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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로스 알꼬스


어느 마을에서도 보이는 철제 동상
젊은 대장장이


좋은 추억을 남긴 에스테라에서의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 마을 로스 알꼬스로 향했다. 로스 알꼬스로 향하는 여정에서는 용서의 언덕처럼 내가 꼭 들려고 싶은 곳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와인 저장소였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 도중에 순례자들을 위한 철제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을 발견했다. 기념품샵이라기보다는 철제를 이용해 무언가를 만드는 곳이었다. 바로 옆에서는 젊은 대장장이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팜플로나에서 이미 몇 개의 뱃지를 구매한 상태였기에 따로 구매는 하지 않았다. 타인을 위한 선물이 아닌 나를 위한 물건이라고 생각했으면 구매했을 것 같기도 하다. 


우연히 찍힌 이 순례자를 나는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대장간을 지난지 얼마 안 있어 나타난 와인 저장소. 방문하는 시간대에 따라 와인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순례자들이 와인을 시음하고 있었다. 차례를 기다린 뒤 나도 미리 준비해 간 생수병에 와인을 담아 맛을 보았다. 와인은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는데 떫은 맛을 싫어하는 나에게 딱 맞는 산미가 강하고 달콤한 와인이었다. 다른 순례자들을 위해서 많이 담아가진 못하고 맛만 보는 수준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와인을 마시는 모습을 찍는 게 순례자들 사이에서 유행인지 내 차례가 오자 자연스레 다른 순례자분이 나를 찍어주시겠다고 하셔서 사진도 남겨올 수 있었다. 


저수조에 비친 나


한모금밖에 안 마셨지만 그래도 와인이라고 속이 뜨거웠던 것 같다. 저녁엔 항상 술이었지만 처음으로 낮에 술을 먹고 걷게 된 까미노. 이후로 꾸준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다다르게 된 1200년경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저수조. 이곳은 순례자들이 잠시 쉬어가며 발을 담글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으로 알고 있었다. 최근에는 물이 순환되지 않고 고여 있어 발을 담글 순 없게 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땐 무슨 일인지 물이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저때는 발의 상태가 꽤 괜찮아서 사진만 찍고 지나쳤는데 지금 사진을 다시 보니 잠시 쉬어갈 걸 후회된다! 



그리고 한동안 끊임 없이 이어진 평지. 순례길을 걸으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평지는 처음 만난 것 같다. 나를 한참 전에 추월해 간 독일 순례자 커플도 평지에 오르자 비록 멀지만 두개의 점이 되어 눈에 들어왔다. 오르막길 내리막길만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긴 평지도 만만치 않았다. 산행이 걱정되어 중등산화를 신고 왔더니 땅을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바닥에 벽돌끼리 부딪히는 느낌이 전달되었다. 한 농가에서는 무언가를 태우고 있어 매캐한 연기까지 더해지니 안 그래도 힘든데 죽을 맛.


닭과 오리와 개와 염소가 같이 살던 이상한 곳


그래도 어찌저찌 하니 도착한 로스 알꼬스. 반갑다! 입구부터 반겨주던 닭 울음 소리에 다가가보니 닭장 안에 닭과 오리와 개 그리고 염소가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너가 왜 여기서 나와?


그런데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로스 알꼬스를 지나쳐 다음 마을인 산솔에 머무는 모양인지 알베르게에 도착한 첫 번째 순례객이 바로 나였다. 곧이어 숙소에 도착한 J와 점심을 먹고 슈퍼에 저녁 먹을거리를 사러 나갔다. 대충 파스타나 만들어 먹자는 생각으로 파스타면과 토마토 소스를 사서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는데 알베르게 공용 공간 책장 속 수많은 책들 사이에 한국 파스타 요리 책이 있었다. 


“니가 왜 여기서 나와?” 



티모시 샬라메인 줄 알았던 기타 치는 순례자
저녁 아홉시에 테라스에서 먹는 스파게티


그리고 저녁 식사 전까지 휴식을 취할 겸 공용 공간에서 일기를 쓰고 있을 무렵이었다. 파스타 재료를 사러 나갔을 때 마주쳤던 길을 헤매고 있던 티모시 샬라메를 닮은 순례자가 갑자기 기타를 들고 눈앞에 나타났다. 그의 기타 실력은 수준급을 넘어 지금 당장 데뷔해도 될 정도. 갑작스런 콘서트에 나는 끼고 있던 이어폰도 집어 던지고 그 순간을 카메라로 촬영하기 시작했다. 미친 연주 실력에도 집 주인분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수다를 떠는 모습도 재밌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만끽한 행복한 감정. 이 직전 J와 슈퍼를 다녀오며 로스 알꼬스는 조용하고 볼 게 없다며 투덜거렸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다른 순례자들처럼 산솔에서 머물었어야 했을까? 하던 고민도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까미노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순식간에 눈 앞에 펼쳐지고는 한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나를 늘 긴장된 상태에 있게 만든다. 그리고 그게 또 나쁘지 않다. 즐거운 긴장감. 





안녕하세요. 


산티아고에서 한 달 반 동안 걸은 이야기를 연재하는 '우리 각자의 산티아고'입니다. 


제가 순례길을 여행하며 담은 사진들을 모은 산티아고 엽서북과 순례길 이후의 여행을 담은 포루투갈 엽서북을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산티아고 일기는 크라우드 펀딩이 끝나는 11/17까지 매일매일 연재되오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link.tumblbug.com/Gi4oZEZKO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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