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동해시 추암동에 있는 추암湫岩 해변은 조선 세조 때 이곳을 방문한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미인의 걸음걸이’라는 뜻으로 ‘능파대凌波臺’라 이름하였다 하며, 이때 지은 「능파대기凌波臺記」는 다음과 같다.
삼척군 동쪽 십 리쯤에 활 모양으로 가운데가 높아 가파른 낭떠러지를 이루는 한 지역이 있는데, 바다와 나란히 홀로 우뚝 솟아있으며 그 위는 매우 넓어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기이한 바위와 흰 돌이 좌우로 빽빽이 늘어서 있는데 마치 구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엎드려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 어떤 것은 사람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용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눈 덮인 산이 우뚝 솟아 공중에 기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니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어 한결같지 않다. 게다가 소나무와 삼나무가 무성한데 그 사이로 고운 빛이 비치니 이른바 하늘이 만든 높은 대臺라 하겠다. 강릉의 경포대와 통천의 총석정과 더불어 서로 우열을 다투지만 기이함에 있어서는 이곳이 더 낫다. 예전부터 추암이라 불렀는데 무엇에 근거한 이름인지 매우 야비하고 촌스럽지만, 세상에 전해오는 것이 없다. 지금 내 마음대로 이름을 능파대로 고침으로써 오랫동안의 숲에 대한 부끄러움을 씻기를 바란다. 나의 이번 순행을 틈타 이렇게 기록한다.
『삼척향토지(2016)』
능파대 전경(2022) (좌), 능파정 (우). 『관동관광(1957)』
그러나 이러한 능파대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한명회가 추암을 ‘능파대’라 개명한 시기에 대하여 대략 3가지 정도의 이견이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발간된 여러 문헌에서 그 시기를 살펴보면 ‘세조 7년(1461)’에서 ‘세조 9년(1463)’까지 다양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동해시와 동해문화원 등 각 기관에서는 향후 발간될 서적과 관광 안내 시 어떤 기록을 기준으로 일관성 있게 자료를 제공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이라 생각하면서 이 문제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본론
한명회가 추암을 능파대로 개명한 시기에 대하여 각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a) 『삼척군지(1985)』
능파대
이조 세조 7년(1461)에 도체찰사 한명회가 능파대라 개명하였으며, (후략)
(b) 『진주지(1963)』
세조世祖 임오壬午(1462)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 개금명改今名
(c) 『삼척향토지(2016), 배재홍 옮김』
1462년 세조 8년 임오 도체찰사 한명회가 개명하여 능파대라 하였다.
〈참고〉 『삼척향토지(1955), 김정경 편저』에서는 “단기 3795년 세조 7년 임오에 도체찰사 한명회가 개이금명改而今名 능파대 하니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세조 7년(1461)’과 ‘임오(1462)’ 사이에 혼선이 있어 이 글에서는 『삼척향토지(2016), 배재홍 옮김』을 참고하여 서술하였다.
(d) 『국역 척주지(2001)』
천순天順 7년 세조 9년(1463) 계미년에 도체찰사 한명회가 동계를 순시하다가 그 위에 올라 내려다보고는 이름을 능파대라 하였다.
(e)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2015)』
1463년(세조 9)에 한명회가 동계를 순시하다가 그 위에 올라 관상하고 능파대라 했다고 전해진다.
위 문헌의 기록을 살펴보면 한명회가 추암을 능파대로 개명하는 시기를 『삼척군지』에서는 1461년(세조 7)으로, 『진주지』와 『삼척향토지(2016), 배재홍 옮김』에서는 1462년(세조 8)으로, 그리고 『국역 척주지』와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에서는 1463년(세조 9)으로 각각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각 문헌 기록의 정확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당대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서 도체찰사 한명회가 추암을 능파대로 개명하는 시기 전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정과 더불어 강원도에 온 시기를 살펴보고 위 문헌 기록과 비교해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되며, 이에 대한 관련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시기순으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1) 세조 7년 신사(1461) 6월 8일(정축)
교태전交泰殿에 나아가 병조 판서 한명회韓明澮를 인견引見하고 활弓 8장張, 갑옷 1령領을 내려 주었다. 한명회가 아뢰기를, “함길도咸吉道 남도南道의 여러 읍의 누협호漏挾戶 인정人丁을 추쇄推刷하여 군사를 삼아 방어防禦하게 하고, 경중京中의 무거인武擧人 등을 병조로 하여금 나누어 보내서 오는 10월에 비로소 부방赴防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 세조 7년 신사(1461) 6월 9일(무인)
임금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강원도ㆍ함길도 도체찰사 한명회韓明澮를 전송하였다.
