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멜번의 노숙자
옛말에 '쉽게 얻은 기쁨은 빨리 사라진다'라고 했던가. 새로운 오지 간호사로서의 채용과정이 그랬다.
첫 일주일(8월 첫째 주)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속전속결로 NUM과의 대화가 이루어졌으나 둘째 주부터 대화가 산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나는 이미 A라는 문서를 제출했는데, NUM이 대뜸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 "헤이 모아, A 문서가 누락되었는데 보내줄래?"라고 하는 것이다. 군 말없이 A 문서를 다시 보내었더니 10분 후에 날아오는 대답: "아 미안. 지난번 이메일에 첨부돼 있었네"
문제는 이런 이메일이 3~4일을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왔고, 나뿐만 아니라 채용 오퍼를 나보다 먼저 받았던 동기도 똑같은 이메일을 받았다고 했다. 처음엔 그저 NUM 실수겠거니 하고 우스갯소리로 넘긴 우리는 같은 메일을 주기적으로 받기 시작하자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공립병원 채용이라 정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지원까지 한 건이라 '설마' 하면서도 난 이 NUM이 진짜 존재하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구글, 링크드인(linkedin)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반전은 없었다. 진짜 그 병원의 NUM이 맞았다.
그래도 불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분명히 첫 주에 비공식적으로 논의된 입사일은 8월 29일이었고, 그때 시작하려면 지금쯤은 내 서류가 인사팀에 넘어가서 곧 정식 오퍼 레터가 나와야 했다. 하지만, NUM의 이런 황당한 이메일은 입사 예정 일주일 전까지 계속되었다.
도저히 참다못한 나는 주말이 되기 전 단호하지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초기에 상의된 입사일이 당장 다음 주인데, 아직 오퍼 레터를 받지 못해 걱정이 되려고 합니다. 채용 진행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업데이트를 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NUM에게 보냈다.
답장은 예정된 입사일이(8/29) 되어서야 왔다.
'미안. 내가 지난주에 너무 바빴어. 오늘 인사팀에 문서 넘길 거야. 인사팀에 넘어간 후 3~4주 걸릴 예정이니까 9월 19일 아니면 9월 26일쯤 시작할 수 있겠네.'
메일을 받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8월 말도 아니고 9월 말?
순진하게 NUM 말을 믿고 멜번을 언제 떠나게 될지 몰라 값비싼 에어비엔비*만 일주일 단위로 연장하며 겨우 멜번에서 시간을 때우던 나는 앞으로 또 한 달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막막했다. 더 두려운 건 9월 말 시작일조차 공식 오퍼 레터가 아니라 구두계약이라는 것.
*진짜 비쌌다. 8월은 대학이 개강하는 달이고 호주 국경이 완전히 열려 유학생들이 대거 입국함에 따라 렌트도 없었고, 에어비앤비는 $200/일에 육박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NUM이 인사팀에 문서를 넘기겠다는 이메일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사팀에서 공식적으로 채용 서류가 접수되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하. 이번엔 진짜겠지? 한 번만 더 믿어보자.'
하.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고대하던 오퍼 레터는 9월 중순이 지나서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장작 두 달이 가깝도록 버젓한 집, 직장 하나 없이 여러 숙소를 전전하며 혼자 보내는 멜번의 겨울은 견디기 힘들 만큼 춥고 길었다.
9월 셋째 주. 이제 더 이상 멜번에서 시간을 보내는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느껴져서 NUM에게 내가 그곳으로 이번 주 중으로 날아가겠다고 통보 후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얼굴이라도 보고 독촉(?)을 해야지 도저히 혼자서 기다리다간 올해가 다 가버릴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난 9월 15일, 오지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