUM은 대리 수간호사 + 워킹맘 + 박사학위 공부 중으로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사는 파워 워킹맘이었다. 평소 빠른 말투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카리스마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피크닉 목적지는 A타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호수. 그곳이 유일하게 A타운 근교에 있는 호숫가라 피크닉이든, 낚시여행이든, 심지어 결혼식이도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목요일은 호주 정부가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추모하기 위해 공휴일로 지정한 날이라 당연히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건 도시에서 온 나의 큰 착각이었다. 스몰웨딩 그룹 하나, 피크닉 그룹 하나 그리고 우리 일행이 전부였다. '도대체 A타운 사람들은 쉬는 날에 뭘 하면서 보내는 걸까?' 진지하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 테이불에 도착하니 총 열댓 명 정도의 사람(모두 여자)이 있었다. 그중 3명은 의사였고, 1명은 약사, 나머지 6명은 간호사였다. 아무리 수평적 조직문화의 호주라지만 도시에서 실습할 때는 의사, 약사, 간호사가 다 같이 병원 밖에서 이런 사교적인 모임을 가지는 경우를 보거나 들은 적이 없었는데, 오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런 환경이 신선하고 좋았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꽤 긴장되고 설렜다. 멜번에서 오퍼 레터를 기다리며, 그리고 A타운에 온 후에도 줄곳 소피랑만 지내온 탓이었다. 소피와 나는 먼저 팀 멤버 모두와 간단한 소개 후 인사를 나눴고, 팀원들은 진심으로 우릴 반겨주었다.
본격적으로 개인 접시에 음식을 덜며 '누구랑 말을 해볼까'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허리춤을 잡아당겼다. '뭐지?' 하며 돌아보니 아까 차에 올 때 뒷좌석에 같이 차를 타고 온 ANUM 아들 Matthew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너도 뭐 먹고 싶어?"라고 물으니 "아니. 나랑 놀자"라며 배시시 웃는 거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기/아이들을 대하는 법을 잘 모른다. 아이들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긴장이 돼서 보통 말 대신 표정으로 말하거나 오픈 바디 랭귀지를 사용하려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나의 이런 나를 재밌게 봐주고 내게 쉽게 다가오는 편이다 (약간 <미스터 빈> 비슷할지도). Matthew도 그 많은 직장 동료들 중 처음 보는 나를 간택하여 놀자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이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때마침 한 명의 동료 간호사가 더 도착했는데, 그분도 7살 난 딸(Candice)과 함께 왔다. Matthew는 다짜고짜 나에게 프리즈비(frisbee)를 던지기 시작했고, 나는 또 말없이 달려가서 그걸 캐치했다. Matthew는 4살 꼬마답게 그걸 보며 깔깔댔고, 난 그런 Matthew에게 또 프리즈비를 던졌다. 우리가 노는 걸 가만히 보고 있던 Candice도 갑자기 "나도 할래!"라며 하나의 삼각형을 만들었다.
본격 프리즈비를 20분 정도 하고 나니 갑자기 Candice는 틱톡 챌린지를 하자면서 같이 '제로투 댄스'를 추자고 제안을 했다. Matthew도 덩달아 제로투 댄스를 시작. 큰일 났다.
"Come on, Moa!"
Candice가 나를 재촉하는데, 아이들 뒷배경으로 내 게 보이는 건 미래 직장동료들뿐. 도. 저. 히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우리 그냥 다른 거 하면 안 될까” 라며 토픽을 바꾸니 이번엔 갖고 있던 물병으로 '물병 세우기' 챌린지를 시작했다. 그 후로도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다리 찢기’ 등의 고강도 체력훈련을 시키더니 이제는 ‘숨바꼭질’을 하잔다. 이미 피크닉을 시작한 지 2-3시간의 시간이 지나간 터라 난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목을 축이기로 했다.
피크닉 테이블로 가니 이미 소피는 모든 사람과 편해진 상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소피에게 귓속말로 "나도 나중에 다 업데이트해줘"라고 말한 후 얼굴이 한껏 상기된 상태로 가쁜숨을 몰아쉬며 아이스박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ANUM과 Candice 어머니이자 직장동료인 Gladys가 내게 "모아, 괜찮아?", "너 오늘 완전 풀타임 베이비시터네" 라며 걱정 반 농담 반의 말을 건네며 웃었다.
