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즐거웠잖아?
다시 생각해도 정말 깊이 잘 잔 것 같다. 눈을 감자마자 잠들었던가. 론세스바예스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같은 침대 칸에서 잠든 외국인 세 남매가 요란스럽게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식을 먹기 위해 아픈 무릎을 끌고 겨우겨우 식당으로 향했다. 알베르게를 나오며 어제 함께 발카로스 언덕을 오른 막대기도 잊지 않았다. 막대기는 스틱을 구해오지 않았던 내가 발카로스 길에서 주운 나뭇가지인데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리고 이때 챙긴 막대기는 이후의 여정에서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이 된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주비리로 가는 여정은 전날 걸은 26km에 비해선 비교적 짧은 20km로 경사도 대부분이 내리막이었다. 전날 해발 1200m를 하루종일 걸어 올라왔으니 당연한 전개였다. 하지만 밤에 내린 비로 인해 바닥은 진흙탕이 되어 있었고 한동안은 벌목된 나무들 사이를 걷는 길이 이어졌다. 발카로스길을 걸으면서는 겨울이었던 스페인에 서서히 봄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면 주비리로의 여정은 서늘한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얼마 안 있어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걷기 시작한 나를 다른 순례자들이 서서히 추월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론세스바예스의 눈길에서 내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함께 걷던 빌과 그의 동행이었다. 두 번째 사진 속 파란 비니와 검은 비니다. 그들은 내가 거의 쓰러지듯 눈 위에 드러누웠을 당시에 이미 나를 조금 추월해 걷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 뒤로 서서히 점이 되어 사라졌었다. 하나뿐인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함께 머물렀겠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빌과 그의 동행도 내심 눈 위에 두고 간 내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인사를 건네자 그들은 살아있었냐는 듯 반가워하며 나를 걱정했었다는 말을 전했다. “아이 콘선드 유!” 그리고는 어김없이 나를 추월해 사라졌다. 지겹게 이어지던 벌목지 그리고 농가와 인접한 길이 끝나자 할리우드 세트장을 연상시키는 마을이 나타났다. 그 사이에 같은 침대 칸에서 잤던 어린 세 남매 순례자들도 나를 추월해갔다. “부엔 까미노!”
마을을 지난 뒤로는 끔찍한 오르막길이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오르막길이 있다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 정상에 오르자 멋진 풍경이 나타났고 조식을 먹고 후식으로 챙긴 사과를 베어 물으며 다시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갔다. 하지만 성치 않은 무릎 때문일까. 내리막길은 오히려 나에게 오르막길보다도 더 힘들게 느껴진 것 같다. 발을 땅에 내딛을 때마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아팠다. 이때 내 어깨까지 오는 긴 길이의 막대기가 없었다면 나는 내리막길을 걷는 도중에 어제처럼 여러번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요령은 이랬다. 발을 내딛기 전 먼저 막대기로 땅을 지지한 뒤 막대기에 상체를 의지한 채 걸음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릎이 조금이나마 덜 아프게 느껴졌다. 내리막길이 끝나니 또 다시 작은 마을이 나왔고 그곳의 바르에서 K를 다시 만났다. K는 여기 또띠야가 맛있다며 메뉴를 추천해줬고 내가 무릎이 아프다고 징징대자 바르는 진통제까지 건네주셨다.
주비리로 가는 길에서도 여러 가축과 동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나 열심히 꼬리를 치며 다가와 앵기던 강아지들이 생각난다. 작은 시골 마을들이 대부분이어서인지 강아지들은 목줄 없이 자유로이 마을 어귀를 누비는 듯 했다. 그런 강아지들이 무서웠다는 몇몇 순례자들의 이야기도 듣긴 했었으나 나의 경우는 다행히 경계해야 할 케이스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의 목적지인 주비리를 3km 정도 앞두었을 때 푸드트럭을 만났다. 푸드트럭이 오는 장소일 뿐인데 구글맵에 등재되어 리뷰까지 달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유명한 장소인 모양이었다. 순례자 여권에 세요를 받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트럭 아래의 바스켓에 놓인 형형색색의 여러 속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안 입는 속옷을 놓고 가면 행운을 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속옷을 세 개밖에 안 들고와서 차마 참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미친 내리막돌길. 어떻게 찍은 건지 오르막길처럼 보이지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을 다 내려오자 발바닥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이때도 막대기한테 고마워서 순례자길 표식이랑 같이 사진도 찍어줬다. 그리고 도착한 주비리. 주비리는 바로 옆에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나는 곧장 강가로 달려가 뜨거워진 발을 강물에 담가 식히고 싶었지만 하늘에서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한 탓에 미리 예약해놓은 알베르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주비리에서 내가 머문 알베르게는 론세스바예스에서 머문 알베르게보다는 훨씬 시설이 좋았다. 다른 무엇보다 따듯했고 이불이 주어졌기에 따로 침낭을 가방에서 꺼낼 필요도 없었다. 또한 체크인을 하고 기다란 막대기를 어디에 놓아야 할 지 몰라 쭈뼜쭈뼜대던 내게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저기에 놓으면 된다며 보관함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막대기들이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바로 옆에 화로가 있었다. 순례자들이 깜빡하고 두고 가면 바로 바로 땔감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곧이어 J도 같은 숙소에 도착했다. 배고팠던 우리는 곧장 점심을 먹기 위해 숙소 앞 바르로 향했다. 닭봉과 돈까스처럼 보이는 음식을 각각 시켰는데 돈까스라고 생각했던 에스칼로프라는 이름의 음식은 사실 닭고기였다. 졸지에 닭요리만 두 개를 시킨 탓에 약간은 힘들었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J에게 강물에 발을 담그자고 제안했는데 걔는 자기는 아직 씻지 않았다며 웃통을 까더니 강물에 몸을 내던졌다. 강물이 미친 듯이 차가워서 발만 담갔는데도 순식간에 온 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신기한 건 그래도 … 나름대로 즐거웠다는 거다. 이곳에선 모든 것들이 끝내 그렇게 생각되고야 만다. 진흙탕을 걸었지만 무릎이 아팠지만 속옷을 넣고 오진 못 했지만 발이 차가웠지만 그래도 … 그래도 즐거웠잖아?
안녕하세요.
산티아고에서 한 달 반 동안 걸은 이야기를 연재하는 '우리 각자의 산티아고'입니다.
제가 순례길을 여행하며 담은 사진들을 모은 산티아고 엽서북과 순례길 이후의 여행을 담은 포루투갈 엽서북을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산티아고 일기는 크라우드 펀딩이 끝나는 11/17까지 매일매일 연재되오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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