(3) 세조 7년 신사(1461) 6월 10일(기묘)
강원도ㆍ함길도 도체찰사 한명회韓明澮가 하직하니, 임금이 교태전交泰殿에 나아가 인견引見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4) 세조 7년 신사(1461) 8월 8일(을해)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가 종사관從事官 이극균李克均을 보내어 함길도의 편의사건便宜事件을 아뢰었는데, 그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후략)
(5) 세조 7년 신사(1461) 11월 21일(정사)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에게 유시하기를, “듣건대, 경卿이 안변安邊에 선패旋旆해 왔다고 하는데, 비록 전일에 글로써 유시하여 뜻을 다하였지마는, 오히려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북방北方도 평정平定되었으므로 특별히 명하니, 잠시 왔다가 돌아가라.” 하였다.
(6) 세조 8년 임오(1462) 4월 16일(신사)
도체찰사 한명회韓明澮가 평안도平安道로부터 와서 복명復命하였다.
(7) 세조 8년 임오(1462) 7월 6일(기해)
우의정右議政 한명회韓明澮가 강원도江原道에 가려고 하니,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8) 세조 8년 임오(1462) 7월 9일(임인)
평안 황해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平安黃海江原咸吉道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가 하직하였다.
(9) 세조 8년 임오(1462) 9월 14일(을사)
병조에서 도체찰사 한명회韓明澮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강원도 산성포山城浦는 즉 포구浦口에 모래가 메워져서 배가 드나들 수 없고 정박定泊하기가 어려우며, 연곡포連谷浦는 포구에 암석이 많아서 역시 배를 정박시키기가 어려우니 만호萬戶를 두기가 마땅치 못하고, 울진蔚珍과 삼척三陟의 양 포浦는 도적이 지나는 요충지要衝地인데 수령으로써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으니, 만약 사변事變이 있으면 수군水軍ㆍ육군陸軍을 겸해서 다스려야 하니, 그 형세가 심히 어렵습니다. 청컨대 산성 만호山城萬戶ㆍ연곡 만호連谷萬戶를 없애고 울진ㆍ삼척에 만호를 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 세조 9년 계미(1463) 2월 1일(경신)
의주 목사 허형손 등이 적에게 패하자 가두고, 한명회에게 경거치 못하게 하였다.
(11) 세조 9년 계미(1463) 3월 3일(임진)
도체찰사 종사관都體察使從事官 김수녕金壽寧이 의주목사義州牧使 허형손許亨孫 등을 추국推鞫한 계본啓本을 가지고 와서 아뢰고, 또 말하기를, “한명회韓明澮가 올라오려고 하여도 유시를 받고 감히 오지 못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나도 또한 보고자 하니, 즉시 올라오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수녕이 드디어 하직하니, 전교하기를, “김수녕이 떠남은 불가하다.” 하고, 승정원承政院에서 치서馳書하여 부르게 하였다.
(12) 세조 9년 계미(1463) 3월 5일(갑오)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가 평산平山으로부터 와서 복명復命하였다.
(13) 세조 9년 계미(1463) 윤 7월 28일(을유)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가 하직하니, 임금이 어탑御榻에서 내려와서 세자世子로 하여금 술병을 잡게 하여 친히 잔을 잡아서 마시게 하고 꽃韡을 내려 주었다.
(14) 세조 9년 계미(1463) 9월 17일(계유)
강원 황해 평안 함길도 도체찰사江原黃海平安咸吉道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일찍이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양정楊汀에게 유시諭示하여, 군사 수백 명을 보내어 강江을 건너서 오랑캐의 지경地境에 들어가 혹은 산山을 불태우기도 하고, 혹은 사냥한다고 핑계하고 산천山川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지금 어떻게 처치하여야 형세가 가可하겠는가? 경의 뜻은 어떠한지, 사의事宜를 짐작하여 상세하게 다 회계回啓하라.” 하였다.
