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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수 Sep 26. 2024

누가 ‘별유천지(別有天地)’를 썼는가?


1. 서론

 

동해시 무릉계 용추폭포 입구에 있는 바위 전면에 초서로 굵직하게 새겨져 있는 ‘별유천지(別有天地)’는 이백(李白)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의 ‘도화유수요연거(桃花流水窅然去)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란 구절에 나오는 말로 인간 세계가 아닌 별천지를 뜻하며, 무릉계와 폭포의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별유천지’ 암각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인적으로 전체적인 글자의 형상에서 오는 느낌과 함께 특히 ‘천(天)’ 자의 꼬리 부분에서 용추폭포의 ‘용추(龍湫,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있는 깊은 웅덩이)’에 깃들어 있는 용의 기운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단언컨대 명필이 아닐 수 없다.

 

주서(主書)는 ‘별유천지(別有天地)’이고, 좌방서(左傍書)는 ‘무인 모춘(戊寅暮春) 광릉귀객(廣陵歸客)’이다. 모춘(暮春)은 늦은 봄. 주로 음력 3월을 이르며,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헌릉(獻陵)이 광주군(廣州郡) 대왕면(현 서초구 내곡동)에 쓰여진 뒤로는 ‘광릉(廣陵)’으로 별칭되기도 하였다. (사진=강동수)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암각문의 좌방서에 있는 ‘무인 모춘(戊寅暮春) 광릉귀객(廣陵歸客)’ 즉 무인년 늦은 봄인 음력 3월에 이 글을 쓴 사람으로 추정되는 ‘광릉으로 돌아가는 나그네’가 누구인지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암각문을 누가 썼는지에 대하여 추론해 보고자 한다.

2. 본론

본론에서는 먼저 배재홍 교수가 쓴 『문헌•금석문 자료로 본 두타산 무릉계』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별유천지’ 암각문을 누가 썼는지 살펴보고 거기에 더하여 2020년 동해시의회 의원연구모임인 ‘무릉계역사연구회’ 출범식 장소에서 배재홍 교수가 밝힌 이최중 설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암각문에서 무인년에 해당하는 연도는 1458년, 1518년, 1578년, 1638년, 1698년, 1758년, 1818년, 1878년 등이며, 모춘(暮春)은 늦은 봄 주로 음력 3월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헌릉(獻陵)이 현 서초구 내곡동[옛 광주군(廣州郡) 대왕면]에 쓰여진 뒤로는 ‘광주부(廣州府)’를 ‘광릉(廣陵)’으로 별칭 하였다.

위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무인년 모춘에 광릉(광주부)으로 돌아가는 인물이 이 암각문을 새겼을 것으로 생각되며 아마도 그 글을 쓴 사람은 삼척 부사, 삼척포진(三陟浦鎭) 영장(營將) 그리고 평릉도(平陵道) 찰방(察訪) 등이 유력할 것이다.

이 중에서 그들의 고향과 재임 기간 등을 고려하여 보았을 때 암각문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효원, 이정수, 이최중을 중심으로 그들의 재임 기간과 재임 중에 일어났던 특별한 사정 등에 대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김효원 설 검토

김효원(金孝元) 부사(재임 기간: 1575년 12월~1578년 4월)가 삼척을 떠난 시기상으로 보아 일부 연구자들은 김효원 부사가 ‘별유천지’ 암각문을 썼을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배재홍 교수는 『문헌•금석문 자료로 본 두타산 무릉계』에서 “시기상으로는 김효원이 글씨를 썼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가 부친상을 당하여 중도에 삼척부사를 그만두었음을 감안하면 상중(喪中)에 이 글씨를 남기고 떠났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 시대 유교에서 부모에 대한 효가 모든 도덕 규범의 기초인 점을 고려하면 상중에 이러한 글씨를 남기고 간다는 것은 그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쉽게 납득 할 수 없으므로 배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며 또한 김효원의 고향은 광릉(광주부)이 아니므로 암각문을 새겼을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2. 이정수 설 검토

 

〈전의 이씨 인명사전〉에 따르면 이정수[1712(숙종 38)~1786(정조 10)]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조선의 무신, 전의(全義) 이씨, 자는 대수(大叟), 공조좌랑,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지낸 이만식(李萬植, 1657~1728)의 손자이며, 경상우병사, 남병사(南兵使), 부총관(副摠管) 등을 지낸 이징서(李徵瑞)의 아들이다. (중략) 1758년(영조 34) 4월 우림위장(羽林衛將)에 제수되었다. (후략)

시기상으로 이정수(李廷壽, 재임 기간: 1757년 2월~1758년 4월)가 암각문을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내장[內將, 국왕의 호위 및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던 내금위(內禁衛)의 지휘관인 위장(衛將)]으로 이배(移拜, 벼슬아치가 전근 명령을 받음)되어 갔으며, 광릉(광주부)이 전의 이씨의 세거지가 아닐뿐더러 충주시 양성면 단암리에 있는 부친 이징서의 묘의 위치로 볼 때 ‘광주부(광릉)’에는 연고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암각문을 새겼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3. 이최중 설 검토

 

강원대학교 배재홍 교수가 2020년 5월 21일 동해문화원에서 개최된 동해시의회 의원연구모임인 ‘무릉계역사연구회’ 출범식 장소에서 ‘광릉귀객’은 광릉이 고향이라는 조선 후기 영조 때 문신인 '이최중' 삼척 부사가 남긴 글이라고 공개하였으나 현재 이를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논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배재홍 교수의 주장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최중의 생애와 광릉(廣陵)의 유래에 대하여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이최중(1715~1784)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인부(仁夫), 호는 위암(韋菴). 중휘(重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濡)이고, 아버지는 현감 현응(顯應)이며, 어머니는 홍중기(洪重箕)의 딸이다. (중략)

1757년 이후 홍문관응교·삼척부사(재임 기간: 1757년 10월~1758년 11월)·대사간·이조참의·부제학·예조참판·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최중의 묘는 강남구 수서동 산 1[광주 광수산(光秀山) 동쪽 기슭]에 있으며, 수서동은 조선 후기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이었다.

