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신발
운동화 엄지발가락 부분에 구멍이 났다.
자주 있는 일이라 놀랍지도 않다. 내 뾰족한 엄지발톱에 당한 희생양은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언제 구멍이 난 건지도 몰랐다. 급한 출근길에 운동화를 신고 나가려는데, 때 묻은 운동화 앞콧등에 흰색 양말이 삐죽 빠져나와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양말의 엄지 부분도 해져서 구멍이 뚫리기 직전이었다. 이대로라면 거리 사람들에게 내 발톱을 자랑하게 생겼다. 그렇게 멍하니 발을 내려다봤다. 다른 걸 신을까? 아니, 바쁜데? 고민을 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서둘러 신발을 갈아 신었다.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서 '구멍 난' 운동화를 신는 건 꽤나 부끄러운 일이다. 경제적 궁핍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혹은 자기 관리 능력의 부족함으로 보이기도 때문이다. 모든 것이 관찰되고 판단되는 이 시대에서,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단점은 장점보다 쉽게 눈에 띈다. 나는 나의 '구멍 난' 부분들이 너무나 신경 쓰였다. 외모적 부분이든, 경제적 부분이든, 인성적 부분이든 나는 나의 구멍이 너무나 잘 보였다. 내게 뚫린 구멍을 통해 사람들이 나의 연약한 부분을 엿볼까 걱정했고, 나는 구멍 난 부분들을 얼기설기 봉합하기 시작했다. 구멍을 가리기 위해 준비한 풀은 '착함'이었다. 어디에서도 그럭저럭 받아들여질 수 있고 비난받지 않는 '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는 '착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불편한 신발
갈아 신은 신발은 불편했다.
갈아 신은 신발은 워커부츠였다. 평소 단단하게 발을 지지해 주는 굽과 발목까지 잡아주는 든든함으로, 내 자신감까지 채워주는 효자였다. 다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지각을 면하기 위해 역까지 뛰어가야 했는데, 각 잡힌 신발은 뛸 때마다 나의 발톱과 발등을 아프게 졸랐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사무실에 도착했다. 의자에 앉아 조심스레 신발을 벗어본다. 발 이곳저곳이 짓눌려서 붉게 변했다. 제일 혹사당한 발톱은 건드리기만 해도 아리다. 쓰라린 발, 땀으로 찝찝해진 옷, 피하지 못한 지각, 전날 급한 미팅으로 미처 정리 못한 책상, 오늘까지 해결이 시급한 일, 나를 쳐다보는듯한 동료들까지 신경 쓰이는 것들 투성이다. 여러 생각이 휘몰아친 탓에 이전에는 미처 해보지 못한 생각이 반항적으로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그냥 운동화를 신고 나왔어도 되지 않았을까?'
워커부츠가 구멍 난 운동화보다는 멋져 보이는 것처럼, '착함'을 덕지덕지 바른 나도 꽤나 성공적으로 남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힘들어도 웃는 얼굴, 무딘 반응, 여유롭고 느긋한 모습, 깍듯한 인사, 차분하게 들어주는 태도 등은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환영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배척당하지는 않겠다는 건 많은 안정감도 주었다.
그러나 나의 '착함'계획은, 점차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착한 사람이 되는 건 쉬우면서도 어려웠다. 먼저, 나의 심력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좋은 사람의 모습을 연기하는 건 나를 지치게 했다. 나아가, 예스맨이 되는 것으로 무리에 들어가기는 쉬웠으나, 그 이상으로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술자리 접대를 새벽까지 가고, 담배를 피우고, 가십거리를 즐기는 것 등은 본능적으로 꺼려졌기 때문이다. 무리가 원하는 수준을 내가 충족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마치 내가 배신자인 것처럼 대하곤 했다. 지쳐버린 나는 마음의 깊은 곳으로 가라앉기 시작했고, 나는 바닥까지 침잠하고 나서야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전략적 신발 설계
구멍 난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누가 얼마나 신경 쓰겠어?'라는 소심한 반항이었고, '남'이 아닌 '나'에 대한 반항이었다. 운동화를 신고 다니며 구멍은 점점 커졌다. 결국 구멍은 발가락이 신발을 뚫고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닳도록 신은 운동화는 내 발에 딱 맞게 변형되었고, 구멍 난 운동화를 신는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비가 양말을 직격 하는 사소한 일을 제외한다면, 구멍 난 운동화는 통풍에도 좋고, 젖어도 빨리 마르는 장점들이 있었다. 또한 의외의 효과도 발견했다. 내가 평소에 자주 꾸미고 갈 때는 별 반응이 없던 사람들이, 운동화를 주로 신다가 워커부츠를 신으면 '멋지다'라고 칭찬해 주는 것이었다. 늘 꾸미는 것보다는, 한 번씩 꾸미는 게 노력 대비 효과가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전략적인 신발 설계가 필요한 것이었다.
되돌아보면, 나에게는 '신발'과 '착함'이 별다를 바가 없었다. '남을 의식하여 뒤집어쓴, 맞지 않는 옷'이란 점에서 말이다. 남을 신경 쓰는 생활을 오래 하며 나를 돌아본 결과, 나는 갈등은 싫어하나, 지나치게 세속적이지는 못했고, 노력은 할줄 아나 성과가 늘 좋지는 못했으며, '멍청하게만 착한 사람'이 되기에는 맞는 말을 참지 못하는 병이 있었다. 따라서 내가 늘 사람들이 기대하는 '착한 사람'의 모습에 항상 맞추는 건 매우 비효율적이고 지치는 일이었다. 물론 '착한 사람'은 분명한 장점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난 경험을 반추하여 '착한 사람'의 적당한 장점만 가지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나는 '전략적 착함 설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전략적 착함 설계
'전략적 착함 설계'란, 멍청함을 벗어나 전략적이고 현명하게 착해지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착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 사람이 되자'와는 결이 다르다. 선한 것은 기본이되, 마음을 독하게 먹고 전략적으로 착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스트레스를 크게 받지 않는 선에서 사회적 평판을 유지하고, 가끔씩 의외성을 보여주어 내가 '착하다'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만만해 보이지는 않도록 할 말을 하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전략적으로 신발을 골라 신는 것처럼 말이다.
전략 실행의 결과, 이전만큼 '착하다'라는 말은 듣지 못하고 있지만 오히려 좋다. 누군가에게 나의 '구멍'은 '흠'이 아닌 '인간미'였고, 필요한 순간에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전에 내가 무리하여 흡수되려 했던 모임은, 적당한 예의를 지키며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어서 편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에 좋은 전략은 아니겠지만 상관없다. 나는 금전적 보상보다 정신적 고통에 더 영향을 받는단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어떻게 생각이 변하든, 지금의 나를 충분히 다독여주고 칭찬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오늘도 나는, '구멍 난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열어젖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