물을 마시고 잠깐 한숨을 돌리니 그전에 눈치채지 못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호숫가 한쪽에는 야생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수컷과 암컷 공작새들이 이리저리 먹이를 찾아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자연이야 -'
잠깐 소와 공작새들을 연신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어느새 Candice와 Matthew가 달려와 "모아, 이제 술래잡기하는 거지?" 라며 나를 부추겼다.
그렇게 1시간을 더 족히 뛰어다니고 다니 힘이 하나도 남아나질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외치는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우리 이제 정리하고 집에 갈 준비 갈 거야"
하. 드디어 베이비 시팅에서 해방인가? 젖 먹던 힘을 다해 테이블로 돌아가자 팀원들이 "우리 이제 저 위에서 노을 보러 가려고" 라며 호숫가 반대편의 동산을 가리켰다. 원래 나는 호주에 온 후 매일 일몰 보는 것과 매달 월출 사냥에 미쳐있었기 때문에 설레는 목소리로 "헐! 저 노을 보는 거 진. 짜. 좋아해요."라며 재빨리 손도 제대로 못 대본 음식들을 다시 가방에 담기 시작했다.
동산을 오르는 와중에도 Candice는 껌딱지처럼 내 손을 잡고 흙길을 씩씩하게 걸어 올라갔다. 팀원들 모두 나와 Candice를 돌아보며 "진짜 Candice가 널 엄청 좋아한다", "그러게. 되게 빨리 친해졌어"라고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고, Candice는 갑자기 나를 슈렉 고양이 같은 눈으로 올려다보며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말을 내게 건넸다.
"나 나중에 커서 언니처럼 되고 싶어"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호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다음으로 지는 해를 품은 붉은 나무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대자연 앞 한 없이 작아진 내 모습도 보였다. 난 이런 자연 속의 내 모습을 좋아한다. 대자연 앞에서는 나와 내 걱정거리 모두가 아무것도 아닌 시답잖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 자체가 내겐 위로가 된다.
우리 모두 단체사진을 찍고, 하산을 하려는데 팀원 중 한 명이 "근데, 댐 쪽으로 가면 더 해가 잘 보이지 않아?"라며 댐 쪽으로 가까이 운전해서 가는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우린 차를 타고 댐 근처까지 가게 된다.
댐 근처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난간을 따라 내려다 보이는 풍경은 마치 '밀림'을 연상케 할 만큼 나무들이 빽빽했고, 그 사이로 한 두 개의 캠핑을 즐기는 텐트들이 보였다.
넋을 잃고 풍경을 바라보며 그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손 하나가 렌즈 앞에 불쑥 나타났다. Candice였다. 나와 하트를 같이 만들자며 또 나를 졸랐다.
'그래 옛다'
사정상 처음 우리를 픽업해줬던 ANUM이 집에 일찍 돌아가야 해서 아직 차가 없는 소피와 나는 대신 Gladys 차로 숙소까지 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도 Candice는 나와 셀카를 찍다가, 로블록스 게임을 보여주다가, 결국엔 내 폰으로 자기 엄마 폰에 전화를 걸어 번호를 따기까지에 이르렀다.
"모아, 내가 내일 전화해도 돼?"라고 묻는데, '안 돼'라고 하기엔 너무 매몰차고 또 된다고 하기엔 정말 맨날 전화할 거 같아서 "되는데, 내가 바쁘면 못 받을 수도 있어. 혹시 못 받더라도 실망하지 마"라고 언질을 줬다.
Gladys는 우리를 숙소에 데려다 주기 전 병동에 함께 들러 당일 근무 중이라 피크닉에 오지 못한 팀원들을 위해 남은 음식들을 배달해줬다. 그러면서 나와 소피에게 귀띔으로 "다른 직원들 오기 전에 남은 음식 좀 더 가져가. 요리하려면 귀찮잖아~ 얼른"라며 정말 엄마같이 푸근한 아량을 보여줬다.
Gladys 외에도 대화는 많이 못 나눴지만, 처음 소개 주고받을 때나 오며 가며 테이블에서 물을 마실 때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눈 분들 모두 정~말 좋은 분들 같아서 여러모로 감사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취침 준비를 마치자마자 소피에게 내가 피크닉에서+돌아오는 길 총 5시간 동안 놓친 이야기들을 하나둘씩 물어봤고, 소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 년 치 칼로리를 하루에 다 소모한 나는 잠에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