광주군 대왕면(현 서초구 내곡동)은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헌릉(獻陵)이 쓰여진 뒤로 ‘광릉(廣陵)’으로 별칭하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평대군(세종의 다섯째 아들) 후손들이 세거해온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光秀山) 일대에 광평대군 묘역과 함께 720여 기의 후손 묘가 있는데 전주 이씨 광평대군 파인 이최중의 묘도 여기에 있다.

이최중의 묘가 헌릉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나 같은 대왕면 일대이므로 이최중의 고향은 ‘광릉(광주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위암집』의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의 기이(其二) 첫머리에도 “귀거래혜 가재광릉 호불귀(歸去來兮 家在廣陵 胡不歸, 돌아가리라! 집이 광릉에 있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최중의 고향이 광릉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최중의 고향이 광릉이고 무인년(1758)에 삼척을 떠난 것은 확실하나 음력 3월경인 모춘에 대한 시기가 이임 시기와 맞지 않는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남아있다.

이러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귀객(歸客)’의 사전적 의미와 조선 후기에 행해진 관료들의 휴가 제도를 연관 지어 살펴보면 ‘광릉귀객(廣陵歸客)’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광릉귀객’을 ‘광릉으로 돌아가는 사람’으로만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국어 사전에서 ‘귀객(歸客)’은 ‘외지에서 돌아온 사람’이란 뜻이 있으므로 ‘광릉귀객’의 사전적 의미는 ‘광릉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라는 뜻과 함께 ‘광릉에서 돌아온 사람’이란 뜻도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조선 시대 관리의 급가(給暇, 휴가)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에 근친(覲親:부모를 찾아뵘)의 경우는 3년에 한 번, 소분(掃墳: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조상의 산소에 가서 무덤을 깨끗이 하고 제사 지내는 일)의 경우는 5년에 한 번씩 휴가를 주었으나 조선 후기에 제도가 변해 매년 1회 근친 휴가를, 2년에 한 번 소분 휴가를 주었다. 또한, 변방 수령과 찰방에게는 휴가를 주지 않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의 2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찰방을 제외한 삼척 부사와 영장 중에서 무인년 음력 3월경에 고향인 광릉에서 휴가를 마치고 삼척으로 돌아온 사람을 살펴보면 ‘별유천지’의 주인공을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삼척 부사 이최중이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고향이 ‘광릉’이고 무인년에 삼척 부사로 재직 중이었다는 점과 1758년 11월에 친환사체(親患辭遞, 부모님의 병환으로 사직하여 교체됨)로 떠났다는 점을 보면 1758년 음력 3월 전에 부모의 병환으로 인한 근친(覲親) 휴가를 다녀왔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부모의 병환에는 가까운 거리는 50일, 먼 거리는 70일, 경기 지방은 30일을 주었고, 지방관의 경우 관찰사가 그 거리를 헤아려서 주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략 2달 정도의 범위에서 휴가를 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시기는 농한기이기 때문에 휴가 일정에 큰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휴가 이후 삼척으로 돌아와서 공무 중 잠깐 여가를 틈타 용추폭포에 들러 ‘별유천지, 무인 모춘(1758년 음력 3월), 광릉귀객(광릉에서 돌아온 사람)’을 썼을 것으로 여겨진다. 휴가지인 광릉에서 돌아와 용추폭포 부근으로 들어오니 별천지로 느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 옛 기록을 고찰하여 사실을 규명한 것이 아니므로 이최중이 ‘별유천지’를 썼을 가능성이 크다는 정도로만 여겨야 한다고 본다.

 

3. 결론

 

위의 사항을 종합하여 보면 삼척부사 중에서 김효원이 암각서를 새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고향이 ‘광릉’이 아닐뿐더러 조선 시대에 부친상을 당하여 가는 상황을 고려하면 가능성은 없다고 여겨진다.

또한 삼척 영장 중에서 이정수가 삼척을 떠난 시점이 모춘에 근접하나 내장(內將)으로 옮겨갔고 전의 이씨의 세거지와 부친 이징서의 묘의 위치로 보아 가능성은 없다고 하겠다.

이최중이 ‘별유천지’를 썼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으나 이는 옛 기록을 고찰하여 사실을 규명한 것이 아니므로 신뢰할만한 문헌 기록이 나타나기 전에는 단정지을 수 없다.

이 3명 외에도 많은 시인 묵객이 용추폭포를 다녀갔을 것이고 그들 중에 누군가가 썼을 수도 있으므로 누가 ‘별유천지’를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문헌으로 고증이 되지도 않았는데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권위 있는 연구자들의 주장에 기대어 각종 도서와 발표 자료에서 성급하게 결론짓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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