(15) 세조 9년 계미(1463) 10월 9일(갑오)
평안 황해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平安黃海江原咸吉道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가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양정楊汀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치계馳啓하기를, “건주위建州衛의 이아구李阿具가 사람을 보내어 와서 말하기를, ‘보하토甫下土가 말하기를, 「경진년庚辰年에 우리 형兄 동속로첩목아童速魯帖木兒가 죽고 처자妻子와 가산家産이 모두 다 적몰籍沒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의주義州에 입구入寇하여 인물人物들을 약탈하여 왔다. 지금 만약 놓아서 본처本處로 돌려준다면 약탈한 인물人物들은 마땅히 돌려보내고, 나도 또한 귀순歸順하여 사죄謝罪하겠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후략)
(16) 세조 9년 계미(1463) 11월 7일(신유)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가 종사관從事官 허종許琮을 보내어 원손元孫의 상례喪禮를 보기를 청하고, 또 통사通事를 건주建州와 허리두리許里豆里가 옮겨 가서 거주하는 황성皇城에 보낼 일들을 청하였다. (후략)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한명회가 도체찰사로 임명받게 된 계기는 누협호漏挾戶(호적의 대장에서 빠져 세금과 군역軍役을 내지 않던 호.) 인정人丁(인부)을 추쇄推刷(도망한 노비나 부역, 병역 따위를 기피한 사람을 붙잡아 본래의 주인이나 본래의 고장으로 돌려보내던 일.)하여 군사를 삼아 방어防禦하게 하고 10월에 비로소 부방赴防(조선 시대에, 다른 지방의 군대가 서북 변경을 방어하기 위하여 파견 근무를 하던 일.)을 실시해야 하는 등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이다. 이 임무를 해결하기 위하여 강원도ㆍ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받은 한명회는 세조 7년(1461) 6월 10일에 하직하게 되고 이후 함길도에서 활동하는 기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1461년 11월에는 세조로부터 “북방北方도 평정平定되었으므로 특별히 명하니, 잠시 왔다가 돌아가라”는 유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한명회가 세조 7년(1461)에 강원도에서 활동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한명회가 세조 7년(1461)에 비록 강원도ㆍ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을 받았으나 강원도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세조 8년(1462) 4월 16일에 도체찰사 한명회가 평안도로부터 와서 복명復命하는 기록이 나오고, 세조 8년(1462) 7월 6일에는 우의정 한명회가 강원도에 가려고 하는 기록이 나오면서 세조 8년(1462) 7월 9일 평안 황해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平安黃海江原咸吉道都體察使 한명회가 하직하게 된다. 그리고 세조 8년(1462) 9월 14일 기록에 “울진蔚珍과 삼척三陟의 양 포浦는 도적이 지나는 요충지要衝地인데 수령으로써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으니, 만약 사변事變이 있으면 수군水軍‧육군陸軍을 겸해서 다스려야 하니, 그 형세가 심히 어려우므로 울진‧삼척에 만호를 두게 하소서.”라는 보고를 올리는 것으로 보아 이때를 전후하여 한명회가 「능파대기」의 마지막 구절에 언급한 “나의 이번 순행을 틈타 이렇게 기록한다.”에 나오는 ‘순행’ 차 추암에 다녀간 것으로 여겨진다.
추암진楸巖津, 삼척진영지도三陟鎭營地圖(1872),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세조 9년(1463) 2월 1일에 한명회는 의주에 있었고 3월 5일에는 평산平山(황해도)으로부터 와서 복명復命하였다. 이후 윤 7월 28일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가 하직한 이후 계속하여 북방에 관한 업무를 보고하였고, 세조 10년(1464) 1월 2일에도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가 종사관從事官 이문환李文煥을 보내어 북방의 일을 아뢰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한명회가 세조 9년(1463)에 강원도에 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3. 결론
위의 모든 사항을 검토하여 본 결과 추암을 능파대라 개명한 시기는 한명회가 ‘순행’ 차 추암에 다녀간 것으로 여겨지는 세조 8년(1462)으로, 이는 『진주지』와 『삼척향토지(2016), 배재홍 옮김』의 기록과 일치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