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며 앞으로 알림을 맞출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새벽 다섯시부터 일어나 짐을 싸는 순례자들의 부산스러운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침으로 계란과 토스트, 시리얼을 먹은 뒤 챙겨갈 수 있도록 마련해놓은 오렌지와 마들렌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다. 아쉽게도 일출은 보지 못했다.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는 두 가지의 코스가 있는데 피레네 산맥을 건너가야 하는 나폴레옹길은 3월 부활절 기간까지 출입이 통제된다고 했다. 실제로 피레네 산맥부터 이어진 론세스바예스까지의 여정은 바로 전날 눈이 온 모양이었다. 내심 아쉬웠지만 지금 와서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나폴레옹길보다 한층 쉽다는 발카로스길을 걸으면서도 나는 거의 죽을 뻔했으니까.
그래도 초반에는 카메라로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고 제법 우쭐해 있었던 것 같다. 그림 같은 풍경 속 양떼와 말들, 목줄 없이 뛰어댕기는 강아지, 나와 비슷한 여정 중인 달팽이까지. 여기 나무들은 빼곡하고 울창하게 심어진 우리나라의 산나무들과는 다르게 한 그루 한 그루 누가 엄청 고민해서 심어놓은 것처럼 이쁘다.
한참 걸음을 옮기다 보니 생장과 론세스바예스를 잇는 길에서 유일한 바르 겸 슈퍼마켓이 나왔다. 그곳에서 카페 콘레체와 카운터 앞 테이블의 손님들이 먹고 있던 정체 모를 음식을 손으로 가리키며 순례길 첫 주문을 했다. 카페 콘레체는 우유의 비율이 많았고, 파이처럼 생겼지만 안에 감자조림이 들어간 음식은 보기와 다르게 많이 짰다. 후식으로는 알베르게에서 챙긴 오렌지를 까미노 화살표 모양으로 까먹고 도로 위에 껍질을 올려놓았다. 이걸 보고 잠시 나마 웃음꽃이 피어나길! 그리고 이 다음부터 지옥의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햇살과 녹음이 짙은 구간은 길도 완만하고 풍경도 다양했다. 그런데 경사가 급격히 가파라지고 녹지 않은 눈이 서서히 드러나는 구간이 시작되자 허리랑 무릎이 급격히 아파오기 시작했다. 진짜 너무 아파서 울뻔 했다. 분명 두 시간 전에 발카로스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어째서인지 몸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걷는 거리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고 완만한 도로가 아닌 산길을 택한 것도 문제였다. 산길은 어제 내린 눈으로 젖어 있었고 아직 눈도 녹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 길 위에서 하필이면 갑자기 빈혈까지 찾아왔다.
나는 바지가 젖든 말든 눈 위에 누울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눈까지 감겼다. 산길을 택할 당시에 나와 달리 도로길을 선택해 돌아가는 사람들을 봤었기에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 순례자가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좁은 눈 길 위에서 의식을 잃어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괜찮냐고 물어왔다. “알 유 오케이?” 나는 염치고 뭐고 물 좀 달라해서 얻어 마신 뒤 한국말로 대충 고맙다고 했던 것 같다. 정말 염치가 없는 걸 신경도 쓰지 못 할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물을 적선하고 유유히 떠난 순례자 이후로 다시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이번엔 익숙한 얼굴이 저 멀리 내리막길 아래에서 아른거렸다. J였다.
그 순간 왜 그렇게 웃음이 났을까? 정말 이상했다.
삼십 분 가까이 눈 위에 누워있으면서 만난 두 명의 순례자 중 한 명이 J라는 게 웃겼던 것 같기도 하고, 막상 가까이서 마주보니 J의 입술도 시퍼런 게 나와 비슷한 상태였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J의 출현 덕분에 다시 몸을 일으켜 걸을 수 있었고 우리는 겨우겨우 극악의 해발 1200m 발카로스길을 완주한다. 사실 그 이후로도 길 위에서 몇 번씩 주저앉아서 다른 순례자들한테 먹을 거 있냐고 과자 구걸했다.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자 유일한 알베르게의 입구 앞에 거의 소처럼 생긴 말들이 방목되어 있었다. 나는 무서워서 못 만졌다.
마침내 도착한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 보자마자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보면 사진보다 더 웅장하고 비록 첫날이긴 하더라도 프랑스길 안에서 가장 힘든 길을 지나왔기에 굉장히 뿌듯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알베르게 입구에서는 직원 분들이 스페인 글씨가 새겨진 벽돌을 조합해 무슨 글씨를 쓰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귀여웠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나오자 걸음이 제대로 걸어지지 않았다. 알베르게에서 마주친 모든 순례자들이 나를 보고 쟤 왜 저렇게 걷지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처음으로 먹게 된 순례자 메뉴. 사진은 못 찍었지만 론세스바예스에 있는 두 개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가 진행됐다. 전식, 중식, 후식 그리고 순례자 와인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고 J와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해 마셨다. 예전에 바텐더 공부를 했다던 J는 이름 모를 위스키를 더블샷으로 두 잔을 시키더니 자리에서 연달아 원샷을 했고 어느새 밖에선 소나기가 내렸다.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사실 예전의 나는 그것에 대해 내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떠들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과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서. 그러나 막상 순례길에 오르고 낯선 이와 얼굴을 맞대며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내가 갖고 있던 고민은 사실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다들 어떻게 까미노에 오게 되었는지 묻는 이 길 위에서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기보다 그 질문 자체를 남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기도.
“어떻게 여기에 왔어? 너 지금 왜 여기 있어?”
안녕하세요.
산티아고에서 한 달 반 동안 걸은 이야기를 연재하는 '우리 각자의 산티아고'입니다.
제가 순례길을 여행하며 담은 사진들을 모은 산티아고 엽서북과 순례길 이후의 여행을 담은 포루투갈 엽서북을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산티아고 일기는 크라우드 펀딩이 끝나는 11/17까지 매일매일 연재되오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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